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가는(문화)

[한국의 창종자들] 동학 - 근세 민족종교의 시발점

Gijuzzang Dream 2008. 7. 20. 00:53

 

 

 

 

 

[한국의 창종자들]  동학은 근세 민족종교의 시발점

 

혁명의 실천에서, 사회운동과 문화 · 정치 · 이념에까지 영향

 
 
 
(1) 수운 최제우

수운이 수행하고 득도한 경주 용담정. 최근 새로 복원했다.


 

천도교를 낳은 동학(東學)은 근세 민족종교의 시발점이다.

종교적 가르침을 넘어 때로는 혁명의 실천으로, 때로는 사회운동과 문화에 이어

정치와 이념에 이르기까지 근현대사의 구석구석에 동학과 천도교의 영향은 뿌리가 깊다.

동학을 세운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 1824∼1863)는

경주 인근 몰락한 양반의 늦둥이로 세상에 났다.

어릴 적 이름은 복술이, 본명은 제선(濟宣)이고 자는 도언(道彦)이다.

 

그는 자신의 시대만큼 불우한 삶을 살았다. 여섯 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열일곱 살에 아버지를 잃었으며, 스무 살 때 얼마 되지 않은 가산마저 모두 불에 타버렸다.

이듬해 가족을 처가에 맡기고 행상으로 전국을 유랑했다.

10년을 떠돌며 그가 본 것은 길 잃은 조선의 절망이었다.

그는 몽중노소문답가(夢中老少問答歌)에서

“임금과 신하와 아비와 자식이 제 도리를 하지 못하는” 시대에 팔도를 다 돌아봐도

“혹은 궁궁촌을 찾아가고 혹은 만첩산중에 들어가고 혹은 서학에 입도”하여

서로 옳다 주장하지만 맞지 않음을 느꼈다고 적고 있다.

체제의 모순은 극에 달했고 무력을 앞세운 서양 세력이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현실 속에

국가는 이미 붕괴 직전인 위태로운 현실을 절감했다.

사람들은 각자 살길을 찾아 옛 예언서를 들고 우왕좌왕하거나

서학(西學)인 천주교에 귀의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세상은 마음 둘 곳을 잃어버렸다.

유랑을 끝낸 그는 처가로 돌아와 농사를 지으며 한동안 조용히 지냈다.

일상 중에 몇 차례 종교적 신비를 체험하자 본격적인 종교 수련에 나서기로 했다.

비몽사몽간에 금강산에서 왔다는 승려에게 49일 동안 기도하라는 말을 듣고 난 후다.

해를 넘겨 서른세 살에 양산 통도사 내원암에서 수도의 길에 발을 내딛고,

이듬해 산 속 동굴에서 49일 동안 간절한 기도를 마쳤다.

 


최제우, 경주 인근 몰락 양반가 늦둥이

 

수운 최제우 초상.

이후 가족을 이끌고 다시 고향마을 용담으로 돌아갔다.

불타버린 집 대신 부친이 세운 용담정 정자에 머물며

도를 얻지 못하면 세상에 나가지 않을 것을 결심했다고 한다. 그때까지 쓰던 제선이란 이름을 버리고

수운(水雲)이란 호를 짓고 제우(濟愚)로 이름을 고쳤다.

용담정에서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 셈이다.

1860년 4월 최제우는

기도와 명상 속에서 드디어 한울님을 만났다.

한울님은 “나의 마음은 너의 마음(吾心卽汝心)”이라는

진리를 들려주었다.

줄곧 찾아나섰던 구세와 구원의 길이 시작됐다.

비로소 ‘사람이 하늘(人乃天)’이며

‘천심이 곧 인심(天心卽人心)’이라는

새로운 가치와 깨달음이 그의 마음속에서 드러난 것.

서울대 종교학과 윤이흠 명예교수는

최제우의 자각이 갖는 의미를

“동양정신사의 일대 전환”이라고 지적한다.

 

“유교나 불교와 같은 동양의 전통적인 세계관이

지배하던 시기가 지나갔고 서양의 종교가 지배하는 것도

아니며 그야말로 새로운 길의 시작을 알린 것입니다.

장엄한 개벽의 새 시대가 오는 것을 예측하고 그 대응으로 최제우는 동학을 제시했습니다.”

 


여자종을 면천시켜 수양딸로 삼아


모든 것이 끝장나기를 바라던 고통의 세월은 선천개벽의 시대로 막을 내리고,

지상천국이 이루어지는 후천개벽의 시대가 시작됐으니

이는 최제우 자신이 얻은 도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도를 “지금도 들어보지 못하고 옛날에도 들어보지 못한” 무극대도(無極大道)라 표현했다.

