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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의 도자기 - 분청사기와 백자

Gijuzzang Dream 2008. 6. 30. 16:08

 

 

 

 

 15세기 조선의 도자기 - 분청사기와 백자

   

 

 

조선시대 도자기는 분청사기와 백자로 대표된다.

분청사기는 15-16세기 조선 전기에 걸쳐 만들어지던 그릇으로,

그 뿌리는 고려말 퇴락한 상감청자에 두고 있으나 고려의 귀족적인 청자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자유분방한 매력을 지니고 있으며, 한국적인 미감이 잘 표출되어 있는 그릇이다.

 

분청사기(粉靑沙器)라는 용어는 옛 문헌기록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분청사기는 1930년대 고유섭(고유섭, 1905-1944) 선생이

회청색 바탕흙에 백토를 분장(紛粧)하고 그 위에 투명한 유약을 씌워서 구워낸

조선 전기의 독특한 도자기를 '분장회청사기(紛粧灰靑沙器)'라고 부른 데서 유래되었다.

 

분청사기의 종류는 그릇 표면에 백토(白土)를 장식하는 수법에 따라

상감, 인화, 조화, 박지, 철화, 귀얄, 덤벙 등 7가지로 나눈다.

각자의 기법은 저마다 독특한 장식 효과를 가지고 있다.

 

분청사기는 세종 연간에 해당되는 약 1418-1450년경에 비약적인 발전을 보였으며,

세조 연간을 주축으로 한 1450-1470년경에 전성기를 맞게 된다.

이 시기에 제작된 인화분청사기의 경우 더욱 밀도가 높아져서 그릇 전면에 백토로 하얗게 뒤덮이는

세련된 양식을 지니고 있다. 아울러 개성미가 뚜렷한 박지, 조화분청사기도 활발하게 제작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눈부신 성과에도 불구하고 분청사기는 서서히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직접적인 원인은 바로 1467-1468년경 경기도 광주(廣州)에 설치된 관요(官窯)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관요의 설치로 인해 국가는 백자(白磁) 등 필요한 그릇을 직접 제작하여 사용함에 따라

지방 분청사기 가마들은 서서히 지방 관아 및 민수용(民需用)으로 주요 소비층이 바뀌게 되고,

분청사기의 질은 현저하게 조잡해졌다. 결국에는 주생산품목을 분청사기에서 백자로 전환하게 된다.

이와 같은 변화로 인해 15세기 말부터 쇠퇴의 길을 접어든 분청사기는

16세기 전반 무렵에 이르면 귀얄분청사기와 덤벙분청사기를 끝으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된다.

 

                                      1418-1430  : 발전기

                                1450-1470  : 전성기

                                1467-1468  : 광주 관요 설치

                                                : 이후 쇠퇴기

                                16세기 전반 : 분청사기 사라짐  

 

 

조선 백자 의 역사는

경기도 광주에 설치되었던 왕실과 중앙관청용 백자 제작을 전담하던 '사옹원(司甕院)'이라는 관청의

하급관청인 '분원(分院)' 즉 '관요(官窯)의 설치와 그 운영에 따라 발전하고 쇠퇴하였다.

 

따라서 조선 백자의 양식 변화는

분원 관요의 변화를 기준으로 초기, 전기, 중기, 후기의 네 시기로 크게 구분된다.

 

조선 초기 는,

세조 말-예종 초(1467-1468) 이전의 시기로, 경기도 광주에 아직 관요가 설치되지 않았던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전국의 가마에서 최고급 백자를 운반하여 왕실과 중앙관청에서 사용하였다.

 

조선 전기

광주 분원 관요가 운영되면서 이곳에서 왕실 자기를 생산하기 시작한 때부터

임진왜란 직전까지의 시기이다.

형태가 세련되고 안정된 순백자, 상감백자, 청자, 철화백자 등이 제작되었다.

특히 세조 연간부터는 청화백자에 관심을 두어 제작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세조 말에서 예종 초, 즉 1467-1468년경

왕실 진상용 백자의 제작을 전담했던 관사 사옹원의 분원, 즉 관요(官窯)가 경기도 광주에 설치되어

그곳에서만 왕실용 자기를 만들어 진상하게 된다.

