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가는(문화)

부여 왕흥사를 모델로 건설한 일본 나라현 아스카절(아스카데라, 飛鳥寺)

Gijuzzang Dream 2008. 6. 15. 07:56

 

 

 

 나라현 아스카절(아스카데라, 飛鳥寺)과 부여 왕흥사

 

 

◇ 일본 최초의 거대한 칠당(七堂) 가람 아스카 절 터전.

고대 일본과 백제 왕실의 연관성을 살필 때 일본 나라(奈良)현 일대는

고대 백제의 여러 가지 유적과 묘지, 유물 등이 오늘날까지도 쏟아져 나오는 지역이다.

특히 나라현의 다카이치(高市)군 아스카(明日香)촌과

나라현 기타카쓰라기(北葛城)군 고료(廣陵)초 구다라(百濟) 지역은

백제궁(百濟宮)이라는 명칭의 백제 왕궁 터와 백제 불교 사찰 등이 다수 남아 있다.

 

지난 2월에는 아스카(飛鳥 / 明日香)에서

5세기 백제인 아스카 지배자의 대형 묘지인 ‘마유미칸스즈카’ 고분 발굴 결과를 ‘아스카교육위원회’가 공표했다(제64회 참조).

발굴 관계 학자들은 5세기 중반 백제 도래인 씨족으로서 일본 역사에서도 유명한 야마토노아야 가문(東漢氏)의 수장급(首長級) 묘지이나 그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필자는 지난 4월 ‘마유미칸스즈카’ 고분 일대를 다시 답사했다. 이미 이때는 마유미칸스즈카 고분이 발굴 이전처럼 완전히 흙과 포장비닐로 덮여 있었다.

4∼5세기부터 수많은 백제인이 아스카 일대로 건너와서 지역을 개발하고 있었다.

‘일본서기’(720)에는 “오진천황 20년 9월에 야마토노아야 가문의 선조인 아지사주(阿知使主)가 그 자식과 도가사주(都加使主) 및 자신이 거느리던 17현(縣)의 백성을 이끌고 건너왔다”고 썼다.

이는 5세기 중엽에 수만명의 백제인 대집단이

백제인 왕족 수장인 아지사주 휘하에 일본 아스카 땅으로 이주하였음을 알려주는 놀라운 내용이다.

 

미즈노 유(水野祐) 와세다대학 사학과 교수는

“5세기 당시의 오사카며 나라 지방의 지배자는 백제 왕족이었던 오진천황이었다”

(‘日本古代國家の形成’ 1978)고 발표한 바 있다.

 

일본 역사책에서는 오진천황을 3∼4세기(270∼310 재위) 일본 고대왕이라고 쓰고 있으나,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후대인 4∼5세기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현재 일본 사학계의 통설이다.

 

필자가 재차 현지 답사한 마유미칸스즈카 고분에서 남서쪽 약 2㎞ 지점의 나지막한 언덕에는

아지사주 신주(神主)를 제사지내는 사당 ‘오미아시신사’(於美阿志神社)가 자리하고 있다.

아지사주의 사당 오미아시신사가 마유미칸스즈카 고분 이웃에 있는 것으로 보아도

모름지기 마유미칸스즈카 고분은 강력한 아스카 지배자였던 백제왕족 아지사주의 무덤이 아닌가

하는 게 필자의 추찰이다.

 

와다 아쓰무(和田萃) 교토교육대학 교수는

“오진천황 시대에 백제로부터 야마토노아야 가문(東漢氏, 倭漢氏로도 함께 동등하게 표기함)이

일본으로 건너온 것은 거의 사실(史實)로 보아 마땅하다. 오진천황은 자신의 야마토왕권 밑에다

야마토노아야 가문을 두고 직접 거느렸다”(‘飛鳥の神神’ 1996)고 했다.

백제인 지배자 오진천황은 야마토노아야 가문 세력의 큰 지지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와 같은 아지사주(야마토노아야 가문)의 아스카 지방 백제인 대집단의 힘은 아스카 땅에서

백제인들의 일본 최초 아스카 절(飛鳥寺)이라는 칠당(七堂) 가람을 건설하게 되었다고 본다.

즉 백제계 스이코여왕(推古 · 592∼628 재위) 당시인 596년에 아스카 왕궁 인근에서

백제에서 건너온 백제인 건축가들에 의해서 처음 세워진 것이 아스카 절이다.