남존여비 반상차별의 유교체제와 달리 그의 도 안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한 존재였다.

깨친 지 1년이 지나자 아내인 박씨에게 처음으로 도를 권했다.

집안의 여자종을 면천시켜 수양딸과 며느리를 삼으니 주변의 관심이 쏠렸다.

소문을 듣고 사방에서 가르침을 구하려고 몰려들었다.

후에 동학 2대 교조가 된 해월 최시형(海月 崔時亨)도 그 무렵 용담을 찾아와 제자가 됐다.

새 시대를 갈망하던 민심이 그를 주목하자 기득권층과 유생들은 당연히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여기저기서 비난이 빗발치자 그는 전라도 남원의 작은 암자 덕밀암으로 몸을 피한다.

조용히 경전을 저술하여 자신이 얻은 바를 정리하는 시간을 맞았다.

당시 세상의 의심은 그의 가르침이 천주를 섬기는 서학과 상통한다는 것이다.

최제우는 ‘권학문(勸學文)’을 지어 자신의 도를 ‘동학(東學)’이라고 밝혔다.

 

“내가 또한 동방에서 태어나 동방에서 도를 얻었기에 도는 비록 천도이나 학은 동학이다.

(道雖天道 學則東學)”

 

‘무극대도’는 비로소 ‘동학’이라는 이름을 얻어 세상 속으로 번지고 있었다.

이때 그의 행적 중에 주목할 만한 것은

칼을 노래하는 ‘검가(劍歌)’를 짓고 칼춤을 추었다는 사실이다.

칼춤은 동학의 수도 방법으로도 널리 퍼졌다고 전한다.

 

경상감사 서헌순은 동학에 대한 동태를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하루는 ‘요사이 바다 위에 배로 오고 가고 하는 것은 모두 서양인들인데

칼춤이 아니고는 제어할 수 없을 것이다’라며 검가 한 편을 주었습니다.”

최제우는 남원 교룡산성에서 반 년 정도를 머물다가

해를 넘겨 경주로 돌아갔지만 분란과 체포가 기다리고 있었다.

 

교인이 점차 늘자 독창적인 신도 조직을 만드니 접(接)이라는 체계다.

도를 전한 사람이 접주(接主)가 되어 신앙조직인 접을 이끌어가고

후일 동학농민혁명 때는 접을 묶어 포(包)라는 조직을 만든다.

들불처럼 번지는 세력과 조직은 체제를 위협하는 불온세력으로 의심받기에 충분했다.

각지의 유생이 나서서 탄원하자 드디어 관이 나섰다.

조정의 명을 받은 선전관 정운구는 동학을 조사하러 경주로 향했다.

정운구는 왕에게 올린 보고서에서

“문경새재를 지나 경주까지 이르는 고을마다 동학 이야기와 주문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적고 있다.

선전관이 올 것을 알고 신도들이 수운에게 피할 것을 권하자
그는

“도가 나에게서 나왔으니 내 스스로 당할 것이다.

어찌 몸을 피하여 그대들에게 누를 미치게 하겠는가”라는 말을 남겨 닥칠 운명을 기다렸다고 전한다.

용담에서 최제우와 23인의 신자가 체포됐다.

고종시대사 1집에 나온 1864년 3월 2일자 기사에는

승정원 일기와 고종실록을 참조하여 ‘동학교조 최제우의 목을 베고’라는 기사에

“최제우 등은 서양의 술수를 따라 명목을 옮겨 어리석은 백성을 현혹함으로써

황건적과 백련적과 같은 류라 하여 경중에 따라 처리하였다”고 적었다.

 

망해가는 국운을 앞두고 허약한 왕조는

동학과 최제우를 종교를 빙자하여 나라를 전복하려는 반란의 무리로 파악한 것이다.

그의 가르침은 그만큼 두렵게 다가오고 있었다.

곧 새 세상이 온다는 개벽의 예언을 남기고 깨달아 도를 편 지 4년 만에 최제우는 세상을 떴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을 좇아 열렬히 세상을 바꾸려 한 동학의 교도들은

순교를 피하지 않고 줄을 이었다.
- 김천<객원기자〉
mindtemple@gmail.com

- 2008 07/22  경향, 뉴스메이커 784호

 

 

 

 

 

 

(2) 해월 최시형 2대 교조로 인정받다


최제우 가르침 모아 경전인 동경대전 · 용담유사 펴내

동학의 제2대 교조 해월 최시형 / 동학의 제3대 교조 의암 손병희


 

동학을 세운 수운 최제우는 무정한 시대에 개벽의 횃불을 들었다.

