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世祖)의 계유정난(癸酉靖難)
세조(世祖)의 정난(靖難) 계유 4월
세조가 나라의 위난(危難)을 평정하려는 뜻이 있었는데, 권람(權擥)이 그 밑에 드나들어 매우 친밀하였다. 매양 가 뵐 적마다 해가 기울어도 물러가지 아니하여 밥상을 늦추게 하므로
그 집 하인들은 권람이 오는 것을 보면 눈짓하며, “국물 식히는 서방님이 또 온다.”고 하였다.
뒤에 세조가 왕위에 오르매, 권람을 내전으로 불러들여 잔치를 벌여 위로하고
정희왕후(貞憙王后)를 돌아보며, “이 사람이 곧 옛날 국물 식히던 서방님이오.” 하였다. 《동각잡기》
○ 한명회(韓明澮)는 젊어서 낙척(落拓)하여 큰 뜻을 품고 과거를 탐탁히 여기지 아니했으므로
나이가 30이 넘어서도 포의(布衣)로 있었으며 권람과 사생을 같이하는 친구가 되었다.
세조가 권람에게 인재를 물으매 권람은 한명회를 천거하여 복건(幅巾) 바람으로 뵙게 하였더니,
세조는 한 번 보고 구면이 있는 것처럼 여기며 서로 늦게야 알게 된 것을 한탄하였다.
매양 나가 뵐 때면 스스로 종부시(宗簿寺) 관원이라 일컫고,
혹 의원이라 일컫기도 하여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게 하며,
또 어두운 밤에는 부르기가 어렵다 하여 궁노(宮奴) 임운(林芸)의 팔에 노끈을 매서
그 한 끝을 문밖에 드리우게 해 두었다가 끌어당기면 비록 밤이 깊어도 곧 세조에게 알리게 되니
정란의 계책은 대개 한명회한테서 나왔다.
세조가 일찍이 한명회를 “나의
자방(子房)”이라고 칭찬하였다.[중국 전한(前漢)의 공신 장량(張良)의 자. 고조(高祖)의 모신(謀臣)으로,
유악(帷幄)에 참획하여 공을 세우고 유후(留侯)에 책봉되었다.
소하(蕭何)ㆍ한신(韓信)과 함께 한 나라 창업의 삼걸(三傑)이라 칭한다.]
한명회는 말하기를,
“한 고조(漢高祖)ㆍ당 태종(唐太宗)이 장량(張良)ㆍ진평(陳平 : 전한의 공신. 한 고조의 모신(謀臣)으로서 한 나라 창업에 공이 많았다)ㆍ방현령[房玄齡 : 唐의 정치가. 당 태종을 보좌하여 수말(隋末)의 대란을
평정하고 뒤에 문하성사(門下省事)가 되었다]ㆍ두여회 [杜如晦 : 당 태종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가 되어 방현령(房玄齡)과 함께 나라의 정치를 맡았다. 세상에서 방현령은 계획을 잘 세우고, 두여회는 결단을 잘 내린다고 하였다]의 꾀를 썼지마는,
한신(韓信 : 한 고조의 장수로 한 나라의 삼걸의 한 사람이다)ㆍ팽월(彭越 : 한고조 장수)ㆍ포공(褒公 : 당 태종의 장수. 포국공褒國公에 책봉되었다)ㆍ악공(鄂公 : 당 태종의 장수 울지경덕尉遲敬德을 이름이다.
악국공鄂國公으로 책봉되었다)이 아니면 무공을 이룰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면서
무사 홍달손(洪達孫)ㆍ양정(楊汀)ㆍ유수(柳洙) 등 30 여명을 추천해서 드디어 그들을 등용하였다.
《동각잡기》
세종 이후로 정치 문화가 나날이 새로워지므로 예를 만들고 악(樂)을 지어 태평시대를 장식하였으며,
문장절의(文章節義) 있는 선비가 조정에 깔렸으며, 기백 있고 세사에 구애받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낮은 벼슬에 파묻혀 있었다. 한명회는 나이가 40에 가까워도 충순위(忠順衛 : 충무위忠武衛에 속한 군대)
로 있어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이 때 여러 왕자가 다투어 손을 맞아드리는데 문인 재사는 모두
안평대군(安平大君)에게로 돌아가 당시 수양대군이었던 세조도 그보다 나을 수가 없었다.
