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측우기에 담겨 있는 태종의 눈물

Gijuzzang Dream 2008. 10. 1. 13:04

 

 

 

 

 

 

 반역자가 된 조선의 ‘레인 메이커(rain maker)

 세계 최초 측우기 속에 담겨 있는 태종의 눈물

임종을 앞둔 태종이 세종을 불러 말했다.

“지금 가뭄이 한참 심할 때이니 만약 내가 죽어서 영혼이 있다면 이날만은 비가 내리도록 하겠다.”

<동국세시기> 5월조의 기록에 의하면

정말로 해마다 태종의 사망일인 5월 10일(음력)에  비가 내렸다고 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 비를 '태종우(太宗雨)'라 불렀다.

농경을 기반으로 하는 조선시대 때 가뭄은 최악의 재해였다.

그런데 태종은 특히 가뭄에 대해 민감하게 대응한 군주였다. 가뭄이 심하게 들면 태종은

하루에 한 번만 식사를 하고, 금주령을 내려 대궐 안의 술그릇을 모두 치우게 했다.

전국민속경연대회의 제주 용연 기우제

더불어 모든 방법을 동원한 갖가지 기우제를 올렸다.

당시 기우제의 대표적인 형식으로는 원단 기우제가 있었다. 고려시대 때 중국의 영향을 받아 시작된 원단 기우제는 제단을 쌓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기우제였다.

그러나 조선은 고려와 달리 원단 기우제를 마음대로 지낼 형편이 아니었다. 그것은 조선이 명나라의 제후국을 자처했기 때문이다. 제단을 쌓고 하늘에 고하는 행위는 중국의 천자만이 할 수 있던 터라, 원단 기우제 자체가 제후국으로서의 예에 어긋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종은 재위 기간 동안 8차례의 원단 기우제를 행하는 집념을 보였다.

고려로부터 전승된 또 다른 기우제로는 소격전의 초제가 있었다.

소격전이란 하늘과 땅, 별에 지내는 도교의 초제를 맡아보던 관아로서,

세조 때 소격서로 바뀌었다가 선조 이후 완전히 폐지되었다.

가뭄이 극심했던 1402년(태종 2년) 7월 2일 <태종실록>을 보면

종묘, 사직, 명산(名山), 대천(大川)과 소격전에 대신을 보내 기우제를 지내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사평부에 무녀들을, 명통사에 맹인들을, 연복사에 승려들을 모아놓고 비를 빌게 했다.

평상시 천대를 받았던 맹인과 무당은 물론 조선시대 들어서 배척했던 승려들까지도

기우제에 모두 동원되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태종은 “나는 학문의 이치를 조금 알므로 승려나 무당의 탄망함도 안다.

비록 비의 혜택을 얻는다 하더라도 결코 승려와 무당의 힘은 아니다.

다만 비를 걱정하는 생각이 이르지 않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해명하고 있다.

나라에 일이 있거나 가뭄 때 기우제를 지냈던 사직단. 

그뿐만이 아니다. 1407년(태종 7년) 6월 21일에는 석척기우제라는 기묘한 행사를 치루기도 했다. 순금사 대호군 김겸(金謙)이 소동파의 시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태종에게 제안한 석척기우제(蜥蜴祈雨祭)는 말 그대로 도마뱀을 이용한 기우제를 말했다.

김겸은 ‘옹기 가운데 도마뱀이 참으로 우습다’는 소동파의 시를 읽다가 그 주석에 비를 비는 법이 실려 있어서 따라해 본 결과 진짜로 비를 얻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태종은 김겸을 불러 대궐의 광연루 아래 뜰에서 시험해볼 것을 명했다.

석척기우제를 지내는 법은 도마뱀을 잡아다 물을 가득 담은 옹기 두 개 안에다 넣은 다음 향을 피우고, 푸른 옷을 입은 남자 아이 20명에게 버들가지를 들린 후

“도마뱀아! 도마뱀아! 구름을 일으키고 안개를 토하며 비를 주룩주룩 오게 하면

너를 놓아 보내겠다.”고 빌게 하는 것이었다.


많은 동물 가운데 왜 하필이면 도마뱀으로 기우제를 올린 것일까.

그것은 도마뱀이 용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용은 물속에서 살다가 하늘로 올라가 구름과 비를 만들어내는 상상 속의 동물이다.

따라서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흙으로 빚은 토룡이나 그림으로 그린 화룡 등으로

기우제를 올리는 풍속을 갖고 있었다.

