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가는(문화)

석사자상(石獅子像)의 美

Gijuzzang Dream 2008. 9. 16. 18:59

 

 

 

 

 석사자상(石獅子像)의 美


 

우리나라 사찰이나 고궁 어느 곳을 가든지 쉽게 만날 수 있는 석사자상은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친근감을 준다. 

언제나 한쪽 구석에 보잘 것 없는 조형물로 외면당했지만

그 석사자상이 가진 조형감이란 우리 고대 불교조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생동감이 있으면서도 단순하고 익살스러운 미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석사자상은 일제강점기 때 대부분 도괴되거나

일본으로 반출되는 등 많은 수난을 거쳐 왔으며

지금까지 그 소재지조차 파악되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제 석사자상을 통해 소박하고 아름다운 미를 상기함으로써

우리 문화재의 소중함을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러한 사자상이 왜 불교의 사찰이나 불상, 석탑, 부도, 석등, 능묘, 궁궐 등에 쉼없이 나타나고 있고

지금도 여전히 표현되고 있는가? 그것은 어떠한 이유에서 연유된 것일까?

더욱이 언제부터 제작되었고 그 등장배경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등등 수많은 의문이 따르게 된다.

물론 사자가 불교의 여러 조형물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데에는

보다 근원적이고 구체적인 이유가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흔히 사자란 두려움이 없고 모든 동물을 능히 조복시키는 ‘백수(百獸)의 왕’으로서

신격화되거나 제왕으로 상징되었으며

또 한편으로는 그 용맹함 때문에 수호신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러한 이유로 고대 인도에서는 제왕과 성인의 위력을 사자에 비유하여

불교경전에서도 석가를 ‘인중사자(人中獅子)’라 칭하고

그 설법 또한 모든 희론(戱論 ; 쓸모없는 이론)을 멸하는 것에서 ‘사자후(獅子吼)’라 하였다.

 

더욱이 『고승법현전(高僧法顯傳)』에서는

사자가 크게 울면 모든 마귀들이 두려워하여 따른다는 기록이 있으며

『화엄경』이나『법화경』에는 ‘사자분신(獅子奮迅)’이라고 하여

부처가 대비(大悲)를 일으키는 것을

마치 사자가 맹렬하게 활동하고 있는 모양에 비유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또한『대지도론(大智度論)』권 4에는 불상의 32길상 중에

‘상신여사자상(上身如獅子相 ; 상체의 위용과 단정함이 사자와 같다)이라든가

‘사자협상(獅子頰相 ; 두 볼의 통통함이 사자와 같다)’ 등

부처의 상징적인 존재로서 사자를 비유했을 뿐 아니라

석가불, 비로자나불 및 문수보살의 대좌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찍이 서울의 뚝섬에서 발견된 금동불좌상의 대좌 좌우에 배치된 사자상에서

불교적인 성격을 엿볼 수 있다.

뚝섬 출토 금동불좌상, 삼국 5세기,높이 4.9cm, 국립중앙박물관


사자좌(獅子座)는 대좌의 형태에서 유래된 이름이 아니라

부처가 사자와 같은 위엄과 위세를 가지고 중생을 올바르게 이끈다는 의미에서 나온 말이다.

이와 같이 대좌의 일부로 조형화된 사자상은 부처의 위엄을 상징하는 역할 보다는

점차 수호적인 성격이 강해지면서 석탑이나 석등, 능묘 주위에 환조상으로 표현되거나

석조물의 표면을 장식하는 장엄용의 부조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탑 주위에 독립된 사자상을 배치하는 형식은

신라시대의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에서 이른 시기의 예를 볼 수 있다.

분황사 모전석탑(국보 제30호)북동쪽에 위치한 돌사자의 좌대, 다리, 발을 복원하여 제모습을 찾았다. 

원작업은 다리가 망실된 채 기우뚱하게 앉아 있던 북동쪽 돌사자의 원래 모습은

남동쪽 돌사자를 모델로 새로운 석재를 이용하여 보강하였다.

