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世宗) - 사군(四郡)의 설치 / 폐사군(廢四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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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군(四郡)의 설치 / 폐지된 네 고을[廢四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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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태종 16년 병신에 갑산(甲山) 소동두(小董豆)의 서편을 끊어서 여연군(閭延郡)을 두었다가
이때 세종 6년 갑진에 이르러서 자성군(慈城郡)을 두었고
세종 18년 병진에 무창현(茂昌縣)을 두었으며 25년 계해에 우예군(虞芮郡)을 두었다.
삼국(三國) 말기에 평양(平壤) 이북은 모두 야인(野人)들이 사냥하던 곳이 되었으므로,
고려 때에 남도 백성들을 옮겨다 채워 놓고,
의주(義州)에서 양덕(陽德)까지 바로 장성(長城)을 쌓아서 봉강(封疆)을 튼튼하게 하였다.
그러나 거처를 불안하게 여겨 자주 반란을 일으켜 나라에서 군사를 동원하여 토벌하기에 이르렀으나,
의주의 토호(土豪) 장씨(張氏)는 조정의 명을 따르지 않았다.
태조(太祖)가 천명(天命)을 받자 성교(聲敎)가 멀리 퍼져 서북에 사는 백성들이 생업을 편안하게 여겨,
밭과 들이 날로 개척되고 인구가 날로 번성하였다.
의주 사람 장사길(張思吉)이 태조의 휘하(麾下)에 예속되기를 원하여
개국공신(開國功臣)의 반열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 뒤부터는 장씨(張氏)들이 다시 배반하는 일이 없었다.
의주에서부터 여연(閭延)까지 강을 낀 천 리 땅에 읍을 세우고 수령(守令)을 두었는데,
압록강을 경계로 삼았다. <폐사군 고사(廢四郡故事)>
○ 태종 16년 병신(1416)에 갑산(甲山)의 여연촌(閭延村)은 군과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소훈두(小薰豆) 서쪽을 떼어 여연군(閭延郡)으로 만들어 평안도에 예속시켰다. 《동국여지승람》
○ 여연에서 동쪽으로 무창(茂昌) 다락구비(多落仇非)까지가 45리요,
남쪽으로 자성(慈城) 신로현(新路峴)까지가 1백 5리요,
서쪽으로 우예(虞芮) 하무로(下無路) 북쪽까지가 65리요, 북쪽으로 압록강까지가 4리이다.
○ 세종 17년(1435)에 도호부(都護府)로 올렸고, 이에 진(鎭)을 설치하여 첨절제사(僉節制使)로 삼았다.
○ 세종 18년 병진에 여연부(閭延府) 상무로보(上無路堡)에 만호(萬戶)를 두었다.
23년에 보(堡)가 여연부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성원(聲援)이 미치지 못하므로,
여연의 출흡(出哈) 손량(孫梁)과 후주(厚州)의 보산(甫山) 등지에 사는 민호(民戶)를 떼어
무창현(茂昌縣)을 설치하고, 24년에 군(郡)으로 올렸다.
○ 무창에서 동쪽으로 갑산 마□수(磨□水)까지가 1백 60리요,
남쪽으로 자성(慈城) 죽전현(竹田峴)까지가 88리요,
서쪽으로 여연 소□량(所□梁)까지가 1백 33리요, 북쪽으로 압록강까지가 2리이다.
○ 25년에 여연부 우예보(虞芮堡 : 처음에 만호를 두었다)가 부(府)와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본부(本府)의 유파(楡坡)ㆍ조명간(趙明干)ㆍ소우예(小虞芮)와 자성군(慈城郡) 태일(泰日) 등지의
민호를 떼어 우예군(虞芮郡)을 설치하고 강계(江界)의 관할로 하였다.
○ 우예에서 동쪽으로 여연 하무로(下無路)까지가 30리요,
남쪽으로 자성 잉길항(芿吉項)까지가 50리이며,
서쪽으로 강까지가 1리이고, 북쪽으로 조명간까지가 23리이다.