한명회가 찾아가 뵈오매, 크게 인재 없는지라 비밀히 헌책(獻策)하기를,
“세상에 변동이 있으면 문인으로서 대우를 받음은 쓸모가 없으니, 나으리는 모름지기 무사와 결탁하여
두소서” 하였다. 세조는, “어떻게 하면 될꼬.” 하니, 한명회는, “이것은 가장 쉽습니다.” 하였다.
활쏘기 연습이란 명분으로 술과 안주를 많이 장만해서 매일 모화관(慕華館)과 훈련원으로 나가
활쏘기를 하고 나서,무사들을 먹이면 다 사귀실 수 있습니다.” 하였다.
세조는 한명회의 그 꾀를 써서 수일 내로 무사들을 두루 사귀어서 드디어 내란을 평정하였다.
○ 임신년 겨울 10월에 사신을 보내어 명 나라에서 고서(誥書)와 면류관 하사한 것에 대해 사례하려고
의논하니, 수양대군이 스스로 가려 하였다. 임금은 잠잠히 있다가 조금 뒤에 부마(駙馬)로 사신을 삼아
차비하여 보내고자 하였으나, 여러 사람의 의논이 그럴 수 없다 하므로 그만두었다.
권람이 대군에게 가만히 말하기를, “대사가 깨뜨려질까 염려스럽습니다.” 하니,
대군은, “안평은 나의 적수가 아니요, 황보인과 김종서도 영걸이 아니다.
황보석(皇甫錫) 인의 아들과 김승규(金承珪, 김종서金宗瑞의 아들)를 거느리고 가면,
저들은 감히 움직이지 못하리라.” 하고, 드디어 공조 판서 이사철(李思哲)을 부사(副使)로 삼고
집현 교리(集賢校理) 신숙주(申叔舟)를 종사(從事)로 삼아서 명 나라에 갔다.
다음해 2월에 대군이 돌아와서 종관(從官)에게 다 추은가자(推恩加資)하고자 하니,
대간이 그것을 따라갔던 사람에게다 계급을 올려주려는 것을 거부하였다. 《야언별집(野言別集)》
○ 제조가 한명회ㆍ권람 등과 더불어, 10월 10일에 거사하기를 약속하였더니 일이 상당히 누설되어
어떤 사람들이 걱정하므로 세조는, “설사 계획이 누설되더라도 저편에 모의하는 자가 9인도 못 된다.
그 중 김종서가 가장 교활하니 먼저 이 사람만 죽이면 나머지 적은 없애기가 쉽다.” 하면서
10일 이른 아침에 강곤(康袞)ㆍ홍윤성(洪允成)ㆍ임자번(林自蕃)ㆍ최윤(崔潤)ㆍ안경손(安慶孫)ㆍ
홍순로(洪純老)ㆍ홍귀동(洪貴童)ㆍ민발(閔發)ㆍ곽연성(郭連城) 등을
세조의 집 후원(혹은 운성위雲城尉의집이라 한다)에 모아놓고 활을 쏘며, 주석을 베풀고 거사를 의논했다.
홍달손(洪達孫)은 순라(巡邏)를 감시하려고 먼저 나갔고,
송석손(宋碩孫)ㆍ민발 등은 모두 먼저 임금께 아뢰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의논이 분분하자,
더러는 북문으로 빠져나가므로 한명회가 말하기를,
“길 옆에서 집을 지으면 삼 년이 되어도 집을 못 짓는 법이니, 대군은 스스로 결단을 내리시오.”라 하고,
홍윤성은 말하기를, “용병(用兵)하는 데는 주저하는 것을 가장 꺼립니다.” 하였다.
송석손 등이 세조의 옷자락을 잡고 말리니 세조가 노해서,
“너희들은 모두 가서 고발하라.” 하고 드디어 활을 집어들고 일어나 그 말리는 자를 발로 차면서,
“나는 너를 강제로 잡지 아니한다. 따르지 않을 자는 가라. 장부가 죽으면 사직을 위해 죽어야 한다.