자신들의 권력과 유교적 질서를 지키는 것조차 힘들었던 구한말의 정권은

어둠 속에 감춰둔 학정과 세상의 한탄이 드러나는 것이 두려웠다.

세상을 어지럽혔다는 혹세무민(惑世誣民)과 좌도난정률(左道亂正律)의 죄목으로

최제우의 목을 베어 돌아선 민심을 막아보려고 했지만,

옛 세상은 끝났고 새 시대가 온다는 그의 가르침은 이미 사람들의 마음에 뿌리를 박고 있었다.

최제우의 순교 이후 조정의 기대와 달리 교세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최제우의 횃불을 세상을 불태운 들불로 만든 것은

해월 최시형(海月 崔時亨, 1827~1898)과 의암 손병희(義菴 孫秉熙, 1861∼1922)다.

최시형의 본명은 최경상. 후일 동학의 교조가 된 후

“도(道)는 용시용활(用時用活)하니 때와 짝하여 나가지 않으면 죽은 물건과 같다”면서

“이 뜻을 후세 만대에 보이기 위하여 스스로 이름을 고치겠노라”고 이름을 시형으로 바꾸었다.

그도 경주 사람으로 최제우처럼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머슴살이부터 온갖 어려운 일을 다 겪었다.


백범 김구도 해주서 교인으로

그는 최제우의 득도 소식을 듣고 곧바로 달려가 제자가 되어 해월(海月)이라는 호를 받았다.

철저한 수련으로 곧바로 종교적 신비를 체험하고 열렬히 수행하여 일찍부터 교조의 인정을 받았다.

곧 닥칠 박해를 예감한 최제우는 최시형에게 교통을 전했다. 제2대 교조의 일을 맡긴 것이다.

 

“오늘부터 도운(道運)이 그대에게 돌아가고 도법(道法)이 그대에게 전해졌으니

힘써 나의 마음을 어기지 말라”

 

삼엄한 감시와 박해 속에서 최시형이 한 일은 교조의 가르침을 정리해서 펴는 일이었다.

1880년부터 최제우의 가르침과 저술을 모아 동학 경전인

동경대전(東經大典)과 용담유사(龍潭遺詞)를 곳곳에서 찍어 펴냈다.

동학은 세상의 소문이 아니라 경전 속의 가르침으로 세상에 다가서게 됐다.

최시형이 교조로서 처음 행한 설법은 신분의 귀천을 없애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한울이라 평등이요 차별이 없나니

사람이 인위로서 귀천을 가리는 것은 한울님 뜻에 어긋나리라”.

 

나라 밖은 이미 변해가고 있었지만 조선의 위정자는 외면하고 있던 시대의 흐름이었다.

연세대 사회과학연구소 오문환 박사는 “동학은 세상의 흐름과 함께 간다는 가르침을 내세웠으니,

도(道)란 시대 상황을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역사와 함께 나가는 것임을 주장하고 실천했다”며

최시형은 현실과 종교를 밀착시킨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종교가 세상 한복판으로 나아가 사람들의 아픈 삶을 직접 구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시형은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보은에 숨어 소리 없는 포교를 계속해갔다.

뜻을 가진 이들이 속속 동학에 입교하니 그 무렵 백범 김구도 해주에서 교인이 됐다.

19세의 김구는 1983년 보은으로 최시형을 찾아가 팔봉 접주의 첩지를 받았다.

한 해 뒤 그는 농민군의 선봉으로 해주성 공략에 앞장선다.

 

최시형도 순교… 손병희가 뒤이어

 

농민혁명 직전은 동학의 최고 전성기였다.

전국 곳곳에 신도 조직인 포와 접이 조직해 있었고 무엇보다 민심을 돌려놓았다.

각지에서 수십 명에서 100명씩 지방관청에 몰려가 탄원서를 내고 있었다.

천도교 경전인 <동경대전>의 목판.


구한말의 역사를 기록한 황현의 ‘매천야록(梅泉野錄)’은

그들이 대궐에까지 몰려온 정황을 적고 있다.

 

“죽은 최제우의 죄를 씻어주기 위해 2월 중 대궐 앞에 수천 명이 엎드려 상소했다.

성균관 유생들은 먼저 성토해야 한다는 여론을 내고,

그들을 다 처형하여 난을 방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현과 같은 유학자들은 동학을 교조의 신원을 내세우는 혹세무민의 무리로 낮추어 보고 있었다.

