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외국용병
조선 최초의 서양인 외인부대장 - 박연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외국용병
국가에 대한 충성 대신 부대에 대해 충성을 맹세하는 군대가 있다.
세계 최정예 용병들이 모이는 ‘레종 에트랑제’라는 프랑스의 외인부대가 바로 그런 군대다.
1831년 프랑스 국왕 루이 필립 1세에 의해 창설된 레종 에트랑제의 장점은
일정 기간 복무할 경우 프랑스 국적을 취득할 수 있다.
때문에 모험심 강한 무국적자나 망명자 등이 많이 지원한다.
혹독한 훈련과 엄격한 군인 정신, 그리고 백전불패의 전투력으로 인해
강인한 남자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동경하는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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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동래부 병사와 백성들이 결사항전하는 모습을 그린 동래부순절도. |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 역시 용맹한 외인부대를 이끌며 전장을 누빈 장수였다. 이성계가 태어나서 성장한 함경남도 영흥은 당시 고려인과 여진족, 몽골족 등이 뒤섞여 사는 지역이었다.
따라서 고려 후기 수많은 외적들을 토벌하면서 전공을 세운 이성계의 군대에는 전투 능력이 뛰어난 이민족들이 많이 섞여 있었다.
조선의 1등 개국공신인 여진족 출신의 이지란 장군이 그 좋은 예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가장 특이한 외국 용병은
포르투갈에서 온 흑인 병사를 들 수 있다.
7년이나 계속되던 임진왜란이 거의 끝날 무렵인 1598년(선조 31) 5월 26일, 선조는 명나라의 장수 팽신고의 처소를 찾아가 술자리를 베풀었다.
이 자리에서 팽신고는 얼굴 모습이 아주 다른 신출귀몰한 병사를 선조에게 소개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호광(湖廣 : 중국의 호북, 호남, 광서, 광동 지역)의 극남(極南)에 있는 파랑국 사람입니다.
바다 셋을 건너야 호광에 이르는데, 조선과의 거리는 15만여 리나 됩니다.
조총을 잘 쏘고 여러 가지 무예를 지녔습니다.”
이에 선조는 “이제 흉적을 섬멸하는 것을 날을 꼽아 기대할 수 있겠소이다”라고 화답하며 반가워한다.
여기서 팽신고가 언급한 파랑국(波浪國)은 다름 아닌 포르투갈의 음차 표기이다.
그 날 팽신고가 데리고 온 포르투갈 병사는 3~4명에 불과했다.
그런데 선조는 왜 그 같은 소수의 병사를 보고 왜군을 물리칠 수 있다며 기뻐한 것일까.
그 이유는 바로 그들의 무서운 용모와 전투능력에 있었다.
당시 실록을 기록한 사관은 포르투갈에서 온 병사에 대해 다음과 같은 부연 설명을 덧붙여 놓았다.
“일명은 해귀(海鬼)이다. 노란 눈동자에 얼굴빛은 검고 사지와 온몸도 모두 검다.
턱수염과 머리카락은 곱슬이고 검은 양모(羊毛)처럼 짧게 꼬부라졌다.
이마는 대머리가 벗겨졌는데 한 필이나 되는 누른 비단을 복숭아 모양처럼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바다 밑에 잠수하여 적선(賊船)을 공격할 수가 있고
또 수일 동안 물속에 있으면서 어류를 잡아먹을 줄 안다. 중원 사람도 보기가 쉽지 않다.”
팽신고가 데려온 병사들은 바로 흑인 용병으로서, 험상궂은 용모와 더불어
물속에서 날카로운 톱으로 밑창에 구멍을 뚫어 배를 침몰시키는 놀라운 능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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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전서화첩'의 천조장사전별도에 해귀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좌측 아래 수레에 타고 있는 4명이 해귀이다. |
풍산 김씨의 내력이 수록된 '세전서화첩'에서도 이들에 대해
“해귀 4명은 살색이 옻칠을 한 듯하고 머리 색깔은 황적색으로 융단처럼 곱게 흩어져 있으며
잠수에 능하고 적의 배를 뚫는 사람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로부터 이틀 후 선조는 팽신고의 입회 하에
포르투갈에서 온 흑인 용병 3명의 칼솜씨를 직접 시험해 보고, 상으로 은자 한 냥을 내렸다.
이들의 명성은 왜군들에게도 그대로 전해졌다.