나는 혼자 가겠다, 만약 어리석은 고집으로 기회를 그르치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먼저 죽이리라.” 하고
드디어 나서서 중문에 이르니 정희왕후(貞熹王后)가 갑옷을 들어 입혔다.
그리고 갑옷을 속에 입고 가동(家僮) 임운(林芸)을 데리고 갔다.
한명회는 “왕자가 홀로 가니 후원이 없을 수 없다.” 하면서
권언(權偃)ㆍ권람(權擥)ㆍ한서귀(韓瑞龜)ㆍ한명진(韓明溍) 등을 시켜 돈의문(敦義門) 성 위에 복병케 하고 [《동각잡기(東閣雜記)》에는 세조가 어둠을 타고 김종서 집에 가면서 “한명회 등으로 하여금
돈의문을 지키되 비록 마지막 종소리가 나더라도 문을 닫지 말고 기다리라.” 고 일렀다고 했다.]
또, 양정(楊汀)ㆍ홍순손(洪順孫)ㆍ유수(柳洙)에게 일러서 평복을 입고 대군을 따르게 하였다.
세조가 성문 김종서 집이 문 밖에 있었다 밖에 나서니,
말 탄 군사 여남은 명이 길가에 섰다가 세조를 보더니 모두 흩어져 갔다.
종서의 집에 이르니 김종서의 아들 승규(承珪)가 신사면(辛思勉)ㆍ윤광은(尹匡殷)과 더불어
문 앞에 앉았으므로 세조는 승규를 시켜 김종서에게 통하니, 조금 뒤에 김종서가 나오기는 했으나
물러서서 앞으로 다가서지 아니하고 세조가 들어오기를 청했다.
세조는 해가 저물고, 성문이 닫힐 것을 이유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만,
“종부시(宗簿寺 :
왕실의 계보系譜를 찬록撰錄하고, 왕족의 허물을 살피는 관아)에서영응부인(永膺夫人)의 일을 탄핵하였으니 정승은 모름지기 지휘해 주셔야겠소”
이 때에 부인 송씨(宋氏)가 동래온정(東萊溫井)에 가서 목욕했는데 대간이 그 그릇됨을 지적했으므로
세조는 이것으로써 말했다고 하였다.
세조가 짐짓 사모 뿔을 떨어뜨리니 김종서는 급히 자기의 것을 뽑아 드렸다.
[《동각잡기(東閣雜記)》에 김승규가 좌우를 떠나지 아니하는데, 세조는 사모 뿔이 빠졌으므로,
정승의 사모 뿔을 빌려 달라고 청해서 김종서가 김승규로 하여금 안으로 들어가 사모 뿔을 가져오게
했을 때, 정(汀)ㆍ운(芸) 등이 종서를 쳤다고 했다.]
이때에 사면(思勉)ㆍ광은(匡殷)이 굳이 지키고 물러가지 아니하니 세조는,
“비밀히 논할 것이 있으니 너희들은 그만 물러가라.”고 일렀으나
사면 등은 그래도 멀리 피하지 아니하였다. 세조는 또, “청촉하는 편지가 있다.”고 하였다.
종서가 그것을 달빛에 비춰보는데, 세조는 임운(林芸)을 재촉하여 김종서를 철퇴로 쳐서 땅바닥에
쓰러뜨리니 김승규가 놀라서 쓰러진 아버지 위에 엎드리매 양정이 칼을 뽑아 찔렀다.
세조는 곧 양정을 시켜 말고삐를 잡고 돌아왔다.
이때에 한명회ㆍ권람 등은 세조의 집에서 무사를 사열하였다.
한명회가 돌다리 가에 나와 기다리다가 말 탄 사람이 달려오기에 쳐다보니 세조가 웃으면서,
“이미 적을 죽였노라.” 하였다.
