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트레티야코프 국립미술관] 이반 4세와 타라카노바 황녀
[러시아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국립미술관]
러시아 황실의 비극을 그린 작품
이반 4세와 타라카노바 황녀
러시아 모스크바에 있는 트레티야코프 국립미술관은
러시아의 작가들의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미술관으로 개인 소장품에서 출발했다.
러시아 부유한 상인 트레티야코프(1832-1898)는 물려받은 재산과 섬유업으로 엄청난 재산을 모아
1856년부터 동시대 러시아 미술품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미술 애호가로서 그는 자신이 좋아하던 동시대의 미술품에만 국한되지 않고 수집품을 점차 넓혀나가
그 이전에 제작된 러시아 고유의 소재를 다룬 미술품들을 수집하시 시작하면서 소장품들이 다양해졌다.
러시아 민족주의 미술을 다루는 미술관을 세워 일반 사람들에게 개장하고 싶어 했던 트레티야코프는
소장품들을 계속 늘리는 조건으로 1892년 5천여 점의 소장품들을 모스크바 시에 기증한다.
이때 그의 동생 세르게이도 함께 작품을 기증해 트레야코프 미술관 소장품의 기초가 되었다.
1892년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은 트레티야코프 저택에서 공식 개관하게 되었지만
미술관 출발점을 공식 개관일이 아닌 트레티야코프가 처음 러시아 미술품을 소장한 1856년으로 잡고 있다.
1918년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은 국립미술관이 되었다.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의 가장 큰 특징은 19세기 러시아 이동파 화가들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동파'는 '방랑자'를 뜻하는 러시아 말로서
1871년에서 러시아에서 결정된 사실주의 화가들의 모임을 말한다.
그들은 주로 러시아의 역사나 풍경, 러시아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다루었으며
모스크바나 생트페테르부르크 중심의 전시회에서 탈피해 민중 계도를 목적으로
러시아 소도시를 돌며 전시회를 열어 이동파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된 것이다.
일랴 레핀의 <1581년 11월16일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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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1년 11월 16일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 1885년, 캔버스에 유채, 1995×254 |
러시아 역사를 다룬 기념비적인 작품은
일랴 레핀(Ilya Repin, 1844-1930)의 <1581년 11월 16일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이다.
이 작품은 러시아 역사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그린 것으로
황제 이반 4세(=이반 뇌제)의 비극을 표현했다.
러시아 황제 이반 4세(1530-1584)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권모술수가 난무한 궁정에서 살아남기 위해
수없는 고초를 겪어왔다. 불행한 삶은 그를 의심 많고 포악한 성격으로 만들었다.
권력 투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항상 의심이 많았던 이반 4세는 어느 날 아들의 궁전을 방문하게 된다.
며느리 황태자비는 단정치 못한 옷으로 이반 4세를 맞이한다.
며느리의 모습에 진노한 이반 4세는 임신한 그녀를 구타하기 시작했고
아내의 비명을 들은 아들은 뛰쳐나왔다.
권력을 지키기 위해 의심이 많았던 이반 4세는 아들의 모습을 보자마자 그를 쇠망치로 때려죽인다.
이 작품에서 이반 4세는 관자놀이에서 피를 흘리면서 죽어가는 아들 황태자 이반(1554-1581)을 안고 있다.
아버지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아들을 껴안고 있지만
아들은 죽음의 순간을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고 평안하게 맞이하고 있다.
화면 앞에 있는 피 묻은 쇠망치와 구겨진 카펫, 그 뒤로 쓰러진 의자는 비국의 현장임을 암시한다.
광기 어린 행동을 한 황제를 검은색으로, 그에게 희생당하는 아들은 황금색의 옷으로 대비시켜
비극을 극적으로 연출했다.
일랴 레핀의 이 작품은 살인의 동기보다는 회한의 감정에 치중했다.
트레티야코프는 이 그림을 보자마자 구입했지만 처음 그의 미술관에서는 이 작품이 공개되지 못했다.
이 작품이 전시회에서 처음 공개되었을 때
관료들이 러시아 통치자의 치부를 대중들에게 공개할 수 없다고 해서 치우라고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쇠지팡이로 내려친 아들(황태자 이반)이 쓰러져 관자놀이에서 피를 흘리자
정신이 든 아버지(황제 이반 뇌제)가 아들을 일으켜 안았다.
이 그림은 러시아 최초로 차르를 그린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 이반, 1582년 11월16일>(1885년)이다.
