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천 물걸리 절터((物傑里寺址)
물걸리 절터 (物傑里寺址)
물결처럼 흔들리는 푸른 산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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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으로 만든 꽃방석은 아니지만 풀꽃이 지천에 깔린 절터 마당은 아주 편안한 방석 같은 느낌을 준다.
하얀 꽃 바람에 날리는 토끼풀이 싱싱한 이 마당 그늘에 편안히 쉬기까지 다섯 시간을 넘게 달려왔다.
몇 해를 벼르고 별러서 이곳을 왔건만 눈앞에 보이는 삼층 석탑하나만 그저 무심한 듯 보다가
풀밭 위에 드러눕는다. 더위가 성큼 다가온 푸른 하늘이 싱싱한 칠월이다.
눈을 감고 절터 마당에 누워 몇 해 전,
어수선한 마음자리 어루만지며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혼자 길을 떠났던 때를 기억한다.
충주 남한강 중원탑 아래 홀로 앉아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았지.
하루 종일 말 한마디 할 기회가 없었던 그 날, 날이 저물도록 명치께에 머물러 녹지 않던 욕심의 덩어리를
강물에 띄워 보내노라고 다짐했던 그 날도 이런 여름이었다.
당시 충주에서 원주지나 경기도에 접해 있던 국도 변의 절터들이 나에게 적지 않은 위로가 되었지.
거돈사지, 청룡사지, 법천사지, 흥법사지,
고달사지.길을 잃고 뙤약볕에 지쳐 청룡사지 나무 그늘아래에서 낮잠을 청한 기억이나
폭우가 쏟아지는 고달사지 입구 정자나무 아래에서 차안에 발이 묶여 있다가
종내는 온몸에 비를 맞으며 혼자 절터를 산책했던 기억들이 새롭다.
◇ 토끼풀이 무성한 물걸리절터 ⓒ 들찔레
그 길 위에서의 걸음들이 몇 해 동안 나를 버티게 해준 힘이 되었다.
이후 몇 번이나 그 길의 끝을 이어 다녀가고자 했으나 오늘까지 시간이 여의치 못해 미루어진
절터 기행의 길을 다시 잡게 되었고 그 출발지를 이곳 홍천 땅 내촌면의 물걸리절터로 정하였다.
물걸(物傑), 만물과 호걸이 모이는 곳이라는 뜻의 이 산골마을은
지금 어느 곳에서도 그런 융성한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동창(洞倉)이라는 옛 지명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영동과 영서를 잇는 옛 길의 중심지였음과
이곳 물걸리절터의 만만치 않은 규모로 보아 많은 사람들이 살던 고을이었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1967년 봄, 발굴당시 이곳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금동여래입상 1구, 철불파편 2점, 청자편,
수막새와 암막새 기와, 암키와 조각, 청자조각, 토기조각, 조선시대 백자조각등이 발견되어
통일신라부터 조선시대까지 절의 명맥이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절터의 이름을 알 수 없으나 지금까지 홍양사터라고 전해온다.
흥양사라는 절은 낙산사, 백담사 등을 말사로 거느렸던 고성의 건봉사와 그 사세가 비슷했다고 한다.
◇ 물걸리 삼층석탑 ⓒ 들찔레
풀밭 위에 누어서 실눈을 뜨고 토끼풀의 앙증맞은 잎과 시계꽃이라 부르던 하얀 꽃무더기를
눈높이로 바라보며 쓰다듬는데 푸른 풀 냄새 코를 찌른다. 푸른 마당이 바람을 맞아 물결처럼 흔들린다.
부처님이 나 올 줄 알고 더위에 지친 몸 쉬라고 봄부터 이런 자리 마련해 주었구나 하면서
천천히 몸을 일으켜 삼층석탑(보물 제545호) 아래로 다가간다.
절터 입구에 서서 불법을 지키는 탑 하나는 아무도 찾지 않는 이 여름에도
소박하고 두터운 갑옷을 입은 금강역사의 현신처럼 여겨진다. 비로소 만져 탑의 온기와 질감을 느껴본다.
손에 익은 그 부드러운 마티에르는 나를 스스로 안심하게 만든다.
개망초가 부서진 아래 기단을 덮고 있는 삼층석탑은 통일신라기의 전형적인 탑의 양식을 보여준다.