그러나 상소의 핵심은 ‘탐관오리의 화를 입어 죽어 나가는 사람이 그치지 않으니

조정은 도탄에 빠진 민정을 공평히 살펴 헤아려주기 바란다’는 민초들의 요구였다.

상소 끝에 돌아온 대답은 오히려 동학을 금하며 수괴를 잡으라는 명령이었다.

최시형은 이에 맞서 폭정으로부터 민중을 구하고 외세를 물리칠 것을 부르짖어

팔도 교도의 소집을 요청했다. 수만 명이 보은에 모여 돌로 성을 쌓고 관과 맞섰다.

결국 농민군의 봉기가 일어나자

정부와 유생, 일본과 청나라, 외세와 수구세력이 한편이 되어 혁명의 싹을 밟아버렸다.

갑오년인 1894년 최시형은 체포되어 교수형을 당했다.

그의 나이 72세였다. 죄명은 동학의 수괴.

 

이미 통령 신분으로 농민군을 이끌었던 의암 손병희는 그의 뒤를 이어 제3대 교조가 된다.

손병희는 박해를 피해 일본으로 망명해 있었다.

본디 미국으로 가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일본에 머물며

오세창 · 박영효 등의 망명객과 교류하며 지냈다.

손병희가 본 것은 근대 개혁의 영향과 시대의 변화였다.

결국 종교와 정치사상의 민주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며 동학의 자기 변신을 준비하고 있었다.

손병희는 망명 중에도 여러 차례 국정의 개혁을 요구했다.

그는 주권이 민중에게 있어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가야 함을 주장했다.

천심이 민심에 있다는 동학의 가르침은 그에 이르러 구체화된다.

서울대 종교학과 김종서 교수는 동학의 지도자에 따른 하늘관의 변화를 이렇게 설명했다.

 

“수운 최제우가 말한 것은 시천주(侍天主), 즉 하늘을 모시자는 것입니다.

최시형은 양천주(養天主), 우리 안의 하늘을 길러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손병희에 이르러 인내천(人乃天), 즉 사람이 하늘이라는 메시지가 드러납니다.

손병희가 일본에서 민주주의와 평등주의를 경험한 것이 교리에 드러난 것입니다.”

 

점점 하늘을 대하는 행위가 적극적으로 변해갔다는 것이다.

을사늑약으로 나라를 빼앗기자 손병희는

1905년 12월 1일 동학의 교명을 천도교(天道敎)로 바꿨다.

 

동학교도가 기반이 된 진보회를 일진회가 흡수하여 친일에 나서자

세간에는 동학이 친일에 앞장선다는 원성이 자자했던 것도 큰 이유가 됐다.
손병희는 서울에 중앙총부를 세우고 교세의 복원을 서둘렀다.

일진회의 수장이던 이용구 등을 출교하여 친일세력과 일정한 획을 그었다.

교구조직을 정비하며 교조가 한울님에게서 받은 궁을기(弓乙旗)를 상징으로 내세우고,

일요일을 시일로 삼아 의례를 체계화했다.

손병희의 천도교는 안팎의 개혁을 이끌며 또 다른 민심과 천심의 폭발을 예비하고 있었다.

1919년 3·1운동을 준비하고 전국에서 조직적인 시위에 나선 것도 천도교인들이었다.

천도교는 줄곧 현실 개혁과 종교의 갈림길에서 고심했다.
- 2008 07/29   뉴스메이커 785호

- 김천<객원기자〉 mindtemple@gmail.com

 

 

 

(3) '사람이 하늘’ 교리로 민중 사로잡다



최제우, 모두 상생하여 함께 어우러져 사는 지상천국 꿈꿔

 

수운 최제우가 태어나고 수행한

용담정에 세워진 동상.

“사람이 하늘이다.”
천도교의 교리와 목적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말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엄연한 차별과 모순을 해결하기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종교는 세상을 보는 다른 눈과 방법을 제시하여 빈부와 신분의 벽을 한꺼번에 해소하려 한다.

종교적 가르침 안에서는 한울님에게 수운 최제우가 들은 것처럼 ‘한울의 마음이 나의 마음’인 평등의 세상이 가능해진다.

수운 최제우가 종교적 깨달음 속에서 본 세상은 사람이 주인이 되고, 모두 상생하여 함께 어우러져 사는 곳이다.

그는 새로운 개벽이 일어나 지상천국이 이루어지기를 꿈꿨다.

서울대 종교학과 윤이흠 명예교수는 “천도교는 우주론적 종말론인 개벽사상이 핵심이며 오늘의 현실이 구제할 수 없도록 혼돈에 빠지면 빠질수록 후천 이상세계는 그만큼 더 장엄하고 화려하다”며 당시의 시대적 조건과 맞물려 민중을 사로잡았음을 강조했다.