세조가 순청(巡廳)에 이르니 이미 달손에게 명하여 순라군(巡邏軍)을 모아두었으니
달손으로 하여금 그 순라군을 이끌고 뒤를 둘러싸게 하고 시재소(時在所)로 나아가
[《동각잡기》에 “이때에 노산군(魯山君)이 향교동(鄕校洞) 영양위(寧陽尉) 정종(鄭悰)의 집에 나와
있었는데 세조는 대문 틈으로 정원에 얘기하여 ‘김종서가 반역을 꾀하여 일이 급하므로 주달 못하고
이미 죽였으니 임금께 친계(親啓)하겠다’고 했다.”고 함]
내금위(內禁衛) 봉석주(奉石柱)로 하여금 군사들을 뜰 가운데 배열시켜 사람들이 함부로 나들지 못하게
한 다음 입직승지(入直承旨) 최항(崔恒)을 불러 손을 잡고 김종서죽인 연유를 말하고,
또한 황보인ㆍ김종서ㆍ이양(李穰)ㆍ민신(閔伸)ㆍ조극관(趙克寬)ㆍ윤처공(尹處恭)ㆍ이명민(李命敏)ㆍ
원구(元矩)ㆍ조번(趙蕃) 등이 함길도 절제사 이징옥(李澄玉)ㆍ종성 부사 이경유(李耕㽥)ㆍ평안도 관찰사 조수량(趙遂良)ㆍ충청도 관찰사 안완경(安完慶)과 연결하여 임금이 어린 틈을 타서 사직을 도모하려 하며,
김연(金衍)ㆍ한숭(韓崧) 모두 내시 이 또한 임금의 곁에 붙어 있으므로 적의 괴수는 이미 제거하였지만
그 나머지 당도 이제 위에 아뢰어서 토벌하겠다.” 하였다.
《해동야언(海東野言)》 《동각잡기(東閣雜記)》
○ 때에, 승지 최항(崔恒)이 문을 열고 나와서 맞이하므로 세조는 그와 손을 잡고 같이 들어갔다.
임금이 놀라 일어나며 “숙부는 나를 살려 주시오.” 하니 세조가 말하기를,
“이는 어렵지 않습니다.” 하고는 곧, 명패[命牌
: 윗쪽에 ‘명命’ 자를 쓰고, 붉은 칠을 한 나무패.임금의 명(命)으로 삼품 이상의 벼슬아치를 부를 때 이 패에 성명을 써서 돌렸다. 이 패를 받고 올 뜻이
있으면 ‘진(進)’ 아니 올 때는 ‘부진(不進)’이라 써서 도로 바치었다.]를 내어서 여러 재신(宰臣)을 불렀다.
군사를 세 겹으로 짜 세워서 세 겹 문을 만들고 한명회는 생살부를 가지고 문의 안쪽에 앉았다.
여러 재신이 부름을 받아 들어오는데 첫째 문에 들어오면 따르는 하인들을 떼고,
둘째 문에 들어오면 그 이름이 생살부에 실렸으면 홍윤성(洪允成)ㆍ유수(柳洙)ㆍ구치관(具致寬) 등이
쇠몽둥이를 들고 때려죽이니, 황보인(皇甫仁)ㆍ조극관ㆍ이양 등 죽은 이가 너무나 많았다.
사람을 보내서 윤처공 등을 죽이고, 민신을 현릉 비석소(顯陵碑石所)에서 죽였다.
이때에 황보인은 부름을 받고서 초헌(軺軒)을 타고 오는데 종묘 앞을 지나도 내리지 아니하면서,
“끝이다. 끝이다.”고 중얼거리면서 사인(舍人) 이례장(李禮長)의 손을 잡고 뒷일을 부탁하였다.
○ 김종서는 숨이 거의 끊어졌다가 다시 살아나서 원구를 시켜 성문지기를 큰 소리로 불러 정부에 가서,
“정승이 밤새 남에게 맞아서 죽게 되었으니 빨리 임금께 아뢰어 약을 가지고 와서, 구제하도록 고하라.”
고 하였으나 대꾸하는 이가 없었다. 김종서는 상처를 싸매고 부인의 가마를 타고
숭례(崇禮)ㆍ소덕(昭德)ㆍ돈의(敦義) 등의 문을 한 바퀴 돌았으나
이때는 한명회가 심복 장사를 풀어서 각 문을 지켰기 때문에 문이 닫혀서 들어가지 못하였다.