그저 소박한 모습 그대로라 누구에게 뽐내는 자태는 결코 아닌데
나 역시 세상에 뽐낼만한 구석이 없다는 공통점이 있으니 어쩌면 그래서 정감이 더 가는 탑이다.
두 개의 바깥기둥과 하나의 안기둥만 만들어지고 아무 조식이 없는 위 기단은 대범하지 못하고
얹힌 갑석 역시 충분히 여유롭지 못하다.
산 중 절의 탑이 다 그렇듯 1층 몸돌에 비해 그 위의 몸돌 크기가 축약이 심하고
지붕돌의 층급받침도 5단으로 되었다가 3층 지붕돌은 어쩐 일인지 4단으로 축약되어 있다.
게다가 상륜부도 노반만 남아 전체적으로는 불완전한 구조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러면 어떠랴?
이 산중 절터에서 가장 높은 키로 하늘을 보고 자연의 돌아가는 이치를 꿰뚫는
부처님의 혜안을 가졌다면 걸친 옷이야 누더기면 어떠랴? ◇ 절터 마당에 놓여 있는 불대좌, 사자상이 새겨져 있다 ⓒ 들찔레
뎅그러니 서 있는 삼층석탑이 그래도 외로워 보이지 않는 이유는
금당 터에 쓸어 모아놓은 석부재 중 부처님의 대좌로 여겨지는 돌덩이에 새겨진 사자들이
지긋이 탑을 지켜주고 있기 때문이다. 경주 장항리 절터 대좌의 것이 주먹 불끈 쥔 천진난만한 사자라면,
영암사지 금당 기단돌에 새겨진 사자가 익살스러움과 인간적인 모습을 그대로 투영한 것이라면
이곳에 양각된 사자는 웅크리고 바라보는 모습이 날카롭다.
아마도 행색이 초라한 탑을 만만히 보는 세상의 뭇 것들에게 경계를 늦추지 않는 모습으로 보인다. ◇ 물걸리 절터의 보물들을 모아 놓은 모습 ⓒ 들찔레
이 절터에 들어서면서 계속 뭔가 아쉽고 서운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왜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표현 할 수가 없었는데
금당터 뒤에 높은 곳에 있는 밭에 올라 절터 전체를 바라보면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집 속에 갇혀있는 석조여래좌상(보물 541호), 석조비로사나불좌상(보물 542호),
물걸리 불대좌(보물 543호), 물걸리 불대좌 및 광배(보물 544호)등이 제 자리에 있지 않음으로서
자연적인 절터의 미학을 느낄 수 없게 된 점이 바로 그것이다.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한꺼번에 박제가 되어버려 햇볕도 바람도 느끼지 못하게 갇힌 이 유물들에게서
우리는 생명의 부활을 보는 것이 아니라 명복만 빌게 될 뿐이다.
그렇다고 들어가 보지 않을 수는 없지 않은가?
네 개의 보물이 가지런히 옆으로 놓인 전각 안에는 햇볕이 듬성듬성 비추고 있다.
석조여래좌상과 석조비로사나불좌상의 얼굴은 그림자가 져서 어둡고
대좌들의 바닥에 조각된 복련의 꽃잎 깊이가 음양으로 뚜렷하게 각인된다.
일견 보기에도 네 개의 좌대는 그 형태나 기법이 유사한 것이 동일 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돌로 남은 부처님과 장엄들을 친견하러 들어가는 길, 가벼운 합장을 한다.
◇ 물걸리 불대좌 및 광배 ⓒ 들찔레
내 눈에 가장 먼저 띄는 것은 부처님이 아니다.
가장 왼쪽에 놓여 있는 물걸리 불대좌 및 광배(보물 544호)이다.
부처님을 잃어버린 이것의 규모는 광배 높이 188㎝, 너비128㎝, 대좌높이106㎝, 상대너비92㎝ 정도이다.
일견 보아도 정교하게 조각된 광배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대개는 광배를 한 조각의 배에 비유하지만
나는 부처님에 헌화하다 떨어져 나온 한 잎의 연꽃 같은 느낌도 든다.
두광과 신광이 뚜렷이 구분되고 두광 중심은 활짝 핀 연꽃으로 장식되어 있다.
