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조 신하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제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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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중추원사 정렬공(貞烈公) 최윤덕(崔潤德) 상신에 들었다.
좌의정 문경공(文敬公) 허조(許稠) 상신에 들었다.
좌의정 문희공(文僖公) 신개(申槩) 상신에 들었다.
이조 판서 문정공(文靖公) 이수(李隨) 명신에 들었다.
다섯 사람 외에
양녕대군(讓寧大君) 정강공(靖剛公) 제(禔)와
효령대군(孝寧大君) 정효공(靖孝公) 보(補)의
이 두 사람을 추배(追配 : 처음에는 배향되지 못하였다가 뒤에 추가)하였으니, 이제 모두 일곱 이다.
- <연려실기술> 제3권 세종조 고사본말(世宗祖故事本末)
황 희(黃 喜)
황희는 자는 구부(懼夫)이고, 처음 이름은 수로(壽老)였으며, 본관은 장수(長水)이고, 호는 방촌(厖村)이다. 고려말 기사년(1389)에 급제하여 조선에 들어와 병오년(1426)에 정승이 되어 영의정에 이르렀고,
나이 여든에 치사하여 임신년(1452)에 죽으니 나이가 아흔이었다.
제사(諸司)의 이서(吏胥)와 노예들이 모두 치제하였으며 시호는 익성공(翼成公)이고, 종묘에 배향되었다.
○ 공은 14세에 음관(蔭官)출신으로 복안궁 녹사(福安宮錄事)가 되었고,
소년에 사마(司馬) 양시(兩試)에 합격하였으며,
27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습유 우보궐(拾遺右補闕)이 되었는데,
성격이 곧아서 바른 말을 과감히 하였다. 《조야첨재》
○ 고려 말에 적성훈도(積城訓導)가 되었다. 《경훈전고(警訓典故)》에 상세하다.
○ 태종조에 이조 판서로서 양녕대군을 폐위하는 것을 간하였더니,
태종이 크게 노하여 공조 판서로 좌천시키고, 또 평안도 도순무사(平安道都巡撫使)로 내보냈다가
무술년에 양녕이 폐위되어 서인이 되자 그를 교하(交河)에 좌천시켰다.
대신과 대간들이 모두 그에게 죄를 주기를 청해 마지 않았으나,
태종은 공의 생질 오치선(吳致善)을 공이 있는 교하로 보내어 이르기를,
“경이 비록 공신은 아니지만 나는 경을 공신으로 대우하여 하루라도 좌우를 떠나지 못하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제 대신과 대간들이 경에게 죄 주기를 청해 마지 않으니,
양경(兩京, 개성과 서울) 사이에는 둘 수 없다. 경의 본관(장수, 長水)에 가까운 남원으로
옮기게 할 것이니 경은 어머니를 모시고 편하게 같이 가라.” 하였고,
또 사헌부에 명하여, “그가 갈 때에 관리가 압송하지 말라.” 하였다. 오치선이 복명(復命)하자,
태종이 묻기를, “황희가 무어라 하던고.” 하니, 치선이 아뢰기를,
“‘살과 뼈는 부모께서 주신 것이지만, 의식이나 쓰는 것은 모두 임금의 은혜였으니,
신이 어찌 은덕을 배반하겠습니까. 실로 다른 마음이 없었습니다.’ 하고는
울면서 어쩔 줄을 몰라 했습니다.” 하였다.
○ 4년 임인에 태상왕이 명하여 공을 불렀다.
공이 이르러 통이 높은 갓을 쓰고 푸른 색 거친 베로 만든 단령(團領)을 입고 남색 조알[條兒]을 띠고
승정원에 들어왔는데, 막 시골에서 왔으므로 몸체만 큼직할 따름이어서 사람들이 특이하게 여기지 않았다.
태상왕이 세종에게 이르기를, “황희의 전날 일은 어쩌다가 그릇된 것이니, 이 사람을 끝내 버릴 수 없다.
나라를 다스리려면 이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된다.” 하고는 곧 예조 판서로 제수하였다.
때마침 흉년이 들어 강원도 관찰사로 나갔다.
그는 마음이 넓고 모가 나지 않았으며,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에게 한결같이 예의로써 대하고
국사를 의논할 때에는 전례를 잘 지켜 고치고 바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소문쇄록(謏聞瑣錄)》
○ 계묘년(1423)에 강원도에 크게 흉년이 들었다. 세종이 걱정하여 특별히 공을 관찰사로 삼았는데,
정성을 다하여 구제했기 때문에 백성들이 크게 괴로워하지 않았다.
세종이 크게 가상이 여겨서 숭정대부(崇政大夫) 판우군부사(判右軍府事)에 제수하고,
을사년(1425)에는 찬성사로서 대사헌을 겸직시켜 소환하였다.
《조야첨재》에는 이르기를, “공이 돌아온 뒤에 관동 백성들이 그의 은덕을 사모하여
울진에서 그가 행차를 멈추었던 곳에다 대를 쌓고 소공대(召公臺)라 이름하였으며,
남곤(南袞)이 글을 짓고 송인(宋寅)이 글씨를 써서 비를 세웠다.” 하였다.
소공대(召公臺)란, 주(周)의 소공(召公)이 자기 관내의 백성에게 은덕을 베풀었으므로 백성들이
그의 행차가 감당(甘棠)나무 밑에서 멈추었다가 떠난 후 감당나무를 보호하고 시를 지은 일을 말한다.
○ 공이 아버지의 상사를 당했는데, 판강릉부사(判江陵府事) 군서(君瑞)이다.
때마침 나라에 일이 있어 공을 기복(起復)시키니, 굳이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
좌상이 되었을 때에 어머니 상사를 당하여 또 기복시키니, 간곡히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여
곧 나와 일을 보았다.
《조야첨재》《동각잡기》에 이르기를 “어머니 상사를 당하여 몇 개월이 지난 뒤에 기복되었다.” 하였다.
○ 그때에 세자가 장차 명 나라로 떠날때 공으로 수행하게 하니,
공은 간곡히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
명 나라에서 칙서(勅書)를 보내어 세자는 반드시 들어올 것이 없다 하니,
그는 또 글을 올리기를, “세자께서 이미 명 나라에 조회하지 않기로 되었고,
또 국가에 일이 없으니 삼년상을 마치게 해 주소서.” 하였다.
세종은, “대신을 기복하는 것은 선왕 때에 이미 이룩된 법이다.” 하여 윤허하지 않고,
이어 글을 내리기를, “옛날에는 나이가 60이 되면 비록 상복을 입었어도 고기를 먹는 법인데,
이제 황희는 이미 기복도 하였으려니와 나이가 60이 넘었으니 어찌 소찬을 하면서 일을 보리요.
정원에서 그를 불러 고기 먹기를 권고하라.” 하였다.
그가 빈청(賓廳)에 나아갔더니 지신사 정흠지(鄭欽之)가 임금의 명령을 전달하고 고기 먹기를 권하였다.
공이 머리를 조아리면서 말하기를, “신이 마침 병이 없으니 어찌 감히 고기를 먹겠습니까.
청컨대, 이 뜻을 잘 아뢰어 주시오.” 하였다. 흠지가 감히 그렇게 아뢸 수 없다 하니,
공이 그제서야 이마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고기를 먹었다. 《동각잡기》
○ 공이 정승이 되었을 때 김종서가 공조 판서가 되었다.
