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산사 아미타불, 미륵보살
아미타불과 미륵보살의 만남
- 감산사 석조 불, 보살상 이야기 -
경주 감산사터에서 발견된 석조 아미타불입상과 미륵보살입상은
조각의 높은 완성도와 그 아름다움에서 통일신라 8세기 전기의 불상을 대표하는 기준작으로 평가된다.
감산사 석조 아미타불상
719년(성덕왕 18)경, 경북 경주 외동읍 신계리 감산사지 출토, 높이 174㎝, 국보 81호
감산사 석조 미륵보살입상
719년 경, 높이 183㎝, 국보 82호
광배 뒷면에 새겨진 명문 역시 신라사에 관한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어
일제시대부터 다양한 방면의 연구자료로 활용되어 왔다.
그동안 감산사 불, 보살상을 둘러싸고 진행되었던 논점을
상의 제작연대, 양식적인 특징, 신앙이나 불교사와 관련된 문제 등으로 정리해본다.
감산사 아미타상과 미륵상의 광배 뒷면에는 중아찬(重阿湌) 김지성(金志誠 혹은 金志全)이
돌아가신 부모를 위해 아미타상과 미륵상을 만든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아미타상과 미륵상의 명문은 내용상 몇 문단으로 나눌 수 있어서
미륵상의 경우 상의 조성동기, 머리말, 김지성의 생애, 발원내용, 어머니의 장례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미타상의 명문은 머리말, 김지성의 생애, 발원내용이 미륵상과 공통되나,
앞부분에 조성동기가 없는 대신 명문을 새긴 관여자들, 아버지의 장례식, 김지성의 사망 사실이 추가되어
약간 다르다.
이처럼 명문 내용의 차이로 인해 미륵상보다 아미타상이 더 늦게 완성되었다는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미륵상의 명문 앞부분에 719년 두 상을 만든다고 명시되어 있고,
양식상 큰 차이가 없으므로 두 상 모두 719년 경에 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무난하다.
이런 점에서 아미타상 명문에서 김지성의 사망을 말하는 부분은
720년 이후 추가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감산사 상의 조형적 특징에 대해서는
중국 唐 불교조각과 덴표(天平)시대 일본조각과의 비교를 통하여
비슷한 시기에 유행했던 도상을 수용하였고,
이들이 당시 동아시아의 공통된 국제양식을 형성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특히 미륵상의 경우, 관능적인 자세와 화려한 장신구의 표현에서 이 像이 중국을 거치지 않고
인도 굽타시대 및 서역 보살상과 직접적인 영향관계를 맺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한편 아미타상의 Y자형 옷주름은 서역의 불상에 기원을 두면서도
중국을 거치면서 이미 형식화된 단계의 것을 받아들였다고 보기도 한다.
이런 종류의 도상적 원류와, 像의 제작 시 참조했던 모본을 현실적으로 구별해보겠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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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연부에는 투박한 화염문이 조각되었다. |
광배 뒷면에 불상을 만든 이와 만든 내력이 기록되어 있다. |
아미타불의 특징적인 수인을 보여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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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배는 내부에 구획을 지어 두광을 나타냈다. |
머리형식은 나발이며 육계가 크고 평평하다. |
이마 정중앙에는 백호를 뜻하는 구멍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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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보살상이 착용하는 ‘도티’처럼 치마(裳)는 다리에 밀착되어 있다. |
U자형의 주름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발목까지 내려와 있다. |
하나의 돌로 된 미륵보살에 대좌를 따로 만들어 결합하였다. |
감산사 像에 보이는 국제적인 불상 양식의 배경은
성덕왕대에 唐과의 교류가 활발했던 역사적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성덕왕은 재위 36년간(702-737), 43회의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이는 신라와 唐의 전체 사신 교환 횟수에서 1/3에 해당한다. 그리고 여기에 김지성이 포함되어 있다.
아미타상의 명문에 기록된, 김지성에게 내려졌다는 '상사봉어(尙舍奉御)'는
705년에 그가 唐에 사신으로 갔을 때 받았던 관직명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러한 김지성의 대외적인 활동은 그가 발원한 불상의 국제적인 양식과 결부되어 흥미롭게 느껴진다.
