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끼며(시,서,화)

파올로 우첼로(Paolo Uccello) - 산 로마노 전투

Gijuzzang Dream 2009. 1. 8. 10:09

 

 

 

 

 

 

 파올로 우첼로의 <산 로마노 전투>

 

 

아내보다 사랑한 원근법, 회화의 새로운 길 열어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들은 원근법이 발달하지 않아 표현방식이 서툴렀지만

우첼로는 <산 로마노 전투>에서 근대적 원근법을 실험했다.
르네상스 시대에 원근법의 선구자였던 우첼로는 <산 로마노 전투>에서

중앙의 고정된 점에서 시작된 땅 위에 창을 세워 후퇴하는 시선을 만들어 냈다.

 

<산 로마노 전투> : 1455~1460년, 목판에 템페라, 182×320,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이 작품은 미술 역사상 실제의 전쟁을 다룬 최초의 작품으로서

1432년에 산 로마노 근처에서 벌어졌던 피렌체와 시에나 사이에 벌어진 작은 전쟁을 그렸다.

우첼로는 이 작품을 통해 15세기 그림에 ‘전쟁’이라는 새로운 주제를 도입했다.

피렌체와 시에나는 적대적 관계였다.

1432년 산 로마노 근처에서 매복 중이었던 시에나군은 피렌체를 기습 공격한다.

병력이 우세한 시에나군의 기습 공격에 사령관으로 임명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피렌체 장군

니콜로 다 토렌티노는 20여 명의 기병을 데리고 산 로마노 탑 앞에서 적진을 향해 돌진한다.
토렌티노는 진격해 오는 시에나 대군들 앞에서 용맹스럽게 칼과 창을 들고 맞서 싸웠다.

피렌체의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토렌티노 장군은 무려 여덟 시간 동안

수적으로 열세한 군사를 가지고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의 위대한 메디치 가문 코시모는

절친한 친구 토렌티노가 승리로 이끈 산 로마노 전투를 기록하고 싶었다.

코시모는 우첼로에게 작품을 의뢰하면서

전투 장면을 정확하게 그리면서 군마는 화려하게 장식하라고 주문한다.

우첼로는 코시모의 의뢰대로 산 로마노 전투의 내용을 가지고 3부작으로 작품을 제작한다.

코시모는 공격을 진두지휘하는 토렌티노의 용맹을 보여주고 있는 세 작품 모두

메디치 궁에 있는 자신의 침실의 벽에 걸어 두었다.

메디치가의 궁전을 장식하고 있었던 3부작 가운데 이 작품은 두 번째 전투 장면으로,

병사들은 중세의 기사도 복장을 하고 있다.

화면 왼쪽 백마를 타고 붉은 색의 모자를 쓴 남자가 피렌체 장군 니콜로 다 토렌티노다.

20여 명의 군사 앞에 서 있는 토렌티노의 머리 위에

메디치가의 코시모를 뜻하는 ‘솔로몬의 매듭’이 그려진 군기가 휘날리고 있다.

 


사실적 회화 위해 동작과 원근법에 심혈을 기울여

실제의 전투에서 토렌티노는 이 작품에 묘사된 모자를 쓰지는 않았지만

우첼로는 승리의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 주인공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백마 뒤로는 부러진 창과 투구가 놓여 있고 병사는 죽어서 쓰러져 있다.

죽은 병사를 묘사했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굉장히 충격적인 표현법이었다.

장군 뒤로 왼쪽의 피렌체 기사들은 창으로 무장을 하고 있고 멀리 보이는 기사들은

창과 나팔, 군기를 들고 산에 오르고 있다.

화면 오른쪽에 있는 기사는 적군 두 명에 의해 창을 자유롭게 쓰지 못하자 곤봉으로 싸우고 있다.

기사가 타고 있는 말은 싸움에 피해 날뛰고 있다.