○ 세종 6년 갑진에 소포리(小浦里) 등 여덞 곳에 사는 백성들을
보시번강(保時番江)의 장항(獐項)에 모아 놓고 울타리를 치고 방수(防戌)하게 하였다.
14년에 파저강(婆豬江)에 있는 야인들이 사람을 죽이고 노략질하여 갔는데,
그 땅이 여연과 강계(江界)와 서로 떨어져 있어서 미처 구원하지 못하였다.
15년에 그 두 고을 안에 있는 시번(時番)의 자작리(慈作里)에 성을 쌓고
자성군(慈城郡)을 설치하고 강계의 관할로 하였다.
○ 자성에서 북쪽으로 상토보(上土堡)까지가 1백 20리이다.
이상은 모두《동국여지승람》에 있다.
○ 단종 을해년(1455) 4월에 평안도 도체찰사(平安道都體察使) 박종우(朴從愚)가 아뢰기를,
“신이 강가에 있는 여러 고을과 여러 구자(口子)를 돌아다니며 살펴보니,
우예ㆍ여연ㆍ무창은 본 고을 군사가 매우 적으므로 도절제사(都節制使)가 남도의 군사를 임시로 뽑아서
가서 수자리 서게 하니 폐단만 있고 이익은 없습니다. 마땅히 소속된 여러 보(堡)를 폐지하고,
그 군수 물자와 의창(義倉)의 곡식을 자성과 강계에 사는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가,
가을이 되면 각각 그 고을에서 받아들이게 하소서.
강계는 곧 후문(後聞)의 거진(巨鎭)이고 게다가 묵은 밭 1천여 결(結)이며,
옛날 구주(龜州)는 바로 도적이 들어오는 주요한 길목으로
성터의 동ㆍ서ㆍ북의 삼면이 험한 곳을 의지해 있으며,
성안에 샘물이 많고 또 농사지을 만한 땅 수천여 결이 있으니,
만약 다시 수령을 두고 옛터 그대로 성을 쌓고 관(關)을 설치해 놓으면,
의주(義州)ㆍ강계와 함께 솥의 발처럼 대치하여
앞뒤에서 서로 협격(挾擊)하여 적이 들어오는 길을 막아낼 것입니다.
따라서 마땅히 우예의 백성은 강계로 옮겨 살게 하고,
여연ㆍ무창의 백성은 귀주로 옮겨 살게 하며 햇수를 정하여 무역을 면제시키소서.
삭주(朔州)의 판관(判官)은 홀로 본읍(本邑)에 있고
절제사(節制使)는 겨울이면 소삭주(小朔州)에 나가 살면서 적이 들어오는 길을 끊고,
여름이면 구령구자(九嶺口子)로 옮겨 지켜 농민을 수호하게 하며,
본고을 사람은 소와 말에 실어 태령(太嶺)을 넘게 하여 공돈(供頓)을 지탱하게 하되,
차차 피폐해지면 판관은 없애고
절제사로 하여금 그대로 본 고을에 있으면서 군민(軍民)의 일을 겸해서 다스리게 하면
참으로 편리하고 이익이 될 것입니다.
소삭주는 달리 적이 들어 올 길이 없고 다만 연평현(延平峴)이 바로 적이 들어오는 길이기 때문에
이미 연대연(煙臺)를 쌓아놓고 적의 동정을 살피고 있으며,
또 창성과의 거리가 겨우 20여 리이므로 반드시 절제사가 방수(防戍)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구령구자만은 강변으로 적이 들어오는 주요한 길목이니,
만일 석보(石堡)를 쌓아놓고 만호(萬戶)를 두어서 삭주에 있는 군사를 거느리고서 방비를 엄하게 하면
소삭주에 있는 백성들은 편안히 살면서 농사에 힘쓸 수 있을 것입니다.