일랴 레핀(Ilya Repin, 1844-1930)은 1882년에 이반 뇌제에 의해 진압된 프스코프 반란이야기를
소재로 한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콘서트를 보고 이 작품을 구상했다.
그는 오랫동안 이반 뇌제와 황태자 이반의 형상을 어떻게 그려낼지 고심하다가
‘이동파의 양심’이라 불렸던 G.먀소에도프(1834-1922, 러시아 이동전람파의 대표자)를 모델로
이반 뇌제의 얼굴을, 황태자 이반은 V.가르쉰(1855-1888, 러시아작가)을 모델로 그렸다.
비운의 황태자처럼 가르쉰의 운명도 비극적이었다.
그는 귀족 출신으로 아버지는 크림전쟁(1853-56)에 참가한 장교였고 어머니는 해군장교의 딸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1860년대 혁명, 민주운동에 참여했는데 가르쉰이 5세 때
가정교사였던 비밀혁명단체의 활동가 P.V.자바드스키를 사랑해서 가정을 버렸다.
가르쉰은 1877년 터키전쟁 때는 지원군으로 입대하였는데 옆구리 부상으로 후송되어
병원에서 집필한 전쟁이야기 <4일(1877)>을 발표하여 유명해진다.
그는 1인칭 수기형식으로 뼈아픈 정신적 고통을 이야기해서
'가르쉰은 피로 쓴다'는 말이 통용되기도 했다. 그는 항상 지식인의 양심과 행동의 문제를 고민했다.
1880년 2월에 혁명가 I.O.믈로데츠키가 최고 공판위원회 위원장 M.T.로리스-멜리코프 백작을
암살하려 한 사건이 발생하자 가르쉰은 백작에게 그의 사면을 부탁한다.
그러나 믈로데츠키는 결국 사형당하고 가르쉰은 우울증이 깊어져
하리코프와 페테르부르크의 정신병 요양소에서 2년정도 치료받는다.
인민주의자들은 가르쉰의 작품을
인텔리들의 양심의 가책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상처를 주는 것인지를 보여주는 예라고 말했다.
1883년 겨울에 N.M.졸로틸로바라는 의과대학 학생과 결혼하면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지만
1887년 우울증이 재발하면서 일을 그만두게 되고 아내와 어머니의 불화가 시작된다.
결국 1888년 4월5일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1913년 1월29일에는 정신병을 앓고 있던 아브람 발라쇼프라는 성상화가가
<다볼리노 크로피(피는 더 이상 그만!)>라고 외치며
작품 속 이반 뇌제의 얼굴을 세 번이나 칼로 그었으나
레핀이 그토록 심혈을 기울인 눈은 무사하여 복원된 후 유리로 덮여 전시되었다.
레핀은 이반 뇌제의 눈을 어느 방향에서 보든지 보는 사람을 바라보도록 그리는 기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더욱 섬뜩한 전율이 느껴진다.
그림에 묘사된 장면은 과연 역사적 사실이었을까?
레핀은 카람진(1766-1826)의 러시아 역사에 관한 저서 <역사>에 근거한 것으로 추측된다.
<역사>에는 이반 뇌제가 그 아들 이반을 죽인 내용을
러시아에 왔던 로마 교황의 사절 안토니오 포세비노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서술하였다.
1581년 11월9일 모스크바 근교의 알렉산드로프 슬로보다(마을)에서 이반 뇌제는
며느리의 처소에 우연히 들렀다가 임신한 며느리 엘레나 수레메치예바(황태자 이반의 세 번째 아내였는데 이반 뇌제는 아들의 첫 번째 두 번째 아내를 모두 수도원에 보내버림)가 옷을 하나만 걸친 것을
보고 분노가 치밀어(귀족의 예절로 여인들은 보통 3개 이상의 겉옷을 입어야만 했다) 구타했다.
황태자 이반은 아내를 보호하려다가 아버지가 내려친 쇠지팡이로 관자놀이를 맞게 된다.
그 결과 다음날 밤 며느리는 유산하고, 아들은 열흘 뒤인 1581년 11월19일 27세로 사망한다.
이반 뇌제는 그 충격으로 거의 미칠 지경이 되었고 다시는 알렉산드로프 슬로보다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러시아 민중생활연구자들은 이를 반박한다.
