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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들의 모습을 그린
단원 김홍도의 그림.
조선 후기 벌열(閥閱)이라 하면 권력을 독점한 세력이라는 부정적 이미지가 강하다. 하지만 다른 모습도 보인다.
벌열은 다른 말로 경화세족(京華世族)이다.
곧 대대로 서울에 살며 벼슬하는 가문이다.
경화세족의 문화는 일반 백성은 물론 시골양반과도 달랐다.
문학과 예술, 학문에서도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무엇이 있었다. 좋게 말해 감식안이 높은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도도하고 시건방지다고 할 수 있다.
추사 김정희 역시 벌열 중 벌열, 경화세족 중 경화세족인 경주 김씨가 아니었던가.
정조 때 가문의 위세 절정
실학자 서유구(徐有, 1764~1845) 역시 두말할 필요가 없는 벌열이요 경화세족이다.
서유구를 언급하는 것은 그의 방대한 저술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때문이다.
먼저 그의 족보부터 훑어보자.
선조대의 명신 서성(徐성)에서부터 시작되는 이 가문의 위세는
서명선(徐命善, 1728~1791)에 와서 절정에 이른다.
거의 50년을 집권한 노쇠한 영조가 세손(世孫 · 正祖)에게 대리청정을 시키려 하자,
노론의 홍인한(洪麟漢)이 한사코 반대하고 나섰다.
서명선은 홍인한을 탄핵해 정조의 대리청정과 즉위에 결정적 공을 세운다.
뒤에는 또 정조의 의중을 헤아려 권신 홍국영(洪國榮)을 제거하는 데 앞장선다.
정조의 공신인 것이다.
정조는 즉위한 해(1776년)에 49세의 서명선을 우의정에 임명하고,
다음 해에는 좌의정, 그 다음 해에는 영의정에 임명한다.
서명선은 1780년에 잠시 한직으로 물러났다가 다시 이 과정을 되풀이한다.
정조는 서명선의 형 서명응(徐命膺)까지 홍문관과 예문관 대제학, 곧 양관 대제학에 임명한다.
양관 대제학은 영의정 부럽지 않은 명예로운 벼슬이다.
서명응의 맏아들 서호수(徐浩修) 역시 정조 즉위 후
도승지 · 대사성 · 대사헌과 규장각 직제학을 지낸다.
둘째 아들 서형수(徐瀅修)도 이조참판과 경기관찰사를 역임한다.
어떤가? 영의정 · 좌의정 · 우의정에 대제학 · 도승지 · 대사헌 · 관찰사라니,
이것이 절정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1764년 태어난 서유구가 청소년기에 접어들 때 ‘가문의 영광’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그는 대갓집 똑똑한 도련님의 교육 코스를 거친다.
숙부 서형수에게서 문장을 배우고, 이의준(李義駿)에게서 명물고증학과 성리학을 배운다.
그리고 1779년부터는 서명응을 시봉(侍奉)한다.
서명응은 당시 천문학과 농학에 큰 업적을 남긴 조선 최고의 학자였다.
서명응은 이 시기 전래된 서양의 과학과 기술의 존재를 알았고,
이것들을 자신의 학문체계에 녹여 수렴했다.
서유구의 아버지 서호수 역시 한문으로 번역된 서양의 천문학과 수학, 기하학에 정통하였었고,
숙부 서형수는 명물고증학과 경학(經學)에서 최고의 학자였다.
이렇듯 서유구의 가문은 18세기 후반 베이징(北京)에서 발원한 새로운 학문을
앞서 수용한 최고 수준의 학자 가문이었고, 그는 그 가문의 훈육을 받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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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출간된 서유구의 ‘산수간에 집을 짓고’(돌베개).
‘임원경제지’에 담긴 집 짓는 법에 관한 내용을 정리했다.
1779년 서유구는 용주(蓉州)에서 조부 서명응을 시봉하며 농학서 ‘본사(本史)’의 집필을 돕는다(용주는 芙蓉江에 있다고 하는데, 아마 용산 근처가 아닌가 한다). 교정을 보기도 하고, 서명응을 대신해 집필을 맡기도 한다. 이 작업에서 그는 실용적 학문의 필요성을 철저히 체험한다.