일찍이 공처(公處)에 모였을 때에 종서가 공조로 하여금 약간의 주과(酒果)를 갖추어 드렸더니,
공이 노하여 이르기를, “국가에서 예빈시(禮賓寺)를 정부의 곁에 설치한 것은
삼공(三公)을 접대하기 위해서이다. 만일 시장하다면 의당 예빈시로 하여금 장만해 오게 할 것이지
어찌 사사로이 제공한단 말인가.” 하고는, 종서를 앞에 불러 놓고 준절히 꾸짖었다.
정승 김극성(金克成)이 일찍이 이 일을 경연에서 아뢰고,
“대신이란 마땅히 이러해야 조정을 진정시킬 수 있습니다.” 하였다. 《동각잡기》
○ 그때에 김종서가 여러 차례 병조ㆍ호조의 판서가 되었는데
한 가지 일이라도 실수한 것이 있을 때마다 공이 박절할 정도로 꾸지람을 하되
혹은 본인 대신 종을 매질하기도 하고 때로는
구사(丘史: 관원이 출입할 때 모시고 다니는 하인)를가두기도 하였다. 동렬(同列)들이 모두 지나친 일이라 하고 종서 역시 매우 고달펐다.
어느날 맹사성(孟思誠)이 묻기를, “김종서는 당대의 명경(名卿)인데
대감은 어찌 그렇게도 허물을 잡으시오.” 하였더니,
공은 말하기를, “이것은 곧 내가 종서를 아껴서 인물을 만들려는 거요.
종서의 성격이 고항(高亢)하고 기운이 날래어 일을 과감하게 하니
뒷날 우리의 자리에 있게 되어 모든 일을 신중히 하지 않는다면 일을 허물어뜨릴 염려가 있으니,
미리 그의 기운을 꺾고 경계하여 그로 하여금 뜻을 가다듬고 무게있게 하여
혹시 일을 당해서 가벼이 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지, 결코 그에게 곤란을 주려 함이 아니오.” 하니,
사성이 그제야 심복하였다.
그뒤에 공이 물러가기를 청할 때 종서를 추천하여 자기의 자리를 대신하게 하였다. 《식소록(識少錄)》
○ 형조 판서 서선(徐選)의 아우 서달(徐達)은 공의 사위이다.
서달이 일찍이 사람을 죽였는데, 공과 우상 맹사성 역시 이 일에 관련되어 의금부에 갇히게 되었다.
이튿날 보석되어 다만 파직되었으나 후임을 내지 않았다가 열흘이 지나자 복직을 시켰다.
○ 공이 좌상이 되었을 때에 사헌부에서 공이 감목(監牧) 태석구(太石鉤)의 죄를 완화시키려고
대관(臺官) 이심(李審)의 아들 백견(伯堅)에게 청탁하였다 하여, 파면시켜서
앞으로 청탁을 받고 법을 굽히는 일이 없도록 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답하기를, “대신이란 가벼이 죄를 줄 수 없다.” 하다가,
뒤에는 사헌부의 청을 윤허하여 그를 파면시켰다.
그러나 후임을 내지 않고 있다가 이튿날 다시 복직시켰다.
사간원에서 소를 올리기를,
“황희는 일찍이 의정(議政)이 되어 대체를 돌보지 않고 친한 자를 사사로이 돌봐주기 위하여
사헌부에 청탁하였으니, 다만 그 직만 파면하였음은 황희로 보아서는 큰 다행입니다.
또 교하(交河)의 둔전을 이양받으려고 청하였으니,
이것은 옛날
직부(織婦)를 내쫓고[노상(魯相) 공의휴(公儀休)가 자기 집에서 베를 잘 짜는 부인을내쫓으면서 “내집에서 베를 짜면 민간의 부인이 무슨 직업을 가지겠느냐” 하였다는 고사에서 비롯]
집안에 심은 채소를 뽑아버렸던 일과는 거리가 멀었는데, 그런 지 한 해가 채 못되어
갑자기 백관의 수반(首班)에 제수하자, 임명을 받아 엄연히 부끄러운 줄을 알지 못하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여 이르기를, “모든 일에 대하여 시비를 숨김없이 모두 진술하니,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그러나 국정을 맡은 대신을 너희들의 말을 듣고서 가벼이 거절할 수 없다.” 하였다.
○ 그때에 사간원에서 논박하기를,
“영의정 황희가 교하수(交河守)에게 둔전을 청하여 사사로이 농장을 삼으려 하였으니,
백관의 수반인 정승의 자리에 둘 수 없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고 안숭선(安崇善)에게 이르기를,
“황희는 국정을 맡은 대신이고,또 태종께서 신임하시던 사람이니, 내 어찌 경솔히 끊어 버리겠는가.
태종께서 일찍이 나에게 이르기를, ‘양녕이 세자가 되었을 때에 종수(宗秀)의 무리가 그에게 아부하여
많이들 불의를 행해서 양녕으로 하여금 도리어 어긋나게 하였을 때에,
황희에게 묻기를 어떻게 처리하였으면 좋을까 하였더니,
황희가 대답하기를, 세자는 나이가 어리고 또 그의 과실이란 사냥을 좋아한 것에 불과합니다 하였다.
당시에는 황희가 중립하여 사태를 관망한다고 생각하였으나, 이제 생각하니, 황희는 실로 죄가 없다.’
하시고, 또
사단(史丹)의 일[한대(漢代)의 사단(史丹)이 태자를 바꾸도록 간한 사실]을 인용하여해명해 주시면서, 이내 눈물지으며 말씀하던 것이 아직도 내 귀에 남아 있으니,
내 이제 어찌 함부로 신진 간신(新進諫臣)의 말을 들어서 그를 끊어 버리겠는가.” 하였다. 《국조보감》
○ 태학(太學) 유생이 길에서 그를 만나자 면박하기를,
“네가 정승이 되어 일찍이 임금의 그릇됨을 바로잡지 못한단 말이냐.” 하였으나,
공은 노여워하지 않고 도리어 기뻐하였다. 정암(靜菴)의 <연주(筵奏)>
○ 공이 상부(相府)에 있은 지 27년이나 되어, 조종(祖宗) 때에 이미 이룩된 법을 힘써 따르고,
변경하기를 기뻐하지 않았으며, 일을 처리함에는 이치에 따라서 하고 규모는 원대하였으며,
인심을 진정시키는 도량이 있어서 대신의 체모를 얻었다.
태종으로부터 세종에 이르기까지 신임이 매우 두터워,
세종이 매양 황희의 견식과 도량이 크고 깊어서 큰 일을 잘 판단한다고 칭찬하면서
그를 점치는 시구(蓍龜)와 물건의 중량을 다는 권형(權衡)에 견주었다.
더러 옛 제도를 변경하려고 의논하는 자가 있으면, 그는 반드시,
“신이 변통하는 재능이 부족하니, 무릇 제도의 변경에 있어서는 감히 가벼이 의논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평시에는 의논을 너그럽게 하였으나,
큰 일을 당해서는 맞대고 그 자리에서 시비를 가려 의연히 굽히지 않았다.
나이 팔십에 비로소 치사를 허락하였고,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에는 임금이 반드시 근시(近侍)로 하여금 공에게 나아가 자문한 뒤에 결정하였다.
나이가 구십이 되어서도 총명이 조금도 쇠퇴하지 않아서,
조정의 전장(典章)이나 경사자집(經史子集)에 대해 마치 촛불로 비추는 듯이 산 가지로 세는 듯이 하여,
비록 기억 잘하는 장년도 감히 따르지 못하였다.
