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보로 떠나는 서울 남산의 근현대 흔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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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 남쪽 경계였던 것이 도시 확장과 함께 한가운데 위치하고 만 것인데, 인간의 손도 그만큼 더 탈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하지만 사람들과의 공존에서 생겨난 ‘남산의 스토리들’은 생각만큼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안기부가 있었고 군사독재정권이 요란한 정치선전장으로 활용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남산 산책길을 걸으며 우리가 잊고 지낸 근현대의 흔적들을 찾아보자.
남산을 오를 때마다 기억나는 사진이 한 장 있다. 지난 70년대 초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어머니가 당신을 처음 찾아온 외할머니를 모시고 찾아간 남산에서 찍은 사진이다. 둥근 돔과 흰색 벽이 인상적인 어린이회관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었다. 서울에 일제에 의해 동물원으로 바뀐 창경원 말고는 변변한 유원지 하나 없던 그때, 케이블카도 타고 식물원도 구경할 수 있는 남산은 소중한 손님을 모시고 나들이하기에 제격이었을 것이다.
적잖은 사람들에게 낭만적이고 평화로운 모습으로만 기억되는 남산은, 인권유린의 현장이기도 했다. 지난 95년까지만 해도 얼마나 고문이 심했던지 육국(肉局)으로까지 불린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가 있던 곳이 바로 남산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TBS교통방송 등 서울애니메이션센터 뒤쪽 일대 건물 대부분이 안기부 사무실과 취조실 등으로 쓰였다.
장소성을 고려해 인권기념관 등으로 만들자는 제안이 잇따랐지만 실현되지 못했다. 마당 지하에 있던 벙커는 지금 현재 서울소방방재본부 상황실로 쓰이고 있는데, 신분증을 맡기면 누구나 들어가 볼 수 있다. 다만 내부 구조가 많이 바뀌어 당시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가늠해볼 수 있을 정도다.
최근 리모델링을 마친 서울시청 남산별관이 나타난다. 《야생초편지》의 저자 황대권 씨 등 안기부에서 고문을 받았던 이들 대부분이 취조실이 있었다고 증언한 건물이다. 하지만 지하실에 있었다는 음습하고 공포스러운 취조실의 흔적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찾아볼 길이 없다.
비슷한 시기 남산은 시끌벅적한 정치 선전의 장으로도 활용됐다. 다시 서울유스호스텔 앞길을 거쳐 안기부장 공관으로 쓰였던 ‘문학의 집’ 쪽으로 나오면 남산 순환도로를 만날 수 있다.
이 길을 따라 산 위쪽으로 걷다 보면 이내 백범광장에 닿는다. 백범 김구 동상이 있어 그렇게 불리는데, 동상은 친일부역혐의자 김경승이 만든 것이다.
그 아래에 있는 어린이 놀이터에는 말을 타고 진격을 외치는 늠름한 모습의 김유신 장군 동상도 한 기 서 있다. 김구 동상과 김유신 동상, 그리고 그 위에 있는 안중근 의사의 동상까지, 모두 김경승의 작품들이다.
역사적 정통성이 빈약한 군사독재정권이 군사정권의 ‘시대적 필요성’을 역설하기 위해 만든 것들이다. ‘반공’이라는 국시에만 동의하면 문제가 없었는지, 동상 건립을 주도한 단체나 조각가들은 친일부역 혐의가 짙고 쿠데타 정권을 옹호하는 이들 일색이었다. 특히 김유신 동상 건립 등을 주도한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는 정권의 비호 아래 남산은 물론 전국 방방곡곡에 32종 352개의 ‘애국선열’ 동상을 세웠다. 이런 동상이 유독 남산에 집중된 이유는 남산이 당시에는 찾는 이도 많았을 뿐더러 서울의 중심이라는 상징성까지 지녔기 때문이다.
남산은 일제강점기에도 조용하지 않았다. 일제에게 있어 남산은 황국신민화 교육을 위한 더없이 효과적인 장소였다. 동원체제 확립을 위해 민간신앙에 불과했던 신도를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국가신도로 재정립한 일제는, 조선에서도 면(面) 단위 마을마다 한 개의 신사를 두는 ‘1면 1신사’ 원칙을 고수했다.
그 핵심은 남산이었다.
남산은 조선 왕실이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 등의 위패를 봉안하고 국가의 안녕을 위한 천제(天祭)를 지내는 국사당(國祀堂)을 설치했던 곳으로서 중요성이 남달랐다. 뿐만 아니라 고층 건물이 없던 때였기에, 남산 중턱에 대규모 신사를 만들면 사대문 안 어디에서든 신사를 바라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남산은 예장동쪽 중턱에 많은 일본인들 몰려 살았다는 점에서도 대형 신사를 세우기에 제격이었다.
조선신궁은 일본 황실이 시조라 여기는 신화 속 인물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와 메이지 천황을 제신으로 삼았는데, 다른 신사들과는 달리 정부 자금으로 운영됐다.
당시 신궁은 일본 본토를 통틀어도 15개 밖에 없는 실정이었으니, 식민지 수도에 세운 조선신궁이 갖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남산에 들어선 조선신궁은 지금의 힐튼호텔 맞은편 어린이 놀이터에서부터 안중근의사기념관과 남산식물원 터를 아우르는 43만 제곱미터의 광대한 면적을 자랑했다. 비록 남아있는 유구는 없으나, 당시 찍은 사진 속의 석등이나 계단 등을 보고 그 엄청난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비록 조선신궁 유구는 아니나, 신궁 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신사 유구 일부가 남아있기는 하다. 사회복지법인 남산원 자리에 있던 노기신사인데, 러일전쟁 당시 뤼순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군신(軍神)으로까지 추앙받은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를 기리기 위한 신사이다.
남아있던 마지막 목조 건물이 1993년 화재로 불타버렸으나, 기증연대가 확실한 수조와 석등 등이 남아 이곳이 신사 터였음을 웅변하고 있다. 노기가 러일전쟁에서 전리품으로 가져온 러시아 대포는 1967년 남산원에서 육군박물관으로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이 답사 코스는 남산 순환도로로 치면 고작 8분의 1에 해당하는 거리다. 아무리 천천히 걸어도 채 두 시간이 걸리지 않는 코스다.
즉 해방과 함께 태어나 전쟁과 함께 자란 해방촌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기리기 위해 장충단을 비집고 들어선 박문사(博文寺) 등, 나머지 8분의 7에 서려있는 근현대의 흔적들은 지금도 무궁무진하다는 뜻이다.
남산도서관이나 자유센터 등 남산 주변 근현대 건물들에 대한 등록문화재 지정을 앞둔 지금, ‘또 다른 남산 스토리’를 찾아 터벅터벅 남산 답사에 나서보는 것은 어떨까. - 문화재청, 월간문화재사랑, 2008-07-2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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