또 이 시기부터 그는 ‘풍석(楓石)’이란 호를 쓰고 ‘풍석암서옥(楓石庵書屋)’이란 서재를 마련한다.
1781년 이후 그는 1788년까지 서형수의 지도로 학문에 몰입하는데,
주자학에 비판적이고 고증학적 경향을 선명하게 띠었던 서형수의 학문적 영향으로 서유구의 학문 역시 동일한 색채를 지니게 된다.
그의 1781년부터 1788년까지의 저술을 모은 것이 <고협집(鼓협集)>이란 책인데, 여기에는 ‘고문상서’에 대한 논란, ‘좌전’의 작자 문제, 역대 도량형의 이동(異同) 등 당시 유행했던 고증학적 논제를 다룬 논문이 잔뜩 들어 있다. 과거 조선 학계의 학문적 주제와는 사뭇 다른 것이다.
서유구는 1790년 문과에 합격해 관료의 길을 걷는다.
1792년 그는 규장각 대교, 예문관 검열 등 당시 문벌가의 젊은이들이
걷는 출세 코스를 밟기 시작했다.
특히 규장각에서 서적의 교열과 편찬에 종사하면서
정조의 인정을 받는다. 앞에 탄탄대로가 놓여 있었다.
하지만 날이 언제나 화창하지는 않다.
1805년 12월 김달순(金達淳)의 옥사가 일어나자 서유구의 가문은 일거에 몰락했다.
정조 때 영남 사림이 정조의 생부인 사도세자를 추숭(追崇)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리자,
반대파가 들고 일어났다. 정조는 반대파가 탐탁지 않았지만, 여러 이유로 사건을 덮는다.
그런데 우의정 김달순이 순조 5년(1805) 12월 그 반대파 두 사람을 표창하자고 주장했던바,
이에 반대하는 세력이 들고일어나 김달순을 귀양 보내고 급기야 목숨까지 빼앗았던 것이다.
이 사건의 배경은 너무 복잡하니 여기서 더 언급할 필요가 없다.
숙부 유배 후 자신도 벼슬 그만둬
중요한 것은, 서유구의 숙부인 서형수가 김달순의 배후자로 지목되어 귀양길에 올라
여러 곳을 전전하다 1823년 전라도 임피현(臨陂縣)에서 사망한다는 것이다.
서명응은 1787년, 서명선은 1791년, 서호수는 1799년에 사망해
서씨 가문에서는 서형수만 유일하게 정계에 남아 있었다.
서형수가 유배되자 출세를 달리던 서유구 역시 순조 6년(1806) 1월18일 상소를 올려
당시 맡고 있던 홍문관 부제학을 자진해 사퇴한다. 가문은 순식간에 몰락했다.
그가 정계에 복귀하는 것은 순조 24년(1824) 자신의 벗이었던 남공철(南公轍)의 주선으로
회양부사(淮陽府使)가 되면서부터다. 그는 이후 1848년 사망할 때까지
6조의 판서와 규장각 · 예문관의 제학, 대사헌 등을 거친 뒤 1839년 치사(致仕)한다.
하지만 정치적 실세는 아니었으니 가문의 영광은 사라진 뒤였다.
조정을 떠난 18년 세월 동안 그가 한 일은 무엇이었던가.
다산은 강진에서 초당을 짓고 제자를 길러 거대한 학문의 산을 이룬다.
서유구 역시 같은 길을 걸었다. 18년 동안 여섯 번 이사를 하면서 저술에 몰두한다.
하지만 그 저술은 다산과 달리 제자가 아닌 단 한 사람의 아들 서우보(徐宇輔)의 도움을 받았다.
(이 아들은 그보다 일찍 죽어 가슴을 아프게 한다)
세상에서 잊힌 18년의 학문적 노동의 결과는 113권 52책이란 거질의 <임원경제지>로 탄생한다. |
강산이 두 번 바뀌는 세월을 쏟아부은 이 책은 어떤 책인가.