우리 조선의 어진 정승을 논할 때는 반드시 공을 제일로 삼았으며,
공의 훈업(勳業)이나 덕량을 송 나라의 왕문정(王文正)과 한충헌(韓忠獻)에 견주었었다. <묘비(墓碑)>
○ 공은 평시에 거처가 담박하였고, 비록 아손(兒孫)과 동복들이 앞에서 울부짖고 희롱하여도 조금도
꾸지람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수염을 뽑는가 하면 뺨을 치는 놈까지 있어도 역시 제멋대로 하게 두었다.
일찍이 아래에 있는 신료들과 함께 일을 의논할 때, 바야흐로 붓을 풀어 글을 쓰려 하는데
종의 아이가 종이 위에 오줌을 싸도 그는 아무런 노여워하는 빛이 없이 다만 손으로 훔쳤을 뿐이었다.
공이 일찍이 남원에서 귀양살이할 때에 7년 동안을 문을 닫고 단정히 앉아서
찾아오는 손님도 맞이하지 않고 다만 운서(韻書) 한 질을 갖고 거기에만 눈을 대고 있었을 따름이더니,
그뒤 비록 나이가 많아서도 글자의 획이나 음이나 뜻에 대해서는 백에 하나도 틀리지 않았었다.
《필원잡기》
○ 공은 나이가 많고 벼슬이 무거워질수록 더욱 스스로 겸손하여,
나이가 구십여 세나 되었는데도, 늘 고요한 방에 앉아서 종일토록 말없이 두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며
글을 읽을 따름이었다.
창 밖에 늦복숭아가 무르익어서 이웃 아이들이 다 따는데, 공은 나직한 소리로,
“다 따먹지 말아라. 나도 좀 맛보자.” 하고 조금 있다가 나가서 보니, 나무에 가득하던 열매가 다 없어졌다.
매양 아침 저녁으로 밥먹을 때에 아이들이 모두 모여들어 그가 밥을 덜어서 주면
지껄이며 먹기를 다투곤 하였는데 공은 다만 웃을 뿐이었다. 《용재총화》
○ 공은 기쁨이나 노여움을 일찍이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고,
종들을 은혜로 대우하여 일찍이 매를 대지 않았으며,
그가 사랑하는 여종이 작은 종과 희롱하기를 지나치게 하였으나 공은 볼 때마다 웃었다.
일찍이 이르기를, “노예도 역시 하늘 백성이니 어찌 함부로 부리리오.” 하고는,
그 뜻으로 훈계하는 글을 써서, 자손들에게 전하여 주기까지 하였다.
어느날 홀로 동산을 거닐 때, 이웃에 살고 있는 버릇없는 젊은이가 돌을 던지니,
무르익은 배가 돌에 맞아 땅에 가득 떨어졌다. 그가 큰 소리로 시동(侍童)을 부르자,
그 젊은이가 놀라 달아나 숨어서 가만히 들어본 즉,
시동을 시켜 그릇을 갖고 오게 하여 배를 담아서 그 젊은이에게 주되, 끝내 아무런 말이 없었다.
정언 이석형(李石亨)이 뵈러 갔더니,
그가 《강목(綱目)》과 《통감(通鑑)》을 내어서 책 표지에 제목을 쓰게 하였다.
얼마 안되어 추하게 생긴 여종 한 사람이 약간의 안주를 갖고 공의 의자에 기대고 서서
이석형을 내려다 보며 공에게 묻기를, “곧 술을 올릴까요.” 하니,
공은 조용히 “조금 있다가.” 하였다.
여종이 한참 기다리다가 고함을 치면서, “어쩌면 그리도 꾸물거리누.” 하니,
공은 웃으면서, “그럼 드려오렴.” 하였다.
술상을 들여오니, 아이들이 모두 남루한 차림에다 맨발로 들어와서 혹은 공의 수염을 잡아당기기도 하고,
더러는 공의 옷을 밟고 안주를 다 집어 먹고 공을 두들기곤 하였는데 공은 “아야 아야” 하였다.
그 아이들은 모두 노비의 자식들이었다. 《청파극담(靑坡劇談)》
○ 그의 정자인 반구정(伴鷗亭)이 임진강 하류에 있었다. 파주읍(坡州邑) 서편 15리에 있다.
자손이 그곳에 집을 짓고 이내 반구라 이름하였다. 《미수기언(眉叟記言)》
최윤덕(崔潤德)
《해동잡록(海東雜錄)》에,
‘공의 자는 백수(伯修)요, 본관은 통천(通川)이며 양장공(襄莊公) 운해(雲海)의 아들이다.’ 하였다.
최윤덕은, 자는 여화(汝和)이며, 본관은 흡곡(歙谷)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갑인년(1434)에 정승이 되어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정렬공(貞烈公)이고, 종묘에 배향되었다.
○ 공의 아버지 최운해(崔雲海)는 국초의 명장이었다.
《명신록(名臣錄)》에 이르기를, “공의 아버지가 합포(合浦)를 지켰다.” 하였다.
그가 태어난 뒤에 어머니가 죽었는데, 운해는 변방을 지키느라고 돌아오지 못하였으므로,
같은 이웃에 살고 있는 양수척(楊水尺, 사냥을 하거나 버드나무로 그릇 등을 만들어 팔던 천민)의 집에
맡겨져서 자라났다. 점차 자라서는 힘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 센 활을 잘 쏘았는데,
때로는 수척을 따라 사냥하러 나가서 많이 잡기도 하였다.
어느날 산중에서 마소(馬牛)를 먹이다가, 범이 별안간 숲 속에서 뛰어나오자 마소들이 흩어졌다.
공이 말을 타고 화살 하나로 범을 쏘아 죽이고는 돌아와 수척에게 이르기를,
“아롱진 무늬를 가진 큼직한 것이 무슨 짐승인지 나오기에 내가 쏘아 죽였다.” 하여
수척이 가서 보니, 큰 호랑이었다. 수척이 윤덕을 기이하게 여겼다.
서미성(徐彌性, 서거정의 아버지)이 나가서 합포(合浦)를 지킬 적에
수척이 공을 데리고 가서 뵙고 공을 기려 마지 않았더니, 미성이 이르기를, “한번 시험해 보겠다.” 하였다.
함께 사냥을 할 때 공이 좌우로 달리며 쏘아 맞히지 못하는 것이 없으니, 모두 칭찬하였다.
미성이 웃으면서 이르기를, “이 애가 비록 손이 빠르긴 하나 아직 법을 모르니,
이 애의 기술은 사냥꾼의 기술에 불과하여 옳은 기술이라고 볼 수 없다.” 하고는
이내 활쏘기와 말달리는 방법을 가르쳐서 마침내 명장이 되었다. 《필원잡기》
○ 운해(雲海)는 벼슬이 서북면 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 승추부사(承樞府事)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양장공(襄莊公)이다.
○ 태조가 해주(海州)에 거둥하여 강무(講武 : 열병(閱兵)을 겸한 사냥)할 때,
가까운 길을 취해 큰 냇물을 건너고자 하였더니, 공이 아뢰기를,
“신이 먼저 물의 깊이를 알아가지고 오게 해주소서.” 하고는, 말을 타고 곧 물 속에 들어가
고삐를 잡고 목을 움추리고 거짓으로 그 몸을 기울이니 물이 안장에 미쳤다.