◇ 부여 왕흥사 터전 발굴 현장.

그 당시 백제 제27대 위덕왕(威德王 · 554∼598 재위)은

일본 아스카 땅의 왜 왕실로 백제인 건축가들을 보내주어 그들이 아스카 절을 세웠다.

그 무렵 아스카 왕실의 지배자는 백제계인 스이코여왕이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스이코여왕의 왕궁인 ‘도유라궁’(豊浦宮)은

아스카 절에서 직선 거리로 불과 500m 미만의 지점에 있다는 점이다.

현재도 당시의 도유라궁 왕궁 터는 잘 보존돼 있다.

 

아스카 절은 588년에 착공, 596년에 완공됐다.

가도와키 데이지(門脇禎二) 교토부립대학 사학과 교수는

“백제계 일본 지배자 ‘소아마자’(蘇我馬子 · 소가노 우마고 · 626년 사망)에 의해서

아스카 절이 착공되어 8년 만에 완공됐다”(‘古代を考える飛鳥’ · 1995)고 했다.

 

가도와키 교수는 필자에게 보내준 저서에서

“소아마자의 5대조 할아버지는 백제인 목만치(木滿致 · 백제 제21대 개로왕의 조신)였다.

목만치는 5세기에 일본으로 도래한 백제 왕실(개로왕, 455∼475 재위)의 고관이었다. 일본으로

건너온 목만치 일족은 아스카의 소아 터전에 정착하여 소아씨(蘇我氏) 가문을 이루게 되었다”

(‘飛鳥’ 1990)고 밝혔다.

 

이에 앞서 미즈노 유 와세다대학 사학과 교수도

“소아 가문은 조선인이다”(‘天皇家秘密’ 1977)고 단정했다.

그 밖의 여러 저명 학자들도 “소아 가문은 백제 도래인이다”고 입을 모았다.

 

“위덕왕이 보낸 백제 건축가들이 세운 창건 당시의 아스카 절은

뒷날인 1196년에 번갯불에 맞아 화재 발생으로 소실됐다.

당시 본존불상(석가여래좌상, 철불)도 대파하였으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불상은 여러 차례 파손된 부분을 수리하게 됐다”(‘古代寺院の成立’ 1985)고

시미즈 마사지(志水正司) 게이오대학 사학과 교수는 지적했다.

 

12세기 말부터 폐허가 됐던 아스카 절은 그 옛날 절 터전이 1956∼57년 발굴됐다.

발굴 결과 본존불상(석가여래좌상)과 부처님 사리함과 곡옥, 관옥 등 옥류가 발견됐다.

또 금환, 구리쇠 말방울, 수키와 등 기왓장을 찾아냈다.

이 발굴 작업으로 백제인들이 창건한 아스카 절은 ‘1탑(塔) 3금당(金堂) 형식’이 밝혀졌다.

즉 한 기(基)의 불탑을 중심으로 불당인 금당 셋이 에워싼 건축양식이었다.

◇ 아스카 절 1탑 3금당 복원도.

더 구체적으로 절터 형태(사진 ‘아스카 절 1탑 3금당 복원도’ 참조)를 설명하자면

정문인 남문이 있고 그곳에서 들어서면 중문이 나온다.

중문에서 안쪽에 탑이 섰고, 탑 뒤에는 중금당이 섰으며, 그 뒤쪽은 강당이 있어 일직선을 이룬다.

또 탑의 오른쪽에는 동금당이 있고 왼쪽으로는 서금당이 섰다.

이 1탑 3금당은 네모진 회랑으로 사방이 둘리어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최근 이 아스카 절과 부여 왕흥사의 건축양식이

일본 학자들에게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발굴작업이 시작된 부여의 '왕흥사' 옛 터전(사적 제472호) 목탑터에서 금은동 부처님 사리용기(금제병, 은제병, 청동함)가 발굴되자 계속하여

일본 학자들이 왕흥사 발굴 현장을 찾아오고 있다.

왕흥사 터는 부여 부소산(사비성)에서 북서쪽으로

백마강 건너 약 1㎞ 거리에 자리하고 있다.

이 사찰은 백제 왕실의 원찰(願刹)로 알려진다.

즉 백제 제27대 위덕왕이 577년,

죽은 왕자를 위해 지금의 왕흥사 터전을 잡고 사찰을 세웠다(‘청동함’의 명문).