하지만 말은 싸움을 하고 있는 이미지보다는 회전목마를 연상시켜 사실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 작품에서 화려한 투구를 쓰고 있어 기사들의 얼굴이 보이지 않지만

토렌티노 장군 뒤에 있는 나이 어린 기수들과 나팔수의 얼굴이 투구를 쓰지 않아 보인다.

파올로 우첼로(Paolo Uccello / 본명, Paolo Di Dono, 1396~1475)는 이 작품을 제작하면서

사실적으로 보이기 위해 등장인물들의 동작과 원근법에 가장 많은 신경을 썼다.

그는 전경과 후경 사이에 산울타리를 그려 넣어 전투와 배경과의 거리감을 주었다.

우첼로는 아내보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은 원근법이라고 밝힐 정도로 특이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원근법에 빠진 그는 의뢰한 그림을 그리기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그리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겨

말년에 가난하게 생을 마감한다. 하지만 그의 원근법은 회화의 새로운 길을 열어 주었다.

- 박희숙 서양화가, 미술 칼럼니스트  bluep60@hanmail.net

- 2008년 12월 09일, ⓒ ScienceTimes [명화산책]

 

 

 

 

 

 파올로 우첼로(Paulo UCCELLO)

 

<산 로마노의 전투, The Battle of San Romano>

 

 

피렌체 출생으로 이탈리아 르네상스 초기의 화가.

처음에는 조각가 기베르티의 조수로 있었으나 1415년에 의약조합에 화가로서 등록되었다.

그 후 10년가량의 행적은 알 수 없으나 당시 유행하였던 ‘국제 고딕양식’에 심취하여 지낸 것으로

추측된다. 1425년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성당의 모자이크 작업을 완성하고

1430년경에 다시 피렌체로 돌아왔다.

그 사이 피렌체 화단은 마사치오의 영향에 크게 변해 있었다.

우첼로도 그 영향을 받아 1436년에는 피렌체성당에 대벽화《존 포크우드 장군 기마상》을 그려

보기 드문 조형적인 사실력을 보이기도 했으나,

《성 게오르기우스와 용》에서 볼 수 있는 공상적인 구상과 곡선적인 수법이 나타난

여왕의 모습 등을 보면 ‘국제 고딕양식’에 대한 집착을 알 수 있다.

화면의 통일이나 자태의 조형적인 효과를 무시한 채

투시도법의 부분적인 추구에 정력을 기울였다.

 

침식을 잊은 채, 투시도법의 기하학적 연구에 몰두하였다는 일화까지 남기고 있는데

산타 마리아노 벨라 성당의 회랑(回廊) 벽화 《노아의 홍수》는

화면 전체가 거의 투시도법으로 채워져 있다.

메디치(Medici) 왕궁을 장식하고 있던 《산 로마노의 패주》의 3연작

(현재는 런던, 피렌체, 파리에 분산)의 경우도,

화면의 통일이나 자태의 조형적인 효과를 무시한 채

투시도법의 부분적인 추구에 보다 정력을 기울였음을 엿볼 수 있다.

그 밖에도 만년의 작품으로 《성병(聖餠)의 모독》(1468)과 《밤의 수렵(狩獵)》이 있다.

   

1432년 니콜로 다 톨렌티노(Niccolò da Tolentino)가 이끄는 피렌체의 군대가

적군인 시에나의 군대를 패배시킨 것을 그린 것이다.

형태를 조각처럼 입체적으로 처리한 기법과 부분적인 원근법 사용 등

르네상스적 요소도 보이지만, 밝은 색채의 사용과 정교한 장식성은

15세기 피렌체를 지배하던 고딕양식의 영향이다.

 

한편 고딕양식은 산 로마노의 전쟁을 그린 3점의 패널화를 모두 사들인 메디치(Medici)家와 같은

당대의 새로운 지배계층의 환경을 호화롭게 꾸미는데 사용되었다.

