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우기에 담겨 있는 태종의 눈물
반역자가 된 조선의 ‘레인 메이커(rain maker)’
세계 최초 측우기 속에 담겨 있는 태종의 눈물
임종을 앞둔 태종이 세종을 불러 말했다. “지금 가뭄이 한참 심할 때이니 만약 내가 죽어서 영혼이 있다면 이날만은 비가 내리도록 하겠다.” 정말로 해마다 태종의 사망일인 5월 10일(음력)에 비가 내렸다고 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 비를 '태종우(太宗雨)'라 불렀다. 그런데 태종은 특히 가뭄에 대해 민감하게 대응한 군주였다. 가뭄이 심하게 들면 태종은 하루에 한 번만 식사를 하고, 금주령을 내려 대궐 안의 술그릇을 모두 치우게 했다.
더불어 모든 방법을 동원한 갖가지 기우제를 올렸다. 당시 기우제의 대표적인 형식으로는 원단 기우제가 있었다. 고려시대 때 중국의 영향을 받아 시작된 원단 기우제는 제단을 쌓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기우제였다. 소격전이란 하늘과 땅, 별에 지내는 도교의 초제를 맡아보던 관아로서, 세조 때 소격서로 바뀌었다가 선조 이후 완전히 폐지되었다. 종묘, 사직, 명산(名山), 대천(大川)과 소격전에 대신을 보내 기우제를 지내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사평부에 무녀들을, 명통사에 맹인들을, 연복사에 승려들을 모아놓고 비를 빌게 했다. 평상시 천대를 받았던 맹인과 무당은 물론 조선시대 들어서 배척했던 승려들까지도 기우제에 모두 동원되었던 것이다. 비록 비의 혜택을 얻는다 하더라도 결코 승려와 무당의 힘은 아니다. 다만 비를 걱정하는 생각이 이르지 않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해명하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1407년(태종 7년) 6월 21일에는 석척기우제라는 기묘한 행사를 치루기도 했다. 순금사 대호군 김겸(金謙)이 소동파의 시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태종에게 제안한 석척기우제(蜥蜴祈雨祭)는 말 그대로 도마뱀을 이용한 기우제를 말했다. 이에 태종은 김겸을 불러 대궐의 광연루 아래 뜰에서 시험해볼 것을 명했다. “도마뱀아! 도마뱀아! 구름을 일으키고 안개를 토하며 비를 주룩주룩 오게 하면 너를 놓아 보내겠다.”고 빌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도마뱀이 용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용은 물속에서 살다가 하늘로 올라가 구름과 비를 만들어내는 상상 속의 동물이다. 따라서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흙으로 빚은 토룡이나 그림으로 그린 화룡 등으로 기우제를 올리는 풍속을 갖고 있었다. 궁녀들은 세 그룹으로 나누어 입시시키자고 건의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원컨대 궁녀로 하여금 윤번으로 입시하게 하여 남녀의 정을 다하게 하면 거의 화기(和氣)에 이르러서 가뭄의 재해를 그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평소 세자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태종도 이 제안을 즉시 받아들였다. 양녕대군의 말이 당시의 음양사상에 비추어 볼 때 꽤 일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북은 만드는 가죽은 양에 속하고 종을 만드는 구리나 쇠는 음에 속하므로, 양기를 내는 소리를 피하고자 하는 조치였다. 중종 때가 475회로 가장 많고 성종 때가 455회로 그 뒤를 잇는다. 세종 때는 323회 등장하고 태종 때는 162회 등장한다. 재위 기간을 감안해도 다른 왕들에 비해 태종 때에만 유독 가뭄이 극심했던 편은 아닌 셈이다. 그에 대한 이유는 태종이 스스로 밝히고 있다.
1416년(태종 16년) 여름에 또 가뭄이 들자 태종은 육조와 대간에 아래와 같이 하교했다. 무인(戊寅)ㆍ경진(庚辰)ㆍ임오(壬午)의 사건이 부자 형제의 도리에 어긋났기 때문이다.” 자신의 집권 과정에서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이 일어난 연도를 가리킨다. 무인년(1398년) 8월 25일 정안대군 신분이던 태종 이방원은 반대파 세력인 정도전ㆍ남은ㆍ심효생을 살해하고, 이복동생인 세자 방석과 방번 형제를 제거하는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그로 인해 태조 이성계는 정종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물러났다. 방원은 개성 한복판에서 치열한 시가전을 벌인 끝에 반란군을 제압했다. 이 사건 이후 방원은 세자로 책봉되고 곧 이어 왕위에 올랐다.