그해 9월 5일 전라도 관찰사 황신은
“왜적이 중국군이 얼마나 되는지를 묻기에 중국군의 수군(水軍)과 육군이 모두 40만 명인데,
해귀(海鬼)도 많이 나왔다고 엄청나게 불려서 말하였더니
왜적들이 모두 얼굴색이 변하면서 짐바리와 잡물(雜物)을 죄다 배에 실었다”라고 선조에게 보고했다.
당시에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병사한 후 왜군들이 본국으로 철수하는 시기여서,
이들 해귀에 대한 두려움은 더욱 컸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활약은 거기까지였다.
실제로 해전에서 적선을 침몰시켰다는 전과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이에 대해 실학자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명나라의 유정 제독은 왜를 공격할 때 한 번도 공을 세우지 못했다.
왜 해귀를 시켜 물속으로 들어가 왜선의 밑창을 뚫어 침몰시키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아무런 전과를 올리지 못한 흑인 용병들의 무능함을 꼬집었다.
조선 최초의 흑인 외인부대는 무시무시한 외모와 명성과는 달리 실질적인 전과는 하나도 없었던 셈이다.
이지란 장군 후 조선에서 가장 출세한 외국인 장수로는 동청례와 김충선이 있다.
함경도 회령 출신의 여진족이었던 동청례는 조선에 귀화하여 성종 때 무과에 급제한 후
연산군 때 위장(衛將)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위장은 임금의 호위군이자 왕실 친위부대인 금병을 지휘하는 종2품 무관직으로서,
요즘으로 치면 대통령 경호실장 같은 자리였다.
이에 비해 김충선은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의 좌선봉장으로 상륙했다가 조선에 투항한 일본 장수였다.
투항한 이유는 조선의 문물이 뛰어나서 흠모했기 때문이라는데,
조선군에 편입된 후 그는 왜군과의 전투는 물론 북방 오랑캐와의 전투 등에서 누차 큰 공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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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선 장군을 모신 대구의 녹동서원. |
그로 인해 선조는 그에게 김해 김씨의 성을 하사하고,
가선대부라는 종2품 벼슬을 내렸다.
22세 때 귀화한 김충선은 그 후로도 뛰어난 무예로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 때 많은 전과를 올렸다.
동청례와 김충선은 둘 다 무예뿐 아니라 뛰어난 글솜씨까지 갖췄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하지만 출신 성분의 한계를 딛고 이들이 중용된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동청례의 경우 국경 지역에서 소란을 피우는 야인들을 회유하고 설득하는 이점을 지니고 있었으며, 김충선은 왜군의 조총 기술을 조선에 전수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둘의 말로는 매우 달랐다.
동청례는 연산군이 쫓겨난 후 반정의 논공행상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다가
역모죄에 걸려 능지처참을 당하고 그의 처자는 종이 되었다.
이에 비해 김충선은 말년에 대구에 정착하여 향리 교화에 힘써서
현재 7천여 명에 이르는 후손을 둘 정도로 가문을 번성시켰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조선의 외인부대 역사상 가장 특이한 인물로는 박연을 들 수 있다.
박연은 조선의 정식 외인부대원 중 최초의 서양인이었다.
하멜을 만나 하루 종일 눈물만 흘리다
1627년 어느 날 경주의 해안가에 낯선 이국인 세 명이 보트를 타고 나타났다.
이들의 정체는 일본으로 향하던 중 풍랑을 만나 경주 인근의 외해에 표착한
네덜란드의 우베르케르크호 선원들. 물을 구하기 위해 본선에서 내린 보트를 타고 상륙한 이들은
이상한 외모를 보고 모여든 백성들에 의해 곧 사로잡혔다.
그 소식을 들은 우베르케르크호는 그들을 버려두고 닻을 올려 줄행랑을 쳐버렸다.
관가로 넘겨진 이국인 중에서 나이가 제일 많고 보스 격이었던 이는
당시 33세로서 네덜란드 데리프 시 출신의 얀얀세 벨테브레.
그리고 그의 두 동료는 라이프 출신의 드리크 히아베르츠와 암스테르담 출신의 얀 피에테르츠였다.
이후 세 사람은 동래부사에 인계되어 부산의 왜관을 통해
원래 그들의 목적지인 일본으로의 송환이 추진되었다.
하지만 왜관에서는 그들이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를 들어 인도를 거부했다.
그렇게 갈 곳 없이 부산에 머물고 있던 그들을 불러올린 이는
서인 세력과 함께 광해군을 몰아낸 조선의 제16대 왕 인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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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 고향인 네덜란드 데리프 시에 세워진 박연 동상. |
인조는 정권을 잡자마자 이괄의 난과 후금이 일으킨 정묘호란 등으로 인해 대내외적으로 좋지 않은 상황에 처해 있었다.