그 당시 모스크바에 있지도 않았던 안토니오 포세비노(폴란드에 포위된 포스코프에 있다가 모스크바로 간 것은 사건이 있는 몇 달 후였다는 기록)가 기술한 내용을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게다가 예절에 어긋나게 옷을 하나만 입었다고 황제가 분노했다는 부분에 대해서도
아무리 황족이지만 자신의 처소에선 아무거나 입어도 상관이 없었고
황제라 하더라도 외간여인의, 그것도 며느리의 거처에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것이 궁중예법이라는
반박이다. 그들은 <연대기>에 적힌 내용을 근거로 황태자 이반의 죽음을 정치적인 것으로 해석한다.
이반 뇌제는 최초로 ‘차르’란 명칭을 쓴 황제이다.
‘짜르’는 케사르(시저)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로마제국의 정통성을 자신에게 부여하고자 이반4세가 처음으로 사용한 말이다.
그는 31세 때 아버지가 죽었고 8세 때 어머니마저 사망하는데 독살되었다는 설이 있다.
어렸을 때부터 권력을 둘러싼 왕족과 귀족들간의 살인, 간계, 폭력 등을 보며 자란 환경은
그의 성격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모든 사람을 의심하였고,
쉽게 적개심을 품었으며 잔인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그로즈느이(Groz는 우레를 뜻함. 영어로는 Ivan The terrible)라는 칭호를 갖게 된 것은
아마도 귀족들이 맘대로 휘둘렀던 권력을 오프리치나(황실 친위대, 또는 황실령의 영토를 뜻함)를
창설해 중앙집권을 꾀하면서 그 전횡이 너무 심하였고, 노브고로드 대학살을 감행했기 때문인 것 같다.
오프리치나는 수도사처럼 검은 옷을 입고 다니면서 말안장에는 빗자루(배신자를 쓸어버리기 위해)와
개의 머리(배신하는 놈들을 갉아먹기 위해)를 달고 다녔다.
이반 뇌제는 귀족들의 세습영지를 강제로 몰수해서 친위대 소속의 궁중귀족들에게 넘겨주었는데,
그에게 반대했던 노브고로드가 리트비아 편으로 넘어가려 한다고 의심을 하고
1570년 1-2월 노브고로드 원정을 직접 지휘했다.
모스크바에서 노브고로드까지 모든 도시들이 강탈당했다.
3만명 정도가 거주했던 노브고로드에서 희생자가 1만-1만5천명이었다고 전한다.
1570년 노브고로드 학살 때부터 부자간의 불화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반 4세는 첫 부인(그는 1번은 동거에 대한 축복만 받고 정식결혼을 하지 않아 7번 결혼,
8명의 부인이 있었다. 교회법상 3번 이상의 결혼은 금지였는데 그것으로도 그의 황권이 어떠했는지
증명해준다)의 소생이었던 장남 이반을 황태자로 책봉하고 군사교육을 포함한 후계자교육을 시켰다.
황태자 이반은 13세 때 아버지와 함께 리보니아(현재의 라트비아, 에스토니아지역) 전쟁에 참여하였고
노브고로드 원정도 동행했다. 그러나 황태자 이반은 오프리치나의 횡포에 반대하였다고 한다.
1581년 8월에 폴란드왕은 포르코프를 포위하였는데
이반 뇌제는 리보니아 전체를 폴란드에 양보하면서까지 폴란드와 평화협정을 맺으려 하였으나
황태자 이반은 폴란드와의 화친에 반대하여 싸우려고 했고,
군사령관들도 황태자를 지지하였지만 이반 뇌제는 그 뜻을 굽히지 않았다.
역사학자들은 11월9일 한 귀족에게 보낸 서한에서
“아들이 아파서” 알렉산드로프 슬로보다에서 나갈 수가 없다고 썼다.
열병이라고도 하고 간질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치료를 위해 양젖, 곰쓸개즙을 먹이기도 했고,
연기를 쐬기도 했고, 고추냉이와 마늘을 갈아서 가슴에 얹기도 했다.
이상한 것은 궁중의사들과 약사들이 있었고 이반 뇌제에게는 두 명의 외국인(이탈리아인, 네덜란드인)
주치의가 있었는데도 그런 식으로 치료했다는 것이다.
결국 10일 후 11월19일 황태자 이반은 사망하고 동생 표도르가 황태자가 된다.
크렘린의 아르한겔스크 사원에서 이반 뇌제와 아들들의 무덤을 발굴했을 때,
황태자 이반의 뼈에서 치사량의 수은이 발견되었는데
뼈에서 발견된 비소의 함량은 허용량의 3.2배나 초과되었다.