‘임원(林園)’이란 도시가 아닌 전원 곧 농촌이고, ‘경제’란 물질적 생활의 영위다.
쉽게 말해 농촌에서 양반이 물질적 생활을 구가하는 방법이란 뜻이다.
양반이 시골에서 자족적인 생활을 할 경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윤리적인 문제를 묻는 것이 아니다. 오직 생활에 있어 물질적 삶의 방법에 대한 물음이다.
가장 필요한 것은 역시 먹을 것이다.
그래서 본리지(本利志, 권1~13)에 전제(田制), 수리(水利), 토양, 절후(節候), 개간, 비료, 종자,
파종, 각종 곡물 종류, 농기구, 관개에 걸쳐 곡물을 중심으로 한 농업 일반에 대한 서술이 있다.
그런데 먹을 것은 곡물만이 아니다. 채소도 가꾸어 먹어야 한다.
채소 가꾸는 것은 관휴지(灌畦志, 권14~17)에서 다룬다.
채소를 재배하면 꽃의 재배도 절로 연상된다.
예원지(藝志, 권18~22)가 수십 종의 꽃과 그 재배법을 상설(詳說)한다.
어떤 꽃은 지면 열매를 맺는다.
그래서 만학지(晩學志, 권23~27)에서 31종의 과일과 15종의 과류(瓜類)를 심고 가꾸고 수확하고
저장하는 방법을 일러준다. 먹을 것의 재배와 함께 심고 가꾸어야 할 것이 직물의 원료다.
뽕나무를 심고 기르고 비단을 짜고 염색하는 방법을 논한 것이 전공지(展功志, 권28~32)다.
농사를 지으려면 날씨와 절후를 알아야 한다. 위선지(魏鮮志, 권33~36)에서 그것을 다룬다.
곡식과 채소, 과일 외에 단백질의 보충을 위해 고기가 필요한바,
전어지(佃漁志, 권37~40)에서 목축, 사냥, 어업에 관련된 지식을 제공한다.
자, 이제 이렇게 얻은 재료를 요리해보자.
정조지(鼎俎志, 권41~47)에서 요리법과 조미료를 만들고 술 담그는 법을 소개한다.
이제 집안을 돌아볼 차례다. 먼저 집을 지어야 할 것이니,
건축기술과 집 짓는 재료와 공구가 필요할 것이고,
집이 완성되어 그 속에서 살자면 침구와 와구(臥具), 촛불, 등불 등 조명시설이 필요할 것이다.
또 출입할 때 쓸 말이나 가마, 배 등등이 필요할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 모든 것에 대한 지식을 섬용지(贍用志, 권48~51)가 자세히 제공한다.
먹을 것, 입을 것, 주거만 있다 해서 만족스러운 삶일 수는 없다.
의식주가 구비되더라도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 할 것이다.
식이요법과 단전호흡 같은 여러 가지 보양법(保養法),
곧 요즘의 ‘웰빙’에 해당하는 생활방법을 보양지(養志, 권52~59)가 꼼꼼히 권해준다.
이렇게 했는데도 병이 난다면 의약(醫藥)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인제지(仁濟志, 권60~87)는 ‘임원경제지’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해
필요한 의약을 조목조목 일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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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적 삶 위해선 ‘윤리’보다 ‘물질’ 중요시
이렇게 살면 자족한 삶이 된다. 하지만 향촌에서는 홀로 사는 게 아니다.
이웃이 있고, 이웃과 갈등을 피하기 위해 예(禮)를 차릴 필요가 있다.
그래서 자기 집안에서 차려야 할 관혼상제(冠婚喪祭)의 예는 물론
이웃과의 예인 향음주례(鄕飮酒禮) · 향사례(鄕射禮) · 향약(鄕約)이 필요한데,
그것들을 정리해 향례지(鄕禮志, 권88~90)로 엮었다.
사람이 밥만 먹고 살 수는 없다. 교양도 쌓고 취미도 길러야 한다.
독서법, 활 쏘는 법, 서예, 그림 그리는 법을 소개하는가 하면,
거문고 양금 생황도 뜯고 치고 불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을 다룬 것이 저 유명한 유예지(遊藝志, 권91~98)다.