강력한 군사력이 필요했던 인조는 한양으로 불러올린 세 명의 네덜란드인들을 훈련도감에 편입시켜 대포의 제작법과 사용법을 가르치게 했다.
훈련도감은 임진왜란 중인 1593년 8월 임시기구로 설치되어 상설기구로 정착한 조선 후기의 중앙 군영이었다.
따라서 훈련도감은 특히 전쟁에 필요한 화포의 취급과 연습, 사격훈련 등에 중점을 두었는데, 병기 개발을 위한 신기술의 도입을 위해서는 그들과 같은 서양의 이국인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훈련도감군은 포수(砲手)ㆍ살수(殺手)ㆍ사수(射手)의 삼수군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포수는 총통을 다루는 병사였고, 살수는 창과 검을 다루는 병사, 사수는 활을 쏘는 병사로서, 훈련도감군의 주축은 포수였다.
훈련도감군의 또 하나 특징은 의무군역이 아닌 급료병이었다는 점이다.
조선 전기의 중앙 군사조직인 오위는 의무군역을 해야 하는 양인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하지만 포(布)를 내고 군역을 대신하는 양인들이 늘어나면서
임진왜란 때에 이르러서는 거의 유명무실한 군사조직으로 전락해 있었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새 군사 편제에 의해 설치된 것이 훈련도감으로서,
훈련도감에 속한 군사들은 매월 쌀 4~9말씩을 급료로 받았다.
우베르케르크 호의 선원 3명이 훈련도감에 배속된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 홍이포의 제작이었다.
그 무렵 명나라를 통해 전래된 서양 대포 중 하나인 홍이포는 가장 성능이 좋은 대포 중 하나였다.
당시에는 네덜란드를 아란타 또는 하란타, 하란, 홍이, 홍모 등으로 불렀다.
그렇게 볼 때 홍이포는 곧 네덜란드인들이 만든 대포로서,
네덜란드 선원이었던 그들이 홍이포에 대해 가장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홍이포의 관련 기술을 조선에 전수하던 중 사건이 터졌다.
국호를 청으로 바꾼 후금이 12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다시 조선으로 쳐들어온 것.
훈련도감에 소속되어 있던 이들도 당연히 전쟁터로 나가게 되었고,
병자호란의 와중에 그만 두 명의 네덜란드인이 낯선 이국 땅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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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화성에 있는 홍이포. |
이때 혼자 살아남은 이가 바로 박연,
즉 얀얀세 벨테브레이다.
박연이라는 그의 조선 이름은 문헌에 따라 朴淵ㆍ朴延ㆍ朴燕 등으로 적혀 있는데, 아마 벨테브레에서 ‘박’이라는 성을 취하고 얀얀세의 얀에서 ‘연’이라는 이름을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
정조 때 규장각에 재직했던 조선 후기 문신 윤행임의 시문집인 ‘석재고’를 보면 박연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박연은 하란타(河蘭陀 ; 네덜란드)인이다.
조정에서는 훈련도감에 예속시켜 항왜와 표류해온 중국인을 거느리게 했다.
박연의 이름은 호탄만이다. 병서에 재주가 있고 화포를 매우 정교하게 만들었다.
박연은 그 재능을 살려 나라에 홍이포의 제(制)를 전하였다.”
'항왜'란 김충선처럼 조선에 투항한 일본인을 일컫는 말이다. 향화왜 또는 귀순왜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임진왜란 초기만 해도 조정의 허가 없이 살해당하는 항왜가 많았다.
그러나 1594년 이후 항왜의 중요성을 깨달은 조정이 수용 정책을 펴자 수많은 일본군들이 투항해 왔다.
그 중에서 검술이 뛰어난 왜장급의 항왜들은 훈련도감에 배속되어 검술 교관 등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박연으로 하여금 이 같은 항왜와 표류해온 중국인들을 거느리게 했다는 걸로 봐서
당시 훈련도감 내에는 그들로만 구성된 일종의 외인부대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럼 왜 석재고에는 박연의 원래 이름을 얀얀세 벨테브레가 아닌 호탄만(胡呑萬)으로 기록하고 있는 걸까.