전문가들은 “독살이나 만성적 음독에 의한 죽음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반 4세 즉 이반 뇌제는 폭군이었지만 교양 있고 학식 높은 사람이었다.
그는 놀라운 기억력의 소유자였고 많은 서신들의 저자였다.
그런 그를 아들을 죽이는 광인으로 내몰았던 이유가 단정치 못하게 옷을 입은 며느리 때문이었다는
것은 일반인이 봐도 좀 납득이 안 간다.
사람을 자식마저 못 알아보게 미치도록 만드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권력욕일까? 광기일까?
아니면 아들이라도 상대를 죽여야만 내가 살 수 있다는 절벅한 삶에의 집착이었을까?
권력욕으로 천륜을 끊고 아들을 죽인 후회로 아들에 대한 사랑으로 절규하는 그의 눈빛은
이미 온전치 못할 그의 여생을 보여주는 듯하다.
1584년 3월17일 이반 뇌제는 54세를 채우지 못하고 죽었는데 측근 귀족이 독살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네덜란드 상인 이사악 마사과 회고록에서
“벨스키(비밀업무 외에도 황제의 건강도 책임지는 귀족이었다)가 이오간 에일로프(이반 뇌제의 궁중 네덜란드인 의사)가 처방한 음료에 독을 넣어서 바쳤다”고 썼다.
며칠간 말도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채 있다가 인사불성이 되어 아들 이반을 부르며 죽었다고
전한다. 그 누구도 차르를 이런 모습으로 그린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인민의 의지당’에 대한 피의 보복이 있었던 당시에는
반대자나 찬성자 모두에게 비인간적 전제에 대한 폭로와 저항으로 비쳐졌다.
전시뿐만 아니라 모사도 금지되었지만
트레티야코프의 노력으로 개인미술관에 보관되다가 일반에게 전시되었다.
콘스탄틴 플라비츠키의 <타라카노바 황녀>
러시아 역사의 비극을 그렸지만 호기심을 자극하는 주제 때문에 인기를 끌었던 작품이
콘스탄틴 플라비츠키(Konstantin Flavitsky, 1830-1866)의 <타라카노바 황녀>이다.
이 작품은 러시아 엘리자베타의 여제의 숨겨진 딸이었던 타라카노바 황녀의
비극적인 죽음의 순간을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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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라카노바 황녀>(Princess Tarakanova) 1864년, 캔버스에 유채, 245×187 |
예카테리나 여제는 프러시아 출신으로 자식이 없었던 엘리자베타의 후계자였던
조카 표트르 3세의 아내로 선택된 여자였다.
그녀는 러시아 정통 혈통은 아니었지만 야심이 많아 남편 표트르 3세를 쫓아내고 권력을 잡는다.
반항적이었고 농민들에게 사랑받지 못했던 표트르 3세는 쫓겨난 지 8일 만에 살해되고
왕위에 오른 예카테리나 여제는 대외적으로 영토 확장에 나서서 러시아를 유럽의 강국으로 만들었다.
예카테리나 재위 시절 프랑스 국적의 타라카노바 황녀가
공개적으로 자신이 러시아의 진정한 왕위 계승자라고 주장했다.
자신이 엘리자베타의 숨겨진 딸이라는 것이다.
권력에 도전하는 타라카노바 황녀를 1775년 예카테리나 여제는 러시아로 유인해 요새에 감금한다.
그해 수해로 요새가 물에 잠기는 일이 발생하고 타라카노바 황녀는 수장된다.
물은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와 감옥 안을 바다로 만들었다.
넘치는 물 때문에 식탁과 침대는 물에 잠겨 있고 황녀는 물을 피하기 위해 침대 위로 올라가 있다.
침대 시트 위로 물을 피하고 있는 쥐들이 보인다.
창살과 식탁 위에 놓여 있는 물병, 검은 빵 한 조각은 처참했던 그녀의 감옥 생활을 나타낸다.
붉은색의 가운을 입은 황녀는 물에 잠긴 침대 위에 서서 벽에 기댄 채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그녀의 얼굴에는 공포가 서려 있다.
콘스탄틴 플라비츠키는 타라카노바 황녀가 요새에서 수장되기 직전의 모습을 묘사한 이 작품에서
붉은 색의 가운으로 그녀가 황녀라는 것을 나타내며 러시아의 권력을 암시한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에 빗나는 황금색 드레스와
붉은색 가운과 대조되고 있는 황녀의 흑빛 얼굴은 권력에 저항하지 못하는 민중을 상징한다.