정녕(定寧)은 지난 갑오년에 의주의 방산(方山)으로 옮겨다 놓고,
정녕의 산리(山里)ㆍ비현(枇峴)ㆍ광화(廣化)ㆍ격음동(隔音洞)ㆍ소곶(所串)을 떼어 의주에 예속시키고,
의주의 가원(柯原)ㆍ이송동(李松洞)ㆍ방산ㆍ청수(靑水)ㆍ광평(廣坪)ㆍ도령(都領)ㆍ백여자(白呂子)
ㆍ당승(當乘)을 떼어 정녕에 예속시켰으나, 방산에는 농사지을 만한 땅이 없으므로
그 인리(人吏)와 종들이 옛날 정녕에 그대로 살면서
험한 90리 길에 양식을 싸 가지고 왔다갔다 하게 되어 끝없이 폐해를 받고 있으니,
의당 옛날 정녕에 환속시켜야 하고 서로 바꾸었던 토지는 각각 본 고을로 돌려보내야 합니다.
또 방산의 석보(石堡)는 거리가 알맞아서 응원(應援)하기가 편리하니,
의당 청수의 만호를 방산으로 옮겨 방어를 튼튼하게 해야 하며,
그 청수구자(靑水口子)에는 매년 여름이 되면 임시로 관할할 사람을 보내어 농민들을 수호하다가
겨울이 되면 방산의 성에 들어가서 지키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 도통부(都統府)ㆍ의정부ㆍ육조 판서 이상이 함께 의논하여 아뢰기를,
“평안도 강변에 있는 여러 고을과 여러 구자(口子)를 그대로 두거나 고치는 것은
모두 도체찰사(都體察使)가 아뢴 대로 시행하시되, 구주(龜州)의 사방 경계(境界)는 관찰사를 시켜
영리(令吏)를 자세히 살펴보고 정하게 하여 자상(慈詳)하고 근검한 사람을 선택하여 수령을 삼으시고,
새로 옮겨 가는 백성은 5년 동안 부역을 면제해 주며,
빌려주는 의창(義倉)의 곡식은 3년 뒤에 구주에서 받아 들이게 하고,
우예(虞芮)의 백성으로 강계(江界)로 옮겨 간 사람도 이에 준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 윤6월 세조가 선위(禪位)를 받은 뒤에
영의정 정인지(鄭麟趾)와 좌의정 한확(韓確)과 우의정 이사철(李思哲)이 의논하기를,
“여연(閭延)ㆍ무창(茂昌)ㆍ우예 세 고을 사람들로
자성(慈城)ㆍ강계(江界)에 가서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들어 주고,
그 나머지는 모두 구성(龜城)으로 옮겨 사람과 산물이 많아지면 읍을 설치하고,
적으면 삭주(朔州)에 붙였다가 사람과 산물이 많아질 때를 기다려 읍을 설치하자.” 하니,
우찬성 이계린(李季疄), 이조 판서 정창손(鄭昌孫), 우참찬 강맹경(姜孟卿)이 의논하기를
“대신이 그 이해 관계를 자세히 조사하여 이미 의논을 정해 놓고,
또 고을 사람들이 올린 말로 인하여 따라서 이랬다 저랬다 하면
작사도방(作舍道傍)에 삼년불성(三年不成)이 될 폐단이 있을까 염려된다.” 하니,
모두 전에 결정한 대로 전교를 받기를 청하였다. 이상은 <폐사군 고사(廢四郡故事)>
○ 여연ㆍ무창을 혁파하여 그곳의 백성을 구성으로 옮기고,
무예를 혁파하여 그곳의 백성을 강계로 옮기고 그 땅을 비워 모두 강계에 예속시켰다. 《여지승람》
○ 7월에 평안도 관찰사 기건(奇虔)에게 유시(諭示)하기를,
“무창ㆍ여연에 살던 백성 1천 5백여 가구를 지금 구성의 풀이 우거진 땅으로 옮겨 놓았는데,
북쪽 땅은 일찍 추워지는 곳이니 돌보아 주는 것이 적절하지 못하면
반드시 얼고 굶주림에 이를까 염려되므로, 지금 부정(副正) 김필(金㻶)을 보내어
본고을의 군수 박흥점(朴興墊)에게 아울러 사목(事目)을 주니,
경은 이 뜻을 잘 받들어서 그와 함께 한마음으로 잘 주선하여 편안히 모여 살도록 하여
한 사람도 살 곳을 잃게 하지 마라.” 하였다.
