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수호를 통해 독립 운동 - 간송 전형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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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미술관 보화각 |
스물다섯,
10만석 갑부 전형필의 고민
간송(澗松) 전형필(1906-1962)은
1906년 중추원 의원이자 종로의 거상으로 알려진
전영기의 2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장안의 유명한 갑부 집안으로
서울 종로 일대의 상권을 잡다시피 했다.
간송은 휘문고보(지금의 휘문중 · 고교)를 거쳐
일본 도쿄의 와세다 대학 법과를 졸업했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고국에 돌아오자마자 10만석이라는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게 된 간송 전형필,
그의 고민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이 막대한 재산을 가치 있게 쓸 수 있는
어떤 민족적인 과제가 있는가?’
이런 자문에 빠져있을 무렵 일생일대의
중요한 사람을 만나게 되니,
그는 바로 3.1운동 때 민족 대표의 한 사람이었던 오세창 선생이다.
“인간과 짐승을 가장 두드러지게 구분해 주는 것이 바로 문화라는 것이야.
그런 의미에서 한 나라의 문화재란
그것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주체성과 정신적 가치가 깃든 일종의 유산이지.
즉 우리 문화재는 우리 민족의 정신이 함축된 유산이란 말일세.
우리 문화재를 지키는 일은 그 일에 생애를 바치겠다는 굳건한 뜻이 있어야 하네.
아니, 그 뜻만큼 중요한 것이 능력이야.
우리 문화재를 닥치는 대로 사들이는 일본인 수집가들과 맞설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는 말일세.”
오세창의 권유를 받아들인 간송은 문화재를 본격적으로 수집하기 시작한다.
나이 스물다섯에 10만석의 재산을 상속받은 그에게는
각지에 흩어진 우리 문화재들을 구매 할 수 있는 재력이 있었고,
오세창을 비롯해 최초의 서양화가 춘곡 고희동 등과 교류를 통해
서화와 고서에 대한 견식과 안목을 높일 수 있었다.
단순한 취미를 넘어 민족문화재 지킴이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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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처음 서화와 고서로부터 시작된 간송의 컬렉션은 차차 고려 및 조선시대 도자기, 기타 불교 조각품으로 수집 대상이 확대되어 갔다. 이는 단순한 취미가 아닌 민족문화재의 광범위한 보호로서의 사명감을 가진 수집이었다.
당시 이 땅의 무지한 백성들은 김홍도의 풍속도나 장승업의 국보급 명화를 알아보지 못하고 도배할 때 바르는가 하면 청화백자 같은 보물들을 고양이 밥그릇으로 사용하기도 하는 등 문화재의 파손과 소멸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정치인들은 골동품을 일인들에게 뇌물로 바치는데 급급한가 하면
무더기로 밀반출하면서 주머니를 불리는 수집가들이 설치는 판이었다.
이 상황에서 우리 문화재를 이대로 국외로 흘러나가게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간송은 인사동에 있는 ‘한남서림’이라는 고서점을 인수해, 서화 골동을 사들이는 본거지로 이용했다.
거간들은 이곳으로 물건들을 가지고 나오고 물건이 들어오면 간송이 달려와 감정하고 흥정을 하였는데
간송은 어찌나 많은 물건들을 보아 왔던지 그를 섣불리 속이지 못했다고 한다.
예술품을 보는 안목이 높아지면서 그의 눈은 당시 탐욕스런 일본인 수집가와 골동품상을 앞지르곤 했다.
또 일본인에게 놓친 물건이 생기면 힘을 다해 다시 사와 우리 문화재가 일본인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했다.
한마디로 문화재를 통한 일제와의 대결이었다.
문화재는 값을 받아야 한다, 국보로 겨지게 된 문화재
(왼쪽) 대학 재학시절의 간송(1928년)
(오른쪽) 괴산외사리 석조부도(보물 제579) 앞에서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반출될 뻔한 것을 거금을 주고 되사온 후
찍은 사진으로 흰옷을 입은 사람이 간송이다.
간송은 파는 사람이 부른 가격보다 여러 배를 자진해서 지불했다.
좋은 물건, 진귀한 물건을 만났을 때는 고미술상이나 파는 사람에게
가격을 묻지 않고 그 만큼의 가격을 지불했던 것이다.
1942년 늦여름, 한남서림. 창밖을 보던 간송의 눈에 옛 서적을 거간하던
이름난 골동품 상인이 눈에 들어왔다.