◇ 오미아시신사 연혁 철판.

왕흥사 발굴 터를 최근에 답사한

일본 와세다대학 오하시 가즈아키(大橋一章, 佛敎美術史 전공) 교수는 지난 5월22일,

필자에게 직접 “왕흥사 터에서 발굴된 각종 출토물이며 기와(연꽃무늬 수막새)의 문양과

탑 구조 등은 일본 나라땅 아스카 절의 유물과 거의 일치한다.

일본에 건너와서 596년에 아스카 절을 건축한 백제 건축가들은 이미 그 이전에

백제 땅에서 왕흥사를 건축했던 똑같은 기술자들이었다.

나라 땅의 아스카 절은 왕흥사를 모델로 건설한 일본의 유일한 1탑 3금당 형식 사찰이다”고 했다.

 

또 오하시 교수는 “현재 발굴작업이 계속되는 왕흥사 터전은 탑과 금당, 강당이 일직선으로 연결된

오사카의 ‘사천왕사’식 건물 배치처럼 보이지만, 왕흥사의 회랑 쪽 동서 양쪽에 있는 부속 건물은

뒷날 일본에 건너와서 아스카 절을 지을 때 2곳의 금당(동금당, 서금당)으로 변했다고 본다”

고 했다. 즉 아스카 절은 철저하게 왕흥사를 본떠 백제 건축가들이 세운 사찰이라는 것.

 

두말할 것 없이 오사카의 사천왕사도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 건축가들에 의해 세웠졌던

가람이다. 그 때문에 사천왕사에서는 지금도 해마다 11월 초에 ‘사천왕사 왔소’ 축제행사를

거행해 오고 있다.

 

부여 왕흥사 터전에서 출토된 곡옥이며 관옥, 금환(순금 둥근고리) 등 사리 공양구들은

역시 아스카 절터에서 출토되었던 사리 공양구 등과 일치한다.

두 사찰에서 각기 발굴된 수막새 등 기와의 연꽃무늬 문양도 동등한 것임을 살피게 해준다.

 

역시 부여의 왕흥사 유적을 답사했던

스즈키 야스타미(鈴木靖民, 일본고대사 전공) 고쿠가쿠인(國學院)대학 교수도 이 사실을 인정했다.

 

“아스카 절 창건은 백제왕과 왜왕 사이의 활발했던 교류를 입증하고 있다.

더구나 아스카 절 창건에 앞장섰던 왜왕실 실권자 ‘(당시 권력자였던) 소가노우마코(蘇我馬子),

소아마자 대신(大臣) 등 만조백관이 아스카 절의 목탑 찰주에다 사리함을 봉안하던 법요 때

모두 백제 옷을 입고 참석했다는 역사 기사도 있다.” 고 설명했다.

일본의 아스카 절과 백제 왕흥사, 두 절의 관련성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지난해 10월 왕흥사에서 발굴한 금은 청동 사리함에 새겨진 창건연도를

단서로 처음 제기됐다. 사리함에는 “백제왕의 발원으로 (왕흥사)가 577년 2월 창건됐다”고 돼 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같은 해 11월 백제왕이 일본에 사찰 기술자들을 보냈고

11년 뒤인 588년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소가노우마코가 아스카데라를 창건했다고 기록되었다.

한편, 아스카 절은 1956년부터 그 옛 터전에서 1957년까지 발굴작업 끝에

‘1탑 3금당 형식’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오하시 가즈아키 교수와 스즈키 야스타미 교수는

아스카 절은 6세기 말 당시의 ‘완벽한 백제 양식’의 가람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게이오대학 시미즈 마사지 교수는

“평양 교외 청암리 고구려 사지(寺址) 등에 중앙에 8각 건물을 가진 3금당 형식이 확인됐다”

(‘古代寺院の成立’ 1985)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고대 백제와 고구려에서는 초기에 1탑 3금당 형식의 사찰을 함께 건립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일본에다 백제가 불교를 보내준 것은 일본 역사책에서도

고대 백제의 제26대 성왕(聖明王 · 523∼554 재위)이라는 것을 시인하고 있다.