○ 8월에 호조에서 아뢰기를,
“우예에 살던 백성이 새로 강계로 옮겨 갔으나 소를 기르는 사람이 적어서 경간(耕墾)하는데 염려가 되니,
평안도와 황해도에 있는 목장의 말을 소와 바꾸어 그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고,
또 옛날부터 살던 부호(富戶)의 정전(正田)을 가려 내어 새로 옮겨 간 사람들 중에서
어려운 집부터 먼저 빌려주되, 3년을 기한으로 경작하고 나서 도로 본 주인에게 돌려 주고,
경작료는 황한지(荒閑地)를 경작한 데에 준하여 계산해 내어주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 10월에 평안도 도절제사(平安道都節制使)가 아뢰기를,
“자성(慈城)의 상봉포(上奉浦)와 하봉포(下奉浦) 두 보(堡)는 본래 남도의 군사로 방수(防戍)하였는데,
지금 병조의 관문(關文)을 보면 남도의 군사를 제쳐 놓고 본 고을 군사로 방수하라고 합니다.
신이 직접 두 보(堡)를 자세히 조사해 보니, 바로 적군이 들어오는 요충지인데도
당시에 다만 목책(木柵)만 설치해 놓고 성보(城堡)는 없으며
더구나 본 고을의 군사가 본래 적어서 나누어 지킬 수 없으니, 남도의 군사가 옛날대로 방수하게 하소서.
또 자성 경계 안에 허공교구자(虛空橋口子)ㆍ지령귀구자(池寧貴口子)ㆍ지령귀 동원리보(池寧貴洞源里堡)로 말하면 방수할 곳이 많은데, 본군(本軍)의 무기와 식량이 있는 곳도 지킬 만한 군사가 없으니
참으로 안 될 일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허공교구자는 읍성과 멀지 않으니,
관할 하의 군인과 백성들을 모두 읍성으로 옮겨 들이고,
금창(金昌)ㆍ혼야(昏夜) 두 고을의 예(例)에 의거하여 다만 연대(煙臺)만 설치하여 망을 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병조에 명하여 의정부와 같이 의논하라고 하였다.
의논하기를, “허공은 적의 들어 오는 길 직전에 있으니,
단지 연대를 쌓고 망 보는 것만은 참으로 옳지 않으니,
군사 중에 맡길 만한 사람을 뽑아서 권관(權管)으로 차임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방수(防戍)하게 하고,
자성군(慈城郡)의 일은 본 고을에 맡겨 지키게 하되 고을 경계 안에 있는 여러 곳의 군사가 부족한 만큼,
도절제사가 전에 있던 지령귀 이상을 방수하던 남도의 당번(當番) 군사중에서 뽑아
본 고을 군사와 함께 방수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 평안도 경차관(敬差官) 양성지(梁誠之)가 여연ㆍ무창ㆍ우예의 세 고을의 지도에
물감으로 주요한 곳을 표시하여 올리고, 또 도내의 편의(便宜)한 사건을 조목조목 들어서 아뢰기를,
“첫째는 지금 강변에 있는 세 고을을 없애어 자성(慈城) 한 고을이 홀로 적이 들어오는 길을 막고 있으니,
만일 야인(野人)들이 무창의 죽전현(竹田峴)으로부터 상봉포(上奉浦)에 이르고,
두가을헌현(豆加乙獻峴)으로부터 하봉포에 이르며,
여연의 신로현(新路峴)으로부터 금창동(金昌洞)에 이르며,
우예의 신로동으로부터 혼야동(昏夜洞)에 이르고, 소보리(小甫里)로부터 허공교(虛空橋)에 이르게 되면,
자성에 있는 백성들이 어찌 위태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상봉포ㆍ하봉포와 금창동ㆍ혼야동에는 새로 목책을 설치하였으나,
모두 권관(權管)이 가서 방수(防戍)하고 있어서 수어(守禦)하는 것이 허술하니,
허공교ㆍ금창동ㆍ상봉포 등에는 우선 만호(萬戶)를 두어서 변방의 방비를 튼튼히 해야 할 것입니다.