 

복원하기 전에 돌사자의 상태는 출처불명의 돌기둥과 탑에 사용되었던 모전석으로

앞다리를 받치고 있었고 좌대의 절반 이상이 결실되어 민원이 제기된바,

사적의 미관을 해치고 있는 요소로 지적되고 국가지정 문화재로서의 품격에 걸맞지 않았으나

복원작업으로 당당한 원래의 모습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2006년 12월)

 

 

 

 

 분황사 돌사자 정면 (복원전)  / (복원 후)

 

 

 

분황사 돌사자 측면 (복원 전) / (복원 후) 

 

  

 분황사 돌사자(복원후)

 

 

통일신라시대의 불국사 다보탑과 의성 관덕동 삼층석탑, 광양 중흥산성 삼층석탑 등에서도

기단 위의 네 모서리에 4구의 사자상이 놓여 있었으나 그중 일부는 일제강점기 때 없어졌다.

 

특히 의성 관덕동 삼층석탑의 석사자상은 현재 2구만 남아 있는데

암사자상은 세 마리의 새끼를 품은 채 한 마리에게 젖을 먹이고 있는 형상으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예일 뿐 아니라 동아시아에서도 가장 오래된 귀중한 조각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의성 관덕동 삼층석탑 암사자상

통일신라 9세기, 높이 50cm, 국립대구박물관


또 한편으로 석탑 주위에 배치되었던 석사자상들이

탑 구조의 중요한 일부가 되어 특이한 형식의 4사자석탑(四獅子石塔)이 나오게 되었다.

이 4사자석탑은 상층기단의 네 귀퉁이에 사자를 한 마리씩 배치하여 탑신부를 받치게 하고

그 중앙에 인물상을 안치했으나 시대가 내려오면서

인물상이나 4사자의 연화받침이 생략되는 등 형식화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석탑형식은 과연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일반적으로 4사자석탑은 불국사 다보탑의 상층기단에 5개의 기둥을 세우고

그 주위에 4마리의 사자를 배치한 형식과 관련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중앙의 기둥 대신에 인물상을 배치하고 4개의 기둥자리에는 석사자상을 두었다는 것이다.

화엄사 4사자삼층석탑, 통일신라 9세기, 전라남도 구례 화엄사


불국사 다보탑에는 원래 4구의 석사자상이 배치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1구밖에 남아 있지 않다.

불국사를 최초로 방문한 일본인 학자 세키노타다시[關野貞]가

1902년 이 탑을 조사했을 때에는 기단의 사방에 3구가 있었으나

1909년에 다시 왔을 때에는 비교적 완전한 형태를 갖춘 2구가 없어졌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의 불국사 다보탑(『조선고적도보』 권 4, 1916)
불국사 다보탑 석사자상, 통일신라 8세기


전하는 말에 의하면, 석사자상 1구(또는 2구)는

일본 우에노[上野] 서양헌(西洋軒)의 정원에 진열되어 있고

나머지 1구는 파리박물관에 있다가 영국 대영박물관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다보탑의 석사자상에 대해서는 그동안 수차례에 걸쳐 한일회담 때 논의된 바 있으며

또 일본의 방송과 라디오까지 동원하여 수소문해 봤지만 아직까지 행방이 묘연할 뿐이다.

사자를 석조물의 장엄에 이용한 또 다른 예는 사찰의 법당이나 불탑 앞에 세워진 석등에서 볼 수 있다.

석등의 간주석 대신에 두 마리의 사자가 상대석을 받치고 있는

이른바 ‘쌍사자석등’이라고 부르는 독특한 형식이 통일신라시대에 크게 유행하여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만들어졌다.

중흥산성 쌍사자석등, 통일신라 9세기, 국립광주박물관


이와는 달리 능묘의 사방을 지키는 석사자상은 독립된 환조상인 석수(石獸)로 나타나고 있다.

