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마제석검 - 우두머리의 칼

Gijuzzang Dream 2008. 10. 9. 18:55

 

 

 

 

 

 

 우두머리의 칼

 

 

 

 

 

- 부산 괴정동 출토 마제석검

 

마제석검(磨製石劍)은 돌을 갈아 만든 단검으로,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석기로서 동북아시아 중에서도 한반도에서 가장 발달하였고,

그 영향을 받아 일본열도의 북부 구주지방에서도 출토된다.

 

자루의 유무(有無)에 따라 유병식석검(有柄式石劍)과 유경식석검(有莖式石劍)으로 나누어진다.

 

유병식석검은 손잡이 부분이 검신(劍身)과 함께 제작되는 것으로서

손잡이 중앙에 홈이 있어 상하로 구분되는 것을 이단병식(二段柄式),

홈이 없는 것을 일단병식(一段柄式) 석검이라고 한다.

 

유경식석검은 검신과 슴베부분으로 된 것으로서 나무로 만든 손잡이를 슴베에 끼워 사용하였다.

현재 손잡이 부분은 부식되어 남아있지 않지만,

부여 송국리유적에서 목제의 손잡이에 끼워진 채로 발견된 것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검신(劍身, 칼몸)에는 혈구(血溝, 피홈)라고 하는 두 줄의 홈이 세로로 길게 있는 것도 있다.

크기는 길이가 30㎝ 내외의 것이 많으나

40-50㎝ 혹은 60㎝ 이상의 것도 있는 반면, 15㎝ 정도의 짧은 것도 있다.

손잡이나 슴베가 없는 것도 상당수 발견되는데

소형의 것은 석검(石劍)인지 석창(石槍)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유경식석검 가운데

슴베의 폭이 좁고 길면서 검신에 혈구가 있는 것은 주로 평안남도와 황해도 지방에 많고,

이것보다는 작지만 전남 영광이나 보성에서도 이러한 형태의 석검이 출토된다.

 

이러한 석검이 어떻게 만들어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있다.

해방 전에는 특히 혈구가 있는 석검이 한국식동검(銅劍)을 모방하여 만들었다고 하여

금석병용기론(金石竝用期論)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제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석검이 출토된 파누 옥석리주거지가 한국식동검보아 이른 시기임이 밝혀지고,

부여 송국리유적에서는 요령식동검가 함께 출토되면서부터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

 

그 후 남한에서 발견되는 유병식석검은

완주 상림리유적에서 대량으로 발견된 중국 춘치우(春秋)시대 말, 찌안구어(戰國) 초의 중국식동검과

자루형식이 흡사하여 이를 모방하였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오르도스식동검 등을 모방하였다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현재에는 중국 동북지방의 요령식동검을 모방하여 제작되기 시작하였다는 견해가 가장 유력하다.

 

청동기시대 석기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무기류의 발달인데,

석촉과 달리 석검은 누구나 가질 수 있었던 것이 아니고

마을 내에서도 특정한 계층의 사람들만이 소유할 수 있었다.

비교적 규모가 큰 주거지나 무덤에서 출토되는 등 출토 상황에서도 증명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동검의 모방에서 비롯된 청동기시대의 석검은

한반도에서 최초의 ‘개인용’ 무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단검(短劍)은 실전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그렇지 않을 때에도

몸에 착장되어 신체와 일체를 이루는 개인용의 성격이 강하다.

전장에서 사용될 때는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적을 상대하기 때문에

어떤 다른 무기보다도 영웅성을 유발하기 쉬워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전사(戰士)의 이념형(理念型)과 연결되고 있다.

 

그렇다면 청동기시대에서 석검의 출현은

지휘자를 전제로 하는 전쟁의 시작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결국 검신(檢身)과 자루가 일체(一體)로 제작된 유병식석검은

최초의 개인용 무기인 동시에 사회적 지위를 상징하는 물품, 즉 위세품(威勢品)인 것이다.

- 배진성, 국립중앙박물관 고고관 청동기실

- 2008년 9월24일,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와의 대화(제 107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