곧 돌아와서 아뢰기를, “물이 깊어서 건너지 못하겠으니 전하께서 이 내를 건너시려는 것은,
‘큰길로 가고 지름길로 가지 말며, 배를 타고 가고 헤엄치지 말라.’는 옛말의 뜻과 어긋납니다.” 하니,
태조가 그 말을 옳게 여겨 건너는 것을 중지하였다. <행장(行狀)>
○ 과거에 태안군(泰安郡)의 수령으로 있을 때에 그가 찼던 화살통에 쇠로 장식했던 것이 헐어 떨어지자,
공인(工人)이 관가의 쇠로 기워 고쳤는데, 곧 명하여 기웠던 쇠장식을 도로 떼어 내었으니,
그 청렴함이 이러하였다. <행장(行狀)>
○ 공이 이상(貳相 : 의정부의 좌우찬성을 달리 이르는 말)으로
평안도 도절제사(平安道都節制使) 판 안주 목사(判安州牧使)를 겸임하였는데,
공무가 끝나면 공청 뒤 빈 땅을 경작하여 오이를 심고 손수 매어 가꿨다.
소송하러온 자가 누구인지 모르고 묻기를, “대감께서 지금 어디에 계신지요.” 하자,
그가 속여 말하기를, “아무 곳에 있다.” 하고는, 들어가서 옷을 바꿔 입고 판결에 임하였다.
시골에 사는 한 지어미가 울면서 이르기를, “호랑이가 제 남편을 죽였습니다.” 하니,
공이 이르기를, “내 너를 위해서 원수를 갚아 주겠다.” 하고는 범의 자취를 밟아 손수 쏘아 죽인 후
그 배를 쪼개고 뼈와 고기와 사지를 꺼내어 의복으로 싸서 관을 맞추어 매장하여 주었더니,
그 지어미가 슬피 울었다. 그 고을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사모하기를 부모와 같이 한다. 《청파극담》
○ 안주(安州)를 다스릴 때에 버드나무 수만 그루를 고을 남쪽에다 심어서
고을의 터를 보호하고 수해를 막으니, 사람들이 감당(甘棠)에 비하여 감히 베지를 못하였다.
○ 살고 있는 집 남쪽에 못 두 곳을 만들어 연꽃을 그 가운데다 심고
꽃나무와 아름다운 풀을 그 곁에다 심어서,
매양 공무에서 물러나온 뒤에 노인들을 청해 술상을 차려 놓고 그 사이에서 담소하였으니,
산야(山野)의 취미가 있었다.
허 조(許 稠)
허조(許稠)는 자는 중통(仲通)이며, 호는 경암(敬菴)이고, 본관은 하양(河陽)이다.
고려 말 경오년(1390)에 급제하였고, 조선에 들어와 무오년(1438)에 정승이 되어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경공(文敬公)이고, 종묘에 배향되었다.
○ 태종조에 공이 대간으로서 일을 논하다가 전주 판관(全州判官)으로 좌천되었는데,
이조 정랑의 자리가 비게 되어 태종이 관안(官案)을 검열하다가 이르기를,
“이 사람이 이 직에 알맞다.” 하고는 곧 제수하였다. 《동각잡기》
○ 공은 대범ㆍ엄숙ㆍ방정ㆍ공평ㆍ청렴ㆍ근신하여
매양 닭이 울면 세수하고 머리를 빗고 관디를 차리고 바로 앉아서
종일토록 게으른 기색을 나타내지 않았었다.
그는 정성껏 나라의 일을 생각하여 사사로운 일은 말하지 않았으며,
국정을 의논할 때는 홀로 자기의 신념을 지켜서 남들에게 맞추어 오르내리지 않았다.
가법(家法)이 몹시 엄하여 자제에게 허물이 있으면 반드시 사당에 고한 다음 벌을 내리고,
노비들에게 죄가 있으면 법에 의하여 다스렸다.
공은 어릴 때부터 깎은 듯이 여위어서 어깨와 등이 굽은 듯하였다.
일찍이 예조 판서로 있을 때에 상하 관원의 복색을 마련하여 제도가 분명하였으므로,
시정의 경박한 자식들이 공을 매우 미워하여 ‘수응 재상(瘦鷹宰相)’이라 별명을 지었다. 《필원잡기》
○ 공은 마음가짐이 맑고 바르며, 집 다스림이 엄하고 법도가 있었으며,
자제를 가르치되 털끝만큼이라도 잘못이 있을까 싶어 삼가게 하였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허공은 음양(陰陽, 부부관계)의 일도 알지 못할 것이다.” 하니,
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음양의 일을 몰랐다면, 저 후(詡)와 눌(訥)이 어디에서 나왔단 말인가.” 하였다. 《용재총화》
○ 공은 매양 부모의 기일(忌日)을 당하면, 반드시 그의 모부인(母夫人)이 손수 지은
어릴 때에 입던 푸른빛 작은 단령(團領)을 입고 눈물을 흘리며 치재(致齋)하였다.
그의 형 허주(許周)가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서 치사하였는데,
공은 매양 정부에서 합좌(合坐)할 때마다 닭이 울면 반드시 형에게 가고,
갈 적에는 반드시 하인들을 동구에 떼어 두고 수레에서 내려 걸어서 들어갔다.
허주도 역시 공이 반드시 찾아올 것을 짐작하고 밤마다 의관을 바로 하고 등불을 켜고 자리를 베풀어
몸을 안석에 기대고 기다렸는데,공이 오면 반드시 작은 술상을 차렸다.
공이 조용히 묻기를, “오늘 정부에 이러이러한 일이 있는데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습니까.” 하면,
허주는 대답하기를, “내 의견에는 마땅히 이러해야 될 것 같네.” 하였다.
공은 기뻐하여 물러나와 말하기를,
“옛말에 ‘사람은 어진 부형이 있음을 즐거워한다.’ 하더니, 이를 두고 이름이다.” 하였다.
《청파극담》
○ 공이 책상 앞에 단정하게 앉아 있을 때에, 밤중에 도둑이 그 집에 들어와서 물건을 모두 가져 가는데,
공은 졸지도 않으면서 마치 진흙으로 만들어 놓은 인형처럼 앉아 있었다.
도둑이 간 지 오래 되어서 집안 사람이 비로소 이를 알고 쫓아갔으나 잡지 못하여 분통해 하니,
공이 말하기를,
“이보다 더 심한 도둑이 와 마음 속에서 싸우고 있는데, 어느 겨를에 바깥 도둑을 걱정하리오.” 하였다.
《정암집(靜菴集)》
○ 조선의 어진 정승으로 황희(黃喜)와 공을 첫째로 꼽는데,
다만 두 사람은 모두 고려조에 과거에 올랐던 사람들이었으므로
청의(淸議)를 주장하는 자는 이 때문에 그들을 부족하게 여겼다. 《병진정사록》
신 개(申槩)
신개(申槩)는 자는 자격(子格)이며, 호는 인재(寅齋)이고, 또 다른 호는 양졸당(養拙堂)이다.
태조 계유년(1393)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기미년(1439)에 정승이 되어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궤장(几杖)을 받고 을축년(1445)에 죽으니 나이가 72세였다.
시호는 문희공(文僖公)이고, 종묘에 배향되었다.
○ 공은 어렸을 때부터 어른과 같았으며, 일찍이 외조모 원씨(元氏)에게서 컸다.
나이 겨우 세 살이었는데, 창벽 사이에 그림을 그리고 더럽힌 자가 있거늘
외조모가 아이들을 모아놓고 힐책하니, 아이들이 다투어 변명하였으나
공은 홀로 말하지 않고 제 키를 가리키는데, 과연 키가 그림 그린 벽에 한자 남짓 미치지 못하였다.