 

그는 섬세하고 정교한 원근법 소묘로도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홍수(The Flood), 1447-8>와 피렌체의 산 마르티노 델라 스칼라 교회에 있던

그의 마지막 프레스코인 <예수탄생(The Nativity)의 밑그림 및

현재 우피치미술관(Uffizzi Gallery)에 있는 소묘 3점으로도 알 수 있다.

 

이 작품들은 과학적 법칙을 응용하여 3차원의 공간에 있는 물체를 면밀하고 분석적인 연구를 통해

재구성해내는 그의 정신을 드러내고 있다.

아마 소묘 제작에서는 유명한 수학자인 파올로 토스카넬리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우첼로의 원근법 소묘는 그 후 피에로델리 프란체스카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

알브레히트 뒤러와 같은 르네상스 미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말년에는 세상을 멀리하고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산 로마노의 전투, The Battle of San Romano>

 

 

파울로 우첼로(Paolo Uccello, 1397-1475)

also as known Paolo di Dono

Tempera on wood / 1435∼1440년경

 

3편 연작으로

파리의 루브르박물관, 런던의 국립미술관, 피렌체의 우피치미술관(Uffizzi Gallery)에 소장.

 

 

산로마노 전투는 십자군 원정이 계속되던 13세기경에 상업권을 두고 발발한

피렌체와 시에나의 전쟁으로 1432년 피렌체가 승리하였다.

 

메디치(Medici)의 코시모는 산 로마노 전투에서 피렌체군의 승리를 기념하는 그림을

우첼로에게 의뢰하였다. 우첼로는 철저히 코시모의 취미와 취향에 따라

전쟁 그림에는 어울리지 않는 장미정원이나 토끼사냥 장면을 삽입하였다.

또 피렌체 직물산업의 특산품이며 피렌체 시민들의 자부심의 상징인 모자를

토렌티노(Niccolò da Tolentino)와 코티뇰라의 머리 위에 그려 넣었다.

3점의 그림은 메디치(Medici)家의 궁전을 장식했으나

뒤에 각기 파리와 런던으로 옮겨져 보관되었다.

 

 

 (1) London National Gallery

The left-hand scene  

 

 

제 1막 <니콜로 다 톨렌티노가 피렌체군을 이끌다

            :  Niccolo da Tolentino Leads the Florentine Forces>이다.

 

역동적인 흰 말을 탄 지휘관 토렌티노(Niccolò da Tolentino)가 중앙에서 피렌체군을 이끌고

시에나군을 공격한다. 뒤에는 솔로몬의 매듭을 상징하는 문장의 깃발이 펄럭인다.

전쟁터와 언덕 사이에는 꼼꼼하게 그려진 장미 울타리가 있다.

멀리 언덕 위에는 작지만 선명하게 표현된 병사들이 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의 거장 우첼로는 피렌체 출신으로

조각가 로렌초 기베르티(Lorenzo Ghiberti)의 제자였다.

우첼로는 당시 물체의 모양과 위치를 선에 의해 투시적으로 표현하는

'선원근법(1점 소실 원근법)'의 기하학적 연구에 몰두하였다.

 

기하학적 원근법을 적극적으로 적용한 우첼로의 대표작이다.

그림 속의 토렌티노(Niccolò da Tolentino)는 창 대신 지휘봉을 들고, 투구 대신 모자를 쓰고 있다.

이 모자는 우첼로의 원근법을 적용한 모자이다.

멀리 언덕 위의 물체는 원근법을 사용하여 작게 그렸으나,

또 원근법과는 어긋나게 병사와 말을 지나치게 선명하게 그렸다.

바닥에는 부러진 창을 인위적으로 늘어놓았으며

말과 바닥의 색깔, 장미꽃 울타리, 토끼사냥 등 사실적이지 못하고 장식적인 요소들이 삽입되었다.

 

 

 (2) Galleria degli Uffizi, Florence, Italy

In the middle scene

 

Bernardino della Ciarda Thrown Off His Horse from the Battle of San Romano

   

   

 

 (3) Louvre, Paris, France

The right-hand sce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