신이 허공교를 살펴보니, 동쪽 산비탈에 행성(行城)을 잇대어 제방처럼 쌓아서
보통 때에는 성 위를 다니며 우예와 통하고,
전쟁이 있으면 행성을 굳게 지켜서 적이 들어오는 길을 막아야 할 터인데,
지금 우예를 철폐한 만큼 허공교가 바로 적의 들어오는 길목이 되었으니, 행성을 수십 보만 무너뜨리면
비록 관문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 없어도 적이 자연히 날아서 넘어오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 5년 을묘 정월에 평안도 도체찰사가 아뢰기를,
“자성군은 사람과 산물이 적은데도 읍성과 지령귀ㆍ허공교 세 곳을 나누어 지켜야 하는데,
전염병이 돌아 매양 들어가 지킬 때를 당하면 서로 전염이 되어 목숨을 많이 잃게 됩니다.
강계 땅에는 상토(上土)에서 와동(瓦洞)ㆍ만포(滿浦)까지 밭이 묵은 것이 많으니,
땅은 넓은데 사람은 적습니다. 자성을 혁파하고 그곳 백성을 상토ㆍ만포ㆍ와동으로 옮기고,
그 전에 이곳으로 옮겨 온 사람은 구성진(龜城鎭)으로 옮겨 두시되
모두 새로 옮기는 예(例)대로 요역(徭役)을 면제하고 조세를 면제해 주소서.” 하였다.
이상은 <폐사군 고사(廢四郡故事)>.
○ 자성군을 혁파하여 그 백성을 강계로 옮기고 그 땅을 비워서 강계에 붙였다. 《여지승람》
○ 그때의 의논이, 자성군을 혁파하고 그 원래 거주하는 사람은 강계로 붙이고,
모집해 옮긴 사람은 구성으로 붙이자고 하였다.
관찰사 원효연(元孝然)이 아뢰어 가을이 되기를 기다려 옮기기를 청하였다.
가을에 이르러서는 강계부사 홍흥조(洪興祚)가 또 풍년이 들면 옮기자고 청하였다.
백성들이 처음 가을에 가서 옮긴다는 의논을 듣고
모두 미리 옮겨 갈 준비를 하느라고 농사짓는데 힘쓰지 않고 있다가, 풍년이 들면 옮긴다는 말을 듣고는
서로서로 알리며 노인은 부축하고 어린이들은 끌고 나서 이리저리 떠돌게 되었다.
관찰사 조효문(曺孝門)이 아뢰기를, “인심이 벌써 동요하여 막아 낼 수 없는 사세이니,
만일 시일을 끌다가는 거의 다 도망가고 흩어질 것이므로 창고와 군기도 맡겨 둘 곳이 없게 될 것입니다.”
하니, 이에 편의에 따라 의창(義倉)의 곡식을 내어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고,
또 곡식ㆍ기물(器物)ㆍ무기를 가지고 강계(江界)와 이산(理山) 등의 고을로 나누어 운반하여
백성들에게 모두 반드시 옮긴다는 것을 알게 하여 안심시켜 놓고,
이어 위에 보고하지 않고 스스로 제멋대로 독단한 죄를 아뢰었다.
○ 10월에 임금이 당상관 이상에게 명하여 의논하게 하고, 유서(諭書)로 답하기를,
“이미 경에게 위임하여 처리하게 하였고 일을 먼저 행하고 뒤에 아뢴 것은
사세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니 내가 나무라지 않는다.