한문체 동경대전 식자층이 대상


최제우의 개벽사상은 이후 이 땅의 신종교에 하나의 이정표가 된다. 증산교와 원불교, 심지어 통일교까지 후천개벽의 구현을 목표로 삼게 되었다.

그를 실현하는 주체와 방법은 달랐지만, 수운이 밝힌 선천개벽시대의 몰락과

후천개벽시대의 시작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다.

사람을 세상의 근본으로 보는 인본(人本)과 평등, 상생의 가르침도

여타 신종교의 모범이 되어 각자 그의 가르침을 극복하거나 이어받아 교리를 세워 갔다.

한마디로 최제우의 가르침은 근대정신의 정형이 된 것이다.

천도교의 기본 경전인 동경대전(東經大全)과 용담유사(龍潭遺詞)는

최제우가 직접 지은 것이다. 동경대전은 한문체로 적은 경전이다.

종교 체험과 한울님과 만남의 과정을 적은 포덕문(布德文),

수행의 요체인 주문의 해석과 무극대도의 종교임을 밝힌 논학문(論學文),

도를 닦음에 지켜야 할 법도를 적은 수덕문(修德文),

철학적 탐구를 편 불연기연(不然其然)의 4편으로 그의 사상과 수행의 도리를 밝히고 있다.

당시는 교육받은 유학자만 한문을 읽을 수 있던 때라

동경대전이 식자층을 대상으로 했음을 알 수 있다.

내용들이 비교적 체계적으로 저술돼 있고 철학적·종교적 깊이가 있어

그가 상당히 오랫동안 당대의 문제와 해결책을 고심하고 있었다는 점을 느끼게 된다.

수운 최제우가 지은

용담유사의 한글 가사.

용담유사에는 한글 가사체 8편이 실려 있다.

아내를 위해 지은 안심가(安心歌), 자녀와 조카를 위해 지은 교훈가(敎訓歌) 등 누구나 쉽게 읽어 깨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피상적으로 세상을 구원하려는 것이 아니라 내 곁의 사람부터 마음을 일깨우고 삶을 바꿀 수 있도록 호소한 것이 독특하다.

천도교가 후에 남녀평등에 앞장서고 소파 방정환을 내세워 어린이운동을 이끈 것도 교조의 이런 태도와 무관하지 않다. 한마디로 일찍부터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언어와 가르침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연세대 사회과학연구소 오문환 박사는

“최제우의 하늘이란 종교적인 대상인 동시에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의 세상”이므로

시천주(侍天主)의 가르침으로 하늘을 모시는 일은 “세상의 사람을 모시는 것과

다르지 않아서 종교와 사회와 역사가 따로 떨어질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의 가르침이 종교에 국한되지 않고 적극적으로 세상을 바꾸는

변혁의 가르침이 된 것은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2세 교조 해월 최시형은 더 나아가 “사람이 하늘이어야 한다”고 절규했다.

1918년 조선총독부는 천도교인 수를 14만8000여 명으로 파악했다.

동학혁명의 좌절과 국권의 침탈에도 불구하고 교세는 여전히 꺾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3·1운동 이후 천도교는 내부로 눈을 돌려 교역자 양성과 교육에 나섰다.

미주에서 독립운동 관련 소식을 전하던 신한민보는

1922년 3월 23일자 기사에 천도교 종학원 설치 소식을 상세히 싣고 있다.

천도교가 ‘시대의 변천과 인문의 발달에 순응’하고

‘종법사와 포덕사를 양성하기 위해’ 종학원을 설립했다는 것이다.

교육연한은 예과 1년에 본과 3년으로 따로 속성과 1년을 두고 있었다.

천도교 교리와 세계 종교사를 비롯하여 철학, 외국어, 수학, 역사, 심리학 등

고등교육 전반을 가르치고 있었다. 손병희는 전국에 수백 곳의 종학원을 세웠다.

세상을 바꾸는 개벽의 길을 교육으로 옮겨놓은 것이다.

천도교는 주목할 만한 잡지들을 창간하여 교리를 널리 펼쳤다.

1906년 일간지 만세보(萬歲報), 1910년 천도교월보, 1920년 월간지 개벽(開闢),

1922년 월간지 부인(婦人), 1923년 월간지 어린이, 1926년 월간지 신인간(新人間) 등

일제하 언론사(史)에 주목할 만한 잡지를 두루 출판했다.


