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실학, 실학자들 2] 실학의 창시자 - 반계 유형원
[경기실학, 실학자]
반계 유형원(磻溪柳馨遠) 조선 실학의 창시자 | ||||||||||
화성 건립 100년전 수원 중요성 알린 선구자 | ||||||||||
“수원 도호부는 광주 아래 지역인 일용면 등지를 떼어 보태고 읍치를 평야로 옮기면 내(수원천)를 끼고 지세를 따라 읍성을 쌓을 수 있다…. 읍치 규모와 평야가 매우 훌륭해 참으로 큰 번진의 기상이 있는 지역으로 안팎에 만호를 수용할 수 있다.”
정조가 수원 화성을 건립(1796)하기 100여 년 전 이미 화성의 전략적 중요성을 간파했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 무덤을 화산에 옮기고 화성을 건립하기 위해 대의적 명분이 필요했을 때 반계의 주장은 대단한 원군이었던 셈이다.
공사에 필요한 재원 조달까지 세세하게 제시했으며 그 혜안은 정조를 통해 우리나라 최초의 신도시 화성을 설립하게 된 단초를 제공했다.
이들이 임진왜란 직후 피폐한 사회경제와 정치현실 문제점들과 해결책 등을 거론했다면 반계는 보다 현실적이며 체계적인 대안을 마련하고자 했다.
반계는 누구인가 서울 정릉에서 태어나 2세 때 아버지 한림공 흠은 광해군 복위운동에 연루돼 28세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이후 외가에서 기거했는데 이때 외삼촌 이원진과 고모부 김세렴이 스승역할을 했다. 김세렴은 대사헌까지 지낸 이름 높은 외교관이었다. 자연히 실학적 가풍을 몸소 체험했다.
33세때 진사가 되기도 했지만 초야에 묻혀 저술활동에 힘썼다. 반계 또한 여느 실학자와 마찬가지로 정치적 중심세력은 아니었다. 20여 년 동안 ‘반계수록’ 등 저술활동에 몰두했다.
현재 묘소(경기도기념물 제31호)는 용인시 백암면 석천리에 소재하며 바로 뒷편에는 아버지 묘가 있다. 그는 토지개혁을 비롯, 경제(상업), 지리, 군사, 언어, 문학 등 다방면에 걸쳐 국가체제를 혁신할 개혁안을 제시했다. 이후 그의 사상은 이익 · 안정복을 거쳐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에게 영향을 미쳤다.
토지는 줄고 노비는 증가해 국가제정이 궁핍했다. 그런데도 정치는 당리당략에 치우쳐 옛 것만 숭상하는 상황이었다.
반계수록 26권 ‘서수록후’에는
“우리나라는 옛날의 폐습을 고치지 못한 것들이 많았는데 그에 더해 쇠퇴함이 쌓이더니 끝내는 (청나라 오랑캐에게) 커다란 치욕을 입게 됐다. 낡은 법을 개혁하지 않고는 돌이켜 치도를 세울 수 없다"고 저술 동기를 밝혔다.
잘못된 법과 제도를 고치려는 노력은 반계수록 26권에 담겼다. 호적과 조운(漕運), 경상(經常), 화폐, 시장, 과거제도, 교육, 지방행정 등 정치와 경제분야를 비롯해 군사 전반의 문제점과 개선방향 등도 제시됐다.
실천적 실학자, 반계
전북 부안군 우반동 거주시절 농촌의 현실을 지켜 본 그는 좀 더 구체적이며 실천적으로 바뀐다. 일례로 다가올 기근을 미리 인지해 농민들에게 식량 비축을 권고했는가 하면 해변에 배와 말 등을 미리 준비해 뒀다 익사 직전 백성들을 직접 구하기도 했다.
허목은 “유형원은 임금을 보좌할만한 재주이다. 쇠퇴해 가는 이 시대에 이같은 인물이 있는줄을 미처 몰랐다”고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백성의 생활안정을 위해 국가가 토지를 소유하고 백성에게 일정 부분을 나눠준 후 세금을 부여하는 방식이다. 화폐 유통과 상설점포 개설, 관수품 전체를 시장에서 구입하는 등 농업에 못지 않은 상공업 활성화도 주장했다.
반계의 묘소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30여 년 밖에 되지 않는다. 그것도 사라질 위기에서 기사회생됐다. 71년대 초 용인군청에 근무하던 이인영씨(전 용인문화원장)은 당시 서울대 강사였던 이성무씨로부터 용인에 반계 산소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인영씨는 “반계 선생이 오랫동안 거주했던 부안에도 묘소가 없어 훼손된 줄 알았다. 그러던중 용인에 산소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 나섰다”며 “발견 당시 묘지의 봉분이 깎여 나가 거의 평지와 같았고 비석 등도 쓰러져 있었다”고 회고했다.
마침 성주 이씨가 연고가 없는 묘소로 알고 이장하려던 차였다. 이인영씨는 “수 차례 서울에 올라가 성주 이씨 문중을 설득했다. 문화재는 현장 그대로 보존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묘소를 고스란히 보존했고 정부로부터 80만원을 지원받아 묘역을 정비했다”고 말했다.
현재 묘역 30여평에는 길이 41m 반원형 담장이 둘러져 있고 봉분 왼켠에는 묘비와 중수한 표석, 문인석 등이 있다. - 경기일보 2006-5-25 / 이형복기자 bok@kgib.co.kr
■ 정양화 용인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장
반계와 함께 수원 화성의 총관리자 채제공과 이익의 제자였던 신후담, 유희의 어머니 사주당 이씨 등 실학자들이 용인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고 말했다.
한해 100여 차례 향토문화유적을 순례한다는 그는 “방학기간을 이용해 반계 묘역을 답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예산과 인력문제 등으로 반계에 대한 연구나 시민들과 접속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못한 편이다. “문화관광부가 몇년 전 포은 정몽주 선생을 이달의 인물로 선정한 것을 계기로 포은 탄생일 즈음 문화제를 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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