 

경기도 광주에서 최상품의 백자를 구워낼 수 있었던 것은

기본적으로 좋은 태토인 광주토(廣州土)와 풍부한 땔감을 갖추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수도인 한양과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이점 때문에 완성된 백자는 한강을 이용하여

왕실로 수월하게 운반되었다. 광주는 도자기 산지로서 최적의 입지를 갖추고 있었다.

향후 조선 백자의 발전을 광주 관요산(産) 백자가 리드해 가게 된다.

 

 

<15세기 조선 도자기 연표>

연대

왕조

문헌기록

1400

정종  2년

태종이 왕세자 시절 성균관에서 중국 전래품인 청화백자 잔으로

술을 마셨다고 함(효종실록)

1417

태종 17년

장흥고와 기탁 관청에 상납하는 사기와 목기에

각각 관사명을 새기도록 함.

경승부(敬承府)명 분청사기 인화문 접시(이화여대박물관, 개인)

공안부(恭安府)명 분청사기 인화문 접시(국립중앙박물관)

1419

세종  1년

어기(御器)를 백자로 전용하도록 함(용재총화)

1421

세종  3년

진상 그릇에 장인이름을 새기도록 함.

1425

세종  7년

명나라 사신 윤봉(尹鳳)의 요구에 의해

광주에서 대, 중, 소 백자 10탁분을 번조하여 진상함.

1428

세종 10년

고봉화상의 분청사기 조화박지 연어문 사리호(1428-1430)

1432

세종 14년

이 무렵 자기소 139, 도기소 185개소를 조사함(세종실록 지리지)

1445

세종 27년

김종서가 고령의 백자를 절찬함(점필재집)

1447

세종 29년

문소전, 휘덕전에 소용되는 은그릇을 백자로 대용토록 함.

1450

세종 32년

경태(景泰) 원년(元年)명 분청사기 상감묘지(국립중앙박물관)

1455

세조  1년

중국에서 회회청을 구입하여 청화백자 제작.

1457

세조  3년

분청사기 덕녕부(덕녕부)명 인화문 완(국립중앙박물관)

1461

세조  7년

사족(士族)은 주기(酒器) 이외의 금은기, 청화자기의 사용을 금하고,

서인(庶人)은 주기에도 금은기, 청화자기를 금함(경국대전)

1462

세조  8년

분청사기 인화문 항아리(월산대군묘 출토, 오사카동양도자미술관)

1463

세조  9년

전라도의 경차관(敬差官), 강진에서 회회청을 구하여 바침.

1465

세조 11년

전라도 경차관, 순천부에서 회회청과 유사한 광물을 채취하여

처음으로 이것을 사용하여 청화를 굽다.

1466

세조 12년

백자는 진상용이므로 이미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사용을 금함.

백토의 도용을 막기 위해 등록대장을 만들어 공조와 승정원에 둠.

1467

세조 13년

사옹방을 사옹원으로 개칭(세조실록)

1469

예종  1년

국산 회회청으로 백자 번조(예종실록)

1478

성종  9년

분청사기 성화(成化) 14년명 항아리(국립중앙박물관)

1487

성종 18년

성화(成化) 23년명 분청사기 청화 묘지(국립중앙박물관)

1488

성종 19년

이 무렵 광주 관요에 한하여 매년 사옹원에서 화원들을 인솔하여

어기(御器) 제조를 감독함(신증동국여지승람)

1489

성종 20년

청화백자 홍치(弘治) 2년명 송죽문항아리(동국대박물관)

1492

성종 23년

백자 홍치(弘治) 5년명 항아리(국립중앙박물관)

 

 

- 국립중앙박물관 미술관 분청사기실 학예관, 이애령

-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와의 대화, 제 93회(2008년 6월18일)

 

 

 

 

 

 

분청사기의 성격은 15세기 초에 뚜렷해진다.