전형적인 수법으로 안쪽에는 넝쿨무늬, 바깥에는 불꽃 무늬를 새겼고
광배 가장자리 아홉 곳에는 화불을 조각하였는데 수인(手印) 즉, 손의 모양이 모두 다른 특징이 있다.
◇ 물걸리 광배에 새겨진 화불 ◇ 불대좌에 새겨진 신장상과 귀꽃 ⓒ 들찔레
햇살이 잘 든 대좌의 하대석 아랫부분에는 안상이 음각되어 있고
그 위에 새겨진 복련과 귀꽃은 굴곡이 깊고 풍만하게 만들어져 기품을 더한다.
귀꽃은 충분히 도드라져 화려함을 더하고 가만히 보면 그 모양도 부처님을 닮았다.
팔면의 중대석마다 감실처럼 돌의 표면을 파내고 신장이나 보살상을 새겨 놓았다.
그 중에는 세월이 흐르면서 닳고 닳아 마치 간다라유적들에서 보았던
고행하는 부처님과 닮은 모양도 있고 인자했을 얼굴들이 마모되어 고통을 참는 듯 보이는 것도 있다.
그저 평범한 사람의 눈으로 보이는 현상이지만 보이는 것은 보이는 대로 느끼면 그뿐,
깊은 의미는 두지 않기로 했다. 그 위, 부처님과 광배가 올려진 상대석은 두 겹의 연꽃잎이 조각되어 있다.
복련이 한 겹이고 앙련이 두 겹으로 된 불대좌는 자주 본다.
크지 않은 규모이지만 매우 세련된 조각기법이 동원되어 있음을 본다.
비어 있는 불대좌의 크기로 보아 불상이 있었다면 바로 곁에 안치된 석조여래좌상의 크기쯤이 될 것이다.
◇ 물걸리 석조여래좌상 ⓒ 들찔레
그 곁에는 물걸리 석조여래좌상(보물 541호)이 놓여있다.
얼굴이 심하게 마모되고 육계도 뚜렷하지 않은 부처님은 그래도 가부좌를 틀고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하고 꼿꼿이 앉아 깨달음에 이르는 순간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온화하고 극명한 표정의 깨달음도 좋지만 이렇게 부서진 얼굴로도
깨달음의 자세를 잃지 않는 모습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깨달음이 아니겠는가?
불상의 대좌는 그나마 완벽하게 남아 있는데
다른 네 기의 보물들과 양식면에서는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다만 대좌에 조각된 내용들이 틀린데 하대석에는 가릉빈가가 새겨져 있으며
향로 같은 모양의 조각도 볼 수 있다. 중대석에는 팔면에 각각 팔부중상이 새겨져 있고
아래위로 복련과 앙련은 하대석과 상대석에 전형적인 형태로 새겨져 있다.
◇ 물걸리 석조비로사나불좌상 ⓒ 들찔레
아마도 석조여래좌상과 석조비로사나불좌상(보물 542호)을 가운데 안치한 것은
그래도 불상이 남아 있어 지금의 사람들이 예를 갖춘 탓일 것이다.
석조비로사나불좌상(=비로자나불, 毘盧舍那佛, Vairocana)은 인자하지만 투박한 모습,
머리가 상대적으로 큰 모양을 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는 매우 세련된 모습은 아니다.
불교의 지혜로움, 그 망망한 바다의 광대무변을 상징하는 비로사나불은 태양을 상징하는 의미가 있으며
화엄종의 본존불이다. 비로사나불은 끝없는 공덕을 쌓아 대광명을 뿜어 세상에 널리 비춘다.
따라서 어느 절집에서건 비로사나불을 모신 전각의 이름은
화엄전, 비로전, 광명전 혹은 대광명전 등으로 불린다.
◇ 비로사나불좌상의 수인 ◇ 중대석에 새겨진 공양상 ⓒ 들찔레
비로사나불임은 손 모양 즉, 수인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지권인(智拳印)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 손의 모양은 이(理)와 지(智), 중생과 부처, 미혹함과 깨달음이 원래는 하나라는 뜻으로
양손을 가슴 앞에 올리고 검지만 똑바로 세운 왼손을 오른손으로 감싸서
오른손 엄지가 왼손 검지 끝에 서로 맞닿도록 한 모양이다.