임오년(1402년) 사건은 1차 왕자의 난 때 제거된 방석과 방번 형제의 친모였던 신덕왕후 강씨의 척족들이 태조 이성계의 복위를 도모했던 ‘조사의의 난’을 가리킨다. 태종은 정예군 4만명을 동원해 조사의의 군대를 제압했지만, 반란을 뒤에서 부추긴 이가 다름 아닌 아버지 태조였다는 사실을 알고 큰 충격을 받는다. 때문에 가뭄이 들 때마다 그 원인이 자신의 그 같은 패륜에 있다고 자책하곤 했다.
“내가 부덕한 사람으로서 하늘의 꺼림과 노여움을 만나서, 가뭄의 재이가 자주 꾸짖음을 보여 주니, 밤낮으로 걱정하고 두려워하여 구제할 바를 알지 못하겠다. 하루라도 스스로 편안할 적이 없고, 하룻밤이라도 편안하게 잠잘 적이 없는 것을 그 누가 알겠는가?” 눈물과 콧물이 턱 사이에 범벅되어 능히 말을 하지 못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어느 기록에도 나와 있지 않다. 동국세시기는 태종이 죽은 지 400년 후에 발간된 책으로서, 그 당시 야사로 떠돌던 말을 기록한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아마 가뭄 때마다 태종이 흘린 이 같은 후회의 눈물이 모여서 만들어낸 전설이 아닐까 싶다.
태종은 기우제를 지낸 후 비가 오면 참여한 무당이나 승려들에게 모시나 베, 쌀 등을 하사하곤 했다. 실제로 비가 오지 않다가 기우제를 지낸 후 비가 내렸다는 기록을 조선왕조실록의 여러 군데서 찾아볼 수 있다. 우선 기우제를 지낼 정도라면 비가 아주 오랫동안 내리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그것은 곧 머지않아 비가 올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또 하나는 기우제를 올리면서 하는 행위에 그 비밀이 숨어 있다. 기우제를 올리는 방법은 매우 다양한데, 그 중에서 주목할 것은 동물이나 곡식 등의 제물을 태우는 행위이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산으로 올라가 며칠 동안 제물을 태우는데, 그때 발생하는 시커먼 연기가 실제로 비를 내리게 요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구름 입자가 최소 100배 이상에서 수천 배까지 성장해야 비나 눈이 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조그만 입자들을 서로 뭉치게 하는 중심 물질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 구름에는 순수한 수증기만 있는 게 아니다. 이것들이 구름에서 비나 눈을 내리게 하는 구름씨 역할을 하는데, 빗방울을 형성하는 것을 응결핵, 작은 얼음 덩어리를 형성하는 것을 빙정핵이라 부른다. 강수 확률을 한층 높인다. 이는 요즘의 인공강우 기술과도 똑같은 원리이다.
최초의 인공강우 실험은 1946년 11월 미국 뉴욕 근처의 한 비행장에서 빈센트 쉐퍼 박사에 의해 시도되었다. 그는 드라이아이스를 가득 실은 경비행기를 이륙시켜 4천 미터 높이의 구름층에 뿌리게 했다. 그러자 5분 후 실제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 해 랴오닝성은 60년 만에 찾아온 최악의 가뭄으로 봄부터 비가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다. 논밭이 거북 등처럼 갈라진 것은 물론이고 식수조차 얻기 힘들 정도였다. 그 비는 바로 중국 정부에서 시도한 인공강우였다. 이때 내린 비의 양은 총 8억톤이나 되었는데, 인공 강우 사상 최대 규모로 알려져 있다. 2005년 5월 제2차 세계대전 승전 60주년을 앞둔 소련은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의 군사 퍼레이드 때 세계 60여 개국의 정상들과 수많은 국제 귀빈들이 참석하게 되어 있었다. 모스크바 상공 3천~8천 미터에 걸쳐 있는 구름을 모두 제거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드라이아이스와 요오드화은이 핵으로 작용할 수 있는 구름이 있어야만 인공강우가 가능하다. 또 구름 중에서도 수증기를 듬뿍 함유하고 있고, 비를 형성시킬 수 있는 적당한 조건의 구름이어야만 한다. 언제 그 기술이 실용화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주술사였던 '레인 메이커(rain maker)'가 바로 그들이다.