품위 있는 생활을 하자면 그에 따르는 물건도 여럿이다.
그래서 이운지(怡雲志, 권99~106)에서는 품위 있는 생활을 하기 위한 여러 도구,
예컨대 문방구, 다구(茶具), 서화 골동품, 장서, 나들이할 때 쓰는 도구 등을 낱낱이 거론한다.
이제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상택지(相宅志, 권107∼108)에서는 조선 전체의 지리적 공간에서 살 곳을 고르는 방법,
살 터전을 마련하는 방법 등을 소개한다.
그리고 예규지(倪圭志, 권109~113)에서 조선 전체의 경제에 대해 총괄적으로 다룬다.
<임원경제지>의 내용은 농촌에서 사는 사대부의 이상적인 삶이다.
하지만 굳이 사대부의 이상으로 한정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아마도 서유구가 상상한 이상적 사회였을 것이다.
조선의 이데올로기 성리학은 물질적 생활의 윤택함에 바탕을 둔 인간의 삶이 아니라,
유가의 윤리에 의해 의식화된 도덕적 삶을 이상적인 삶으로 규정했다.
그럴까?
도덕적 삶이 아름답기야 하지만, 그래도 물질적 삶의 영위가 불가능한 상황이라면
그 도덕이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서유구는 <임원경제지>를 통해 이상적 삶은 윤리적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안정되고 세련된 물질적 생활의 풍요 속에 있다고 반론을 편 셈이다.
이것이 그의 학문을 '실학'이라 말하는 근거일 터다.
18년 동안 세상에서 버려진 사람의 가슴속에는
자신이 학문을 통해 도달할 수 있다고 믿은 유토피아가 있었던 것이다.
끝으로 한마디. 이 방대한 책, ‘임원경제지’는 서유구의 저작인가. 그렇다. 하지만 또 아니다.
이 책은 900여 종의 책에서 인용된 자료로 구성된 책이다.
물론 서유구 자신의 저술도 포함됐지만 몇 종에 불과하다. 어떻게 이런 책이 가능했을까?
2007.04.17. 581호 (p86~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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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구와 ‘임원경제지’(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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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0권 책에서 지식의 정수를 뽑다 |
남의 책 인용으로 1만4000쪽 ‘임원경제지’ 완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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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에 몰두하던 선비가 잠시 쉬고 있는 모습의
겸재 정선의 ‘독서여가’.
서유구의 <임원경제지>는 오로지 인용으로만 이루어진 책이다.
<임원경제지>는 893종의 책에서 골라 뽑은 자료로 구성되었다.
대부분 중국에서 수입된 책이고, 당시로선 최신간이 대량 포함돼 있다.
하지만 서유구가 893종의 책만 읽은 것은 아니다.
수천 종의 책을 읽고, 그 가운데 인용 할 수 있는 893종의 책에서 자신의 구상에 부합하는 자료를 골라냈을 것이다.
물론 그는 1806년 조정을 떠난 이후 18년 동안 ‘행포지(杏蒲志)’ ‘종저보(種藷譜)’ ‘경솔지(志)’ ‘옹희지(饔志)’ ‘난호어목지(蘭湖漁牧志)’ ‘금화경독기(金華耕讀記)’ 등을 저술한다.
하지만 ‘종저보’만 단독으로 전하고 나머지는 모두 ‘임원경제지’에 분산, 인용돼 있다. 자신의 저술 몇 종이 인용돼 있다고 하지만 전체 인용서 893종에 비하면 그야말로 조족지혈이다.
그렇다면 그가 읽은 수천 종의 책은 어떻게 축적된 것인가.
조부 때부터 수집한 장서 물려받아
서유구의 가문이 경화세족(京華世族)이고,
경화세족들은 18세기 후반에 오면 독특한 문화를 갖는다.
그 독특한 문화의 하나로 책과 서화, 골동의 수집을 들 수 있다.
서유구의 가문 역시 유수한 장서들로 가득했다.