능묘 앞의 석사자상은 중국 당대(唐代)의 묘의제도(墓儀制度)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원래 석사자상은 능침(陵寢)의 문을 수호하는 것으로

들어오는 입구에 한 쌍을 마주보게 세우며 왕릉에만 가능한 것이었다.

괘릉 석사자상, 통일신라 798년, 경주 괘릉


이러한 석사자상이 통일신라시대의 왕릉 앞에 배치된 것은

당시에 유행했던 탑의 사자 형식과 당대의 묘제가 혼합되어

독특한 능묘 형식으로 발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밖에도 경복궁 근정전 주변의 석조난간이나 계단, 다리 아래에 조각된 석사자상이나

석조 건축물의 모서리 기둥에 표현된 석사자상은

근엄하거나 용맹스럽기는 커녕 하나같이 장난끼 많은 앙징스러운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어

우리들의 흥미나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사자입상, 통일신라, 높이 99cm, 국립경주박물관


이렇듯, 우리가 그냥 지나쳐 버리는 평범하고 소박한 석사자상에서도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유심히 바라보게 되면 어느 새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와

옛사람들과의 어떤 미적인 공감대를 느끼게 되며

또 잊어버렸던 오래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여유로운 마음이 되어 이 석사자상의 앞을 쉽사리 떠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 문화재청 인천국제공항 문화재감정관실 이숙희 감정위원

- 문화재청, 문화재칼럼, 2008-09-16 

 

 

 

 

경주 분황사석탑(사적 제30호) 석사자상에 대한 수리 복원과정 내용

 

경주 분황사석탑 돌사자에 대한 수리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2005년 봄,

분황사로부터 석사자의 흉한 외관 모습에 대한 개선 건의를 적극 받아들여

돌사자상의 원형복원을 검토하게 되었다.

이후, 2006년 4월 문화재위원회의 심의와 수차례에 걸친 관계전문가의 자문회의를 거쳐,

2006년 12월 석탑 기단부 북서 모서리에 자리한 돌사자를 거의 원형대로 복원하기에 이르렀다.

 

 

돌사자에 대한 복원과정은 먼저, 외관상 가장 비슷한 동남편 사자의 다리를 모델로

실측도와 3D스캔 도상을 얻은 후, 이를 근거로 유토를 사용한 가형상을 제작하였다.

또한 수지의석(樹脂擬石)과 동일석재를 응용하여 직접 돌에 조각을 하는 방법으로

돌사자의 결실된 부분의 모형을 완성하였으며

완성된 부분은 에폭시 수지(Araldite AW106 Hardener 953)를 원래의 문화재와 단단히 접착시키고

경화가 되면 비슷한 질감이 나도록 도드락다듬(석재표면을 다듬는 방법의 하나로 격자무늬가 있는

도드락망치를 이용한다)을 하였다.  

이후 복원부분에 대한 고색 처리를 하여

분황사 돌사자 고유의 색과 전반적인 조화가 이루어지도록 하였는데,

여기에 사용된 재료는 천연안료를 사용하여 완성하였다.

 

분황사석탑의 돌사자는 원래 기단 위에 6구가 있었으나

이중 규모가 작은 2구는 일제강점기에 경주박물관으로 이전되었고,

현재는 4구의 돌사자가 기단부 모서리에 각각 배치되어 남아 있는 상태이다.

사자상은 높이 117.5㎝이며 재질은 화강암에 원각좌상(圓脚坐像) 형식을 하고 있다.

 

신라지역에서 원각으로 돌사자가 조형된 유적은

성덕왕릉(聖德王陵), 괘릉(掛陵), 헌덕왕릉(憲德王陵), 흥덕왕릉(興德王陵) 등의 고분과

불국사 다보탑(多寶塔),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四獅子石塔) 등에서 볼 수 있다.

- 경연고고(慶硏考古) 제1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