실제로 성왕은 그 스스로가 직접 일본에 건너다니면서

왜왕(긴메이천황 · 欽明 · 539∼571 재위) 왕위를 겸임했던 것(제47회 참조)이며,

성왕이 왜왕으로 왜 왕실에 재임하고 있던 당시부터 성왕의 왕자였던 백제 위덕왕은

열성껏 백제 불교 일본 포교에 참여했던 것이다.

- 홍윤기, 한국외국어대 교수 senshyu@naver.com

- 2008-05-27 [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속의 한류를 찾아서] 

- ⓒ 세계일보&세계닷컴(www.segye.com),

 

 

 

 

"일본 最古절은 백제 왕흥사 복사판"

 

 
왕흥사 사리함서 완공시기 577년 확인
아스카데라 건립 연도·탑 구조 등 일치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절인 나라(奈良)현 아스카데라(飛鳥寺)가

6세기 말 축조된 백제 왕흥사(王興寺)를 본떠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

일본 고고학계에서 제기됐다고 아사히(朝日)신문이 16일 보도했다.

 

나라현 다카이치(高市)군 아스카(明日香)촌에 있는 아스카데라는

백제왕이 승려와 장인을 보내 577년 건립을 시작했다는 기록이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있어 애초부터 백제와 깊은 연관이 있는 절이었다.

 

일본 학자들이 왕흥사를 이 절의 모델로 지목하는 것은

지난해 충남 부여 왕흥사터에서 출토된 사리함 명문을 통해 왕흥사 완공 시기가

여태까지 알려진 600년이 아니라 577년인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또 문양이나 구조로 볼 때 아스카데라의 기와는

두 가지 다른 계통의 가마에서 구운 것인데

왕흥사 기와도 똑 같이 두 가지 계통을 보이고 있다.

 

또 절의 본당 앞에 세운 목탑의 기둥받침돌(심초석)이 지상노출식이 아니라

지중매설식이라는 점도 같다.

 

오하시 가쓰아키(大橋一章) 와세다(早稻田)대 교수(불교미술사)는

“왕흥사에 이어 아스카데라 계획이 추진되었을 것”이라며

“백제가 불상이나 경전을 일본에 주었지만 불교가 확산되지 않자 절을 세워야겠다고

생각한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사가와 마사토시(佐川正敏) 도호쿠가쿠인(東北學院)대 교수(고고학)는

“아스카데라는 목탑의 기둥받침돌 바로 아래에 사리함을 넣었지만

왕흥사는 약간 남쪽으로 치우쳐 사리함을 묻었다”며

“중국과 한반도를 거쳐 사찰 양식이 전해지면서 일부 변용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왕흥사는 백제 위덕왕이 죽은 자신의 아들을 위해 창건한 절로

지난해 국보급 사리함이 발견돼 고고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 도쿄=김범수특파원 bskim@hk.co.kr

- 한국일보, 2008-04-17

 

 

 

 

 

 

동아시아 最古 목탑 터 추정 유적 발견

 

풍납토성 경당지구서 “한성백제때 건립된 듯”

 

한국 중국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목탑 터로 추정되는 유적이

서울 송파구 풍납동 풍납토성 경당지구에서 29일 발견됐다.

 

이 목탑 터는 한성 백제(기원전 18년∼기원후 475년) 말기인

4세기 후반∼5세기 전반 유적으로 추정된다.

 

경당지구를 발굴 중인 한신대 박물관은

“한 변이 10여 m이고 깊이가 3m인 정사각형 모양의 목탑 터가 나왔다”고 밝혔다.

 

권오영 한신대 국사학과 교수는

“충남 부여군 왕흥사 터 등에서 발견된 백제 사비기(538∼660년)의 목탑 터와

모양이 거의 같다”며

“땅을 파고 흙을 부은 뒤 땅을 다진 흔적은 지상에 건축물을 높이 올리기 위한 것이고, 모양이 정사각형이어서 목탑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터 가운데 찰주(불탑 꼭대기에 세운 장식의 중심을 뚫고 세운 기둥)를 세운 것으로 보이는 기둥 터도 발견됐다.

 

이로써 풍납토성 내에

한성 백제 시기의 대형 사찰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권 교수는 “한성 백제 시기 백제에 불교가 전래됐고 사비 시기에 뒤지지 않는

고도의 건축 기술이 존재했음을 증명한다”며

“이번 터의 발견은 풍납토성이 초기 백제의 도읍지일 가능성이

더욱 높아진 것을 뜻한다”고 말했다.

-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 동아일보, 2008-0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