홍한주(洪翰周)의 ‘지수염필(智拈筆)’에 이런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는 좁고 작은 나라지만, 심두실(沈斗室, 沈象奎)의 속당(續堂)은 거의 4만 권에 육박하고,
유하(遊荷) 조병귀(趙秉龜), 취석(醉石) 윤치정(尹致定) 두 분의 집도 역시 3, 4만 권을 내려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진천현(鎭川縣) 초평리(草坪里)의 화곡(華谷) 이경억(李慶億) 가문의 만권루(萬卷樓)와 풍석(楓石) 서유구(徐有)의 두릉리(斗陵里) 8000권이 또 그 다음이 된다.
심상규는 청송심씨로 영의정까지 지낸 인물이고,
조병귀는 풍양조씨 세도의 핵심 인물이었던 조만영(趙萬永)의 아들이다.
풍양조씨는 조엄(趙儼) 조진관(趙鎭寬) 조만영 조병귀로 이어지는 벌열(閥閱) 중의 벌열이다.
이경억의 장서는 이하곤(李夏坤)의 장서다.
이시발(李始發), 이경억(李慶億, 좌의정), 이인엽(李寅燁, 이조판서 · 대제학), 이하곤으로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이 자료를 통해 장서의 구축이 경화세족의 문화였고, 서유구도 장서가로 손꼽혔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두릉리란 대체 어디인가. 서유구는 1806년 조정에서 축출된 이후 여러 번 집을 옮기는데, 1837년 번계(樊溪, 지금의 서울 樊洞)로 옮기고 마지막에는 두릉리란 곳으로 옮긴다.
이곳 두릉리가 1845년 세상을 뜰 때까지 그가 만년을 보낸 곳이다.
서유구의 장서는 어떻게 구축된 것인가.
그의 조부 서명응은 베이징(北京)에 다녀온 사람이었으니,
필시 베이징에서 책을 대량 구입했을 것이다.
천문학과 수학 등에 탁월한 조예가 있었던 서유구의 아버지 서호수도
이 방면의 서적을 대량 소장하고 있었다.
황윤석(黃胤錫)의 일기 ‘이재난고(齋亂藁)’를 보면,
시골 선비 황윤석이 ‘수리정온(數理精蘊)’이라는 한역 서양 수학서를 빌리려고
서호수의 집을 찾아 담화하는 장면이 나온다. 서유구의 가문은 당시 중국에서 수입한
최신 수학책을 소장하고 있는 서울의 두서너 집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서호수는 어느 날 아들 넷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희들이 재주가 없으니, 이 책들은 아마 뒷날 깨진 간장독이나 바르는 데 쓰게 될 거야.”
이 말을 들은 맏아들 서유본(徐有本)은 5년 동안 발분한 끝에
수학과 천문학, 기하학의 높은 경지에 오르게 된다.
서유본은 또 유금(柳琴)의 제자였던바, 유금은 유클리드 기하학에 빠져
자기 서재 이름을 기하실(幾何室)이라 했으니 이 시기 서양 수학의 유행을 알 만하다.
서유본은 1822년에 사망한다.
서호수와 서유본의 장서는 자연스럽게 서유구에게 전해졌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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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구의 ‘임원경제지’ 표지와 본문.
10대 후반 자신의 서재 만들고 책과 씨름
서유구의 숙부 서형수의 장서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서씨 집안은 서울 남산 아래 저동(苧洞)에 저택이 있었는데, 서형수는 필유당(必有堂)이란 가내(家內) 도서관을 마련한다.
서유본이 쓴 ‘필유당기(必有堂記)’를 보자.
죽오(竹塢)의 서쪽에 나무를 얽어 가리개를 만들고 가리개 안을 소제해 당(堂)을 지으니,
조용하고 깨끗하여 산림의 분위기가 있었다.
중부 명고선생(明皐先生, 서형수)께서 사부(四部)의 서적을 그 안에 모아두시고
자제들에게 그곳에서 학업을 닦게 하셨던바, ‘필유당’이란 편액을 걸었다.
대개 옛날 정기(丁)란 사람이 서적 만 권을 구입해두고
“내 자손 중에 반드시 학문을 좋아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吾子孫必有好學者)”라고 하였으니,
당의 이름을 필유라 한 것은 대부분 여기서 나온 것이다.