어딘가 바쁘게 가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 그를 붙잡고 인사를 나누니,
사연인즉 ‘경상도 안동에서 훈민정음 원본이 나타났다는 것.
책 주인이 일천 원을 불렀다고 하는데 그래서 돈을 구하러 가는 길’이라고
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할 때 찍어낸 훈민정음 원본은
당시 국내에서 발견되지 않고 있었는데, 만약 그것이 발견된다면
조선총독부가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것이 뻔했다.
간송은 거간꾼에게 즉시 일만 일천 원을 건네며
책 주인에게 일 만원을 전하고 일천 원을 수고비로 받으라고 했다.
물건 값은 제값을 받아야 한다는 그의 신조에 따른 것이다.
이렇게 해서 훈민정음(국보 제70호)원본을 간송이 소장하게 되었다.
이후 해방이 될 때까지 간송은 훈민정음이 있다는 사실이
밖으로 알려지지 않게 조심했다. 만일 조선총독부가 알게 된다면
훈민정음이 어찌될 지 알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여 서둘러 피란을 가야 할 상황에서도
간송은 훈민정음만은 가방에 넣고 서울을 떠났다. 이뿐인가,
목판본을 낮에는 품고 다니고 밤에는 베개 사이에 끼우고 자면서
잠시도 몸에서 떼어 놓지 않았다. 그 결과 국보 제70호는 지금까지 무사히 지켜질 수 있었다.
1937년 2월, 일본 동경에서 고려자기를 수집해 오던 영국인 존 개스비(John Gadsby)가
그의 컬렉션을 처분한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간송은 전세기를 타고 바로 일본으로 향했다.
돈을 마련하기 위해 충남 공주에 있던 2백석 지기 농장을 팔아야 했는데,
급히 파는 바람에 제 가격을 받지도 못했다.
지금까지 간송의 문화재 수집에 대해 이렇다 말씀이 없었던 그의 어머니조차도
이때만큼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걱정하셨을 정도라고.
당시 기와집 50채 값인 현금 50만 엔을 아낌없이 지불한 간송,
그의 용기 있는 결단은 우리 문화재를 사랑하는 마음에서였다.
이렇게 사들인 고려청자 10점 중 훗날 2점은 국보로, 2점은 보물로 지정이 되었다.
문화화의 보존과 긍지, 보화각을 세우다
간송이 일생 동안 수집한 문화재의 수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맨 처음 손을 댄 책만 해도 2만 점에 달하고
서화, 도자기, 불교조각, 불구, 와당 등 그 종류와 수를 헤아릴 수 없다.
이 중에는 국보와 보물이 21점이나 포함되어 있어 그 수준을 짐작케 하는데,
그가 모은 방대한 수집품 하나하나에는 간송의 애정이 안 담긴 것이 없다.
1936년 여름, 간송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 박물관을 세웠으니
이름하여, ‘보화각(保華閣)’ 지금의 간송 미술관이다.
‘보화’란 ‘빛나는 물건을 모아 둔다.’는 뜻으로
보화각은 단순히 수집한 미술품이나 문화유산을 전시하는 곳이 아니었다.
우리의 전통 문화를 수장, 연구, 복원할 수 있는 연구소로 운영해 나가겠다는
간송의 다짐이 담긴 곳으로 보화각을 통해 민족문화의 보존은 물론
민족적 긍지를 되찾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 문화재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재산을 쏟아 부은 간송은
1962년 1월 26일, 신장병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나이 불과 57세의 안타까운 나이였다.
1965년 보화각은 간송미술관으로 개칭됐고,
1971년 간송미술관의 첫 전시가 시작되면서 오늘날까지 봄, 가을 정기전을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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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이 한국 미술사의 전부는 아니지만 간송 없이 한국 미술사는 성립할 수 없다.’는 이 말에
이의를 다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간송 전형필의 미술사랑은 독립투사들의 애국심 못지않게 각별하고 단호했다.
부호의 아들로 태어나 안락한 생활이 약속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개인의 행복보다는 조국의 역사, 문화재를 지키려 했던 간송 전형필,
그의 숭고한 뜻을 이어 우리도 문화재 지키는 일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지 않을까.
보화각 개관기념일(1938)에, 왼쪽에서 여섯 번째가 간송이다.
- 이은희 방송작가 / 사진. 간송미술관, 눌와
- 월간문화재사랑, 2009-0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