한편 1414년(태종 14년) 6월 6일에는 세자인 양녕대군이 태종에게 가뭄에 대한 조치로

궁녀들은 세 그룹으로 나누어 입시시키자고 건의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제 가뭄이 심하니 이것이 궁녀들의 원한의 소치인가 합니다.

원컨대 궁녀로 하여금 윤번으로 입시하게 하여 남녀의 정을 다하게 하면

거의 화기(和氣)에 이르러서 가뭄의 재해를 그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도마뱀은 용과 모습이 비슷하여 종종 기우제에 이용되었다. 

평소 세자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태종도 이 제안을 즉시 받아들였다. 양녕대군의 말이 당시의 음양사상에 비추어 볼 때 꽤 일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음양사상의 관점에서 볼 때 가뭄은 양기가 극히 강한 때이다. 따라서 가뭄이 심하게 들면 도성에서 인정과 파루의 시각을 알릴 때 북 대신 종을 치게 했다.

북은 만드는 가죽은 양에 속하고 종을 만드는 구리나 쇠는 음에 속하므로, 양기를 내는 소리를 피하고자 하는 조치였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가뭄이 혹시 여인의 원망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양녕대군의 말이 태종에게 그럴싸하게 들렸을 것이다. 덕분에 그 후로 궁녀들은 가뭄 때마다 가끔씩 뜻하지 않은 휴가를 즐길 수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가뭄’을 검색하면

중종 때가 475회로 가장 많고 성종 때가 455회로 그 뒤를 잇는다. 세종 때는 323회 등장하고 태종 때는 162회 등장한다.

재위 기간을 감안해도 다른 왕들에 비해 태종 때에만 유독 가뭄이 극심했던 편은 아닌 셈이다.

그럼에도 태종은 왜 그렇게 가뭄에 민감했던 것일까.

그에 대한 이유는 태종이 스스로 밝히고 있다.

 

1416년(태종 16년) 여름에 또 가뭄이 들자 태종은 육조와 대간에 아래와 같이 하교했다.

“가뭄의 연고를 깊이 생각해보니 까닭은 다름이 아니라

무인(戊寅)ㆍ경진(庚辰)ㆍ임오(壬午)의 사건이 부자 형제의 도리에 어긋났기 때문이다.”

여기서 태종이 언급한 무인ㆍ경진ㆍ임오는

자신의 집권 과정에서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이 일어난 연도를 가리킨다.

무인년(1398년) 8월 25일 정안대군 신분이던 태종 이방원은

반대파 세력인 정도전ㆍ남은ㆍ심효생을 살해하고,

이복동생인 세자 방석과 방번 형제를 제거하는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그로 인해 태조 이성계는 정종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물러났다.

정종의 재위기간 중인 경진년(1400년) 정월, 바로 위의 형인 방간이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자

방원은 개성 한복판에서 치열한 시가전을 벌인 끝에 반란군을 제압했다.

이 사건 이후 방원은 세자로 책봉되고 곧 이어 왕위에 올랐다.

대한제국 때 고종 황제가 축조한 원구단 

 

임오년(1402년) 사건은 1차 왕자의 난 때 제거된 방석과 방번 형제의 친모였던 신덕왕후 강씨의 척족들이 태조 이성계의 복위를 도모했던 ‘조사의의 난’을 가리킨다.

태종은 정예군 4만명을 동원해 조사의의 군대를 제압했지만, 반란을 뒤에서 부추긴 이가 다름 아닌 아버지 태조였다는 사실을 알고 큰 충격을 받는다.

이처럼 이복동생과 친형, 아버지와의 세 차례에 걸친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은 강골로만 보이는 태종에게도 큰 아픔이었다.

때문에 가뭄이 들 때마다 그 원인이 자신의 그 같은 패륜에 있다고 자책하곤 했다.

다음날인 1416년 5월 20일 태종은 편전에서 그에 대한 자신의 심정을 더욱 솔직하게 드러냈다.

 

“내가 부덕한 사람으로서 하늘의 꺼림과 노여움을 만나서, 가뭄의 재이가 자주 꾸짖음을 보여 주니,

밤낮으로 걱정하고 두려워하여 구제할 바를 알지 못하겠다.

하루라도 스스로 편안할 적이 없고, 하룻밤이라도 편안하게 잠잘 적이 없는 것을 그 누가 알겠는가?”

그 말을 하며 임금이 큰 소리로 슬프게 우니,

눈물과 콧물이 턱 사이에 범벅되어 능히 말을 하지 못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실 태종우의 유래가 된, 글 앞머리의 세종에게 남긴 태종의 유언은

그 어느 기록에도 나와 있지 않다. 동국세시기는 태종이 죽은 지 400년 후에 발간된 책으로서,

그 당시 야사로 떠돌던 말을 기록한 것에 불과하다.