필유당은 서형수의 ‘필유당기’에 의하면
경류(經類) 19종, 사류(史類) 30종, 자류(子類) 25종, 집류(集類) 34종, 총 108종의 책이 있었다.
필유당 외에도 저동의 저택에는
서명응의 죽서재(竹西齋), 서유본의 불속재(不俗齋), 서유구의 태극실(太極室) 등의 서재가 있었다.
여기에는 모두 서적들이 있었다.
사족이지만, 뒷날 필유당의 책은 모두 팔리게 된다.
서형수의 문집 ‘명고전집(明皐全集)’에 ‘경발선사춘추전후(敬跋宣賜春秋傳後)’라는 글이 있다.
‘춘추전’의 제작에 서형수의 공이 가장 컸기에
특별히 정조는 제본하지 않은 책 1질과 제본한 책 1질을 하사한다.
1798년 서형수는 이에 감격해 발문을 썼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추자도 귀양지에 있을 때(1817년) 아들 서유경(徐有)이 편지를 보내,
생활고에 몰려 필유당에 있는 장서 17종 377책을 팔았다고 보고한다.
그중에 ‘춘추전’ 2질도 포함돼 있었다. 서형수는 이 말을 듣고 낙담해 마지않는다.
서유구는 가문의 장서 속에서 성장했다. 그 역시 10대 후반 서명응을 용주에서 시봉하며 지낼 때
자신만의 서재이자 장서고(藏書庫)인 풍석암서옥(楓石庵書屋)을 짓는다.
서형수는 이를 기념해 ‘풍석암장서기(楓石庵藏書記)’를 써준다.
조카 유구가 용주에 거처할 때 네모난 땅을 정원으로 삼고, 돌을 쌓아 계단을 만들고,
계단에 단풍나무 10그루를 심었는데, 늘어선 것이 마치 비단으로 장막을 한 것 같았다.
계단 아래에는 봇도랑, 밭두둑 사이에 차밭 몇 이랑이 섞여 있다.
계단에서 5, 6보 떨어진 곳에 처마를 등지고 서재를 지었다.
깊고 조용하고 깔끔하며 책과 거문고를 기둥에 기대놓았다.
‘장서기(藏書記)’라 했으니, 서유구의 책 수집을 의식해 한 말이다.
서유구는 10대 말부터 책을 수집했고, 출사(出仕)하여 급료를 받자 본격적으로 장서를 구축한다.
거기에 가문의 불행도 한몫한다.
서명응은 1787년, 서호수는 1799년에 사망하고, 1806년 서형수는 귀양을 간다.
가문의 불행으로 가문의 장서가 곧 서유구의 장서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흥미로운 것은 장서에 대한 서유구의 태도다.
<임원경제지>의 ‘이운지(怡雲志)’에서 서유구는 선비가 품위 있는 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여러 도구들, 예컨대 문방구, 다구(茶具), 서화 골동품, 장서의 구축 방법에 대해 언급한다.
‘이운지’ 6, 7권은 ‘예완감상(藝翫鑑賞)’ ‘도서장방상(圖書藏訪上)’ ‘도서장방하’로 이루어져 있는데,
곧 금석(金石) 골동(骨董) 서화의 감별, 감상, 소장법을 언급한 뒤
서적의 구입, 감별, 수장법, 인쇄법을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다. 눈에 띄는 대로 줄여 쓰면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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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에게 맞게 새롭게 꾸민
‘임원십육지’.
‘임원경제지’의 다른 이름이다.
먼저 책을 구하는 여러 방법, 책값,
먼저 구입해야 할 책과 나중에 구입해야 할 책의 순서,
서적의 진위, 송대 원대의 인쇄본 감정법, 책의 인쇄처, 인쇄종이
등에 대해 거론하고
이어 장서각을 건립하는 곳, 우리나라 책을 간수하는 법,
분류하는 법, 좀벌레를 막는 법, 책을 햇볕에 쬐는 법,
책을 보호하는 법, 책은 반드시 3본을 소장해야 한다는 주장,
서적 목록 만드는 법 등 책 소장에 관계되는 사항을
거의 남김없이 상설한다.