 

15세기 초에는

정소공주묘(貞昭公主墓) 출토 분청상감초화문 사이호(粉靑象嵌草花文四耳壺, 1412∼1424),

분청상감연어문 정통5년명 대반(粉靑象嵌蓮魚文正統五年銘大盤, 1440),

분청박지연어문 고봉화상 골호(粉靑剝地蓮魚文高峯和尙骨壺, 1430),

분청귀얄 성화14년명 호(粉靑―成化十四年銘壺, 1478),

분청귀얄철화 가정15년명 묘지편(粉靑―鐵畵嘉靖十五年銘墓誌片, 1536) 등의 예에서 보다시피

 

인화무늬와 상감무늬수법이 조선초기부터 거의 동시에 발달하였고,

이어서 박지기법→귀얄기법→철화기법의 순으로 발달하였음을 보여준다.

 

15세기 중엽에 이르면 인화기법 · 상감기법 · 박지기법 · 음각기법 등이 더욱 세련되어지며,

철화기법 · 귀얄기법 · 분장(덤벙)기법은 15세기 후반에 성행했다.

16세기에 들어오면 인화기법과 귀얄기법이 함께 사용되고 귀얄기법과 분장기법이 더욱 증가한다.

 

 

 

 

 

 

분청사기

발생기

(약 1360년경∼약 1420년경)

- 고려와 조선왕조의 교체시기와 겹치는 시기

 

- 상감청자는 무늬, 형태 등이 흐트러지고 청자의 색도 압록색을 띄면서 쇠퇴해

간다.

 

- 조선왕조의 성립을 배경으로 퇴화해 간 고려 상감청자무늬가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하여 인화기법이 새로 정착되어 가는 시기

- 특징은 공안부 · 경승부 · 인녕부(仁寧府) 등의 관사명이 새겨있다.

- 청자상감무늬의 여운과 변모를 보여주는

정릉(正陵) 능호가 새겨진 청자상감정릉명연당초문대접

(1365년경)

 

분청사기공안명연당초문대접

(1400∼1420년)

발전기

(약 1420년경∼약 1470년경)

-분장기법이 다양하게 발전하여 분청사기의 특질이 뚜렷해지는 시기

 

태토가 밝아지고 유약이 투명해져 세종치세 연간에 그 절정을 맞는다.

-이 시기에 우수한 백자도 생산되어 1425년에는 명나라 인종이 조선왕조에 백자를 요구해 오기도 한다.

분청사기의 인화기법은 더 세련되어짐.

 

1468∼1470년경 전후 경기도 광주에 관요(官窯; 分院의 개념이 이때에 생김)가 운영되면서 공물(貢物)의 하나였던 분청사기의 제작은 줄어들어 쇠퇴하기 시작

- 정소공주묘 출토

분청상감초화문사이호(1412∼1424)

 

분청박지연어문고봉화상골호(1430)

 

분청상감연어문 정통5년명대반(1440) 등

쇠퇴기

(약 1470년경∼약 1540년경)

- 상감 · 인화기법의 분청사기가 쇠퇴해 가는 반면 지역특색이 뚜렷해진다.

충남 공주 학봉리의 철화기법 분청사기가 그 대표적인 예.

 

- 발전기와 쇠퇴기의 구획선은 광주 분원의 성립시기에 근거하고,

 

- 쇠퇴기에 들어서자 분청사기를 만들던 가마들은 분청사기 제작을 그만두거나 백자생산으로 이행해가는 현상.

 

- 백자생산으로 이행

→ 대표적인 가마는 광주직할시 충효동가마(1963년과 1991년 발굴)와 공주 학봉리가마(1927년과 1992년 발굴)

-《신증동국여지승람》 토산조에 자기소 · 사기소 · 도기소 지역이 전국에 48개소만 기록.(1481년경 상황)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모두 324개소(자기소 139, 도기소 185)의 자기와 도기를 굽던 곳이 조사되었다.

(1424∼1432년 상황)

 

- 두 문헌기록을 비교하면 분청사기가 쇠퇴한 현상이 파악된다.

- 쇠퇴기는

백자로의 이행과 표면백자화의 길을 모색하여 귀얄기법과 담금분장(덤벙) 기법이 성행하면서 서민용의 막그릇을 생산한다.

소멸기

(약 1540년경∼약 1600년경)

 

- 백자에 흡수당하여 분청사기의 제작은

  상감청자로부터 자연발생한 것처럼 자연소멸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