일간지 만세보·월간지 개벽 펴내


특히 개벽은 1926년 일제가 강제 폐간할 때까지 잡지의 왕으로 불릴 만큼 대중적인 인기가 높았다.

김일성은 그의 자서전 ‘세기와 더불어’에서 10대 시절 잡지 개벽을 통해

“동학의 교리를 이론적이고 철학적으로 접할 수 있었다”고 밝힌 바 있다.

천도교는 일제하에 혁신적인 방법으로 대중을 이끄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최제우의 사상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그의 가르침이 종교적으로나 철학적으로 지금도 낡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천도교를 상징하는 주문인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에는

분열로 대표되는 현대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가 담겨 있다고 주목한다.

 

오문환 박사는 이렇게 설명한다.
“시천주 안에는 창조의 존재와 변화시키는 기운이 합해진다는 가르침이 담겨 있다.

근대에 와서 인간과 자연이 분열되고 영성과 인간성이 동떨어져 혼돈을 겪고 있다.

그러나 최제우는 이것이 결코 나눌 수 없는 것임을 일깨웠다.”

수운 최제우의 가르침은 세상의 조화와 변화 속에 계속 혁신된다는 것이다.

내 안의 하늘을 모시고, 마음속의 신성과 영성을 깨달아 자연과 우주의 기운을 회복하는 과정이

후천개벽이라는 해석은 천도교가 아직도 진행 중인 오늘의 종교임을 일깨운다.
- 2008 08/05, 경향, 뉴스메이커 786호

- 김천, 객원기자,  mindtemple@gmail.com 

 

 

 

 

 

 (4) 남북분단 후 교세 급격히 하락

 

 

1920년대 교인 수 200만… 기독교 35만, 불교는 20여만 명에 불과

천도교 김동환 교령이

수운 최제우의 초상 앞에 앉아 있다.

매주 일요일 오전 11시. 서울 종로구 수송동 천도교 서울대교당에 200여 명의 천도교인이 모여 종교의식을 치르고 있다.

 

천도교는 일요일을 한울님을 모시는 날이란 뜻으로 시일(侍日)이라 하고 의식을 시일식이라 한다.

현재 천도교 교구는 전국에 105개, 그중 실제로는 85곳이 활동 중이며 미국과 일본에 각각 한 곳의 교구가 있다. 교인 수는 어림잡아 10만 명이 채 안 되는 것으로 파악된다.

1926년 7월 10일자 동아일보는 조선 종교현황 중에 천도교인 수를 200만 명으로 보도하고 있다.

같은 기사에 기록된 기독교 35만 명, 불교 20여만 명과 비교하면 압도적인 수다.

 

1930년 잡지 삼천리 10월호에서 천도교 핵심 인사 최린은 교당 수를 군 단위에 400개소, 면 단위까지 합하여 1000개소 이상이라고 밝히고 있다.

국내뿐 아니라 도쿄, 런던, 미주 일대와 심지어 쿠바에까지 천도교 교당인 종리원이 있었다는 것이다.

 

평안도 · 함경도에서 가장 번성

 

천도교는 초창기인 동학 때부터 극심한 내부 분열을 겪었다.

제2대 교조 해월 최시형이 동학혁명을 이끌 때 남접과 북접이 노선 차이로 대립했고,

제3대 교조 의암 손병희가 교통을 물려받을 때도 국내파의 반발에 부딪혔다.

이후 천도교는 신파와 구파의 분열, 천도교에서 출교당한 송병준 일파의 시천교,

기타 동학계열 교파들과 대립을 거친다.

일제는 천도교의 분열을 조장하여 회유와 탄압의 수단으로 삼기도 했다.

광복은 역설적으로 천도교 교세가 급격히 쇠락하는 전기가 됐다.

 

앞서 인용한 삼천리의 기사에서 최린은

“천도교는 평안북도와 평안남도, 함경남도가 가장 번성하는 곳이며,

이곳의 신도가 전체의 3분의 1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분단으로 가장 강력한 기반을 북에 남겨두게 되며 남북의 천도교는 분열과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뿐 아니라 급격히 밀려든 서구문물과 가치관은 종교로서 천도교의 위상을 위협했다.

3·1운동 직후인 1919년 9월 2일 청년운동조직으로 출발한 천도교 청우당(靑友黨)은

해방과 더불어 현실정치에 참여할 것을 선언한다.

1945년 10월 31일 ‘민족통일결성촉진, 전재동포구제, 실업대책’을 내세우며

지방대표 1000명이 모여 부활전당대회를 개최했다.

이후 임정 지지, 반탁 성명 발표 등을 주장하여 현실정치에 뛰어들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북한의 천도교인도 1946년 2월 8일 북조선 천도교 청우당을 창당했다.