그런데 이곳 물걸리의 것은 왼손 엄지가 오른손의 검지를 싸고 있는 모습을 취하고 있어
손의 모양이 바뀌어 있는 특징을 보인다. 결가부좌를 틀고 앉은 불상의 발 모양도 특이하다.
보통은 오른발을 위로 한자세인 길상좌(吉祥坐)의 모습을 취하는 것이 보통인데
이것은 왼발을 위로 올린 항마좌(降魔坐)를 취하고 있다.
이 불상의 대좌도 다른 것들과 모양이나 형식에서는 비슷한데
다만 공양하는 모습 등 중대석에 새겨진 조각의 형태가 각각 조금씩 틀린다.
◇ 물걸리 불대좌 ⓒ 들찔레
맨 오른쪽에는 물걸리 불대좌(보물 543호)가 놓여있다.
뒤의 광배는 깨어지고 마모가 심한 반면 불대좌의 모습은 거의 완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대좌의 중대석에는 팔부중이 각 면에 새겨져 있고
하대석에는 안성을 파고 그 속에 가릉빈가가 새겨져있다.
신라 말기의 것이라 여겨지는 이 불대좌나, 반대편에 놓인 물걸리 불대좌 및 광배(보물 544호)의 주인은
잠시 외출을 떠나고 다시 돌아와 앉을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바깥 볕이 너무 좋기 때문이다.
아직 칠월 보름까지 하안거 기간이 창창한데 기간을 작정하고 들어가면
그 전에는 나올 수가 없는 무문관(無門關)같은 이 전각을 빠져나간 부처님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어쩌면 가운데 앉아 있는 비로사나불이나 여래불은
나들이 간 부처님들이 어디쯤에 머무는지 알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 물걸리 불대좌에 새겨진 가릉빈가 ⓒ 들찔레
중생, 이 하잘 것 없는 인간은 부처님을 뵈러 와서 부처님의 속마음은 읽지 못하고
그저 그 모양이나 탐하다가 종내는 집을 나간 스님만 경책하고 있다가
아무도 없는 절터에서 그 운치만 또 탐한다.
나의 그런 모자람, 종교와 믿음 이라는 화두의 틀에 얽매이고 싶지 않은 미욱함을 내가 잘 안다.
겉 표면을 읽는 데는 눈치가 빠르되 속성과 내면을 꿰뚫을 능력이 없는 평범한 인간인 나를
절터 한가운데 세워놓고 스스로 웃는다. 가벼운 놈!
그러나 아직까지 이런 곳으로의 걸음걸이가 싫증나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 생각한다.
아직은 무겁지 않은 발걸음으로 부처님을 찾는 것이 삶에 있어 결정적인 위기를 맞은 적이 없다는
안도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굳센 믿음 언젠가 가져보리라는 가능성도 남아있기 때문이다.
◇ 물걸리절터 밖으로 빛을 발하는 비로사나불 ⓒ 들찔레
절터 앞의 소박한 농가 한 채가 처음부터 나를 주시하고 있다. 그 집의 덩치 좋은 개 한 마리도
마치 절집을 지키는 보살님처럼 늙었으나 인자한 얼굴로 물끄러미 나를 쳐다본다.
마당과 작은 농로를 따라 난 길에는 여름 꽃들이 피기 시작하여 땀을 훔치며 그들과 상면한다.
아마도 집나간 두 부처님도 어느 길에서 나처럼 땀을 흘리며 꽃을 보고 있을지 모르겠다.
땀을 훔치며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날을 세며 그늘에 앉아 여름 바람을 맞고 있을지 모르겠다.
하안거 회향한 어느날, 언젠가 이자리로 부처님들 돌아온다면
무문관 속에서 깊이 선정에 든 두 부처님과 더불어 푸른 풀밭 가꾸어진 절마당 어느 곳,
본래 자신이 앉았던 터에 듬성듬성 앉아 계셨으면 좋겠다.
오는이 누구라도 여기저기서 손들어 엷은 미소로 맞아 주었으면 좋겠다.
박제가 되기 싫은 사람에게 박제가 아닌 부처님의 온전한 모습으로
자연스런 광명의 빛 뿌려 주기를 기대한다.
- 2008.07.18 데일리안 배강열 칼럼니스트 <들찔레의 편지 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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