신앙의 내용이 서로 다른 아미타불과 미륵보살이 감산사 상에서 한 쌍을 이루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이른바 법상종(法相宗)이라는 불교 종파(宗派)의 신앙적 특징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법상종에서는 미륵을 주된 신앙의 대상으로 모시고,
이를 보완하는 의미에서 아미타불을 부수적으로 받들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법상종 미술론이 감산사 상의 명문에 적용되는 출발점은
김지성이 유식(唯識)불교에서 중시하는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이란 경론을 읽었다는 구절이다.
또한 <삼국유사> 탑상 남월산조에서 일연이 감산사 상들을 직접 보았을 때
미륵상이 금당의 주존으로 안치되어 있었다는 목격담과,
같은 책의 남백월이성조에서 성덕왕 8년(709)에 남사(南寺)를 창건하고
금당(金堂)에 미륵, 강당(講堂)에 미타를 봉안했다는 기사 등을 근거로 삼는다.
따라서 '법상종 미술론'의 핵심은 미륵보살상을 금당의 주존으로,
그 보조 역할을 하는 아미타여래상은 강당의 주존으로 각각 안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미륵보살과 아미타불을 함께 안치하는 것이
굳이 법상종 사찰만의 고유한 신앙적 특징은 아니라는 반론도 제기되었다.
미륵과 아미타를 함께 받드는 것은 7세기에 8세기 중엽,
중국과 신라에서 종파와 무관하게 널리 유행했던 불교의 보편적인 신앙형태였다는 주장이다.
통일신라 불교사에서 종파의 유무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용어와 개념 정의를 놓고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려왔던 문제였다.
설령 종파에 준하는 실체가 인정되더라도,
구체적인 형상을 가진 미술품과 추상적인 불교의 신앙, 사상을 잘 연결하여
어떻게 합리적이고 종합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 될 것이다.
지엽적이지만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감산사 불, 보살상의 정수리에 깊이 약 2-3㎝ 정도의 구멍이 파여있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하여 시대와 지역의 차이는 있으나,
쿠샨시대 간다라 지역의 일부 석조불상과 중국 초기 금동불상의 정수리에서도 구멍을 볼 수 있다.
불상의 정수리에 난 구멍에 대해서는 불사리를 봉안하기 위했던 것이라는 가능성이 제기되어 참고가 된다.
감산사 상의 정수리에 있는 구멍의 정확한 기능과 상징성에 대해서는
앞으로 좀더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 허형욱, 국립중앙박물관 미술관 불교조각실
-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와의 대화 제33회
1916년에 경북 경주시 내동면(內東面) 신계리(薪溪里) 감산사터에서
아미타여래상과 미륵보살입상이 일본인 학자에 의해 발견되었다.
불상의 광배 뒷면에 새겨있는 명문에 따르면,
아미타여래상은 720년(성덕왕 19) 김지전(金志全)이 국왕과 당시 정치실력자였던 개원(愷元),
부모 및 가족들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김지전은 미륵보살입상을 만든 김지성(金志誠)과 동일 인물이다.
그는 6두품으로 집사부시랑을 역임하다가 67세에 퇴임하였다.
글은 통일신라의 문장가로 유명한 설총이 지었고, 글자는 승려 경융(京融)과 김취원(金驟源)이 새겼다.