당시 북한 전역에 100여 개에 이르는 조직을 갖춰

소련 군정도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북조선 청우당은 1948년 3·1절을 기해 남북통일 시위를 꾀하다 실패해

1만7000명의 간부가 검거되는 불상사를 겪는다. 이 사건으로 남쪽에서는

북의 교단 간부들이 배신했다는 소문을 들어 격렬히 비난하면서 결별하고 만다.

이후 남과 북의 정권은 정치적 이해 타산에 따라 청우당을 정략적으로 이용해

천도교에는 대중들의 지지를 잃는 계기가 됐다.

1970년대 초 천도교는 박정희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한때 교세를 되살리는 전기를 잡았다.

정전협정 남측 대표, 외무부 장관을 거쳐 서독대사로 근무하던 최덕신은

박 대통령의 권유로 귀국해 천도교 교령이 됐다.

박 대통령의 지원으로 수운 최제우가 득도한 경주 용담정이 복원됐고

현 천도교 중앙총부 건물인 수운회관이 건립됐다.

최덕신은 교단 내부의 분쟁으로 출교당하고 결국 미국 망명을 거쳐 1986년 월북한다.

그가 어린 시절 김일성과 함께 부친 최동오에게 동학을 배웠다는 설도 월북의 유력한 이유로

추측되고 있다.



1997년 오익제 전 교령 월북 충격

천도교 중앙총부 건물 수운회관.

이후 1997년 오익제 전 교령도 월북해 세상의 충격을 주었다.

이 두 사건은 천도교가 위축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교세 위축의 근본적인 원인을 내부에서 찾는 시각도 있다.

천도교 중앙총부 교화관 관장인 이선영 선도사는 “현대의 교육 문화 수준에 맞는 교리 개발의 부재와 교역자 양성의 부진이 교세 위축을 가져왔다”고 지적했다.

게다가 ‘개인적 기복을 권하지 않는다’는 천도교의 신행관이 신도 수를 확장하는 데 장애가 된다는 것이다.

지금 천도교는 새로운 도약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천도교 교리를 정립하고 교역자를 체계적으로 양성하기 위해

대학원 대학의 설립과 해외 포덕을 위한 인력 양성을

준비 중이다. 유명무실한 교구의 재정비도 계획하고 있다.

천도교인들은 정신적 가치를 잃은 물질문명과 현대사회의 모순은

선천세계의 마지막 그림자로, 이미 열린 개벽의 시대를 막을 수 없음을 굳게 믿는다.

오늘도 민족 통일과 인류 번영은 결국 수운 최제우의 가르침대로 ‘사람이 곧 하늘’인 이치로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으며 시운의 변화를 예비하고 있는 것이다.

 

인터뷰 / 천도교 김동환 교령

 

“민족정신 되찾아야 민족도 번성”

김동환 교령은 작년 4월 천도교 수장으로 선출됐다.

그는 지금이 우리 민족과 천도교의 미래를 위해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말했다.

천도교를 적극적으로 전하기 위한 방안을 설명해주십시오.
“우선 교역자를 양성하고 교육하는 일이 시급합니다.

내부 교육기관인 종학대학원의 내실을 기하고 대학원 대학의 설립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천도교의 이념은 민족을 떠나 세계적인 구원의 대안이므로

외국어로 포덕할 수 있는 인력을 키우겠습니다.

최근 블라디보스토크 일대에서 천도교가 독립을 위해 애쓴 공을 인정받아

러시아 정부와 토지 임대에 관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습니다. 실현되면 해외 수련원을 건립해

젊은이들에게 민족혼을 교육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겠습니다.”

일제에 강탈당한 천도교의 재산에 관한 이야기가 화제가 되고 있는데 어떤 내용입니까.
“일제가 예금동결, 압수 등으로 강탈한 재산이 확실한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만

당시 화폐 128만6000원, 지금 돈 약 500억 원입니다. 그밖에 몰수 토지 등 일제가 빼앗은 재산은

당시 독립을 열망하며 천도교에 기부했던 신도들의 사유재산입니다.

앞으로 우리 정부가 나서서 일본으로부터 정당한 배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역점 추진사업은 무엇입니까.
“내년이 3·1운동 90주년입니다. 학자들과 함께 3·1정신의 전모를 밝히는 학술대회를 추진 중입니다.

시대적 배경과 역사 사실을 총망라해 3·1운동의 모든 것을 담은 전범을 만들려고 합니다.

3·1운동은 계층과 종교, 남녀노소를 떠나 민족이 하나가 된 계기였습니다.