그리고 끝으로 인쇄술의 여러 종류와 제본법 등을 다루고 있다.
그는 장서에 대해 최초로 해박한 지식을 소유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중 몇 대목을 읽어보자.
서유구 자신이 쓴 ‘금화경독기’에서 인용된 것이다.
책을 구입하면서 화려하게 장정된 책을 갖고자 하는 것은,
벗을 찾되 화려하고 선명한 의관을 차려입은 친구만 사귀려 하는 것과 같다.
친구를 찾되 화려하고 선명한 옷을 차려입은 벗만 찾는다면,
갈옷을 입었으되 옥을 품고 있는 사람은 멀어지게 마련이다.
책을 모으는 것이 귀중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옛사람의 좋은 말과 행실을 많이 알아 나의 식견을 넓히고자 하는 것인가,
아니면 비단으로 책함(冊函)을 장식하고
상아로 책의 묶음을 고정하는 찌를 만들어 서가를 멋지게 꾸미고자 하는 것인가.
지금도 책의 소장자라면 가슴이 뜨끔할 소리가 아닌가.
각설하고 본래 주제로 돌아가자.
1806년 서유구는 돌아갈 기약 없이 정계에서 축출됐다.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학문 외에는 할 일이 없다.
가문이 구축한 방대한 장서를 기반으로 ‘임원경제지’를 쓰는 것이 생의 소업이 됐다.
매일매일 오직 책을 읽고 글을 썼다.
그리하여 장서는 장식품이 아니라, 그의 삶의 유일한 도구가 됐다.
방대한 장서를 읽어나가면서 자신이 구상한 <임원경제지>의 구도에 따라
자료를 선택하고 분류하고 베껴 썼다. 아니 장서에서 ‘임원경제지’를 끄집어낸 것이다.
축출된 지 18년 만에 조정으로 돌아왔지만, 작업은 끝나지 않았다.
1827년이 되어서야 겨우 일단락이 됐지만, 그 이후에도 보완 작업은 계속됐다.
그의 평생이 소모된 것이다. 그 결과 대충 잡아도 1만4000쪽에 달하는 ‘임원경제지’가 완성됐다.
그 규모가 짐작이 가는가.
독창성 없다고 폄훼 안 될 일
인용으로만 이루어진 이 책을 오늘날 한국 사회, 혹은 학계에서는 뭐라 말할까?
베껴 쓰기로 일관한 독창성이 없는 책이라면서 비난하지나 않을까?
따지고 보면 세상에 ‘새’ 책은 정말 얼마나 될 것인가.
석가와 공자와 예수와 마호메트의 어록과 호메로스의 서사시, 플라톤의 저작이 출현하고,
‘도덕경’과 ‘장자’가 죽간에 쓰인 이후 과연 ‘새’ 책이 있을 것인가.
근대에 와서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다윈의 ‘종의 기원’,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이
고전의 반열에 오른 뒤 과연 누가 ‘새’ 책을 쓸 수 있을 것인가?
모든 책은 불행하게도 이들 책의 해설과 각주에 불과한 것이다.
지금 세상의 모든 글을 쓰는 천재들은,
저 선배들이 먼저 내뱉은 말 때문에 늦게 태어난 것을 저주하며 땅을 치고 통곡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태어난 시대에 충실한 글을 쓰면 그것으로 족할 뿐,
죽은 뒤 자기 책이 멀리 전해지기를 바라는 것조차 무망한 욕심이다.
죽으면 내가 없어지니, 내가 죽은 뒤에 내 책의 운명은 알 수가 없다.
새 책 없는 세상에 인용으로 이루어진 <임원경제지>가 폄훼돼야 할 이유는 아무 데도 없다.
어떤 분이 <임원경제지>를 폄훼하는 말을 했던 기억이 나서 이렇게 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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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명관 부산대 교수 · 한문학 hkmk@pusan.ac.kr
- 주간동아 '조선의 인물, 조선의 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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