경은 마땅히 더욱더 마음을 다해 어루만져 돌보아
적자(赤子)들로 하여금 굶주려서 뿔뿔이 흩어지게 하지 말라.
또 혹 도망하여 동팔참(東八站) 땅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있을까 염려되니,
경은 강을 끼고 있는 여러 고을에 명령하여 길목을 엄하게 지켜 도망하여 넘어가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 경진년 2월에 병조에서 아뢰기를,
“평안도 강변에는 실로 적이 들어오는 길이 많아서
이산(理山)ㆍ벽동(碧潼)ㆍ창성(昌城) 등 여러 고을에 비록 진(鎭)을 설치하였으나
모두 내지(內地)에 있는 다른 고을에 붙여놓았으니 혹시 별안간 일어나는 일이 있으면
소속한 여러 고을에서 미처 응원할 수 없는 것은 필연적인 사실입니다.
벽동ㆍ창성ㆍ이산으로써 독립된 진(鎭)을 만들고,
내지의 여러 고을 사람으로 진군(鎭軍)을 정하여 윤번제로 방수(防戍)하게 하소서.
또 지금은 이미 자성 이상의 여러 고을을 혁파했기 때문에
강계의 상토(上土)와 합배(合排)가 실제로 도적이 들어오는 요지의 땅이 되었으니,
구자만호(口子萬戶)를 설치하고 남도 군사를 뽑아 방어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이상은 <폐사군 고사(廢四郡故事)>.
자성ㆍ여연ㆍ무창ㆍ우예 등의 고을이 강계 서북쪽에 있어서 오랑캐 땅과 바싹 붙어 있으므로
세조(世祖) 때 의논하여, 그 땅을 버려서 비우고 그 창고의 곡식을 강계로 옮겨 둔 것이
지금도 아직 수만 섬인데, 묵고 썩어서 먹을 수 없게 되었다.
중종 때에 야인(野人)들이 여연ㆍ무창에 와서 사는 것을 군사를 동원하여 몰아내도록 명하고,
또 평안도 군사를 시켜 해마다 곡식을 베어 침범하여 점거하는 근심을 끊어버리게 하였는데,
지금 누루하치의 기세가 날로 성하여 점점 가까운 지경으로 나와도 틈이 생길까봐 두려워서
감히 힐문하지도 못하니 어찌 몹시 근심되는 일이 아니냐. 《지봉유설》
○ 중종 계미년(1523)에 서북 평안도ㆍ함경도의 절도사(節度使)에게 명령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여연ㆍ무창에 와서 사는 야인(野人)들을 몰아내게 하였다. 《고사촬요》
○ 명종 갑자년(1564)에 명 나라의 역적이 우리 변경을 점령하고 거주하니,
황제가 우리나라에 명하여 치라고 하였다.
조정의 의논이 모두 장필무(張弼武)가 아니면 그 일을 처리할 사람이 없다고 하므로,
장필무가 그때 만포 첨사(滿浦僉使)로 있는 것을 정서대장(征西大將)으로 삼았다.
장필무가 곧 맹사(猛士) 1백여 명을 거느리고 적의 소굴로 깊이 들어가서 복병을 설치하여 쳐부수어
수백 명을 사로잡아 명 나라에 보내니, 황제의 명으로 은(銀) 3근을 녹여 장필무의 성명을 새겨서 보냈다.
《명신록》
○ 서해평(西海坪)은 본래 우리나라 땅이지만 너무 멀어서 지킬 수 없는데, 오랑캐들이 와서 사는 것이
점점 늘어날까 염려되기 때문에 때로 군사를 거느리고 �아내다가 듣지 않으면 쳐버리곤 하였다.
토지가 기름져서 채소와 곡식이 잘 됨으로 오랑캐들이 죽기를 무릅쓰고 와서 살아
몰아내도 다시 돌아오므로, 마침내 능히 근절시킬 수 없었다.
