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태극기의 원류 - 1882년 태극기 제정 이전
우리나라 태극기의 원류 - 1882년 태극기 제정 이전
조선 고종 19년(1882) 음력 8월 일본에 사신을 갔던 박영효(朴泳孝, 1861-1939)가
그 이전 고종(1863-1907년 재위)이 내린 지침에 따라 태극기를 만들어 각국에 배포하였고,
그 이듬해 1883년 음력 1월27일 조선 조정은 태극기를 공식 국기로 제정하여 반포하였다.
이 태극기에는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통용한
태극(太極)과 사괘(四卦: 건乾, 곤坤
, 감坎
, 리離
) 문양이 들어 있다.
동북아시아에는 이에 대한 많은 기록이 있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이 언급되는 기록으로는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의 “역(易)에 태극(太極)이 있고,
이것이 양의(兩儀)를 낳고, 양의가 사상(四象)을 낳고, 사상이 팔괘(八卦)를 낳는다
(易有太極, 是生兩儀, 兩儀生四象, 四象生八卦)”를 들 수 있다.
여기서 ‘괘(卦)’란 음과 양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부호인
‘음효(陰爻, )’와 ‘양효(陽爻,
)’를 3개씩 결합한 것이며,
이 괘 가운데 아래 팔괘는 우주, 자연의 삼라만상에서 가장 중심되는 위치로 보였다.
나아가 이 8괘가 두 개씩 겹쳐지면 모두 64괘가 만들어지는데
이 64괘는 세상의 사물의 모습과 변화를 판단하는 것은 물론 미리 예언하는 것으로까지 이해하였다.
|
양의 (兩儀) |
팔괘 (八卦) |
팔괘의 의미 | |||
자연현상 |
성질 |
방위 |
계절 | |||
태극 (太極) |
양 (陽, ) |
건(乾, |
하늘(天) |
강건함(健) |
남쪽 |
여름 |
태(兌, |
못(澤) |
기뻐함(悅) |
남동쪽 | |||
리(離, |
불(火) |
붙는 것(離) |
동쪽 |
봄 | ||
진(震, |
우레(雷) |
움직이는 것(動) |
동북쪽 | |||
음 (陰, ) |
손(巽, |
바람(風) |
들어가는 것(入) |
서북쪽 |
가을 | |
감(坎, |
물(水) |
빠지는 것(陷) |
서쪽 | |||
간(艮, |
산(山) |
정지하는 것(止) |
북서쪽 |
겨울 | ||
곤(坤, |
땅(地) |
유순함(順) |
북쪽 |
위 표는 태극과 팔괘를 <주역> 등에 입각하여 도식적으로 구분한 것이다.
<주역>이나 위 표가
단순히 중국에서만 발생하였고 우리나라 지역은 예로부터 그의 영향을 일방적으로 받았다는 견해는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며, 적어도 위 표의 원리가 통용되는 지역은 그를 보편적으로 사고하였고
그 문화가 통용될 수 있다고 본다.
즉 위 표는 동북아시아의 계절, 기후, 천체 관측 등을 오랫동안 관찰한 결과 축적된 지식이었다.
태극과 팔괘문화는 중국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쪽에도 깊이 관련되었다는 것은
우리나라 지역에서 발견되는 역사적 자료들을 통하여 입증된다.
아무튼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태극과 팔괘의 의미와 상징은
처음에는 우주만물의 기본 이치, 요소 및 만물의 생성, 변화, 발전하는 모습 그리고 생동하는 기운을
도식적으로 나타낸 것 즉 어쩌면 형이상학적 차원으로서 사고하고 전개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 상징은 점차 길상을 뜻하며 복을 주며
벽사(辟邪 : 사악한 귀신을 쫓는 것)로도 확대된 것으로 본다.
1882-1883년에 제작되고 공식 반포된 조선의 태극기는
그 이전 우리나라에서 오래 전부터 전개된 태극기 관련 문화의 역사적 소산이자 결실이라고 본다.
아래는 이를 증명하는 단적인 사례들이다.