외조모가 기특하게 여겨 말하기를, “반드시 이 아이가 우리 집을 일으킬 것이다.” 하였다. 《해동잡록》
○ 평소에 말을 빠르게 하지 않았고 당황한 얼굴 빛을 짓지 않았으며,
종들에게 죄가 있어도 매를 때리지 않았다. 《해동잡록》
○ 한원(翰苑)에 있을 때에 태조가 실록을 보고자 하였는데,
공이 소를 올려서 불가함을 논하니, 태조가 그만두었다. 《사가집(四佳集)》 <묘비(墓碑)>
○ 성격이 강직하여 여러 차례 글을 올려서 대신의 잘못을 꺾었으므로 시론(時論)이 갸륵하게 여겼다.
태종이 일찍이 이르기를, “신개는 간신(諫臣)의 기풍이 있다.” 하였다.
을사년(1425)에 강음(江陰)에 좌천되었다. 《사가집》 <묘비>
○ 일찍이 언충신(言忠信)ㆍ행독경(行篤敬)ㆍ소심익익(小心翼翼)ㆍ대월상제(對越上帝) 등
열네 글자를 써서 세 아들에게 보이면서 이르기를,
“사군자(士君子)의 마음엔 마땅히 이것으로 목표를 삼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이 수(李 隨)
이수(李隨)는 본관이 봉산(鳳山)이다.
태조 병자년(1396)에 생원(生員)에 장원하였고 태종 갑오년(1414)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벼슬이 이조 판서 대제학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정공(文靖公)이고, 종묘에 배향되었다.
○ 세종이 세자로 있을 때에 사부(師傅)였으며, 문장으로 이름이 있었다. 《여지승람》
맹사성(孟思誠)
맹사성은 자는 성지(誠之)이며, 본관은 신창(新昌)이다.
한성판윤(漢城判尹) 맹희도(孟希道)의 아들이고, 최영(崔瑩)의 손자 사위이다.
고려 병인년(1386) 문과에서 장원하였고, 정미년(1427)에 정승이 되어 좌의정에 이르렀다.
치사하여 신해년(1431)에 죽으니, 나이가 72세였다.
세종이 백관을 거느리고 곡하였다.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
○ 공의 아버지 희도는 전교부령(典校副令)인데 공양왕 때에 효행으로 정려(旌閭)하였다.
정계가 어지러움을 보고는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온양 오봉산(五峯山) 밑에 살면서 호를 동포(東浦)라 하였다. 태조 때에도 역시 정려하였다.
○ 공의 천성이 지극히 효도하고 청백하였다. 그가 살고 거처하는 집은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였으며
매양 출입할 때에 소타기를 좋아했으므로, 보는 이들이 그가 재상인 줄을 알지 못하였다.
○ 공은 청결하고 검소하며 고아하여 살림살이를 일삼지 않고, 식량은 늘 녹미(祿米)로 하였다.
어느날 햅쌀로 밥을 지어 드렸더니, 공이 “어디에서 쌀을 얻어왔소.” 하고 물었다.
그 부인이 답하기를, “녹미가 오래 묵어서 먹을 수 없기에 이웃 집에서 빌렸습니다.” 하니,
공은 싫어하며 말하기를, “이미 녹을 받았으니, 그 녹미를 먹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무엇 때문에 빌렸소.” 하였다. 《무인기문(戊寅記聞)》
○ 공은 청결하고 검소하며 단정하고 후중해서 상부(相府)에 있을 때에 대체를 지녔었다.
공은 경자생이면서 장난삼아 계묘계에 들었다. 어느날 세종을 모시고 있었는데
세종이, “공은 나이가 몇이요.” 하여, 공이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물러나온 뒤 계묘계 중에서 동갑이 아니라 하여 제명되어 한때에 웃음거리가 되었었다.
공은 음률을 잘 알아서 항상 피리를 갖고 다니며 날마다 서너 곡조를 불었다.
문을 닫은 채 찾아오는 손님을 맞이하지 않다가 공무에 관한 일을 여쭈러 오는 자가 있으면
문을 열고 맞이하였는데, 여름이면 소나무 그늘에 앉고 겨울이면 방 안 포단(蒲團)에 앉되,
좌우에는 다른 물건이 없었으며 일을 여쭌 자가 가고 나면 곧 문을 닫았다.
일을 여쭈러 오는 자는 동구에 이르러서 피리 소리가 들리면 공이 반드시 있음을 알았다. 《필원잡기》
○ 공은 온양에 근친(覲親)하러 오갈 때에
각 고을의 관가에 들리지 않고 늘 간소하게 행차를 차렸으며, 더러는 소를 타기도 하였다.
양성(陽城)과 진위(振威) 두 고을 원이 그가 내려온다는 말을 듣고 장호원(長好院)에서 기다렸는데,
수령들이 있는 앞으로 소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므로 하인으로 하여금 불러 꾸짖게 하니,
공이 하인더러 이르기를 “너는 가서 온양에 사는 맹고불(孟古佛)이라 일러라.” 하였다.
그 사람이 돌아와 고했더니, 두 고을 원이 놀라서 달아나다가 언덕 밑 깊은 못에 인(印)을 떨어뜨렸다.
후대의 사람들이 그곳을 인침연(印沈淵)이라 이름하였다.
○ 공의 집이 매우 협착하였기 때문에, 병조 판서가 일을 여쭈러 찾아 갔다가
마침 소낙비가 내리는 바람에 곳곳에서 비가 새어 의관이 모두 젖었다.
병조 판서가 집에 돌아와 탄식하기를, “정승의 집이 그러한데, 내 어찌 바깥 행랑채가 필요하리요.”
하고는, 마침내 짓던 바깥 행랑채를 철거하였다.
○ 공이 온양으로부터 조정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비를 만나서 용인(龍仁) 여원(旅院)에 들렀는데,
행차를 성대하게 꾸민 어떤 이가 먼저 누상에 앉았으므로 공은 한쪽 모퉁이에 앉았었다.
누상에 오른 자는 영남에 사는 사람으로 의정부 녹사(錄事) 취재(取才)에 응하러 상경하는 자였다.
공을 보고 불러서 위층에 올라오게 하여 함께 이야기하며 장기도 두었다.
또 농으로 문답하는 말 끝에 반드시 ‘공’ ‘당’ 하는 토를 넣기로 하였다.
공이 먼저 묻기를, “무엇하러 서울로 올라가는공.” 하였더니,
그가 “벼슬을 구하러 올라간당.” 하였다.
공이 묻기를 “무슨 벼슬인공.” 하니, 그가 “녹사 취재란당.” 하였다.
공이 또, “내가 마땅히 시켜주겠공.” 하니, 그 사람은 또, “에이, 그러지 못할 거당.” 하였다.
뒷날 공이 정부에 앉았는데, 그 사람이 취재차 들어와 뵈었다.
공이 이르기를, “어떠한공.” 하니, 그 사람이 비로소 깨닫고는 갑자기 말하기를, “죽었지당” 하니,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괴이하게 여겼다.
공이 그 까닭을 얘기하니, 모든 재상이 크게 웃었다.
드디어 그 사람을 녹사로 삼았는데, 그는 공의 추천을 입어서 여러 차례 고을 원을 지내게 되었다.
후인들이 이를 일러, ‘공당 문답’ 이라 하였다.
윤 회(尹 淮)
윤회(尹淮)는 자는 청경(淸卿)이며, 호는 청향당(淸香堂)이고, 본관은 무송(茂松), 소종(紹宗)의 아들이다.
태종 신사년(1401)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병조 판서에 이르렀고, 문형(文衡)을 맡았으며,
시호는 문도공(文度公)이다.
○ 공이 일찍이 임금을 모시고 잔치할 때, 태종이 불러서 몸소 기대면서 이르기를,
“경은 나의 주석(柱石)이다.” 하였다. 《동각잡기》
○ 공과 남수문(南秀文)은 모두 문장에 능하였으나 술을 좋아하여 늘 과도하게 마셨다.