옐리자베타 알렉세예브나 타라카노바
(Yelizaveta Alekseyevna Tarakanova, 1745-1775)
타라카노바 황녀(Princess Tarakanova)는 블라디미르 공주라고도 불렸는데,
엘리자베트 여제의 비공식적인 남편으로 알려져 있는 라즈모프스키에게는 두 딸이 있었는데
첫 딸은 수녀, 둘째딸은 자신이 엘리자베트 여제의 딸이라면서 황녀로서 권리를 주장했다고 한다.
당시 정권을 잡은 예카테리나 2세는 프로이센제후국 공주 출신으로,
남편을 쫓아내고 차르가 된 사람이다.
정통성으로 따지면 여제가 황녀보다 부족한 터라 그녀를 곱게 볼 리가 없었다.
게다가 엘리자베트 여제는 공식적으로는 ‘결혼한 적이 없는’ 처녀였으니 딸을 인정할 수 없었다.
타라카노바 황녀는 이탈리아 Livorno(이탈리아 서쪽항구도시)에 있었는데
예카테리나 2세는 그녀를 없애기 위해 그레고리 오를로프를 보낸다.
오를로프의 꾐에 넘어가 러시아로 따라간 황녀는
곧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페트로파블로프스크 감옥’에 갇힌 채로 죽게 된다.
사실 타라카노바 황녀는 1775년에 감옥에서 결핵으로 죽었다는 것이 공식기록이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이 비운의 황녀 죽음을 더 극적으로 여겨 그녀는 감옥에서 계속 살았으며
1777년 대홍수 때 빠져나오지 못해 감옥 안에서 그대로 수장되었다는 이야기가 퍼졌다.
매년 가을이면 페테르부르크는 네바 강의 범람으로 홍수 피해를 겪는다.
그래서 강 주변은 18세기 초까지도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았다.
그러나 표트르 대제(1672-1725)는 자연에 역행해 이곳에 도시(1703년 5월16일 창건)를 건설한다.
그는 “이곳에 도시를 세워 오만한 이웃나라를 제압하리라.
대자연이 우리에게 유럽을 향한 창을 열고 바다에 튼튼한 두 발을 디디라 명하였다”며
“숙명적인 의지로 바닷가에 도시를 세운” 황제였다.
도시는 그의 이름을 따서 ‘성 피터의 도시(상트 페테르부르크)’로 불렸다.
수많은 나무 기둥을 바다에 박아 건설한 페테르부르크는
농노들의 목숨과 피로 이루어졌다고 불릴 만큼 많은 희생을 치르고 세워졌다.
푸쉬킨(1799-1837)도
“이 젊은 수도 앞에서 모스크바는 마치 새 황후 앞에 선 과부 황태후처럼 빛을 잃었다”라고
페테르부르크의 위용을 묘사했다.
폭풍은 더욱더 기승을 부리고 네바 강은 부풀어 오르며 울부짖고 끓는 물처럼 요동쳤다.
돌연 강물은 격노한 짐승처럼 도시를 덮쳤다.
그 앞에 모든 것은 굴복했다. 주위의 모든 것이 갑자기 폐허처럼 변했다.
강물이 불시에 지하실에 흘러들고 운하는 난간을 뚫고 넘쳐나
뻬뜨로뽈은 둥실 떠올라 트리톤처럼 허리까지 물에 잠겼다.
- 푸쉬킨의 <청동 기마상>(1833) 중에서-
푸쉬킨은 <청동 기마상>에서 자연에 역행한 표트르 대제와 그 결과인 홍수로 인해
약혼녀 파라샤를 잃고 미쳐버린 가난한 주인공 예브게니를 대비시키며
1824년에 있었던 페테르부르크 대홍수의 참사를 그리고 있지만,
역사상 가장 큰 홍수 피해로 기록되는 최초의 연도는 1777년이다.
1777년 페테르부르크 대홍수는 대도시를 건설한 표트르 대제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수많은 목숨을 앗아가며 러시아 역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재난을 가져왔다.
1824년 홍수가 수위는 더 높았지만 피해는 1777년이 훨씬 더 컸다.
K.D.플로비츠키(Konstantin Flavitsky, 1830-1866)의 <타라카노바 공주의 죽음>(1864)은
그 해(1864)에 지하감옥에 있다가 죽음을 맞이했다는 가짜 타라카노바 공주의 전설을 소재로 한
그림이다. 역사 화가였던 플로비츠키는 이 작품으로 교수 칭호를 받게 되었고
예술계와 대중의 관심을 동시에 끌게 되지만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죽었다.
