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 내소사 / 수성당
부안 내소사
'눈 내리는 날 오르는 내소사'.
수첩 맨 위에 큼직하게 적어놓고 기다려 온 내 겨울스케치 코스이다.
어쩌면 내 안에 자리하고 있는 그리움인지도 모르겠다. 그 그리움이 밤사이 하얗게 내렸다.
반사적으로 숙소를 나서 내소사 전나무 숲길에 들어섰다. 이른 아침 눈밭에서 맡는 전나무 향이 청신하다. 사위는 고요하다 못해 긴장감이 흐르고,
전나무 가지에 앉은 눈은 소리 한번 크게 지르면 와르르 쏟아져 내릴 것 같다.
그동안 쌓인 마음의 먼지를 털어 내며 전나무 숲길을 걸어 천왕문에 이르렀다.
어둠 속에 서있는 사천왕상이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으라는 듯 눈을 부라린다.
천왕문을 지나 경내에 들어서자 나이를 알 수 없는 노거수가 시야에 꽉 차게 들어온다.
스님들 얘기로는 1,000살 가까이 먹은 나무라고 했다.
이 노거수가 바로 이 마을의 할아버지 당산으로 일주문 앞 할머니 당산나무와 한 쌍을 이룬다.
내소사(來蘇寺)는 백제 무왕 34년(633) 혜구두타가 세운 절이다.
무조건 화려해야 하고 커야하는 시류에 물들지 않고,
작지만 오래된 절 분위기가 잘 살아 있어 정감이 가는 절이다.
이 절이 세워질 당시는 소래사(蘇來寺)라고 불렀다는데 언제부터인가 내소사(來蘇寺)로 부르고 있다.
당산나무를 지나 돌로 쌓은 계단을 하나 더 오르노라니 봉래루가 길손을 맞는다.
봉래루는 2층 누각의 맞배지붕 건물로
1914년 내변산 사자동에 있었던 실상사에서 옮겨왔다는 기록이 있다.
주춧돌의 높낮이가 제각각 틀릴 뿐 아니라,
주춧돌 위에 올려놓은 기둥들도 짧았다 길었다 천연덕스럽기만 한데, 삐뚤고 짧은 나무토막 하나라도
버리지 않고 이렇듯 훌륭하게 재목으로 쓴 옛사람들의 지혜가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내소사 안마당은 보물창고다.
마당 가운데에는 고려시대 3층 석탑이 서 있고, 오른쪽에는 요사가 들어서 있는데
18세기 동국진체(東國眞體)의 명필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썼다는
설선당(說禪堂)이라는 편액의 '설'자 삐침이 호방하게 하늘로 솟구친다.
정면에는 자연석으로 쌓은 축대 위에 보물 제291호로 지정된 대웅보전이 남쪽을 향해 자리하고 있다.
17세기 사찰건축 중에서도 매우 빼어난 조형미를 간직하고 있는 이 건물은
못을 쓰지 않고 목침을 끼워 맞춘 단층 팔작지붕에 다포계 양식으로 공포의 짜임이 외3출목 내5출목으로 다채롭게 구성되어 있다.
이렇게 공들여 지은 건물이라서 그럴까? 내소사 대웅보전은 유명한 전설들을 간직하고 있다.
사미승이 감춰 놓은 목침이 부정탔다며 기어이 목침을 빼놓고 대웅보전을 지었다는 이야기나
푸른 새가 단청을 칠하다 날아가 아직도 대웅보전 안쪽의 단청이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는 전설은
대웅보전에 들인 공에 대한 반증일 것이다.
산길을 올라 바라본 절집은 나무 위에 떨어지는 눈소리만 큰소리로 들릴 뿐 고요하다.
간밤의 그리움은 편안함을 넘어 애잔함으로 돌아선다.
"이걸 두고 돌아서야 하나..."