또한 세조는 김종서가 다시 살아날까 염려해서 새벽에 이흥상(李興商)을 보내어 살피게 하니
김종서가 김승규의 방안[혹은 아들 승벽(承璧)의 처가라고 했다.]에 숨었으므로 끌어내었다.
김종서는 “내가 어찌 걸어가느냐. 초헌(軺軒)을 불러오너라.”고 하였으나, 말도 마치기 전에 베어 죽였다.
○ 정분(鄭苯)을 낙안(樂安)에, 지정(池淨)을 영암(靈岩)에, 조수량(趙遂良)을 고성(固城)에,
이석정(李石貞)을 연일(延日)에, 안완경(安完慶)을 양산에 귀양보내고,
유중문(柳仲門)을 거제(巨濟)에 안치
하였다가 얼마 후에 사사(賜死)하고,사람을 보내 이현로(李賢老)를 죽이고, 아울러 재산을 적몰(籍沒)하고 처자를 연좌시켰다.
《황토기사(黃兎記事)》
정분은 이때에 전라ㆍ경상도 도체찰사(都體察使)로서 충주(忠州)까지 돌아와서 귀양의 명을 받았다.
이현로는 앞서 벼슬을 그만 두고 호남에 있었더니, 이때에 이르러 정분과 같이 돌아오다가
중도에서 죽음을 당하였다.
《황토기사(黃兎記事)》
○ 이 날 갑오일 전교에, “간신 황보인ㆍ김종서 등이 안평대군 용(瑢)과 결탁하여 널리 당파들을 심어
나누어 중앙과 지방에 웅거하고 비밀히 용사를 기르고 변방 고을의 병기를 싣고 와서 반역을 도모하였다.
이들 간당들은 이미 모두 처형되었지만 지친(至親)만은 차마 법에 부칠 수 없으니 외지에 안치하라.”
고 하였다. 《야언별집(野言別集)》
이때에 정인지(鄭麟趾)는 권람(權擥)에게 집필케 하여, 이계전(李季甸)ㆍ최항(崔恒)과 더불어
교서의 초안을 쓰니, 날이 차고 밤이 깊었다. 임금은 엄자치(嚴自治)를 시켜 궁중의 술을 하사하였다.
○ 금부도사 신선경(愼先庚)을 보내어,
용(瑢)을 강화(江華)로 압송하고 아울러 그 아들 우직(友直)을 귀양보냈다.
이때에 의논하는 자가, “안평이 다른 뜻이 있어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지었고,
또 담담정(淡淡亭)에서 김종서 등과의 상종이 많았다.” 하여 이것으로써 죄목을 삼았다고 한다.
안평은 귀양갈 때 울면서 말하기를, “좌상이 이 일을 아는지, 미안하여 무슨 말을 하리” 하니,
아마 그가 죽은 줄을 모르고 자기를 건져줄까 바랐던 것이다.
○ 다음 날, 을미에 양사(兩司)는,
“용(瑢)은 수악(首惡)으로서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원수라 어찌 같이 한 나라에 살겠습니까.
죄를 따져서 죽이기를 청합니다.” 하였으나 전교에 “허락하지 아니한다.” 하였다.
그때 조정이 용을 죽이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은 오래도록 따르지 아니하였다.
임금은 정인지 등을 경회루(慶會樓) 밑으로 불러 보고 한 나절을 의논하다가 헤어졌다.
이어 정인지는 이계전(李季甸)을 보내어 세조에게 말을 드리고 같이 다시 아뢰자고 청하니
세조는 굳이 사양하여 “나의 생각하는 바는 이미 임금 앞에서 모두 말하였다.
그러나 나의 진술한 바는 사사 정의요,여러 정승이 진술하는 바는 공론이다.
나는 공론을 저지하자는 것이 아니라 임금의 재가를 기다리는 것뿐이다.”고 하니,
이에 정인지 등이 임금에게 대의로써 재가하기를 청하였다.
○ 좌의정 정인지 등이 백관을 거느리고, “위에서는 이미 신들을 인견하실 것을 허락하시었으니
신들은 다시 용을 죄 주기를 청합니다. 속히 결단하소서.” 하고 아뢰니
전교에, “그러면 부득이 처하는 대로 따르겠다.” 하고
신축에 금부진무(禁府鎭撫) 이백순(李伯淳)을 보내어 용을 사사하고, 우직을 진도로 옮겼다.