세종이 그들의 재주를 사랑하여 술을 마셔도 석 잔 이상 마시지 말 것을 명하였더니,
그 뒤로부터 연회에서 술을 마실 때면 두 공은 꼭 커다란 그릇으로 석 잔을 마셨는데
말은 비록 석 잔이라 하였으나,실은 다른 사람보다 배나 되었다.
임금이 듣고 웃으면서 이르기를,
“내가 술 많이 마시지 말라고 경계한 것이 도리어 더 마시기를 권한 것이 되었구나.” 하였다. 《필원잡기》
○ 공의 문장이 그 시대에 으뜸이 되어 홀로 부름을 받을 때가 있었다.
공은 술을 몹시 좋아하여 지나치게 마셨는데 어느날 집에서 많이 취했더니, 임금이 급히 불렀다.
좌우 사람들이 붙들어 일으켜 말에 태우는데 술이 아직 깨지 않았으므로 모두 두려워하였더니,
임금 앞에 이르러서는 조용히 대답하되, 조금도 취한 빛이 없었다.
임금이 명하여 교서(敎書)를 초하게 하니, 나는 듯 붓을 휘둘렀으나 모두 임금의 뜻에 맞았다.
임금이 이르기를, “참, 천재로군.” 하였다.
그때 사람들이 말하기를, “글별[文星]과 술별[酒星]이 한곳에 모여서 한 어진이를 낳았다.” 하였다.
《필원잡기》
○ 공이 젊었을 때, 시골길을 걸은 적이 있었다.
날이 저물어 여관에 들었는데, 주인이 유숙하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뜰에 앉아 있는데, 주인의 아이가 커다란 진주(眞珠)를 가지고 놀다가 뜰 가운데에 떨어뜨렸다.
그러자 그 곁에 있던 흰 거위가 곧 삼켜 버렸다. 얼마 안되어 주인이 구슬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자,
윤회가 훔친 것으로 의심하여 묶어 두었다가 날이 새면 장차 관에 고발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는 변명하지 않고 다만 말하기를, “저 거위도 내 곁에 매어 두라.” 하였다.
이튿날 아침 구슬이 거위 뒷 구멍으로부터 나왔으므로 주인이 부끄러운 빛으로 말하기를,
“어제는 왜 말하지 않았소.” 하고 사과하니,
공은, “만일 어제 말했다면, 당신은 필시 거위의 배를 째어 구슬을 찾았을 것이오.
그래서 욕됨을 참으면서 기다렸소.” 하였다.
김종서(金宗瑞)
김종서(金宗瑞)의 자는 국경(國卿)이며, 호는 절재(節齋)요, 본관은 순천(順天)이다.
태종 을유년에 문과에 올랐다. 신미년에 문종이 훙(薨)할 때에 정승에 임명하여 좌의정에 올랐는데,
단종 계유년(1453)에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죽었다. 묘는 공주 무성산(武城山) 아래 있다고 한다.
시호는 충익공(忠翼公)이다.
○ 공은 체구가 작고 지혜가 많았다.
세종 기해년에 강원도 행대감찰(江原道行臺監察)이 되어
원주(原州) 등 20고을의 기민(飢民)에 관계된 일을 장계(狀啓)하였다. 《국조보감》
○ 계축년(1443)에 북변에 변란이 있었다.
공은 그때 승지가 되어 임금의 명을 받들어 출납을 잘하니 임금이 중히 여겨
다음해 갑인년(1434)에 함경도 절제사로 임명하였다.
드디어 4진(四鎭, 종성, 회녕, 경원, 경흥부)을 수복하여 성을 쌓고
남쪽 지방의 부민(富民)들을 이주시켰다. 《북관지(北關志)》
○ 남도에 지방관으로 가는 문사가 있었는데,
전송하는 자리에 그 집 유모가 어린 아이를 안고 있으므로, 공은 그에게 시를 지어 주었다.
강보에 싸인 아기 골격도 기이해 / 襁保孩兒骨格奇
평소에 자식을 늦게 낳았다 한탄 말라 / 平生莫恨子生遲
애정이 반드시 끝없으리라 / 愛情必是終無已
남도에 가 백성을 다스릴 때 이 아이 생각하듯 하라 / 南去臨民念在玆 《동인시화(東人詩話)》
박 연(朴 堧)
박연(朴堧)은 자는 탄부(坦夫)이며, 호는 난계(蘭溪)이고, 처음 이름은 연(然)이었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니, 삼사 좌사(三司左使) 박천석(朴天錫)의 아들이다. 효행으로 정려되었고,
태종 신묘년(1411)에 생원으로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벼슬이 지중추원사 제학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헌공(文獻公)이다.
○ 공은 영동(永同)의 유생(儒生)으로 젊었을 때 우연히 피리를 익혔는데,
온 고을 사람들이 그를 선수(善手)라 일컬었다. 그뒤 서울에 왔을 때 어떤 광대가 보고서 웃기를,
“음절이 야비하여 가락에 맞지 않는데, 이미 습관이 되어 고치기도 어렵겠다.” 하니,
공이 굳이 배우기를 청하였다. 며칠만에 광대가 말하기를, “선배님은 가르칠 만합니다.” 하였다.
또 며칠 지나서 말하기를, “규범(規範)이 이미 이룩되었습니다.” 하고,
또 며칠 지나자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꿇으면서, “나로서는 미칠 수 없습니다.” 하였다.
그 다음 급제한 뒤에 또 거문고와 비파 등 모든 악기를 연습하여 정묘하지 않음이 없었다. 《용재총화》
○ 공의 아들이 계유년 사변에 관계되었으므로 그 역시 이로 인하여 파면되어 향리로 돌아가게 되었다.
친구들이 강가에 나가서 전송할 때, 그는 말 한 필과 종 하나를 데리고 나와 행장이 초라하였다.
친구들이 함께 배 가운데에 앉아서 술잔을 베풀다가 손을 잡고 하직할 때
그가 주머니에서 피리를 뽑아 세 곡조를 분 뒤에 떠나니,
그 소리를 듣고 처량하게 느껴 눈물 흘리지 않은 이가 없었다. 《용재총화》
정갑손(鄭甲孫)
정갑손(鄭甲孫)은 자는 인중(仁仲)이며, 본관은 동래(東萊)이니, 정흠지(鄭欽之)의 아들이다.
태종 정유년(1417)에 생원으로 문과에 급제하였고, 벼슬이 우참찬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정절공(貞節公)이다.
○ 공은 얼굴이 잘 생기고 키가 크며 수염이 아름다웠고 기량이 넓었다.
공은 비록 여러 대 재상이었으나 집에 저축한 바 없었으며 베 이불과 부들 자리로 만족히 처하였다.
성품이 강개하여 곧은 말을 잘해 권세 있는 이를 피하지 않았으며 그로 인하여 탐하는 자들이 청렴해지고
나약한 자들이 자립할 줄을 알았으므로 조정에서 그를 중하게 여겼다.
일찍이 대사헌이 되었을 때, 이조에서 사람을 벼슬에 잘못 제수한 일이 있었다.
세종이 사정전(思政殿)에 나와서 상참(常參)을 받을 때,
하연(河演)은 겸판서로서, 최부(崔府)는 이조 판서로서 입시하였는데, 공이 아뢰기를,
“최부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하연은 다소 사리를 알면서도 알맞지 못한 사람을 등용하였으니,
국문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온화한 얼굴로 양편을 화해시켰다.