그것을 천도교가 이끌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고,

오늘 우리 현실을 위해서도 반드시 되돌아봐야 할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현대인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천도교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모두 한울님을 모시고 있어 평등하고 귀합니다.

그것을 사무치게 알아 서로 존중하면 계층 간 갈등과 빈부 문제,

정치적 불평등, 남북 통일, 자연 파괴와 환경 재앙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

내 안의 한울님을 돌아보고 상대방 안의 한울님을 모실 수 있는 실천이 필요합니다.”


- 김천<객원기자〉 mindtemple@gmail.com

 - 2008 08/12 경향  뉴스메이커 787호

 

 

 

 

 

 

 

 

  동학은 민족 주체성의 원형

 

19세기 민족주의의 목표는 체제개혁과 조국수호

‘봉건적 왕조체제의 개혁과

외세침략으로부터 조국의 수호.’
이 두가지는 19세기 후반 조선 민족이 해결해야 할

2대 과업이었다.

 

고민은 이 두가지 중 어느 하나에 치중할 수 없이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는 데 있었다. 체제개혁을 우선하면 조국수호가 소홀해지고 조국수호에 치중하면 그 명분 때문에 봉건적 왕조의 체제모순개혁이 밀려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황사영 백서’에서 보듯이

외국의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체제를 전복하고 종교의 자유를 얻겠다는 개혁의 발상은 어떤가?

1000여 대의 군함과 5만~6만명의 정병으로 조선을 침공하기를 요청한 황사영의 탄원은

반국가, 반민족의 행위밖엔 될 수 없다.

 

갑신정변이나 갑오경장 등 개화운동도 외세를 빌려 정치개혁을 시도한 예에 속할 것이다.

외세침략에서 국가수호를 외치면서 사회개혁을 미루면

왕조체제의 유지로 일부 지배계급만이 이득을 보게 될 것이다.

이런 것은 민족의 이익과 지향점이 담긴 국가수호는 아니다.

동학의 실패가 뼈아픈 이유

19세기 후반의 조선사회는 사회적 차별과 정치적 억압, 경제적 수탈(삼정의 문란) 등으로

민중에게 저주스러운 세상이었다.

민중의 동의나 참여를 결여한 어떤 운동도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동도서기(東道西器)’나 ‘위정척사(衛正斥邪)’ 운동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 여기에 있다.

때문에 체제개혁과 사회변혁이란 양대 과제를 동시적으로 수행했어야 했다.

이것이 19세기 한민족이 실현해야 할 민족주의의 목표였다.

“오늘날의 신하된 자는 보국은 생각치 아니하고

부질없이 녹위(祿位)만 도적질하여 총명을 가리고

아부와 아첨만을 일삼아 충간(忠諫)하는 말을 요언이라 하고,

정직한 사람을 비도(匪徒)라 하여,

안으로는 보국의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백성을 학대하는 관리가 많도다.

인민의 마음은 날로 흐트러져 생업을 즐길 수 없고 나아가 몸을 보존할 계책이 없도다….

 

공경 이하 방백수령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위난은 생각하지 않고

부질없이 일신의 비대와 가문의 윤택만을 꾀하고

과거(科擧)의 문을 돈벌이의 길이라 생각하고

응시 장소는 매매하는 저자로 변하고 말았다….

우리는 비록 초야의 유민일지라도 나라에 몸 붙어사는 자라 국가의 위망을 앉아 보겠는가!

 

한편 생각건대 조선 사람끼리라도 도는 다르나 척왜와 척화는 그 의(義)가 일반이라….

각기 돌려보고 충군우국지심(忠君憂國之心)이 있거든 의리로 돌아와 상의하여

같이 척왜척화하여 조선으로 왜국이 되지 않게 하고 동심합력하여 대사를 이루게 하올세라.”

1894년 동학군의 ‘창의문(倡義文)’ 내용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전봉준의 동학혁명은

당시 민중이 바라던 두가지 과업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동학혁명군의 호소에도 관군은 왜군과 합세해 동학군을 참살했다.

전봉준 장군의 접사 노릇을 하던 김경천과 한인현이 전장군을 잡아 일본군에 넘겼다.

 

동학혁명의 실패가 우리 민족에게 얼마나 혹독한 불행을 안겼는지는 우리는 똑똑히 알고 있다.

‘창의문’에서 보인 전봉준의 모습은 우리가 실현해야 할 민족 주체성의 원형이다.
- 이형래, 세계역사문화연구소장

- 경향, 2005 08/24  뉴스메이커 621호 [국학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