그럼 태종우라는 어휘는 어떻게 해서 탄생한 것일까.

그것은 아마 가뭄 때마다 태종이 흘린 이 같은 후회의 눈물이 모여서 만들어낸 전설이 아닐까 싶다.

 

태종은 기우제를 지낸 후 비가 오면 참여한 무당이나 승려들에게 모시나 베, 쌀 등을 하사하곤 했다.

실제로 비가 오지 않다가 기우제를 지낸 후 비가 내렸다는 기록을

조선왕조실록의 여러 군데서 찾아볼 수 있다.
이에 대해 기후제가 과학적으로도 어느 정도 효과가 있다는 지적이 있다.

우선 기우제를 지낼 정도라면 비가 아주 오랫동안 내리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그것은 곧 머지않아 비가 올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제물을 태우던 기우제는 일종의 원시적인 인공강우 기술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또 하나는 기우제를 올리면서 하는 행위에 그 비밀이 숨어 있다. 기우제를 올리는 방법은 매우 다양한데, 그 중에서 주목할 것은 동물이나 곡식 등의 제물을 태우는 행위이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산으로 올라가 며칠 동안 제물을 태우는데, 그때 발생하는 시커먼 연기가 실제로 비를 내리게 요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늘에 떠 있는 구름 속에는 아주 작은 물방울과 얼음 알갱이인 빙정들이 섞여 있다. 그 입자가 얼마나 작은가 하면 지름이 평균 20마이크로미터(1마이크로미터 = 100만분의 1미터)에 불과하다.

그런데 땅 위로 내리는 빗방울이 되려면 적어도 2천 마이크로미터(0.2㎝) 이상으로 커져야 한다.

즉, 구름 입자가 최소 100배 이상에서 수천 배까지 성장해야 비나 눈이 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습도가 아무리 높아도 순수한 수증기 입자들만 모여서는 비나 눈이 되기 매우 어렵다.

조그만 입자들을 서로 뭉치게 하는 중심 물질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 구름에는 순수한 수증기만 있는 게 아니다.

바닷물에서 나온 소금 입자나 식물의 포자, 연기 등 여러 종류의 작은 먼지도 함께 섞여 있다.

이것들이 구름에서 비나 눈을 내리게 하는 구름씨 역할을 하는데,

빗방울을 형성하는 것을 응결핵, 작은 얼음 덩어리를 형성하는 것을 빙정핵이라 부른다.
기우제 때 발생하는 연기나 먼지는 바로 이 같은 응결핵의 역할을 할 수 있으므로

강수 확률을 한층 높인다. 이는 요즘의 인공강우 기술과도 똑같은 원리이다.

비를 형성시킬 수 있는 적당한 구름이 있어야 인공강우기술이 가능하다. 

최초의 인공강우 실험은 1946년 11월 미국 뉴욕 근처의 한 비행장에서 빈센트 쉐퍼 박사에 의해 시도되었다.

그는 드라이아이스를 가득 실은 경비행기를 이륙시켜 4천 미터 높이의 구름층에 뿌리게 했다.

그러자 5분 후 실제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 후 요오드화은이 인공강우 물질로 적당하다는 것이 밝혀져 현재 드라이아이스와 함께 가장 널리 이용되고 있다. 인공강우의 원리는 기우제와 마찬가지로 드라이아이스와 요오드화은이 구름에서 핵 역할을 하여 비를 내리게 한다. 이렇게 볼 때 제물을 태우던 기우제는 일종의 원시적인 인공강우 기술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최근에 시도된 인공강우 중에서 가장 화제가 되었던 것은 2007년 중국 랴오닝성의 사례이다.

그 해 랴오닝성은 60년 만에 찾아온 최악의 가뭄으로 봄부터 비가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다.

논밭이 거북 등처럼 갈라진 것은 물론이고 식수조차 얻기 힘들 정도였다.
그런데 그 해 6월 27일 드디어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비는 바로 중국 정부에서 시도한 인공강우였다.

이때 내린 비의 양은 총 8억톤이나 되었는데, 인공 강우 사상 최대 규모로 알려져 있다.

한편 소련에서는 인공강우 기술을 이용해 흐린 날을 화창하게 바꾼 일도 있었다.

2005년 5월 제2차 세계대전 승전 60주년을 앞둔 소련은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의 군사 퍼레이드 때

세계 60여 개국의 정상들과 수많은 국제 귀빈들이 참석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행사 당일 구름이 짙게 끼어 있자 러시아 공군은 그날 새벽부터 비행기 11대를 동원해

모스크바 상공 3천~8천 미터에 걸쳐 있는 구름을 모두 제거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하지만 현재의 인공강우 기술로도 맑은 하늘에서 갑자기 비를 내리게 할 수는 없다.