조회가 끝난 뒤 밖에 나와서 둘 다 땀이 물 흐르듯 할 때, 그가 빙그레 웃으면서 말하기를,
“각기 제 직분을 다했을 뿐이니, 서로 해침은 아닙니다.” 하였다.
곧 녹사(錄事)를 불러서, “두 분이 매우 더우신 모양이니, 네가 부채를 가지고 와서 부쳐 드려라.”
하고는 조용한 태도로 조금도 후회하거나 두려워하는 빛이 없었다. 《용재총화》
○ 곧은 도리로 흔들리지 않아 풍절이 늠름하니, 사람들이 홀로 치는 새매에 견주었다.
<사가집(四佳集)에 실린 그의 아우 창손(昌孫)의 비문>
○ 공은 성품이 청렴하고 곧으며 엄준하여 자제가 감히 사사로운 일로 청탁을 하지 못하였다.
일찍이 함길도 감사(咸吉道監司)가 되었을 때 부름을 받고 서울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함길도 향시(鄕試)의 방(榜)이 발표된 것을 보니, 그의 아들 정오(鄭烏)가 방에 들어 있었다.
이에 그는 수염이 꼿꼿하여지며 노하여 시관(試官)을 꾸짖기를, “늙은 것이 감히 나에게 아첨을 하느냐.
내 아들 정오는 학업이 정밀하지 못하거늘 어찌 요행으로 합격시켜 임금을 속이려 하느냐.” 하고,
아들의 이름을 지워버리고 마침내 시관을 파면시켜 버렸다. 《필원잡기》
○ 공이 대사헌이 되었을 때에 악을 제거하고 선을 드날렸기 때문에 조정의 기강이 크게 진작되었다.
그러나 너그럽고 후하여 대체를 지녔다.
전례에 공회(公會)가 열리면 사헌부와 사간원이 반드시 막차(幕次)를 이웃하였으므로
혹 휘장을 걷고 술잔을 서로 주고 받아서 권장음(捲帳飮)이라 하였다.
만일 주금(酒禁)을 만나면 사헌부에서는 법을 집행하였기 때문에 마시지 않으나
사간원에서는 마시고 취함이 전과 다름없었다.
어느 날 간관이 술잔을 가득 부어서 희롱하느라 휘장 틈으로 대장(臺長, 장령과 지평)에게 보이니,
대장 역시 희롱하느라 옷소매로 밀어냈는데, 술잔이 휘장틈으로부터 떨어져 굴러서
헌장(憲長, 대사헌)의 책상 앞에 가서 멈췄다.
모든 대장(臺長)들이 황공하여 어쩔 줄을 모르고 대리(臺吏 : 사간원과 사헌부의 이속(吏屬)) 역시
서로 쳐다 보면서 감히 얼른 치우지도 못한 채 종일토록 책상 앞에 있었으니,
대중(臺中)에서 혹시나 일이 날까 걱정하였다.
퇴근할 무렵에 공이 아전에게 말하기를,
“저 거위알처럼 생긴 것이 무엇인고. 수정구슬이 몇 개나 들어갈 수 있을까.” 하니,
아전이, “백 알은 들어갈 것 같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가 말하기를, “그 들어왔던 틈으로 던져 버려라.” 하니,
좌중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의 아량에 탄복하였다.
사간원에 아란배(鵝卵杯)가 있는데 수정 구슬이 한 되 들어갔으니,
이는 금령(禁令)을 범하여 만든 것이었다. 《필원잡기》
김 문(金 文)
김문(金汶)은 호는 서헌(西軒)이며, 본관은 언양(彦陽)이다.
경자년(1420)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벼슬이 직제학에 이르렀으며, 일찍 죽었다.
○ 공은 남보다 총명하여 경사(經史)에 널리 통하였으며, 더욱이 사학(史學)에 밝았으므로
역대의 고사를 묻는 자 있으면 곧, “아무 책 몇째 장에 있어.” 하고 대답하였는데,
백에 하나도 틀림이 없었다. 세종이 선비들에게 명하여 《통감훈의(通鑑訓義)》를 편찬했을 때에
그의 공이 가장 많았으므로 총애가 높았으나, 한스럽게도 일찍 죽었다.
공은 천성이 술을 잘 마셨다. 일찍이 집현전에 있을 때 어떤 이가 말하기를,
“송조(宋朝)에서 다품(茶品)을 논할 때는 자소탕(紫蘇湯)을 제일로 삼았고,
《사림광기(事林廣記)》에는 궁중의 아름다운 음식으로 찐닭을 제일로 삼았어.” 하니,
공이 미소를 지으면서, “자소탕이 항아리 속의 새로 익은 술에 비해서 어떠하며,
찐닭이 소간적[牛心炙]에 비해서 어떤 것이 나을까.” 하여 좌중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필원잡기》
이종무(李從茂)
이종무(李從茂)는 본관은 장수(長水)이며, 무과에 급제하였고
익대 공신(翊戴功臣 : 예종 때 남이南怡를 죽인 공로로 신숙주ㆍ한명회 등 38인에게 내린 훈호)으로
장천부원군(長川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벼슬이 보국대부 우찬성에 이르렀고, 시호는 양후공(襄厚公)이다.
○ 기해년(1419) 5월에 왜적이 비인(庇仁)에 침입하고,
또 절제사(節制使) 이사검(李思儉)을 해주 연평곶(延平串)에서 포위하였다.
세종이 유정현(柳廷顯)ㆍ박은(朴訔)ㆍ조말생(趙末生) 등을 불러서 적이 비어 있는 틈을 타
대마도(對馬島)를 무찔러 되돌아오는 적을 맞아 싸울 것을 의논하였으나, 모두들, “불가합니다.” 하였는데,
조말생만이 홀로 아뢰기를, “가능합니다.” 하였다.
이에 이종무를 삼도 도체찰사(三道都體察使)로 삼아서 세 도의 군함 2백 척을 거느리게 하고,
영상 유정현을 도통사(都統使)로 삼았다. 세종이 한강에 거둥하여 그들을 전송하였다.
○ 공이 아홉 절도(節度)의 배 227척과 군사 1만 8천 명을 거느리고 65일 동안 먹을 군량을 싸 가지고
대마도에 이르러서 배 백여 척을 빼앗고 머리 백여 급을 베었으며,
또 적의 집 2천여 호를 불사르고 중국인 백여 명과 왜인 2십여 명을 사로잡아 가지고 돌아왔다.
김숙자(金淑滋)
김숙자(金淑滋)는 자는 자배(子培)이며, 호는 강호(江湖)이고, 본관은 선산(善山)이다.
세종 기해년(1419)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사예(司藝)에 이르렀다.
세조 원년에 벼슬을 사양하고 밀양(密陽)으로 돌아가 병자년(1456)에 죽으니 나이가 68세였다.
○ 윤상(尹祥)이 황간(黃澗) 원이 되었을 때에 그가 걸어 가서 《주역》을 배워 역학에 정통하였다.
《이준록(彝尊錄)》
○ 일찍이 길재(吉再)의 문하에서 배웠는데 학문의 조예가 깊어서 당대의 이름난 선비가 되었다.
만년에 벼슬을 그만 두고 남으로 돌아가 응천강(凝川江) 뒤에 초당(草堂)을 짓고
산수에 취미를 붙여 스스로 강호산인(江湖散人)이라 일컬었다.
성품이 본시부터 염담(恬淡)하여 사물에 급급하지 않았으므로 혹자들은 그를 우활하다 하였으나,
대절(大節)에 있어서는 굳세어 흔들림이 없었으며,
세상에 있은 지 60여 년에 한 가지 행실도 허술한 데가 없었다. 《이준록》
○ 임금이 명을 내려 경학에 밝고 행검이 있어서 사유(師儒)가 될만한 자를 추천하라 하였는데,
그가 수천(首薦)이 되어 세자 우정자(世子右正字)가 되었고 나가서는 선산 교수(善山敎授)가 되었다.
