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창종자들] 동학 - 근세 민족종교의 시발점
[한국의 창종자들] 동학은 근세 민족종교의 시발점 | ||||||||||||||||||||||||||||||||
혁명의 실천에서, 사회운동과 문화 · 정치 · 이념에까지 영향 (1) 수운 최제우 | ||||||||||||||||||||||||||||||||
천도교를 낳은 동학(東學)은 근세 민족종교의 시발점이다. 종교적 가르침을 넘어 때로는 혁명의 실천으로, 때로는 사회운동과 문화에 이어 정치와 이념에 이르기까지 근현대사의 구석구석에 동학과 천도교의 영향은 뿌리가 깊다. 경주 인근 몰락한 양반의 늦둥이로 세상에 났다. 어릴 적 이름은 복술이, 본명은 제선(濟宣)이고 자는 도언(道彦)이다.
그는 자신의 시대만큼 불우한 삶을 살았다. 여섯 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열일곱 살에 아버지를 잃었으며, 스무 살 때 얼마 되지 않은 가산마저 모두 불에 타버렸다. 이듬해 가족을 처가에 맡기고 행상으로 전국을 유랑했다. 10년을 떠돌며 그가 본 것은 길 잃은 조선의 절망이었다. “임금과 신하와 아비와 자식이 제 도리를 하지 못하는” 시대에 팔도를 다 돌아봐도 “혹은 궁궁촌을 찾아가고 혹은 만첩산중에 들어가고 혹은 서학에 입도”하여 서로 옳다 주장하지만 맞지 않음을 느꼈다고 적고 있다. 체제의 모순은 극에 달했고 무력을 앞세운 서양 세력이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현실 속에 국가는 이미 붕괴 직전인 위태로운 현실을 절감했다. 사람들은 각자 살길을 찾아 옛 예언서를 들고 우왕좌왕하거나 서학(西學)인 천주교에 귀의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세상은 마음 둘 곳을 잃어버렸다. 일상 중에 몇 차례 종교적 신비를 체험하자 본격적인 종교 수련에 나서기로 했다. 비몽사몽간에 금강산에서 왔다는 승려에게 49일 동안 기도하라는 말을 듣고 난 후다. 해를 넘겨 서른세 살에 양산 통도사 내원암에서 수도의 길에 발을 내딛고, 이듬해 산 속 동굴에서 49일 동안 간절한 기도를 마쳤다.
이후 가족을 이끌고 다시 고향마을 용담으로 돌아갔다. 불타버린 집 대신 부친이 세운 용담정 정자에 머물며 도를 얻지 못하면 세상에 나가지 않을 것을 결심했다고 한다. 그때까지 쓰던 제선이란 이름을 버리고 수운(水雲)이란 호를 짓고 제우(濟愚)로 이름을 고쳤다. 용담정에서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 셈이다. 기도와 명상 속에서 드디어 한울님을 만났다. 한울님은 “나의 마음은 너의 마음(吾心卽汝心)”이라는 진리를 들려주었다. 줄곧 찾아나섰던 구세와 구원의 길이 시작됐다. 비로소 ‘사람이 하늘(人乃天)’이며 ‘천심이 곧 인심(天心卽人心)’이라는 새로운 가치와 깨달음이 그의 마음속에서 드러난 것. 최제우의 자각이 갖는 의미를 “동양정신사의 일대 전환”이라고 지적한다.
“유교나 불교와 같은 동양의 전통적인 세계관이 지배하던 시기가 지나갔고 서양의 종교가 지배하는 것도 아니며 그야말로 새로운 길의 시작을 알린 것입니다. 장엄한 개벽의 새 시대가 오는 것을 예측하고 그 대응으로 최제우는 동학을 제시했습니다.”
지상천국이 이루어지는 후천개벽의 시대가 시작됐으니 이는 최제우 자신이 얻은 도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도를 “지금도 들어보지 못하고 옛날에도 들어보지 못한” 무극대도(無極大道)라 표현했다. 깨친 지 1년이 지나자 아내인 박씨에게 처음으로 도를 권했다. 집안의 여자종을 면천시켜 수양딸과 며느리를 삼으니 주변의 관심이 쏠렸다. 소문을 듣고 사방에서 가르침을 구하려고 몰려들었다. 후에 동학 2대 교조가 된 해월 최시형(海月 崔時亨)도 그 무렵 용담을 찾아와 제자가 됐다. 여기저기서 비난이 빗발치자 그는 전라도 남원의 작은 암자 덕밀암으로 몸을 피한다. 조용히 경전을 저술하여 자신이 얻은 바를 정리하는 시간을 맞았다. 최제우는 ‘권학문(勸學文)’을 지어 자신의 도를 ‘동학(東學)’이라고 밝혔다.
“내가 또한 동방에서 태어나 동방에서 도를 얻었기에 도는 비록 천도이나 학은 동학이다. (道雖天道 學則東學)”
‘무극대도’는 비로소 ‘동학’이라는 이름을 얻어 세상 속으로 번지고 있었다. 칼을 노래하는 ‘검가(劍歌)’를 짓고 칼춤을 추었다는 사실이다. 칼춤은 동학의 수도 방법으로도 널리 퍼졌다고 전한다.
경상감사 서헌순은 동학에 대한 동태를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하루는 ‘요사이 바다 위에 배로 오고 가고 하는 것은 모두 서양인들인데 칼춤이 아니고는 제어할 수 없을 것이다’라며 검가 한 편을 주었습니다.” 해를 넘겨 경주로 돌아갔지만 분란과 체포가 기다리고 있었다.
교인이 점차 늘자 독창적인 신도 조직을 만드니 접(接)이라는 체계다. 도를 전한 사람이 접주(接主)가 되어 신앙조직인 접을 이끌어가고 후일 동학농민혁명 때는 접을 묶어 포(包)라는 조직을 만든다. 각지의 유생이 나서서 탄원하자 드디어 관이 나섰다. 조정의 명을 받은 선전관 정운구는 동학을 조사하러 경주로 향했다. 정운구는 왕에게 올린 보고서에서 “문경새재를 지나 경주까지 이르는 고을마다 동학 이야기와 주문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적고 있다. “도가 나에게서 나왔으니 내 스스로 당할 것이다. 어찌 몸을 피하여 그대들에게 누를 미치게 하겠는가”라는 말을 남겨 닥칠 운명을 기다렸다고 전한다. 용담에서 최제우와 23인의 신자가 체포됐다. 승정원 일기와 고종실록을 참조하여 ‘동학교조 최제우의 목을 베고’라는 기사에 “최제우 등은 서양의 술수를 따라 명목을 옮겨 어리석은 백성을 현혹함으로써 황건적과 백련적과 같은 류라 하여 경중에 따라 처리하였다”고 적었다.
망해가는 국운을 앞두고 허약한 왕조는 동학과 최제우를 종교를 빙자하여 나라를 전복하려는 반란의 무리로 파악한 것이다. 그의 가르침은 그만큼 두렵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을 좇아 열렬히 세상을 바꾸려 한 동학의 교도들은 순교를 피하지 않고 줄을 이었다. - 2008 07/22 경향, 뉴스메이커 784호
- 2008 08/12 경향 뉴스메이커 78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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