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비 <이윤탁 한글 영비(靈碑)>

Gijuzzang Dream 2008. 10. 10. 03:10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비

 이윤탁 한글 영비(靈碑) 

 

 

 

서울시 노원구 하계동 12번지, 서라벌고등학교 맞은 편 높은 콘크리트 옹벽 위에는

현재 이윤탁(李允濯)과 그의 부인 고령 신씨의 합장묘가 있다.

묘주(墓主)인 이윤탁 역시 명문 성주이씨가문 출신이기는 하나

정작 그 자신은 연산군 7년(1501) 봄 문과에 급제한 직후 승문원에서

실무 수습단계(權知 副正字=종9품)에 있다가

같은 해 섣달 26일 병환으로 40세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어

관계나 학계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하지 못했다.

 

묘 앞에는 상석과 향로석, 문인석, 묘갈(墓碣)들이 놓여 있다.

당대의 유명한 문인이 글을 짓고 글씨를 쓴 신도비도 없고,

 상석과 향로석 역시 근년에 조성되어 옛모습 그대로가 아니다.

일반 서민들의 민묘에 비하면 일정한 격식을 갖춘 것으로 볼 수 있겠으나

문화재로 지정된 다른 묘들에 비하면 단출한 편에 속한다.

식물이나 묘주 모두 특별한 데가 없는데도

그의 묘역은 최근 문화재로 지정된 묘역들 가운데 유명세를 가장 많이 탔다.

그것은 2007년 9월18일 이윤탁의 묘갈이

서울시 유형문화재에서 국가지정 보물 제1524호로 승격되었기 때문이다.

이 비는 원래  <한글고비(古碑)>로 서울시유형문화재 제27호로 지정되어 있었으나

2006년 문화재적 가치가 재평가된 후 국가 지정문화재 승격후 추진대상으로 선정되었고,

2007년 9월18일 보물 제1524호로 지정되면서 명칭도 <이윤탁 한글 영비(靈碑)>로 변경되었다.

 

지금까지 능원(陵園)을 제외하고 일반 사대부 묘역이 국가지정문화재로 된 예도 없거니와

그 묘 앞에 세워진 석비 하나가 국가지정문화재로 된 것 역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면 이윤탁의 묘갈은 어떤 특별한 요소가 있어서 보물로까지 지정된 것일까?

 

이윤탁의 묘갈은 그의 막내아들인 묵재(默齋) 이문건(李文楗, 1494-1567)이

1501년 세상을 떠나 지금의 태릉(泰陵, 이문건과 정치적으로 대립적인 세력인 문정왕후의 능) 위치에

조성되어 있던 아버지 이윤탁의 묘가 국가에 수용 당하게 되자

이를 이장해 1535년 어머니의 묘와 합장하면서 1536년(중종 31)에 세운 것인데

묘갈 앞면에 묘주명(墓主名)을,

묘갈 뒷면에 가계(家系), 생몰연대, 관력(官歷), 성품, 묘의 이장경위 등을 한문으로 새긴 점은

다른 묘갈과 크게 다를 바 없으나

비 옆면에 비의 훼손을 경계하는 글을 직접 새기고,

특히 왼쪽에는 순수 한글로 글귀를 새겨놓았다는 점에서 다른 묘갈과 크게 다르다고 하겠다.

 

 

 

  

  

 

 

 

 

 

 

 

(제1열) 녕한비라 거운 사람은 재화를 니브리라

(제2열) 이는 글모르는 사람다려 알위노라

 

 “신령한 비이다.

  비에 해를 끼치는 사람은 화를 입을 것이다.

  이를 한문 모르는 사람에게 알리노라“

 

 

이윤탁 분묘의 이장과 묘갈 건립의 전 과정이 기록된 <묵재일기>를 볼 때,

이문건이 이와 같은 내용의 글귀를 새긴 것은

외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옮겨야 했던 아버지의 묘를 두 번 다시 옮기거나 훼손당하는

불행한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한글 경계 글이 새겨진 <이윤탁 한글 영비>가 보물로 지정되기 전까지

그동안 서울지역에서만 <북한산 신라진흥왕 순수비>를 비롯해 총 28기의 석비가

국가 및 서울시 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었으나 한글로 된 비는 단 한 건도 없었다.

 

1443년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고 각종 예서(禮書)들을 한글로 번역해서 민간에 배포하였지만

한글은 사대부들에 의해 언문, 중글, 암클 등으로 비하되었기 때문에

한글이 새겨진 비가 세워지는 사례 자체가 극히 희소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조사된 바로는 한글이 일부라도 새겨진 비는 <이윤탁 한글 영비>를 제외하고

전국에 2건 남아있는데 경북 문경의 <산불됴심비(경북문화재자료 226호)>와

경기도 포천의 <인흥군 이영 묘역 입구 표석> 등이 그것이다.

