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 미술관 테마전] 왕의 글(御製)이 있는 그림
국립중앙박물관미술관 테마전
"왕의 글이 있는 그림" 개최
ㅇ전시명 : 미술관 테마전 “왕의 글이 있는 그림”
Paintings with Royal Colophons
ㅇ전시기간 : 2008. 8. 26 - 12. 14
ㅇ전시장소 : 미술관 1 회화실 (상설전시 2층)
ㅇ전시작품 : <제갈무후도>, <기사계첩>(송성문 기증, 보물 929호)
<사현파진백만대병도>(남궁련 기증) 등 11점
국립중앙박물관(관장 최광식)은 테마전 “왕의 글이 있는 그림”을 개최한다.
미술관 1 회화실에서 8월 26일(화)부터 12월 14일(일)까지 열리는 이번 테마전에는
모두 11점의 작품이 전시되며,
그 중 <제갈무후도(諸葛武侯圖)>, <사현파진 백만대병도(謝玄破秦百萬大兵圖)>(남궁련 기증),
<온궁영괴대도溫宮靈槐臺圖> 3점은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이번 테마전은 왕이 지은 글, 즉 ‘어제(御製)’를 키워드로 하여 조선시대 회화를 조명한다.
전시되는 모든 작품에서 왕이 직접 쓰거나, 신하가 대신 쓴 어제를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 서화를 애호했던 여러 왕들은 수시로 어제를 지어 그림을 감상한 소감을 표현했다.
이 어제들은 예술에 대한 일종의 ‘후원자’ 역할을 했던 왕의 모습을 보여준다.
예술의 후원자로서 왕이 지닌 취향은 회화 양식에 반영되기 마련이다.
전시된 작품은 대부분 청록과 금채로 화려하게 그려져 있어,
조선시대 궁중에서 애호했던 화풍의 한 면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이번 테마전에서는 숙종, 영조, 정조의 어제가 있는 작품을 통해
조선후기에 이룬 뛰어난 예술적 성취를 조명해 보고자 하였다.
나라의 통치자로서 왕이 지은 어제 제찬(題贊)에는 작품에 대한 예술적 감상뿐만 아니라,
나라를 다스리는데 몰두해 있는 왕의 고민과 정치적 견해가 깃들어 있다.
숙종은 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승상(丞相) 제갈량(諸葛亮)의 초상화에
그 충성심을 기리는 어제 찬문을 써 넣었다.
이 밖에 《기사경회첩》의 영조 어제,〈온궁영괴대도〉의 정조 어제에서는
군주의 권력을 보다 효과적으로 발휘하고자 했던 왕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이처럼 그림 속 어제를 통해서 왕이 감상했던 그림에 대한 흥미로운 정보,
왕이 지닌 특별한 취향, 나아가 정치적 지향 등을 살필 수 있다.
테마전 “왕의 글이 있는 그림”은
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회화 활동의 다양한 면모를 찾아보는 특별한 기회가 될 것이다.
이번 전시에 맞추어 작품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담은 소도록을 발간하며,
9월 3일(수), 10월 22일(수) 야간에는 “큐레이터와의 대화”를 진행하여
전시를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관람객들에게 제공한다.
[사현파진백만대병도: 사현(謝玄)이 전진(前秦)의 백만대군을 물리치다]
조선 1715년 / 병풍 / 비단에 색 / 170×418.6cm
중국 동진(東晉)의 장수 사현(謝玄)이 8만의 병사로 전진(前秦) 왕 부견(符堅)의 백만대군을 물리쳤던
유명한 비수(淝水) 전투를 그린 그림이다.
무수한 병사와 말이 험한 산모퉁이를 커다랗게 감싸면서 휘몰아치듯 구성한 화면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숙종은 비수 전투를 소재로 모두 4편의 어제를 지었다.
<사현파진백만대병도>의 어제는 그 중 한 편으로,
역사적 사건에서 얻은 교훈을 회화를 통해 드러내려는 왕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조선 1695년 / 족자 / 비단에 색/ 164.2×99.4cm
중국 삼국시대에 유비(劉備)를 도와 촉(蜀)을 이끌었던 명재상 제갈량(諸葛亮, 181-234)을 그린 그림이다.
평소 즐겨 입던 학창의(鶴氅衣)와 윤건(綸巾)을 착용한 평온한 모습으로,
역사적으로 존경받는 인물을 그린 상징적 초상화이다.
화면의 글은 숙종의 어제이다.
제갈량의 일생을 묘사한 긴 시를 써서 그를 경모(敬慕)하는 마음을 나타냈다.