그뒤에 개녕 현감(開寧縣監)으로 있을 때에 세종이 승하하였는데,
최질(衰絰 : 굴건 제복)로 대궐을 향하여 슬퍼하였고,
또 문종(文宗)의 상사를 만나서는 더욱 슬피 울면서, “아아, 가엾다. 사군(嗣君 : 단종)이시여.” 하니,
보는 사람이 모두 감동하였다. 《명현록(明賢錄)》
○ 공은 학도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고 반드시 상세히 이것 저것 인증하여 가르쳤으므로
매를 때리지 않아도 사람들이 배우기를 좋아하였다.
상제로 봉암(鳳巖)에 여막(廬幕)을 짓고 있을 때, 그 고을 자제들이 그 곁에 서재(書齋)를 짓고 모여 오므로
조석전(朝夕奠)이 끝난 뒤에는 글을 강의하였으며,
매양 ‘산 부모를 섬기고 죽은 부모를 장송(葬送)한다.’ 는 구절을 볼 때마다 문득 흐느끼면서 울었다.
하 연(河 演)
하연(河演)은 자는 연량(淵亮)이며, 호는 경재(敬齋)이고, 본관은 진주(晋州)이다.
아들 셋이 있었는데, 내외 증손(曾孫)이 백여 인이나 되었다.
태조 병자년(1396)에 생원ㆍ진사를 거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예문관 대제학을 거쳐
을축년(1445)에 정승이 되어 영의정에 이르렀고, 궤장을 받고 치사하였다.
단종(端宗) 계유년(1453)에 죽으니 나이는 78세였다.
시호는 문효공(文孝公)이며, 문종(文宗)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 정유년에 동부대언(同副代言)이 되었는데, 태종이 그의 손을 잡으면서 이르기를,
“경이 이 자리에 오른 이유를 아는가.” 하자, 공이 “모릅니다.” 고 대답하니,
태종이 이르기를, “전일 경이 사헌부에 있을 때 능히 헌직(憲職)을 감당했으므로,
내가 그때에 경을 알았다.” 하였다.
○ 공은 평상시에 늘 검은 사모를 썼는데, 그 뿔은 빼어 버리고 향을 태우며 고요히 앉아서
종일토록 읊조렸다. 공의 시는 기벽(奇僻)하여 옛시의 격조에 가깝고 필법이 굳세어 체를 얻었다.
일찍이 춘방(春坊)에 있을 때에 시를 지어 손수 쓰니, 하륜(河崙)이 감탄하기를,
“하문학(河文學)이 시를 지어서 하문학이 썼으니, 역시 인간 보물이다.” 하였다. 《필원잡기》
○ 공이 일찍이 경상도의 안사(按使)가 되었을 때에 남지(南智)가 아사(亞使)가 되었는데,
공이 매우 중히 여겨 하관으로 대우하지 않았다.
일찍이 진주에 이르러 아름다운 산천의 경치를 찬탄하였으니, 공이 진주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남지가 얼굴빛을 고치면서 말하기를,“산수는 비록 아름다우나, 품관(品官)은 몹시 좋지 못합니다.”
[이것은 진주 출신인 하연을 가리킨 것임] 하니, 공이 크게 웃었다.
사람들이 공의 아량에 심복하였더니, 뒤에 공은 남지와 함께 정승에 올랐다. 《필원잡기》
○ 공은 평안하고 검소하며 강직하고 명철하며 풍채가 단아하였다.
효도를 다하여 어버이를 섬겼고, 종족간에 매우 화목하였으며,
옛친구를 버리지 않고 경조사에 인사를 빠뜨리지 않았다.
살림살이에는 힘쓰지 않고 기첩(妓妾)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규문(閨門)이 엄숙하였다.
닭이 울면 일어나서 의관을 바로하고 대궐을 향하여 앉는데 좌우에는 도서(圖書)뿐이었다.
그에게 시를 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흔연히 곧 붓을 잡고 쓰니
시상(詩想)이나 필법이 늙을수록 더욱 절묘하였고,
천성이 옛 도리를 좋아하여 일마다 모두 옛사람을 자기의 목표로 삼았으며,
사대부를 예법으로 대우하여 문에서 오래 기다리는 손님이 끊일 적이 없었다.
오랫동안 이조에 있었으나 사사로운 청탁을 좋아하지 않았고,
정승이 되었을 때에는 법을 좇아 흔들리지 않고 시종 여일하게 근신하였으니,
그는 태평 시대의 문치(文治)를 이룩한 재상이었다.
또 학문이 정하고 깊고 문장이 법도 있고 우아하여 일세의 우러름을 받았다.
공이 죽은 뒤, 유명(遺命)에 따라 불사(佛事)를 짓지 않았다.
○ 공은 부모를 섬기는데 몹시 효도하였다.
두 어버이의 나이가 모두 80이었는데, 어버이 마음을 기쁘게 할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구경당(具慶堂)을 짓고 설날이나 명절이 되면 반드시 잔을 들어 수(壽)를 올리니,
사대부들이 영광으로 여겨서 시를 지어 찬송하는 이들도 있었다.
구경당은 초가로 지어 해마다 새로 이엉을 하였는데, 어버이가 돌아가시자, 영모(永慕)로 편액을 고쳤다.
자질들이 기와로 바꾸기를 청하니, 공이 탄식하기를,
“선인(先人)이 거처하시던 곳을 어떻게 고치겠는가.
역시 그대로 두어, 후대의 사람으로 하여금 선인의 검소함을 본받게 하여라.” 하였다.
황보인(皇甫仁)
황보인(皇甫仁)은 자는 사겸(四兼) 또는 춘경(春卿) 이며, 호는 지봉(芝峯)이고, 본관은 영천(永川)이다.
태종 갑오년(1414)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묘년(1447)에 정승이 되어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문종(文宗)의 유명을 받아서 단종(端宗)을 돕다가, 계유년(1453)에 김종서(金宗瑞)와 함께 죽었는데,
숙종조(肅宗朝)에 관작이 회복되었고 시호는 충정공(忠定公)이다.
○ 공은 일찍이 차원부(車原頫)의 원통함을 간절히 논하느라고 사모가 거꾸로 쓰여진 줄을 몰랐더니,
원부가 그로 인하여 특별히 신설(伸雪)되었었다.
그때 사람들이 그를 사모를 거꾸로 쓴 시종이라 일컬었다. 《해동잡록》
○ 공의 무덤이 파주(坡州) 천참(泉站) 서편 발흥(勃興) 큰 길 가에 있었는데,
그 묘표(墓表)의 글에는 커다랗게 ‘영천 황보공지묘(永川皇甫公之墓)’ 라 새겼고,
또 작은 글씨로, ‘공 휘 인 노산조 수상 경태 계유 정난시 병 이자 일손 피화'라는 스물 두 글자를 새겼고,
(公諱仁魯山朝首相景泰癸酉靖難時幷二子一孫被禍)
또 ‘정덕 기묘 이월 입석 거 피화 위 육십 칠년(正德己卯二月立石距被禍爲六十七年)’ 이라 새겼는데,
수장(收葬)한 이나 그 무덤에 표석을 세운 이의 이름은 모두 나타내지 않았다. 《미수기언(眉叟記言)》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제3권, 세종조 고사본말(世宗祖故事本末)
- 한국고전번역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