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시대의 태교와 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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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큼 자녀 태교 및 양육에 큰 관심을 가졌다. 옛 예비엄마들의 태교는 현재 예비엄마들의 유별난 태교에 못지않았다고 한다. 건강한 아이를 낳기 위한 조상들의 지혜와 과거 육아 방식 등 아이의 무병장수를 위해 지켜왔던 풍속들을 소개한다. 하지만 태내 10개월 사이에 인간의 좋고 나쁜 품성이 형성되고, 또 출생 후의 생장 과정에서 다시 군자와 소인의 분별이 결정된다. 인간의 품성이 결정되는 처음 10개월의 태내 교육이 출생 후의 교육보다 중요하다.”
전통 시대에 태교를 얼마나 중시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전통 시대의 태교는 아이를 갖기 전부터 이미 시작된다.
『동의보감』에는 여성은 월경이 정상적이며 마음이 온전하고, 남성은 기운이 충실하고 욕망이 적어야 자식을 가질 수 있다고 되어 있다. 아이를 갖기 전에 먼저 몸을 건강하게 하고 마음을 바로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아이는 천 · 지 · 인의 기운이 합쳐져 생기는 것으로 보았는데 하늘의 기운을 얻기 위해서는 천재지변이나 날씨가 나쁜 날은 합방을 피해야 하고, 땅의 기운을 얻기 위해서는 안방이 아닌 다른 곳에서 합방하지 말아야 하며, 사람의 기운을 얻기 위해서는 과식하거나 배가 고플 때 혹은 음주 후에 합방하지 말도록 가르쳤다.
태교는 태아의 안전을 기하고 나아가 훌륭한 인격을 갖추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올바른 자세는 태교의 기본이다. 몸을 기울여 앉거나 서지 않고, 모로 눕거나 엎드리지 않는 등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음식은 특히 중요한데 태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썩거나 상한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야 상식이지만 음식의 특성을 태아와 연관시킨 금기 사항도 유달리 많았다. 개고기를 먹으면 벙어리가 나오고, 문어나 오징어와 같이 뼈 없는 고기를 먹으면 등뼈가 없는 아이가 나온다거나, 닭고기를 먹으면 닭의 피부를 가진 아이가 태어난다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또 생물을 해치지 않고 나쁜 마음 자체를 먹지 않는 등 마음가짐도 바로 하도록 경계하였다. 우리의 전통 나이 계산법에서는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한 살로 치는데 10달 간 뱃속에서 이런 저런 가르침을 받았던 것을 생각하면 갓 태어난 아이도 한 살 먹을 자격이 충분히 있어 보인다.
조선 시대의 이문건(李文楗, 1494∼1567)이 손자를 본 후 감격에 겨워 지은 시이다. 슬하에 여섯 아이를 두었으나 그 가운데 다섯을 먼저 보내고 아들 하나를 건졌는데 그 아들이 좀 모자랐다. 다행히 결혼은 시켰지만 손녀만 내리 둘을 낳아 대가 끊기지 않을까 걱정하던 차에 드디어 손자를 본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기뻤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하지만 출산의 기쁨도 잠시 뿐이다, 곧 생존을 위한 전쟁의 시작이었다. 이문건은 손자 아이가 태어난 5일 후에 점쟁이에게 사주를 보게 했는데 액운이 있어 수명을 주관하는 별에 기도하는 것이 좋겠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초제를 지냈다.
만약 사주에 명이 짧다고 나오면 예전에는 무당을 불러 ‘명다리’를 행했다. 생명의 잉태와 명복을 주관한다고 믿는 삼신제석이나 칠성신에게 아이를 바치는 의식이다. 이 의식을 행하면 아이는 무당에게 팔린 것으로 여겨지고 무당은 신굿을 할 때마다 아이 수명장수를 빌게 된다. 이름이 천해야 귀신이 시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민간에서는 대개 아이 이름을 천하게 지었다. ‘개똥이’는 가장 흔한 이름이었다. 동물 이름을 본 딴 ‘마아지망아지’, ‘솬지송아지’는 ‘개똥이’에 비하면 그래도 고급스러운 축에 속한다. 한자에는 없는 ‘뺑’이라는 글자를 넣어 귀신이 아예 아이의 존재 자체를 알아차리지 못하게 속이려는 기발한 발상도 등장하였다.
양반의 경우는 그래도 품위 있는 이름을 지었는데 이문건은 커서 길하라는 뜻으로 숙길(淑吉)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길’자가 오행에 맞는 않는다고 하여 14세 때 준숙(遵塾)이라고 이름을 바꾸고 그것도 마음에 들지 않아 후에 다시 수봉(守封)으로 개명했다. 산통 속에 이름을 적은 산가지를 넣고 뽑았는데 5번 가운데 4번이 수봉이로 나와 결국 낙점한 것이었다. 아이의 이름을 정하는 것은 아이를 낳은 것만큼이나 힘든 과정이었다.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한 후 본격적인 육아가 시작된다.
육아의 경우 육아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은 눈에 띄지 않지만 경험으로 전수된 나름의 육아법은 존재하였다.
아기에게 젖을 물릴 때는 왼쪽으로 안고 유방이 아기 코에 닿지 않게 해서 먹여야 하고 젖을 먹일 때 아기를 웃기지 않는 등 젖 먹이는 방법부터 많은 신경을 썼다.
혹시 산모에 문제가 있을 때는 유모를 쓰게 되는데 유모를 고르는 일에도 신중을 기했다. 성품이 좋지 않은 여성의 젖은 아이에게도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보았다. 예나 지금이나 아기가 기어 다니기 시작하면 조심해야 할 것들이 늘어난다. 우선 날카로운 물건이나 삼킬 수 있는 것들은 모조리 치워야 한다. 또 아이를 방안에 혼자 두는 것은 절대 금했는데 혼자 있다가 크게 놀라면 후유증으로 나중에 정신 이상이 올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아기를 데리고 마을 밖을 외출할 때는 뒷간에 먼저 들리거나 얼굴을 숯검정칠을 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는 귀신이 냄새가 나거나 더러운 모양새의 아이를 잡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여겨서였다. 아이를 언제 잃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그렇게 한시도 부모 곁을 떠나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이 의식했는지 모르지만 뒷간의 암모니아와 숯의 살균성분으로 나쁜 세균을 없애려 한 것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전통 시대의 태교와 육아법에는 상반적 요소들이 뒤섞여 있다. 미신적 성격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반면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 것도 적지 않으며, 전근대적 관념을 강제하는 측면도 있지만 동시에 합리적인 부분도 존재한다. 당연한 결론이겠지만 과학적, 합리적인 접근을 통해 전통 시대의 태교와 육아법에 담겨 있는 옛 선인들의 지혜를 확인하고 이를 우리 시대에 적용해보는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 노대환 동양대학교 문화재학과 부교수 -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황명진 - 문화재청, 월간문화재사랑, 2008-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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