강계로부터 쳐들어오는 길이 몹시 좁아서 겨우 한 발을 옮겨 놓을 수 있었는데,
위에는 절벽이 있고 아래는 깊은 내가 있어 ‘허공교(虛空橋)’ 옛날 자성(慈城) 땅이다. 라고 이름하였다.
명종 을축년에 절도사 김덕룡(金德龍)이 우후(虞侯) 봉흔(奉昕) 등을 보내어
들어가 오랑캐(胡人)가 있고 없는지를 엿보게 하여 기회를 타서 쫓아가 잡으려고 하였는데,
오랑캐가 미리 깨달아 허공교에서 지키고 있다가 돌을 내던지며 소리를 지르자,
우리 군사가 놀라 흩어져 나라의 위신을 몹시 손상시키니, 김덕룡은 죄를 얻어 파직되었다.
조정에서 그 치욕을 갚으려고 김수문(金秀文)을 절도사로 삼았다.
김수문은 노련한 장수로 위엄과 명망이 있었는데, 적을 없애버리기로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선조 무진년(1568) 5월에 여러 장수를 나누어 가만히 군사를 거느리고 밤중에 가서
오랑캐를 불시에 엄습하려고 날이 밝기 전에 서해평(西海坪)에 이르러
장차 사면을 포위해 공격해서 한꺼번에 죽여버리려고 하였는데,
마침 위장(衛將)인 강계 부사(江界府使) 장필무(張弼武)가 성질이 급하여 미처 에워싸기도 전에
별안간 호각을 불어 군사가 진격하니, 오랑캐가 알아차리고 큰소리로 “고려의 도적이 왔다.”고 외치며
장정들은 어둠을 틈타 많이 도망쳤다. 우리 군사가 그 촌락을 다 불지르니,
늙은이와 어린아이와 여자가 모두 죽었다. 김수문이 크게 기뻐서 이긴 것을 아뢰니,
임금이 그 공을 가상히 여겨 김수문을 정헌(正憲)으로 승진시켰다.
뒤에 김수문은, 장정 오랑캐는 모두 도망쳤다는 말을 듣고 부끄럽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여
등창이 나서 죽었다. 《석담일기(石潭日記)》
○ 그때에 장필무와 전 부사 공사검(孔士儉)이 같이 토벌하여 적의 소굴을 뒤집어 엎었다.
임금이 장차 중한 상을 더 주려 하니, 대신들이 아뢰기를,
“장(張)ㆍ공(孔) 두 사람은 벌써 당상관에 올랐으니, 만일 가선(嘉善)을 더하면 벼슬이 너무 중하게 되므로,
안마(鞍馬)만 내리는 것이 옳습니다.” 하자, 임금이 따랐다. 《명신록》
○ 선조 임신년(1572) 8월에 평안도 절도사 이대신(李大伸)이 우후 이붕(李鵬)을 시켜
오위군(五衛軍)을 거느리고 해서평에 가서 곡식을 베고 집들을 불사르고 돌아오는데,
우리 군사 중에 오랑캐의 화살에 맞은 사람이 놀라서 소리지르니, 온 군사가 모두 놀라
오랑캐의 군사가 많고 적은 것을 알지 못한 채 모두 무기를 버리고 어지럽게 달아났다.
이붕이 이미 앞길까지 왔다가 그 소식을 듣고 허겁지겁 돌아와 후군을 검열하는데,
후위장(後衛將)인 강계 부사 이선원(李善源)이 말을 달려 오다가 말이 넘어지면서 떨어지니,
우리 군사가 더욱 놀라 거의 대패할 뻔하였다. 그런데 호병(胡兵)을 자세히 살펴보니,
실로 아주 적어서 10여 명에 불과하므로 여러 사람의 마음이 차차 안정되었다.
우리 군사가 오랑캐에게 활을 쏘니, 오랑캐가 화살에 맞아 도망가 숨었다.