드라이아이스와 요오드화은이 핵으로 작용할 수 있는 구름이 있어야만 인공강우가 가능하다.

또 구름 중에서도 수증기를 듬뿍 함유하고 있고,

비를 형성시킬 수 있는 적당한 조건의 구름이어야만 한다.

앞으로 전자기장을 이용해 구름이 없어도 비를 내리게 하는 기술이 개발된다고 하지만,

언제 그 기술이 실용화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이미 옛날에 100%의 확률로 비를 내리게 하는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있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주술사였던 '레인 메이커(rain maker)'가 바로 그들이다.

100% 확률로 비를 내리게 했다는

인디언 기우제. 

인디언의 레인 메이커가 100%의 확률로 비를 내리게 한 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한번 기우제를 시작하면 비가 올 때까지 행사를 계속 진행한 것이 바로 그 비결이었다.

한 달이건 1년이건 비가 올 때까지 계속 기우제를 지냈으니 확률이 100%가 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시대에도 이처럼 특출한 능력을 지닌 레인 메이커가 있었다.

바로 가뭄에 가장 민감했던 태종 때의 문가학(文可學)이란 이였다. 1402년(태종 2) 7월 9일 문가학은 예문관 직제학 정이오(鄭以吾)의 추천으로 태종 앞에 불려갔다.
승려와 무당, 맹인까지 동원해 기우제를 올려도 비가 오지 않아 답답해하던 태종 앞에서 문가학은 사흘 내에 비를 내리게 하겠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기한이 되어도 비가 오지 않자 태종은 문가학에게 다시 한 번 빌어보라고 부탁한다.

문가학은 역마를 타고 급히 불려오느라 자신의 정성이 부족했던 것 같다며

송림사에서 다시 비를 빌었다. 그리고 다음날 태종에게 가서

“오늘 해시(亥時 : 밤 9시에서 11시 사이)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내일에는 큰 비가 내릴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정말 그의 예언대로 해시가 되자 비가 내렸고 그 다음날에도 비가 내렸다.

그 후 문가학은 1403년부터 1405년까지 매년 가뭄이 들 때마다 기우제를 지내게 되었다.

1406년 11월에도 문가학은 대궐로 불려왔다. 하지만 그때는 비를 내리게 하는 도술가가 아니라

요언을 퍼뜨려서 모반을 꾀한 죄인의 신분이 되어 있었다.

문가학은 “이제 불법은 쇠잔하고 천문이 여러 번 변하였소.

나는 귀신을 부릴 수 있고 천병(天兵)과 신병(神兵)도 부리기 어렵지 아니하오.

만일 인병(人兵)을 얻는다면 큰일을 거사할 수 있소.”라는 말로

몇몇 전직 관리들을 꼬드겨 난을 일으키려다 발각된 것이다.

이에 태종은

“내 문가학을 미친놈이라 여긴다.

천병과 신병을 제가 부를 수 있다 하니 미친놈의 말이 아니겠는가.”라며 어이없어 한다.

결국 국문 끝에 문가학은 동조자 5명과 함께 수레에 의해 몸이 두 갈래로 찢어져 죽는

환형에 처해졌고, 그의 젖먹이 아들도 교수형을 받았다.

기우제에 대한 태종의 집착이 낳은 어처구니없는 모반 사건이었던 셈이다.

기상대에 보관되어 있는

금영측우기.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탓인지 세종도 가뭄에 대해 아주 민감했다. 가뭄이 들 경우 자신의 생일잔치를 금하는가 하면, 손수 길가의 풀뿌리를 캐보며 가뭄의 정도를 가늠해보기도 했다.

또 태종과 마찬가지로 가뭄이 들 때마다 온갖 방법을 동원한 기우제를 올렸다.

그런데 세종은 기우제에만 매달리기보다는 가뭄에 잘 대비하기 위한 방편을 찾았다. 그 방편이란 가뭄의 정도를 보다 잘 파악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바로 세계 최초의 측우기와

과학적인 하천 수위계인 수표의 탄생이었다.

1441년(세종 23) 8월 호조에서는 비의 양을 정확히 측정할 수 있는 측우기와 하천 빗물의 수위를 측정할 수 있는 수표의 설치를 세종에게 건의했다.

이에 따라 1442년 5월 높이 약 32㎝ 지름 약 15㎝의 측우기가 서운관에 설치되었다.