 

 

- 문경새재의 <산불됴심비>

 

- 경기도 포천 영중면 <인흥군 이영 묘역 입구> 한글비

인흥군(仁興君) 이영(李瑛 : 1604-1651)은 선조의 12남.

자는 가온, 호는 취은, 시호는 효숙, 뒤에 정효로 고쳤다.

선조와 어머니 정빈 민씨 사이에는 인성군, 인흥군, 정인옹주, 정선옹주, 정근옹주 2남3녀를 두었다.

1610년(광해군 2) 7세 때 인흥군에 봉해졌으며,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으로 왕이 공주로 피난할 때 수행하였다.

1627년(인조 5) 어머니 상을 당하고도 병자호란으로 남한산성으로 피난하는 왕을 수행했다.

인흥군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 낭선군 이우(1637-1693)은 각 서체에서 명필로 이름을 날렸고

금석학에도 조예가 깊어 <대동금석첩>을 저술하였으며,

차남 낭원군 이간(1640-1699) 역시 전서와 예서를 잘 써

오늘날까지 여러 곳에 필적을 남기고 있으며 <열성어제>를 짓기도 하였다.

 

이들 한글비 가운데 <이윤탁 한글 영비>는 건립연대가 1536년(중종 31)으로 확실하고,

훈민정음이 창제된 직후의 서체인 <훈민정음 해례본>의 서체와 <용비어천가> 서체의

중간형 성격을 지니는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비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가장 크다고 하겠다.

 

아울러 <이윤탁 한글 영비>는 비석의 이름이 ‘영비(靈碑)’ 부분을 제외하고는

비문이 모두 국한문 혼용이 아닌 순국문으로 쓰여 있는데

그동안 본격적으로 한글로만 쓴 문헌은 18세기에 등장한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이 묘갈로 인해 16세기에 이미 순국문으로만 쓰인 문장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지게 되었다.

 

또한 <이윤탁 한글 영비>의 경계 글은 언해문(諺解文)이 아닌 원 국문 문장으로 되어 있다.

15세기 이후 한문 원문을 번역한 언해문이 한글 자료의 주종을 이루고 있었으나

이 묘갈은 짧은 문장이긴 하지만 처음부터 우리말로 쓰인 문장으로 되어 있어

16세기에 한글이 한문 번역도구가 아닌

우리의 생각과 느낌을 직접 전달하는 도구로 변화하였음을 새롭게 증명해주고 있다.

- 김수정, 서울시 문화재과 학예연구사

- SEMU 제 19호(2008년 가을), 서울역사박물관

 

 

 

 

 

 

 

서울 노원구 하계동에 있는 '한글 영비(靈碑)'

 

하계동 주공아파트단지 인근의 서라벌고등학교에서 차도를 건너 불암산으로 올라가는 입구에

이 비석이 서 있다. 조선 중종 31년(1536)에 세운 이 비석은 1974년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됐고,

한글날(10월 9일)을 앞두고 문화재청의 심의를 거쳐 최근 보물 1524호로 승격됐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이 비석은 높이 142㎝, 폭 63㎝, 두께 18㎝ 규모다.

한글 영비는 조선 전기의 유일한 한글 비석으로

중세 국어와 서체 연구에 귀중한 가치를 지닌 점을 인정받았다.

세종대왕이 1446년 훈민정음을 반포했지만 당시 양반들은 한글을 천시했기 때문에

조선시대에 한글로 비석을 새기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한글 비석은 현재 3점이 남아 있으며, 한글 영비를 제외한 나머지 2점은 모두 조선 후기에 세워졌다.

비석의 왼쪽에 한글로 두 줄짜리 글귀가 새겨져 있다.

 

'신령한 비라 쓰러뜨리는 사람은 재화를 입으리다. 이를 글(한문) 모르는 사람에게 알리노라'

  

비석의 오른쪽엔 비슷한 내용의 경고문이 한문으로 적혀 있다.

 

“부모를 위하여 이 비석을 세운다.  

어느 누구 부모 없는 이 있어 이 비석을 훼손할 것인가.  

비를 훼손하지 않는다면 무덤 또한 능멸 당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

만세 뒤에도 화를 면할 것이다.”

(爲父母立此, 誰無父母, 何忍毁之石. 不忍犯則墓不忍凌, 明矣. 萬世之下, 可知免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