심우장(尋牛莊)
심우장
스님이 굳이 북향집을 고집한 까닭은?
용운 스님이 1933년부터 광복 1년 전인 1944년에 중풍으로 운명할 때까지 살았던 곳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 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1879~1944)스님(이하 용운 스님)의 ‘님의 침묵’의 구절이다.
1919년 3 ․ 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 불교계 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의 공약(公約) 3장을 집필한 용운 스님이 살던 집이 성북구 성북동 222번지 1호에 있다.
이름 하여 심우장(尋牛莊).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에서 나와 수월암 방향으로 가다가 동방대학원대학교와 서울명수학교 사이
왼쪽으로 심우장 팻말이 길가 에 있고 팻말을 따라 50m 정도 올라가면 한옥 주택가 골목 안에 있다.
서울시 기념물 제 7호로 지정된 심우장은 건평 52㎡ 되는 작은 기와집으로
용운 스님이 1933년부터 광복 1년 전인 1944년에 중풍으로 운명할 때까지 살았던 곳이다.
정문을 들어서서 오른쪽 스님이 서재로 쓰던 방에는
역시 3 ․ 1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위창 오세창(吳世昌)이 쓴 ‘심우장(尋牛莊)’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심우(尋牛) 라는 이름은 깨우침을 찾아 수행하는 과정을 소를 모는 동자가
소를 찾아 산 속을 헤매는 모습을 비유한 불교 설화에서 따온 것이다.
곧 심우장(尋牛莊)은 불교의 무상대도(無常大道)를 깨우치기 위해 공부하는 집을 의미하고 있어
높은 수양의 경지를 나타내고 있다.
원래 이곳은 안국동 선학원(禪學院)의 김벽산 스님이 초당을 지으려고 계획했던 곳인데
용운 스님의 만년(晩年)을 위하여 흔쾌히 내어놓은 것으로 후학과 유지들의 도움으로 건축하게 되었다.
이 집을 지을 때 남향을 피해 북향으로 앉힌 것은
일제가 조선총독부 청사를 경복궁 남쪽에 지어 놓았으므로 이것이 보기 싫다 하여 등을 돌려 지은 것이다.
“이 비겁한 인간들아, 울기는 왜 우느냐? 이것이 독립선언서에 서명을 했다는 민족대표의 모습이냐?
용운 스님은 충남 홍성 사람으로 본관은 청주이고 용운은 법명(法名)이며 호는 만해이다.
평생을 조국의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던 스님은 그 기개가 남달랐다.
불교에 입문하면서 독립정신과 민족혼을 불교도와 대중에게 심는 일에 주력하였고,
특히 최남선이 지은 독립선언서의 내용을 둘러싸고 좀 더 과감하고 현실적이어야 한다는 주장을 폈으며
그 결과 마지막 부분 행동강령인 공약3장을 집필하기에 이른다.
독립선언서 건으로 일제 경찰에 체포되기 전 민족대표들과 3가지 약속을 사전에 정하고 실천하였다.
세 가지 약속이란 ① 변호사를 대지 말 것 ② 사식을 취하지 말 것 ③ 보석을 요구하지 말 것 등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일부 민족대표들은
일제의 회유에 넘어가고 극형에 처한다는 소문을 듣고 대성통곡하는 인사도 나타났다.
스님은 이렇게 나약하고 좌절하는 민족대표들에게
“이 비겁한 인간들아, 울기는 왜 우느냐? 이것이 소위 독립선언서에 서명을 했다는 민족대표의 모습이냐?
그 따위 추태를 부리려거든 당장에 취소해 버려라”며 인분을 그들의 머리에 퍼부었다.
33인 중의 천도교 대표였던 이종일은
스님을 “듣건대 고문이 점차 극심해져서 그 정도가 이를 데 없이 가혹하다.
이 같은 일 때문에 변절자가 계속 나온다고 한다. 한심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한용운이 공포에 떨고 있는 몇몇 사람에게 인분세례를 퍼부은 게 아닐까.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통쾌무비한 일이다.
내가 그 같은 어리석은 자의 행동을 목격했다고 해도 인분세례를 퍼붓지 않고는 못 견딜 것 같다.
역시 한용운은 과격하고 선사다운 풍모가 잘 나타나는 젊은이다.” 라고 극찬하였다.
물론 스님 자신도 옥중에 있으면서 매일 계속되는 취조, 회유, 협박, 고문 등을 받기에
심신이 지쳐있기는 매일반이지만 결코 좌절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독립에 대한 확고한 자부심은 일제 검사가 작성하게 한 「조선독립의 서」라는 옥중 답변에 대한
『대한불교』의 <한용운 선사의 옥중기>(1969. 3. 2)에서 잘 나타나 있다.
- 일인 검사는 선사의 답변서를 보고 탁월한 인격과 고매한 사상에 감복하고 경의를 표하면서
답변은 정당하나 일본 제국주의의 방침이니 어쩔 수 없다고 밝힌 유명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조선독립의 서>는 그 내용이 더욱 심각하고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근성을 정곡으로 찔러주는 글월입니다. -
심우장을 찾아갔다. 아침나절이라 그런지 찾는 이는 없었다.
한적한 야산 중턱의 주택가에 자리 잡고 있어서 새소리만 들리는 조용하고 아늑한 곳이다.
스님은 이곳에서 화초를 가꾸며 불경을 번역하였고 신문 잡지 등에 왕성한 집필 활동을 하였다.
가끔씩 스님을 찾아와서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청년들에게는 늘
“몸과 마음을 바르게 가지고 사람의 본분을 잘 지키면 자연히 다른 세상이 찾아올 것이네”라며
자상하게 타이르셨다고 한다.
고매한 인격과 독립에 대한 확고한 의식을 가진 선지식 스님의 체취를 느끼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심우장이다.
- 사종민(서울역사박물관 교육홍보과장)
- 2010.12.23 하이서울뉴스. [서울역사기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