그것은 1635년 발명된 유럽 최초의 우량계인 카르텔리보다

무려 198년이나 앞서는 세계 최초의 정량적 우량계였다.

또 청계천 마전교(훗날 수표교로 불림)에는 측정 단위가 2㎜ 정도인 매우 정교한 수표가 설치되었다.

측우기와 수표라는 세종의 과학적 업적을 탄생시킨 일등공신은

바로 가뭄 때마다 흘린 태종의 후회어린 눈물이었던 셈이다.

- 이야기 과학 실록 (10, 11)

- 2008년 06월 19일 2008년 06월 26일 ⓒ ScienceTimes

 

 

 

 

 

 

측우대는 측우기를 설치하여 강우량을 측량하던 받침대(대석, 臺石)를 일컫는다.

측우기는 빗물을 일정한 그릇에 받아서 측정하는 과학적인 강우량 측정기기이다.
높이 30.3㎝, 가로 45.3, 세로 45.5㎝의 대리석으로 만든 이 측우대는

대석의 4면에 새겨진 글에서 측우기의 제작 경위와 그 뜻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말하고 있는데

정조 6년(1782) 6월부터 7월 사이에 계속되는 가뭄에 비오기를 바라는 간절한 뜻을

하늘에 알리고 비를 기다리는 의식적인 의의를 담고 있다.

 
측우기의 발명은 세종실록 권93의 1441년(세종 23)의 8월 18일 기사에 의해 공식 확인된다.

 
“호조에서 아뢰기를,

각도 감사(監司)가 강우량을 전보(轉報) 하도록 이미 시행되고 있는 법이 있으나

땅이 말랐을 때와 젖어 있을 때에 따라서 땅 속에 스며드는 빗물의 깊이가 같지 않아

그것을 헤아리기 어려우니, 청하옵건대 서운관(書雲觀)에 대를 만들고

길이 2척尺, 지름 8촌寸의 철기를 주조하여 대 위에 놓고 빗물을 받아

본관원(本觀員)에게 그 깊이를 재서 보고하게 하고, ……

또한 외방(外方) 각관(各官)에서는 한양의 철기를 본보기로 하여

자기(磁器)나 와기(瓦器)를 써서 객사(客舍) 뜰에 놓아두고

수령이 수심을 재서 감사에게 보고하게 하여 감사가 이를 전해 듣게 하니 그에 따랐다.”

따라서 이 기록에 따르면 쇠로 만든 원통형 측우기는 세종년간에 발명되어

중앙은 물론 지방에서도 측우기를 설치하고 이를 관측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로 여러 차례 측우기가 제작되었으나 현재까지 전하는 유일한 측우기는 금영측우기이다.

이 측우대는 1782년(정조 6)에 가뭄을 근심하던 정조가 명을 내려

세종임금 때의 측우기를 원형으로 삼아 제작한 것이다.

측우기는 한국전쟁 때 없어지고,

현존하는 유일의 조선시대 측우기인 보물 제561호 금영측우기(錦營測雨器)를 복원한 것이다.

측면의 명문은 일부 마멸되어 해독이 어렵지만 『한경지략(漢京識略)』에 그 전문이 실려 있다.

그에 따르면 조선 세종 24년에 높이 1척 5촌, 지름 7촌의 크기로 처음 제작되었으며,

서운관 및 전국의 군현에 측우기를 설치하고 강우량을 측량하였다고 한다.
또한 영조 46년에 옛 제도를 따라 측우기를 다시 제작하고

창덕궁 · 경희궁과 8도, 한성부, 개성부에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측우대는 처음 1782년(정조 6)에는 창덕궁 이문원(이文院) 앞 마당에 설치되었으나

1920년경에는 창경원 경성박물관 앞 계단에 전시되었다. 당시까지는 측우기가 남아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한국전쟁 때 유실되고 현재는 측우대만 전하고 있다.

 

측우기와 측우대는 영조 때 전국적인 정비 이후에도 필요에 따라 중앙이나 지방에서 제작되었다.

남아 있는 유물은 1782년에 제작한 측우대와 1811년의 측우대, 그리고 1837년의 측우기가 있다.
현재 창덕궁 측우대 이외에 관상감 측우대, 대구 선화당 측우대 등이 남아 있으며

한국 과학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 참고문헌
- 한국과학사학회, 「한국의 과학문화재 조사보고」, 『한국과학사학회지』제6권1호, 1984.
- 김인덕 · 서성호 · 오상학 · 오영선,『한국미의 재발견 2 - 과학문화』, 솔출판사, 2004.

 

- 국립고궁박물관, 왕실탐구 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