- 허철희(kreego6153@hanmail.net) / ⓒ 전라도닷컴
부안 수성당 거녀(巨女) ‘개양할미’가 사는 집 | ||||||||
▲ 수성당이 자리한 적벽강 용두암 옆 여울골. 깎아지른 절벽 위에 집 한 채가 있다. 변산반도의 끝자락인 변산면 격포리 죽막동 적벽강 용두암(사자바위). 여해신(女海神) 개양할미를 모신 당집 수성당(지방유형문화재 제58호)이 자리한 곳이다. 아득한 옛날에 수성당 옆 ‘여울골’에서 나와 서해바다를 열었다. 그리고 수심을 재고 풍랑을 다스려 지나는 선박의 안전을 도모하고, 어부들로 하여금 풍어의 깃발을 올리게 했다고 한다. 여울골 위 절벽 위에 수성당을 짓고 모셔왔다. 개양할미와 개양할미의 딸 여덟을 모신 곳이라 하여 구랑사(九娘祠)라 부르기도 한다. 자신은 막내딸과 함께 이곳에 머물며 서해바다를 총괄했다고 한다. 혹은, 딸 일곱을 낳았는데 그들이 수성당에서 내려다보이는 칠산바다 일곱 섬의 지킴이가 되었다고도 한다. 그러다 곰소 앞바다에 있는 ‘계란여’라는 둠벙에 빠져 버선목이 좀 젖자 개양할미는 치마에 돌을 담아다 이 둠벙을 메워버렸다고 한다. 도대체 얼마나 거녀(巨女)였으면 바다를 걸어 다녀도 버선도 젖지 않았을까. 여해신의 거대 막강한 신력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예부터 바다에 국가적 제사를 지내왔던 곳 ‘道光 三拾年 庚戊 四月二十八日 午時 二次上樑’ 상량문으로 미뤄 1804년, 그러니까 적어도 200여 년 전에 이 신당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1992년 전주박물관에서 이러한 개양할미 전설이 서려있는 수성당 주변을 발굴하여 삼국시대 초기 이래로 바다 혹은 해신에게 제사를 지내왔던 곳임을 확인하였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항아리와 잔, 병과 토기류, 청동과 철제 유물, 석제 모조품 등 발굴된 제사 유물은 종류도 다양했다. 지정학적으로 수성당은 선사시대 이래로 중국이나 북방의 문화가 한반도 남부로 전파되던 해로상의 중요 지점이었으리라 여겨진다. 삼국시대가 되면 초기백제의 근거지인 한강 하류유역으로 통하는 길목이 되고, 5세기 후반 백제가 남천한 후에는 웅진과 사비로 들어가는 길목이었으리라. 또한 이곳의 해양환경을 살펴보면 연안반류(沿岸反流)가 흐르고, 주변에 섬들이 많아 물의 흐름이 복잡하며 바람도 강해서 예로부터 조난의 위험이 컸던 곳이다. 그러기에 이곳에 신당을 짓고 바다 혹은 해신에게 제사를 올렸을 것이다. 또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사람들의 가슴 속에는 개양할미가 살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세월이 바뀜에 따라 사람들은 개양할미의 그 거대 막강한 신력을 거부하고, 개양할미의 그 자연친화적 순응을 거스르려고만 한다. 바다는 개발의 대상이 되어 황폐화되어 가고 있고, 어촌공동체는 무너져 가고 있다. 수성당 지근에서 벌어지고 있는 새만금사업이 그것이다.
▲ 변산반도의 끝 격포리 절벽 위에 있는 수성당. 여해신(女海神) 개양할미는 이곳에서 개발의 미명 아래 무너지는 개양할미의 신력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역대 왕조들은 바다를 멀리 해왔다. 우리의 그 뿌리깊은 유교사상과도 무관치는 않으리라. 士·農·工·商에도 끼지 못하는 게 어부라는 직업이다. 어부들은 목숨 걸고 고기 잡아 왕후장상 · 양반들의 입을 호사시켜 주건만, 그들은 대뜸 ‘뱃놈’이라 부르며 어부들을 천대했다. 그러한 문화는 오늘에도 이어지고 있다. 입으로는 ‘블루 레볼루션’을 찾고 ‘인류의 미래는 바다에 있다’고 외치면서도, 산 깎아다가 갯벌을 모조리 메우고 있다. 그러니 상처투성이인 국토는 차치하고라도 고기들은 연안에서 자취를 감출 수밖에 없다. 그래도 입맛은 살아있어 생선 수입해 포장 뜯어보니 납꽃게, 납병어, 납조기에 납갈치 아니던가. 수성당 개양할미의 통곡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 허철희, '부안21(www.buan21.com)' , 《새만금 갯벌에 기댄 삶》책을 펴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