글의 내용은 6두품 출신 김지전(성)의 행적과 신앙,
그리고 8세기 통일신라의 불교사상을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나아가 이것과 미륵보살입상은 만든 연대를 알 수 있어
통일신라 불상 양식의 변천과정을 연구할 때 가장 중요한 기준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조상기
(甘山寺 石造彌勒菩薩立像 造像記)
開元七年己未二月十五日重阿飡金志誠奉」
爲亡考仁章一吉飡亡妣觀肖里敬造甘」
山寺一所石阿彌陀像一軀石彌勒像一軀」
盖聞至道玄微不生不滅能仁眞寂無去無來」
所以顯法應之三身隨機拯濟表天師之十號」
有願咸成弟子志誠生於聖世歷任榮班」
無智略以匡時僅免罹於刑憲性諧山水慕莊」
老之逍遙志重眞宗希無著
之玄寂年六十有」
七致王事於淸朝遂歸田於閒野披閱五」
千言之道德弃名位而入玄窮研十七地之法」
門壞色空而俱滅尋復降旌命於草廬典」
邇都之劇務雖在官而染俗塵外之心無捨罄」
志誠之資業建甘山之伽藍伏願以此微誠上」
資國主大王履千年之遐壽延萬福之鴻」
休愷元伊飡公出有漏之囂埃證无生之妙果」
弟良誠小舍玄度師姉古巴里前妻古老里後」
妻阿好里兼庶兄及漢一吉飡一憧薩飡聰敬」
大舍妹首盻買里及无邊法界一切衆生同出」
六塵咸登十號縱使誠▨有盡此願无窮劫石」
巳消尊容不▨无求不果有願咸成如有順此」
心願者庶同營其善因也亡妣官肖里夫人」
年六十六古人成之東海欣支邊散之」
개원 7년 기미 2월 15일 중아찬 김지성(金志誠)은
돌아가신 아버지 인장(仁章) 일길찬과 돌아가신 어머니 관초리(觀肖里)를 위하여
감산사와 석조 아미타상 1구와 미륵상 1구를 삼가 조성하였다.
듣건대 지극한 도는 그윽하고 미묘하여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니
능인(能仁)의 참된 자취는 가고 옴이 없다. 이런 까닭으로 현신 · 법신 · 응신의 삼신불은
근기에 따라 제도하여 천사(天師)의 열가지 공덕상을 나타내었고 원(願)이 있으면 모두 이루었다.
제자 지성은 성세에 태어나 영화로운 관직을 역임하였으나 지략이 없어
시폐를 바르게 하려다가 겨우 형(刑)과 법에 걸리는 것을 면하였다.
성품은 산수를 좋아하여 장자(莊子)·노자(老子)의 유유자적함을 사모하였고
뜻은 진종(眞宗)[불교]을 중히 여겨 무착(無著)의 그윽하고 적적함을 희구하였다.
나이 67세에 조정에서 임금이 맡긴 일을 사퇴하고 드디어 한적한 전원에 돌아가
오천 언의 『도덕경』을 들춰 보고 명예와 지위를 버리고 현묘한 진리의 세계에 들어가
17지(地)의 유가법문을 깊이 연구하여 색(色)과 공(空)이 무너져 모두 민멸함을 알았다.
이윽고 다시 왕명을 초려에 내리니 멀리 도성의 바쁜 직무를 맡아 비록 관에 있으나
세속을 꺼리고 세간 밖에 둔 마음을 버리지 아니하여 지성의 자산과 업을 다하여 감산의 가람을 세웠다.
엎드려 바라건대 이 작은 정성이, 위로는 국주대왕께서 천년의 장수를 누리시고 만복이 널리 뻗치시며,
개원 이찬공은 번뇌의 세속사를 벗어나 태어남이 없는 묘과(妙果)를 증득하고,
동생 양성 소사, 현도사, 누나 고파리, 전처 고노리, 후처 아호리와 서형 급한 일길찬, 일동 살찬,
총경 대사, 누이 수힐매리 그리고 끝없는 법계의 일체 중생에게 미쳐 함께 세속을 벗어나
다 부처의 경지에 오르소서. 비록 정성스러운 ▨으로 하여 이 원(願)을 다하여
무궁한 겁에 돌이 이미 닳아 없어지더라도 존용은 ▨하지 아니하여 구하면 과보를 얻지 아니함이 없고
원이 있으면 다 이루어지기를.
만일 이 마음의 서원에 따름이 있다면 모두 함께 그 선인(善因)을 지었다.
돌아가신 어머니 관초리 부인은 나이 66세에 고인이 되어 동해 바윗가에 (유골을) 흩뿌렸다.
- 출전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Ⅲ(1992)
- 판독자 : 김남윤
- 국립문화재연구소,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