인디언의 레인 메이커가 100%의 확률로 비를 내리게 한 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한번 기우제를 시작하면 비가 올 때까지 행사를 계속 진행한 것이 바로 그 비결이었다. 한 달이건 1년이건 비가 올 때까지 계속 기우제를 지냈으니 확률이 100%가 될 수밖에 없었다. 바로 가뭄에 가장 민감했던 태종 때의 문가학(文可學)이란 이였다. 1402년(태종 2) 7월 9일 문가학은 예문관 직제학 정이오(鄭以吾)의 추천으로 태종 앞에 불려갔다. 그러나 기한이 되어도 비가 오지 않자 태종은 문가학에게 다시 한 번 빌어보라고 부탁한다. 송림사에서 다시 비를 빌었다. 그리고 다음날 태종에게 가서 “오늘 해시(亥時 : 밤 9시에서 11시 사이)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내일에는 큰 비가 내릴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정말 그의 예언대로 해시가 되자 비가 내렸고 그 다음날에도 비가 내렸다. 1406년 11월에도 문가학은 대궐로 불려왔다. 하지만 그때는 비를 내리게 하는 도술가가 아니라 요언을 퍼뜨려서 모반을 꾀한 죄인의 신분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귀신을 부릴 수 있고 천병(天兵)과 신병(神兵)도 부리기 어렵지 아니하오. 만일 인병(人兵)을 얻는다면 큰일을 거사할 수 있소.”라는 말로 몇몇 전직 관리들을 꼬드겨 난을 일으키려다 발각된 것이다. “내 문가학을 미친놈이라 여긴다. 천병과 신병을 제가 부를 수 있다 하니 미친놈의 말이 아니겠는가.”라며 어이없어 한다. 결국 국문 끝에 문가학은 동조자 5명과 함께 수레에 의해 몸이 두 갈래로 찢어져 죽는 환형에 처해졌고, 그의 젖먹이 아들도 교수형을 받았다. 기우제에 대한 태종의 집착이 낳은 어처구니없는 모반 사건이었던 셈이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탓인지 세종도 가뭄에 대해 아주 민감했다. 가뭄이 들 경우 자신의 생일잔치를 금하는가 하면, 손수 길가의 풀뿌리를 캐보며 가뭄의 정도를 가늠해보기도 했다. 또 태종과 마찬가지로 가뭄이 들 때마다 온갖 방법을 동원한 기우제를 올렸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바로 세계 최초의 측우기와 과학적인 하천 수위계인 수표의 탄생이었다. 이에 따라 1442년 5월 높이 약 32㎝ 지름 약 15㎝의 측우기가 서운관에 설치되었다. 무려 198년이나 앞서는 세계 최초의 정량적 우량계였다. 또 청계천 마전교(훗날 수표교로 불림)에는 측정 단위가 2㎜ 정도인 매우 정교한 수표가 설치되었다. 바로 가뭄 때마다 흘린 태종의 후회어린 눈물이었던 셈이다. - 이야기 과학 실록 (10, 11) - 2008년 06월 19일 2008년 06월 26일 ⓒ ScienceTimes |
측우대는 측우기를 설치하여 강우량을 측량하던 받침대(대석, 臺石)를 일컫는다. 측우기는 빗물을 일정한 그릇에 받아서 측정하는 과학적인 강우량 측정기기이다. 대석의 4면에 새겨진 글에서 측우기의 제작 경위와 그 뜻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말하고 있는데 정조 6년(1782) 6월부터 7월 사이에 계속되는 가뭄에 비오기를 바라는 간절한 뜻을 하늘에 알리고 비를 기다리는 의식적인 의의를 담고 있다. 각도 감사(監司)가 강우량을 전보(轉報) 하도록 이미 시행되고 있는 법이 있으나 땅이 말랐을 때와 젖어 있을 때에 따라서 땅 속에 스며드는 빗물의 깊이가 같지 않아 그것을 헤아리기 어려우니, 청하옵건대 서운관(書雲觀)에 대를 만들고 길이 2척尺, 지름 8촌寸의 철기를 주조하여 대 위에 놓고 빗물을 받아 본관원(本觀員)에게 그 깊이를 재서 보고하게 하고, …… 또한 외방(外方) 각관(各官)에서는 한양의 철기를 본보기로 하여 자기(磁器)나 와기(瓦器)를 써서 객사(客舍) 뜰에 놓아두고 수령이 수심을 재서 감사에게 보고하게 하여 감사가 이를 전해 듣게 하니 그에 따랐다.” 중앙은 물론 지방에서도 측우기를 설치하고 이를 관측했음을 알 수 있다. 세종임금 때의 측우기를 원형으로 삼아 제작한 것이다. 측우기는 한국전쟁 때 없어지고, 현존하는 유일의 조선시대 측우기인 보물 제561호 금영측우기(錦營測雨器)를 복원한 것이다. 그에 따르면 조선 세종 24년에 높이 1척 5촌, 지름 7촌의 크기로 처음 제작되었으며, 서운관 및 전국의 군현에 측우기를 설치하고 강우량을 측량하였다고 한다. 창덕궁 · 경희궁과 8도, 한성부, 개성부에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20년경에는 창경원 경성박물관 앞 계단에 전시되었다. 당시까지는 측우기가 남아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한국전쟁 때 유실되고 현재는 측우대만 전하고 있다.
측우기와 측우대는 영조 때 전국적인 정비 이후에도 필요에 따라 중앙이나 지방에서 제작되었다. 남아 있는 유물은 1782년에 제작한 측우대와 1811년의 측우대, 그리고 1837년의 측우기가 있다. 한국 과학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 국립고궁박물관, 왕실탐구 편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