그것은 박연과 함께 표착한 네덜란드 동료들이 그를 호탄만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이는 우레브케르크호에서의 박연의 지위를 알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네덜란드어 중 호프만(hopman)이라는 단어는 대장, 우두머리의 뜻을 지니고 있는데,
이것이 조선인의 귀에는 호탄만으로 들렸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즉, 박연은 보트를 타고 표착해온 3명의 네덜란드 선원 중 우두머리급에 해당하는 인물로서,
선장까지는 몰라도 갑판장이나 항해사 정도의 고급 선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같은 추정은 효종의 사위인 정재륜의 수필집 ‘한거만록’을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이 책에서 정재륜은 박연에 대해 “위인이 뛰어나고 훌륭하며 깊이 헤아리는 바가 있다”고 적고 있다.
큰 키에 노란색 머리, 푸른색 눈동자를 지닌 박연은
그가 보고 들은 동양 각국의 풍물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즐겼고,
선악과 화복의 이치 등에 대해 자주 말하는 도자(道者)로서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왕실과 조정의 대신들에게서 인품과 자질을 인정받고 있던 박연은
급기야 조선의 무과에 장원 급제하기에 이른다.
1648년(인조 26) 8월 25일 인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정시를 설행하여 문과에 이정기 등 9인을, 무과에 박연 등 94인을 뽑았다”고 되어 있다.
또 <증보문헌비고>의 ‘본조등과총목’에도 박연이 장원으로 급제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박연의 활동시기를 감안할 때 무과에 급제한 박연이
바로 조선 최초의 외인부대장이었던 네덜란드의 얀얀세 벨테브레임이 거의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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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 일행이 타고 온 배를 재현한 제주도의 하멜전시관. |
그 후 박연이 조선왕조실록에 다시 등장한 것은
1653년(효종 4) 8월 6일이다.
기록을 보면 제주목사 이원진이
“배 한 척이 고을 남쪽에서 깨져 해안에 닿았기에 대정현감 권극중(權克中)과 판관(判官) 노정(盧錠)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보게 하였더니,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르겠으나 배가 바다 가운데에서 뒤집혀 살아남은 자는 38인이며 말이 통하지 않고 문자도 다릅니다.”라고 보고하고 있다.
이에 조정은 박연을 보내 그들을 조사하게 했다.
직접 제주도로 내려가 그들과 대면한 박연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눈 후 바닷가에 주저앉아 하루 종일 옷소매가 다 젖도록 울었다.
제주도의 말이 통하지 않는 이국인들은 바로 자신의 고국인 네덜란드 선원들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에 표착한 지 27년 만에 박연이 만난 그 네덜란드인들은 바로 하멜표류기로 유명한 하멜 일행이었다.
박연이 그처럼 눈물을 흘렸던 까닭은 네덜란드에 두고 온 아내와 자식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다.
박연은 조선인 여자와 다시 결혼하여 아들과 딸을 두고 있었지만,
고국 사람을 만나자 그간 참았던 향수를 주체하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하멜 일행은 박연이 책임자로 있던 훈련도감의 외인부대에 배속되었지만,
청나라 사신을 통한 탈출 기도 사건으로 인해 전라도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그 후 하멜 일행은 탈출에 성공하여 1664년 조선을 떠났고, 박연은 또다시 혼자 조선에 남겨졌다.
조선 최초의 서양인 무관이기도 했던 박연은 병기 개발과 개량에 많은 공헌을 했다.
하지만 북벌 정책을 추진하던 효종이 1659년 5월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면서
박연의 활약상도 자취를 감추고 만다.
효종의 붕어와 함께 병기 개량에 의한 군사기술의 축적 의지도 점차 쇠퇴해갔기 때문이었다.
박연이 낳은 자식 역시 훈련도감에 배속되어 활동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사후 그의 자손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300여 년이 흐른 지난 1991년 3월, 박연의 13대손이 불쑥 나타났다.
그 자손은 박연의 한국인 핏줄이 아닌, 네덜란드의 본처가 낳은 후손이었다.
당시 노틀담대 철학교수이던 헹크 벨테브레 씨는
자신의 13대조인 박연의 뿌리를 찾아 제주에서 4박 5일 동안 머무른 뒤 출국했다.
그때 헹크 씨는 대한민국 어디선가 살고 있을 13대조의 후손들을 만나보고 싶다는 의사를 타진했다.
또 박연의 고향인 데리프 시에는 현재 약 600여 명의 박연 후손들이 살고 있다고 전했다.
조선 최초의 서양인 외인부대장을 조상으로 둔 한국인 자손들이 살아 있다면,
박씨라는 성에 아마 푸른색 눈동자나 유난히 오똑한 코를 지녔을지 모른다.
과연 박연의 한국 핏줄들은 우리나라에 몇 명이나 뿌리를 내리고 있을까.
- ⓒ ScienceTimes, 2008.07-17, 07-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