용은 성녕대군(誠寧大君)의 양자인데 성녕의 부인 성씨와 간통하였다고 죄목 중에 첨부해 썼다.
《야언별집》
계룡산(鷄龍山) 동학사(東鶴寺)는 곧 조종조(祖宗朝)에서 원통하게 죽은 사람을 위하여
공양드리는 시설이었으므로 절에 《초혼적기(招魂籍記)》가 있다.
윗머리에 단종(端宗)의 이름을 쓰고 다음에 용(瑢)ㆍ유(瑜)ㆍ우직(友直)ㆍ정종(鄭悰)을 쓰고
그 아래 황보인 이하 계유년 난에 죽은 사람을 쓰고 또 그 아래 병자년 옥에 갇혀 죽은 사람을 쓰고
또 그 아래 금성(錦城)의 옥에 갇혀 죽은 사람을 썼다.
황보인(皇甫仁) 석(錫)ㆍ흠(欽)ㆍ간나니(加耳)ㆍ경근(京斤) 등 4인ㆍ
김종서(金宗瑞) 승벽(承璧)ㆍ석대(石臺)ㆍ대대(大臺)ㆍ승규(承珪)ㆍ조동(祖同)ㆍ만동(萬同) 등 6인ㆍ
이양(李穰) 승윤(承胤)ㆍ계조(繼祖)ㆍ소조(紹祖)장군(將軍)ㆍ승효(承孝) 등 5인ㆍ
민신(閔伸) 보창(甫昌)ㆍ보해(甫諧)ㆍ보석(甫釋)ㆍ석이(石伊) 등 4인ㆍ
조극관(趙克寬)ㆍ윤처공(尹處恭) 경(涇)ㆍ위(渭)ㆍ탁(濁)ㆍ개똥(㖋同)ㆍ효동(孝同) 등 6인ㆍ
이명민(李命敏) 건금(乾金)ㆍ건옥(乾玉)ㆍ건철(乾鐵) 등 3인ㆍ
이경유(李耕㽥) 물금(勿金) 수동(秀同)ㆍ원구(元矩)ㆍ조번(趙蕃) 향동(香同) 귀동(貴同)ㆍ김연(金衍) 대정(大丁)ㆍ한숭(韓崧) 내관(內官)ㆍ조수량(趙遂良)ㆍ안완경(安完慶)ㆍ정분(鄭苯)ㆍ이석정(李石貞) 지정(池淨)ㆍ용(瑢)ㆍ友直(우직) 이상은 《성삼문 유집(成三問遺集)》에 보인다.
○ 이현로(李賢老)ㆍ이징옥(李澄玉) 자원(滋源)ㆍ철동(鐵同)ㆍ윤원(潤源)ㆍ성동(成同)ㆍ지신화(池信和)ㆍ하석(河碩)ㆍ허후(許詡)ㆍ이보인(李保仁) 해(諧)ㆍ심(諶)ㆍ삼문(三問)ㆍ가(佳)ㆍ영모(令謨)ㆍ이의산(李義山) 우경(友敬)ㆍ김말생(金末生) 산호(珊瑚)ㆍ김정(金晶) 개똥(㖋同)ㆍ박이녕(朴以寧) 하(夏)ㆍ이차(李差)ㆍ최노(崔老)ㆍ김상지(金尙志) 득천(得千)ㆍ복천(福千)ㆍ양옥(梁玉)ㆍ조석강(趙石崗)ㆍ황귀존(黃貴存)ㆍ안막동(安莫同) 경손(敬孫)ㆍ장손(長孫)ㆍ조완규(趙完圭) 순생(順生)ㆍ불연(佛連)ㆍ고덕칭(高德稱)ㆍ황의헌(黃義軒) 석동(石同)ㆍ식배(植培)ㆍ귀진(貴珍)ㆍ중은(仲銀)ㆍ김유덕(金有德) 금죽(金竹)ㆍ김신례(金信禮)ㆍ유세(劉世)ㆍ강막동(姜莫同)ㆍ정효전(鄭孝全) 원석(元碩)ㆍ효강(孝康)ㆍ백지(白池)ㆍ박계우(朴季愚). 《학사혼기(鶴寺魂記)》
○ 세조가 이미 김종서 등을 죽이니 그로 하여금 영의정ㆍ이조판서ㆍ병조판서의 직책을 한 묶음해서
맡기고, 내외병마도통사(內外兵馬都統使)를 겸임하여 군국 중사(軍國重事)를 다 통치하게 하고,
3군진무(三軍鎭撫) 한 사람이 군사 백 명을 이끌고 따르게 하였다.