이붕이 군사를 거두어 동위(東衛)에 달려 이르니 날이 이미 어두웠으므로,
이붕이 군중에 명령을 내려 진을 치고 노숙(露宿)하다가 날이 새거든 돌아가자 하니,
이선원은 굳이 밤에 가려고 하여 두 사람이 서로 다투었다.
온 군사들이 어느 말을 좇아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어떤 사람은 가고 어떤 사람은 그대로 있는데,
한 사람이 큰소리로 “이선원을 베야 한다.”고 하니, 이붕이 이선원을 잡아서 장차 베려고 하자,
명령을 좇아 군사를 주둔시키고 이튿날 돌아왔다. 서울에서 군사가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대신ㆍ이붕ㆍ이선원 등을 잡아서 국문하고, 모두 그 벼슬을 빼앗아 병사로 만들었다. 《석담일기》
○ 광해 기유년(1609)에 인삼(人蔘) 캐는 중국 사람 40여 명이 몰래 전자동(田子洞) 지방에 들어온 것을,
행주권관(行走權管) 홍인성(洪仁成)이 군사를 거느리고 쫓아가 잡으려다 중국 사람에게 매맞아 죽고,
군사들도 매맞아 부상을 입으니, 진강(鎭江)에 자문(咨文)을 보내어 강금(江禁)을 철저히 하여
변방에 폐단이 생기는 근심을 없애라고 거듭 밝혔다.
○ 숙종 때에 병조 판서 남구만(南九萬)이 폐사군(廢四郡)에 사진(四鎭)을 설치하기를 청하여
이미 변방을 지킬 장수를 뽑아 놓았는데, 대신(大臣)이 간하고 유상운(柳尙運)이 그 불편한 점을 아뢰기를,
“이 땅은 비스듬히 수백 리를 뻗어 나무가 우거지고 길이 막혀 있으니, 지금 만약 진을 설치한다면
마땅히 나무를 베고 길을 닦아야 할 것인데, 이는 도리어 적이 들어오는 길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또 토지가 개간되면 인삼과 돈피[貂皮]를 생산하는 길이 끊어져서
반드시 국경을 침범하고 넘어가는 근심이 많을 것이옵고,
겹겹의 봉우리와 첩첩한 산이 사면으로 막혀서 뚫린 곳이 없으므로
봉화대(烽火臺)를 설치하려 해도 설치할 길이 없으니, 이것이 모두 불편한 단서입니다.” 하니,
남구만이 아뢰기를, “북로의 돈피와 인삼은 삼수와 갑산에서 나는데,
삼수와 갑산에 읍을 설치한 지가 벌써 수백 년에 이르렀으나 그 이익이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지금 비록 사군을 설치한다 하나 어찌 하루 아침에 이익이 끊어지기에 이르겠습니까.
강변에 왕래하는 길이 한둘이 아니온데, 적이 오기를 어찌 반드시 사군을 경유하겠습니까.” 하자,
우의정 김석주(金錫冑)가 먼저 두 첨사(僉使)를 설치하였다가 형세를 보아서 더 설치하기를 청하니,
드디어 무창ㆍ자성 두 진을 설치하라고 명하였다. 《국조보감(國朝寶鑑)》
○ 후주(厚州)는 토지가 평탄하고 넓고 기름져서 온갖 곡식이 모두 잘 되므로 폐하기는 아깝고,
또 강계에 있는 폐사군(廢四郡)의 파수(把守)와 개울 하나를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으니,
만약 폐사군을 다시 설치하면 이 진은 없앨 수 없다.
다만 삼수ㆍ갑산의 여러 진으로부터 함흥(咸興) 황초령(黃草嶺)까지 3, 일 길 밖에 안 된다고 하니,
만일 적이 곧장 황초령 길로 해서 함흥 남쪽으로 나오면
함흥 이북에서 육진(六鎭)까지는 곧 가운데가 끊어져 우리나라에 붙일 수 없게 될 것이다.
《간재만록(艮齋漫錄》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별집 제18권, 변어전고(邊圉典故)
- 한국고전번역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