김해 대성동 출토 청동 방패 꾸미개 - 가야, 4-5세기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기(氣), 기운(氣運)을 나타내고자 할 때
대개 이 방패꾸미개의 모습과 같이 움직임이 강하고 나아가 질서가 있는 모양인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기, 기운은 우주에 가득하고 무수하지만 그를 모두 표현할 경우
매우 복잡하고 어렵게 되므로 대개 태극과 같이 둘로 나누어 표현하였고 기타 3-5개로도 많이 표현하였다.
이 가운데 4개로 표현한 기, 기운 표현은 나중에 만자문(卍字文)으로도 전개되었다.
경주 계림로 고분 출토 보검 - 신라, 5-6세기
보검 중간 부위에 문양은 ‘삼태극’과 닮아 있다.
그리고 이들 태극 안에는 다시 작은 원이 표현되어 있는데
이 모습은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곡옥과도 흡사하다.
곡옥이 기(氣), 기운(氣運)을 표현하는 것임을 알려주는 한 단서라고 본다.
삼태극이란 원을 둘이 아닌 셋으로 나눈 태극이다.
기와도 - 백제, 7세기경
이 와당의 표면에 있는 문양은 굽어진 모습 때문에 ‘파문(巴文)’
또는 바람개비처럼 보인다고 하여 ‘바람개비문양’이라고도 한다.
이 문양을 부여 군수리 출토 문양전이나 익산 왕궁리 궁터 출토 기와문양과 비교하여 보면 알 수 있듯
이 문양은 기, 기운을 나타내고 또 생명 탄생을 상징하는 연화문 또는 그 변형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기와의 문양은 음양 기운을 나타내는 또 다른 대표적인 표현인 태극문양과도 닮아 있다.
따라서 이 기와의 문양은 태극문양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부여 군수리 절터 출토 벽돌 - 백제, 7세기
좌측과 우측의 문양 모습은 다르지만 모두 연화문이다.
다만 우측은 연화문이 움직임을 나타낸 것 즉 기, 기운을 품은 모습이다.
여기서 ‘연화(蓮花)’란 기, 기운을 품은 또 다른 대표적인 문양인 태극문과 상호 교류, 교환되며
나아가 동등한 것으로도 표현되곤 하였다.
익산 왕궁리 출토 기와 - 백제, 7세기
연화문이 기, 기운을 품은 모습으로 전개됨을 잘 보여주고 있다.
춘천 청평사 대웅전 앞 계단 - 고려, 11세기경
이 계단의 문양은 두 가지 모습이다.
하나는 연화문 안에 태극을 표현한 것과 다른 하나는 태극문양만을 표현한 것이다.
청동 연화문 팔괘문 거울 - 고려, 13세기경
중앙에 중심문양으로서 연화문을 배치하였고 그 주변에는 팔괘문을 배치하였다.
여기에서 연화문은 태극문양과도 호환(互換)된다.
즉 이 동경에서 연화문 대신 태극문을 배치하면 팔괘문을 가진 태극기 그림이 된다.
백자 사괘문 향로 - 조선, 19세기
그릇 등의 정상에 있는 꼭지 또는 손잡이는 꽃 또는 보주(寶珠) 모양으로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이 향로의 꼭지를 꽃모양으로 보고 다시 그를 주변 사괘문과 합하여 보면
앞서 소개한 고려시대 동경에서와 같은 의장, 즉 태극이라고 할 수 있다.
철제 수복(壽福)명 연화문 팔괘문 향로 - 조선, 19세기
이 뚜껑을 위에서 내려다 볼 경우 손잡이를 포함한 중앙은 하나의 꽃임을 알 수 있다.
이 중앙의 꽃 주위를 다시 투각하여 표현한 8송이의 꽃이 둘러싸고 다시 주위는 팔괘로 둘렀다.
팔괘의 사이사이에는 투각된 소위 삼태극, 사태극이 엇갈리게 배치되어 있다.
여기에서 꽃은 연꽃이 분명하다고 본다. 따라서 이를 통하여도 연화문과 태극문은 상호 교환되었고
나아가 같은 의미의 문양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 국립중앙박물관 역사관, 조원교
-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와의 대화 제108회>, 2008년 10월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