숙종은 제갈량과 같은 충신을 얻어 나라를 다스리고 싶은 군왕의 뜻을 내보임으로써
신하들의 충성심을 유도했다.
[기사경회첩/영조의 어제어필御製御筆] [기사경회첩 / 영수각친림도]
장득만張得萬(1864-1764) 등 / 조선 1744-1745년 / 화첩 / 비단에 먹과 색 / 44.0×64.9cm
《기사경회첩》은 1744년에 치러진 영조의 기로소 입소 행사를 기념하여 제작한 화첩이다.
영조의 어제가 세 편 실려 있다.
영수각은 기로소에 들어갔던 역대 왕[영조 당시에는 태조와 숙종]의 이름을 기재한 ‘어첩(御帖)’을
보관한 전각이다. 영조는 기로소에 들면서 영수각에 친림하여 어첩에 제명(題名)하였는데,
〈영수각친림도〉는 이 장면을 나타낸 그림이다.
영조는 어제에서 선왕으로부터 자신을 통해 왕세자로 이어지는 왕실의 종통(宗統)을 강조하여
왕의 권위를 굳건히 하였다.
|
[온궁영괴대도] |
<온궁영괴대도>는 사도세자가 행차하여 활쏘기를 했던
온양행궁(溫陽行宮)의 영괴대(靈槐臺)를 그린 그림이다.
사도세자는 활쏘기를 한 후 회화나무를 세 그루 심었다.
그가 죽고 30여 년이 흘러 나무가 울창하게 자랐다.
이 사실을 보고받은 정조는 ‘영괴대’라는 글씨를 직접 쓰고 비명(碑銘)을 지어 비석을 세우도록 하였다.
〈온궁영괴대도〉에는 회화나무와 비석, 활터 등이 정확히 표현되어 있다.
아버지 사도세자를 추모하고 현창(顯彰)하려는 정조의 의도를 살펴볼 수 있다.
조선왕실의 그림 애호와 후원
- 백인산(간송미술관 연구위원)
▲ 완물상지(玩物喪志)와 재도지구(載道之具)
“음악이나 여색, 사냥뿐 아니라 거문고와 바둑, 책, 그림, 문장, 활쏘기와 말타기 같은 것은
다 뜻을 잃게 하는 것이므로 경사(經史)를 보아 마음을 맑게 하고 정치에 힘쓰는 것을 근본으로 삼고, 모든 기예에 관한 것은 유념하기 마소서.”
서화를 무척 좋아하여 궐내에 각종 기화요초와 금수를 갖추어놓고 화공들에게 그리게 할 정도로
그림을 좋아했던 성종(1457-1493)에게 대간들이 간언을 한 내용 중 일부이다.
이는 기예나 외물에 현혹되어 본지(本志)를 잃는
이른바 ‘완물상지(玩物喪志)’를 경계하고자 하는 유학자들의 전통적인 관념에 기인한 것이다.
이렇듯 회화를 말예(末藝)나 천기(賤技)로 보고 이에 탐닉하는 것을 온당치 않은 일로 여기는 경향은
조선 사회에 일반적인 통념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성리학의 집대성자인 주자(朱子)가 서화(書畵)를 ‘재도지구(載道之具)’
즉 ‘도학(道學)을 실어 전달해주는 도구라 하여 그 기능을 높이 평가하였으므로
주자성리학에서는 처음부터 예술을 중시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성리학을 국시(國是)로 천명한 조선에서는
어느 시대보다도 서화 발전이 두드러졌던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특히 조선 개국의 주역들이 시문서화(詩文書畵) 등 예술을 필수 덕목으로 하는
학예겸수(學藝兼修)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던 만권당(萬卷堂)에 유학하여
성리학을 익힌 문인들의 계보를 잇는 성리학도들이었다는 사실은
조선시대 사회발전을 이해하는 주요한 열쇠임이 틀림없다.
▲ 그림을 좋아했던 국왕
조선시대 국왕이나 왕실에서는 실용이나 감계, 교화의 목적, 혹은 개인적인 취미로 서화,
그 중에서도 그림에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가졌던 이들이 적지 않다.
조선 전기에는 세종, 문종, 성종,
중기에는 인종, 선조,
후기에는 숙종, 영조, 정조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들은 화원들을 적극 독려하고 후원하는가 하면,
다양한 그림을 감상하고 제화시(題畵詩)를 쓰기도 하였으며,
나아가 자신이 직접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
세종은 등극하기 이전에 난초와 대나무 8폭을 손수 그려 신인손(辛引孫)에게 하사했으며,
문종은 눈 속의 매화 한 가지를 그리고, 제화시를 더하여 안평대군에게 주기도 했었다.