이에 백관이 세조의 공을 주공(周公 :
주(周) 나라 무왕의 아우로서 무왕이 죽자 어린 조카, 성왕을 도와섭정하였다. 왕실의 기초를 튼튼히 하였다)에 비해서 표창하기를 임금에게 청하여
집현전으로 하여금 교서를 초안하게 하니, 여러 학사가 모두 도망쳐 갔는데
유성원(柳誠源)만 남아 있다가 협박을 받아 초안하고는 집에 돌아와 통곡하니
집 사람은 그 이유를 알지 못하였다. 《동각잡기(東閣雜記》 《추강집(秋江集)》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내린 교서의 개요는
“숙부는 효우가 천성에서 근본하고 충의(忠義)가 지성에서 나왔다.
기운은 일세를 덮고 용맹은 삼군(三軍)에 으뜸이다.
선을 하는 것이 가장 즐거우니(한 나라의 황자(皇子) 동평왕(東平王)의 말) 부귀와 성색(聲色)이
그 마음을 흔들 수 없으며,임금을 충성으로써 섬기니, 평상시나 험난할 때나 처음에서 끝까지
성(城)처럼 굳게 왕실을 보호하는 대절(大節)에 임하여 변하지 않는도다.
나는 어린 사람으로서 집안의 불행을 만났다. 용(瑢)은 지친에 처해 있으면서
임금을 무시하는 마음을 품고 나라에 재물을 뿌려서 사람들의 칭찬을 낚았다.
황보인ㆍ김종서ㆍ이양ㆍ민신ㆍ조극관ㆍ윤처공ㆍ이명민 등은 그의 일당이 되어 따르며 달라붙었다.
권력을 쥐고 우세를 부리며 사욕을 위하여 은혜를 팔았다.
대간이 뿌리 박혀 제거되지 아니하면 나는 고립돼서 어찌 하랴.
숙부는 영웅적으로 결단짓고 의용(義勇)을 분발하여 시각을 지체하지 아니하고
일시에 그들을 쓸어버렸다. 숙부가 없었던들 내 어찌 이날이 있었으리오.
이에 충성을 대우하여 장상(將相)을 겸하여 맡게 하노라.
나는 충심(忠心)을 피력하여 위임하노니 경은 고굉(股肱 : 《서경(書經)》에 임금은 원수(元首)요,
대신은 고굉(股肱)이라 했다.)의 힘을 기울여 충성을 다하라.
성색과 안색도 변치 않고 국가를 반석 위에 올려놓고 군사를 쓰지 아니하고서 생령(生靈)에게
태평의 낙을 누리게 하니 진실로 어린 임금을 맡기고 나라를 맡길 수 있는 사직의 중신이라 하겠다.
옛날 주공은 관숙(管叔)ㆍ채숙(蔡叔)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은 모두 주공(周公)의 형인데 그의 조카
성왕(成王)이 어린 틈을 타서 반란을 일으키므로 주공이 잡아 죽였다.]을 죽여서 왕가를 안정시켰더니,
지금과 옛날을 비교하니 세대는 달라도 일은 같도다.
이에 책훈(策勳)하여 정난 일등공신(靖難一等功臣)으로 삼고
분충 장의 광국 보조 정책 정난(奮忠仗義匡國補祚定策靖難)의 호를 주노라.
아아, 경은 주공의 아름다운 재주를 갖추고 또 주공의 큰 공을 겸하였으니,
나는 아직 성왕(成王)과 같은 어린 나이로서 많은 난국을 당하였으매
이미 성왕이 주공에게 맡겼던 바와 같이 숙부에게 맡기니
마땅히 주공이 성왕을 보필한 바와 같이 이 몸을 보필할지어다.” 하였다.
