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주요 인물(신하)
세종의 주요 인물 (신하) | |
황희 (1363-1452) |
‘성실하고 정직한 참 재상’과 ‘간악한 소인(小人)’으로 황희에 대한 평가는 이중적이다. 태종과 세종에게는 “세상을 이끌 만한 재주와 실제 쓸 수 있는 학문을 가진 정승”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신하들은 “심술이 바르지 못해 반대자를 중상하고 뇌물 받기 좋아하는 "황금 대사헌”이라 비판했다.
강릉의 부사 황군서의 서자로, 어머니는 천출인 노비였다. 태종은 그를 도승지로 발탁하였고, 세종은 18년 동안 정승직을 맡겼다. 탁월한 사태 파악 능력으로 국왕이 중심을 잃고 헤맬 때, 일의 우선순위를 말하고 그 자리에 적합한 인재를 추천하는 등 해결책을 내놓았다.
세종 치세의 주춧돌이 된 허조, 최윤덕, 안숭선 등이 모두 황희의 천거와 후원을 받은 인물들이다.
|
맹사성 (1360-1438) |
황희와 더불어 세종 치세의 최고의 명재상으로 불린다.
자는 자명(自明), 호는 고불(古佛), 충청남도 온양 출생이다. 권근의 문인으로 1386년(우왕 12) 문과에 급제하였다. 1427년(세종 9) 우의정에 올라 당시 좌의정이던 황희와 정계를 이끌었다. 1431년(세종 13) 좌의정에 올랐고, 이듬해 영춘추관사를 겸하여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를 편찬하였다. 시문에 능하고, 음률에도 밝았으며 청백리(淸白吏)로 존경을 받았다.
|
허조 (1369-1439) |
황희와 함께 세종의 정치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황희의 천거로 태종의 신임을 얻었는데 태종은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이 사람은 나의 주춧돌이다.”라고 말했다.
어릴 때부터 몸이 야위어서 어깨와 등이 굽은 듯한 데다가, 깐깐한 업무처리 방식 탓에 사람들은 그를 “말라깽이 송골매 재상”이라 불렀다. 세종 치세에서 10여 년간 이조판서로 봉직하는 동안 천거된 인재를 꼼꼼히 검증하였고, 선발된 공직자에 대해서는 보호하려고 애썼다.
어전회의에서 제안된 정책이 잘못될 수 있는 소지를 지적해내는 일은 종종 허조의 몫이었다.
|
변계량 (1369-1430) |
1430년(세종 12)에 사망할 때까지 변계량은 세종 치세 전기의 대표적인 ‘문형(文衡 : 최고학자)’으로 평가 받는다. 자는 거경(巨卿). 호는 춘정(春亭)으로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1420년(세종 2) 집현전이 설치된 뒤 20년 간 대제학을 맡으며 외교문서 작성을 거의 전담하였고, 많은 학사들을 길러 세종 치세의 학문적 기반을 제공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태조실록>의 편찬과 <고려사> 개수(改修)에 참여하였으며,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
정인지 (1396-1478) |
1430년(세종 12) 변계량의 사망 이후 세종시대 ‘문형(文衡)’으로 인정받은 인물로 가난한 시골(부여) 출신 수재였다. 태종 시대에 두 번이나 장원급제를 해서 명성을 떨쳤고, 문학, 어학, 역사, 천문학, 수학 등 모든 분야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세종은 “정인지도 이렇게 말했다”면서 신하들을 설득하곤 했다.
정인지는 세종 정치의 ‘비판적 지지자’였다. 세제개혁이나 훈민정음 창제 그리고 고려사 편찬 등에 대해서는 세종을 적극 지지했지만, 세종의 ‘호불적(好佛的) 태도’에 대해서는 강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
김종서 (1390-1453) |
세종은 국경 문제나 외교 문제가 발생하면 김종서를 보내 해결하게 할 만큼 그에 대한 신임이 두터웠다. 1452년(단종 즉위년) 좌의정이 되어 단종을 보필하다가 이듬해 수양대군에게 살해되었는데, 이 사실은 세종이 그에게 얼마나 좋은 울타리였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6진개척의 수장으로서, 강직하고 위엄을 갖춘 관료이자 <고려사> <고려사절요>의 편찬 책임자이기도 하였다.
아버지가 무관직에 있었고 6진개척의 공로 때문에 흔히 ‘무관’으로 알기 쉬우나 김종서는 강직하고 엄정한 문인이자 학자였으며 유능한 관리였다. 집현전 출신이 아니면서도 당시 최고 수준의 학자, 관료였던 집현전 학사와 그 출신들을 지휘해 <고려사> 편찬의 책임을 맡았다.
|
신숙주 (1417-1475) |
보한재(保閑齋) 신숙주는 성삼문과 대조적인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성삼문 등 사육신(死六臣)이 절개를 지킨 충신인데 반해 신숙주는 권력의 추이에 따라 태도를 바꾼 변절자(‘숙주나물’)라는 평이 그것이다.
하지만 그는 세종 치세의 핵심 인물로, 1439년(세종 21) 문과에 급제한 이후 성삼문 등과 함께 집현전의 주요 멤버였고, 1442년(세종 24)에는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와 <해동제국기>를 남겼으며,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는 성삼문과 더불어 요동을 13차례나 왕래했다.