이로보아 당시 왕실에서는 대나무와 매화, 난초와 같은 사군자 계열의 문인화들이
즐겨 그려졌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이들이 지니고 있는 군자적 상징성과 더불어
기법상의 용이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세종과 문종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조선 전기 왕실의 그림 애호는 안평대군에 이르러 정점에 이른다.
그는 당대 최고의 서예가였을 뿐만 아니라, 최대의 서화 수장가였으며,
뭇 화가들의 강력한 후원자로 조선전기 예원의 핵심에 있었던 인물이다.
조선전기 최고의 화가로 꼽히는 안견(安堅)의 활동도 그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에서 진행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세조(1456-1468 재위)의 왕위찬탈로 인해 안평대군의 주도 아래 있던 예술분야는
그의 사사(賜死)와 함께 조락하고 만다.
이후 성종대에 이르러 성리학 부흥정책과 더불어 각종 문예벌전이 다시 진작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회화의 경우는 성종의 적극적인 관심과 후원에 힘입은 바가 크다.
성종은 자신이 난죽화와 더불어 많은 그림을 그리고, 왕실 소장의 여러 명화를 꺼내어
문신들로 하여금 시를 짓게 하거나 제문을 쓰게 하는 일을 하기도 하였다.
한편 제도적으로도 '도화원'을 정비하여 '도화서(圖畵署)'로 개칭하기도 하였다.
조선 중기에 그림을 좋아했던 국왕 중에는 인조(1595-1649)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남다른 솜씨가 있었던 모양이다.
일찍이 선조가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 1556-1618)에게 훗날 인조가 되는 능양군(綾陽君)의
말 그림을 하사하였는데, 이를 본 이항복이 그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인조반정의 주역인 김류(金류, 1571-1648)에게 은밀히 건넸고,
능양군을 추대하여 반정을 도모하는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오기 때문이다.
인조는 등극한 이후에도 이징(李澄, 1581-?)을 비롯한 여러 화가들을 지극히 애호하는 등
그림에 많은 관심과 애정을 쏟았는데, 이로 인해 대신들과 사간원의 거센 항의를 받기도 하였다.
선조(1567-1607) 역시 남 못지않게 서화를 지극히 애호한 문예군주였다.
선조는 자신이 직접 묵난과 묵죽화를 그려 남길 만큼 그림에 조예가 깊었고,
종실(宗室)과 부마들에게 서화를 익힐 것을 명할 정도였다.
소위 '목릉성세(穆陵盛世)'라 불리우는 선조년간의 문예 각 분야에서 진행된
다양하고 활발한 활동들과 이를 창출했던 많은 인재들은 문치(文治)를 강조하고
예술을 애호했던 왕실의 분위기에 힘입은 바가 크다.
조선후기에 그림을 좋아했던 왕으로는 역시 영조와 정조를 손꼽을 수 있다.
영조는 잠저(潛邸)에 있을 때부터 자신의 후원세력이자 당시 진경문화를 선도해가던
안동김문을 비롯한 백악사단(白岳詞壇)과 깊은 관계를 맺으며 서화에 심취한다.
그림은 즉석 휘후로 분원도자기의 밑그림을 그렸으며,
부왕인 숙종에게 2차례에 걸쳐 자신의 그림을 보여드리고 제시(題詩)를 받기도 하였다.
현재 영조가 그린 그림은 남아있지 않으나,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와 같은 조선후기 문예부흥의
성과들은 영조와 같은 호문(好文), 호예(好藝)의 국왕의 적극적인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정조는 경사(經史)는 물론이거니와 시문서화에 두루 능했던 인물로
군사(君師)를 자처하며 학문과 예술 발전을 선도했던 군왕이다.
그의 회화에 대한 관심과 식견은 실로 대단하였다.
그 자신이 파초와 묵매, 묵국과 같은 아취넘치는 문인화를 그려내기도 하였으며,
또한 자비대령화원(差備待令畵員)이라는 규장각 직속 화원제를 두고 시험을 직접 주관할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학예일치의 예술론을 바탕으로 그림의 본질과 효용을 구체적으로 밝혔는데,
대체로 사실적(寫實的)인 전신론(傳神論)에 입각한 것으로
화론(畵論)에도 깊은 조예를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2008년 2월16일, 사단법인 한국의재발견
- 제117회 우리문화사랑방 <왕실의 서화>
- Sunset Glow / 오카리나 연주, 양강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