○ 또, 정인지(鄭麟趾)로 좌의정을 삼고 한확(韓確)으로 우의정을 삼았다.
허후(許詡)는 좌참찬이요, 정창손(鄭昌孫)은 이조 판서요, 이계전(李季甸)은 병조 판서요,
권준(權蹲)은 대사헌이요, 박중손(朴仲孫)은 병조 참판이요, 최항(崔恒)은 도승지요,
민건(閔謇)은 충청 감사요, 기건(奇虔)은 평안 감사이다.
한확 등은 세조의 인친(姻親)이었으므로 사임하였다.
○ 정인지ㆍ한확 등은 행여 간당의 멸망한 자손들이 틈을 타서 수양대군을 모해할까 염려하여
군사로 호위하기를 청하므로 진무(鎭撫) 2명이 각기 갑옷 입은 군사 및 별시위(別侍衛) 각 50명을 인솔하고
총통(銃筒)ㆍ방패(防牌)각 20자루씩 장비하여 밤낮으로 호위하게 하였다. 《야인별집》
○ 수양대군ㆍ정인지 등 36인을 녹훈하여 정난공신(靖難功臣)이라 일컬었다.
한명회(韓明澮)를 승진시켜 군기시 녹사(軍器寺錄事)로 삼았다.
성삼문(成三問)ㆍ박팽년(朴彭年)은 집현전에서 궁을 숙위하였다 하여 공신의 호를 주니
성삼문이 그것을 부끄러워해서 밥맛을 잃었으며,
공신들이 윤번으로 연회를 열었지만 성삼문은 홀로 열지 아니하였다.
○ 허후(許詡)를 거제(巨濟)에 안치시켰다가 조금 뒤에 사사하였다.
일찍이 세조가 수양대군으로 명 나라에 갈 때, 좌참찬 허후가 세조에게 말하되,
“지금 임금이 관이 빈소(殯所)에 있고 어린 임금이 나라의 정무를 맡아 대신이 따르지 않고,
백성이 의심하고 있는데, 공자는 나라의 종신이 되어 나라를 떠나서 장차 어디를 갑니까?” 하니
세조는 그 말을 따르지는 않았으나, 마음속으로는 그 말을 갸륵하게 여기었다.
이때에 와서 나라의 위난(危難)을 평정함에 있어, 허후는 전에 그 말한 덕으로 죽음을 면하였다.
세조가 영의정에 임명되니 여러 신하들이 들어와서 축하하였다.
허후를 불러들여서 자리에 앉게 하고 술을 돌리고 풍악이 시작되었다.
이때 정인지ㆍ한확 등은 손뼉을 치면서 떠들고 웃었으나,
허후는 홀로 슬픈 기색을 띠고 즐거워하지 않으며 고기를 먹지 아니하였다.
세조가 그 이유를 물으니 허후는 조부의 기일 때문이라고 핑계 댔다.
조금 후에 김종서ㆍ황보인 등의 머리를 베어 시가에 달게 하고, 그 자손들을 베어 죽이니,
허후는 “이 사람들이 무슨 큰 죄가 있기에 머리를 베어 달고, 그 처자까지 베어 죽입니까.
김종서는 나와 친하게 교제하지 않으므로 그 마음을 능히 알 수 없지만
황보인은 그 사람의 기품을 자세히 아는데 절대로 반역을 도모할 이치가 없습니다.” 하였다.
세조는, “네가 고기를 먹지 않은 뜻이 진실로 여기 있었구나.” 하니,
“그렇습니다. 조정의 원로들이 같은 날에 모두 죽었으니 허후가 산 것만도 다행이온데,
어찌 차마 고기를 먹을 수 있겠습니까.” 하며 곧 눈에 눈물이 고였다.
세조는 매우 노했으나, 그의 재주와 덕을 아껴서 죽이고 싶지는 아니하였다.
그러나, 이계전(李季甸)이 극력 주장하니 지방으로 귀양보내었다가 마침내 목을 매어 죽였다.
《추강집(秋江集)》 《명신록(名臣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