세조는 일찍이 “당 태종에게는 위징, 나에게는 신숙주”라고 말했을 정도로 신임이 두터웠다.
|
성삼문 (1418-1456) |
매죽헌(梅竹軒) 성삼문은 충남 홍성 출생으로,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이고 도총관 성승의 아들이다.
1438년(세종 20) 식년 문과에 급제하고, 1447년(세종 29) 문과중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집현전 학사였고, 세종이 훈민정음 28자를 만들 때 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이개 등과 이를 도왔으며, 1446년(세종 28) 9월 29일 훈민정음을 반포하는 데도 공헌하였다.
1455년(단종 3) 예방승지로 있을 때, 수양대군(뒤의 세조)이 단종을 위협하여 왕위에 오르자 아버지 성승, 박팽년, 유응부 등과 더불어 단종 복위를 협의했으나 모의에 가담했던 김질의 밀고로 체포되어 심문을 받고 군기감 앞에서 거열형(車裂刑)을 당하였다.
|
윤회 (1380-1436)
|
태종과 세종이 아낀 학식이 출중한 천재형 학자였지만, 거의 매일 술독에 빠져 있어 왕의 근심을 샀다. 자는 청경(淸卿), 호는 청향당(淸香堂)이고, 본관은 무송(茂松)이다.
1417년(태종 17) 승정원의 대언이 되어 왕을 보좌했으며, 1424년(세종 6) 집현전 부제학으로서 정도전의 <고려사>를 개정하는 일을 했다. 1432년(세종 14) 신잠과 함께 <팔도지리지>를 편찬, 1434년(세종 16) 집현전에서 <자치통감훈의(자치통감훈의)>를 찬집하기도 했다.
|
이수 (1374-1430) |
세종의 스승으로 자는 택지(擇之), 호는 심은(深隱)이고, 봉산 이씨의 시조이다.
1396년(태조 5) 생원이 되고, 1411년(태종 11) 충녕대군(뒤의 세종)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1414년(태종 14) 알성문과에 급제한 뒤 예조정랑, 사재감정, 황해도관찰사 등을 거쳤다.
1429년(세종 11) 예문관 대제학으로 등용되고 병조판서가 되었으나 1430년(세종 12) 술에 취해 낙마하여 죽었다. 세종은 그가 죽었을 때 흰옷을 입고 애도했을 만큼 평생 스승으로 대하였다.
|
박연 (1378-1458) |
책을 숭배한 조선의 음악가. 난계(蘭溪) 박연은 책에 실린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생각한 사람이었다.
중국에서 들여온 음악이론서를 신봉해 적힌 그대로 악기를 제작해내는 그의 모습에서, 그리고 풍수서적을 믿고 승문원 터, 즉 지금의 국립고궁박물관 앞뜰에서 황제가 날 것이라 확언하는 그의 얼굴에서 책 숭배자 박연을 볼 수 있다.
충북 영동에서 태어난 그가 1411년(태종 11)에 진사시험에 합격했을 때만 해도 음악과 멀리 있었으나 세종을 만나면서부터 음악 전문가로 변신한다. 세종은 1424년(세종 6) 그를 악학별좌에 임명한 뒤 “오로지 음악을 맡아 주관하게” 했다.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박연이 세종에게 음악을 위임받은 다음부터 “앉아서나 누워서나 매양 손을 가슴 밑에 얹어서 악기를 다루는 시늉을 했다”고 한다.
|
장영실 ( ? - ? ) |
조선 전기 과학자로 본관은 아산이다. 원나라 사람인 아버지와 기생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동래현의 관노로 있었는데, 재능이 뛰어나 세종에게 발탁되었다.
1423년(세종 5) 상의원별좌에 임명되었고, 1424년(세종 6) 물시계를 완성하여 종5품의 행사직으로 승진하였다. 1432년(세종 14)에 간의, 혼천의를 완성하고, 1437년(세종 19) 대간의, 소간의와 현주일구, 천평일구, 정남일구, 앙부일구 등을 만들었다. 자격루(自擊漏)와 자동물시계인 옥루(玉漏)를 만들었음은 물론, 이천 등과 함께 조선시대의 활판기술을 대표하는 갑인자(甲寅字)를 완성하였다.
하지만 1442년(세종 24) 그의 감독 하에 제작된 왕의 가마가 부서지는 사건이 발생하여 투옥된 뒤 장형(杖刑)을 받고 파면 당하였다.
|
이순지 ( ? -1465) |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과학자로 당시 천문학의 대가였다. 자는 성보(誠甫), 본관은 양성(陽城)이다.
1427년(세종 9)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 교리와 서운관 판사 등을 지냈다. 세종의 명으로 역법(曆法)을 연구하여, 정인지, 김담 등과 함께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을 지었다. 또한 장영실, 이천 등과 앙부(仰釜), 물시계 등을 만들었다. 1445년(세종 27)에는 천문관계 문헌을 연구하고 체계화하여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을 펴냈다.
|
- <세종처럼-소통과 헌신의 리더십> 박현모 지음, 60-6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