작품 전체를 가득 채운 가짜 타라카노바의 아름다움과 천재지변 앞에서의 절망감이 잘 드러난다.
창문으로 세차게 밀려들어 이미 침대까지 차오른 물을 피해 침대 위로 뛰어오른 쥐들과
가망 없는 현실 앞에 선 그녀의 무력감이 보는 사람을 압도한다.
작품의 구성도, 색채도, 극적인 긴장성도 매우 뛰어나서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인상을 남긴다.
자신을 타라카노바 공주라고 참칭했던 이 여인은 왜 지하 감옥에서 죽게 된 것일까.
진짜 타라카노바(남편 성을 따름) 아브구스타 티모페예브나(1744년경-1810) 공주는
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 여제(1709-1762, 재위기간은 1741-1762)와
알렉세이 A.G.라주모프스키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디서 태어났는지, 언제 해외로 보내져 양육되었는지, 어떻게 결혼하였는지 밝혀지지 않았다.
엘리자베타 여제는 후사가 없자 조카인 프로이센의 왕족 카를 울리히를 데려다 계승자로 삼았다.
그는 엘리자베타 여제가 죽자 러시아의 황제(표트르 3세)로 등극하지만
부인이었던 예카테리나 여제에 의해 제위에서 물러나게 되고(1762년) 곧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였다.
1785년 예카테리나 여제는 해외에 머물던 타라카노바 공주를 러시아로 소환하여
강제로 모스크바의 이바노프 수도원에 위폐시켰다.
매우 아름다웠다고 전해지는 그녀는 도시페야란 이름의 수녀가 되어 죽을 때까지
교회의 미사마저도 그녀만을 위해 따로 행해질 정도로 완전히 고립되어 지냈다.
평생을 자선활동과 독서와 수예 등을 하며 보냈던 그녀는 예카테리나 여제가 죽은 후(1796년)에야
친척들과 접촉하게 된다. 몇몇 귀족들과 라주모프스키의 친척들이 그녀를 방문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녀는 죽은 후에 모스크바의 노보데비치 사원에 묻혔다.
그러나 가짜 타라카노바 공주는
자신의 미모를 이용하여 예카테리나 여제의 권력에 도전하려했던 대범한 여인이었다.
마리아 앙투아네트까지도 그녀의 미모를 질투했었다는 이 여인은
수많은 숭배자와 연인을 두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프랑스의 가장 유명했던 바람둥이였던 로젠 왕자와 예카테리나 여제의 연인이기도 했던
러시아의 알렉세이 오를로프 백작이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그녀의 출신에 대해서는 아직도 자세히 밝혀지지 않았다.
프라하의 술집 작부 딸이라는 설에서부터 독일 류베른 지역의 빵집 딸이라고도 하고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공후 가문 출신이라는 주장까지 다양하다.
그녀는 이글거리며 불타는 듯한 검은 눈을 가진 터키 여자 같다고도 했고,
얼굴은 슬라브족 같은 동양적 풍모에 몸매는 전형적인 이탈리아 여자 같다고도 했다.
어쨌든 이 세상사람 같지 않은 신비한 아름다움의 소유자였음에는 이견이 없다.
미모와 지성으로 전 유럽에 수많은 숭배자들을 두었던 그녀는
자신의 연인이기도 했지만 결국은 예카테리나 여제에게 사랑과 충성을 바쳤던
오를로프 백작의 손에 의해 1775년 5월 유럽에서 러시아로 잡혀오게 된다.
페트로파블로스크 감옥에 갇혀 온갖 심문을 받지만 사제에게도 자신의 정체를 결국 밝히지 않은 채
예카테리나 여제와의 면담만을 요구했다고 전한다.
몇 개월 후 그녀는 감옥 안에서 폐결핵으로 사망(1775년 12월4일)했다.
참칭자 타라카노바가 1777년 홍수가 나기 2년 전에 감옥에서 이미 사망했다는 기록을 염두에 두면
이 그림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화가는 전유럽의 사교계를 떠들썩하게 하며 한 시대를 풍미했지만
예카테리나 여제의 권력 앞에서, 자연의 재앙 앞에서 너무나 무력하고 나약했던 한 여인의 운명을
대홍수를 배경으로 더욱 극적으로 그려냈다.
- 박희숙 서양화가, 미술 칼럼니스트 [명화산책]
- 2009. 07.21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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