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정조의 사망은 인삼 오용으로 인한 의료사고

Gijuzzang Dream 2008. 6. 12. 01:42

 

 

 

 

2008.06.10 639호(p62~64)

 
 

“정조 사망은 인삼 오용 인한 의료사고”

 

 

한의사 이상곤 씨, 처방 기록 근거로 주장 “독살설은 정치적 상황만 고려한 추리”

 
 

정조 일행이 수원 사도세자묘를 참배하고 돌아오는 모습을 그린 ‘수원능행도’ 일부.

“참과 거짓은 사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고 안에 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가 보고 싶어하는 것만 본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카이사르가 각각 한 이 말은 사람이 자기 관점에서 남을 평가할 때 사실 자체를 왜곡할 수 있다는 위험을 지적한 명언이다.

 

그렇다면 최근 조선 정조 이산(李)의 죽음을 둘러싼 암살 논란도 실체적 진실보다 개개인 자신이 생각한 음모론을 바탕으로 확산된 것은 아닐까.

 

이인화 씨의 소설 ‘영원한 제국’과

이덕일 씨의 ‘조선왕 독살 사건’ 등이 이 같은 논란을 확산시켰다. 또한 다양한 미디어들도 앞다퉈

정조 사망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면서 암살설은 진실로 굳어지는 듯하다.

 

한 인간의 죽음은 질병에 따른 증상과 투약 이후의 증상 변화를 통해

짚어보는 것이 가장 사실적인 방법이다.

그러나 최근의 접근법들은 사망자의 구체적 질병은 외면한 채

시대상황과 권력관계 등 주변 사정만을 들어 추리로 일관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매우 세밀하게 왕의 일상생활과 약물 처방 및 투약 뒤의 증상 변화를 기록하고

있다. 이는 정조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정조가 앓았던 질병의 원인과 체질적 특징, 처방의 의미를 하나씩 되짚어보는 것은

역사적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다.

 

정조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명이 종기였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종기는 한의학적으로 옹저(癰疽)에 해당하는 질환이다.

<동의보감(東醫寶鑑)>을 보면

 “억울한 일을 당해 마음이 상하거나 소갈병이 오래되면 반드시 옹저나 정창이 생긴다”

“분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자기 뜻을 이루지 못하면 흔히 이런 병이 생긴다”는 말로

옹저의 원인을 설명하고 있다. 즉, 옹저의 원인으로 현대적 의미의 스트레스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정조에게 이런 증상이 있었을까?

 

<조선왕조실록>에는 이에 관한 구체적인 언급이 몇 차례나 나온다.

 

 

화병으로 생긴 종기에 인삼 처방은 위험천만

정조 초상화

 

재위 24년 6월14일 정조는 지방의관 정윤교와의 대화에서

“두통이 있을 때 등에서 열기가 솟구치니

이는 다 가슴의 화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또한 증상을 치료하기 위해 한약재인 소요산(逍遙散)에

황금(黃芩), 황련(黃連)을 더해 사용하면서

“가슴의 해묵은 화병 때문에 생긴 것인데

요즘에는 더 심하다”고 한 것을 보면

정조가 앓았던 종기의 원인은 화(火)라고 규정할 수 있다.

 

재위 24년 6월부터 정조의 종기 치료에 관한 기록은

여러 차례 이어진다.

 

그 이전인 재위 17년에도 종기를 치료한 기록이 있다.

머리에 난 부스럼이 자라 종기가 됐는데, 내의원들이 여러 약을 사용했지만 낫지 않자

민간에서 채재길이라는 의원을 불러 치료하게 했다.

 

채재길은 아버지가 종기를 치료하는 의원이었지만,

아버지가 일찍 숨지는 탓에 의학을 배우진 못했다.

하지만 남편을 거들었던 어머니에게서 고약 제조법을 배워 일약 종기 전문의가 됐고,

정조의 치료를 위해 특별히 초빙된 것이다.

뜻하지 않게 정조의 질환을 살피게 된 채재길은 웅담을 여러 약재와 배합해 사용했고,

사흘 후 종기가 씻은 듯이 나아 명의로 불리게 된다.

 

이 같은 기록을 보면 정조는 이전에도 종기를 앓았으며 원인은 심장의 울화로 보인다.

 

의술에 상당한 조예가 있던 정조는 재위 24년 6월14일 직접 처방을 내리기도 했다.

소요산에 황금, 황련을 추가해 사용하고

6월16일에는 사순청량음(四順淸凉飮), 금련차(金連茶), 웅담고(熊膽膏)를 투약했으며

다시 가감소요산 세 첩과 금련차를 쓴다.

 

6월20일에는 유분탁리산(乳粉托裏散)과 삼인전라고(三仁田螺膏)를 사용한다.

정조가 스스로 처방을 내린 가미소요산은 장자(莊子)의 ‘소요유(逍遙遊)’에서 나온 말로

‘기와 혈이 막혀 흐르지 않는 것을 가볍게 흔들어 열어줌으로써 푼다’는 뜻이며

불면, 어지러움, 때때로 올라오는 열감, 안면홍조 등의 증상을 완화하는 데 쓰인다.

 

특히 여기에 사용된 목단피(牧丹皮)는 차가운 기운과 매운맛이 특징인데,

심화로 혈액 속에 응결된 열기를 뚫는다. 즉, 열이 쌓이고 어혈이 정체해 생기는 고름을 없애고

씻어내는 중요한 약이다. 사순청량음도 혈액 속의 열기를 풀어주는 작용을 한다.

 

웅담은 곰 쓸개즙이다.

진위를 가릴 때 진짜는 손톱에 문지르면 자국이 남거나 수박에 그으면 줄이 생긴다.

그만큼 다른 조직에 침투해 삭이고 분해하는 능력이 뛰어나 해독과 열을 식히는 데 효과가 크다.

 

담즙이 음식 속의 기름과 독을 제거하듯,

담낭에 농축된 곰의 담즙으로 피부와 근막 속의 열기, 독소를 속속 제거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열거한 처방은 모두 열을 내리거나 어혈을 풀어주는 효과가 있는 것들로,

정조가 투약했을 때 종기와 전체적인 증상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정조의 몸이 거부반응을 일으키거나 그가 싫어했던 약제들이 있다.

즉, 체질에 의해 거부반응을 일으켰던 처방들이다.

이는 정조의 자각과 약물에 대한 의학적 인식을 바탕으로 한 것임이 틀림없다.

대표적인 것이 인삼이 들어간 처방이다.

육화탕(六和湯), 가미팔물탕(加味八物湯), 경옥고(瓊玉膏) 등은 인삼이 든 처방이다.

 

재위 24년 6월24일 어의(御醫) 강명길의 말을 인용해 주위에서 경옥고를 쓰자고 건의하자

정조는 “초기 열 증상의 원인이 인삼이 든 육화탕에 있는 것 같다”며 거부했다.

이후 경옥고의 복용을 권유받자 “나는 원래 온제를 복용하지 못한다.

오늘은 결코 복용할 수 없다”며 극단적인 거부의사를 표하기도 했다.

 

인기리에 방영 중인

MBC 월화드라마 ‘이산’의 정조

특히 숨지기 이틀 전인 6월26일

훈방을 사용한 이후 증상이 호전되자

드디어 경옥고를 복용했다.

하지만 정조는 잠자는 듯 정신이 몽롱한 상태로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경옥고는 훌륭한 보약이지만,

인삼과 꿀이 들어 있어 심화를 더욱 조장하기도 한다.

 

6월27일 다시 가감팔물탕을 처방했는데

인삼 2돈을 1돈으로 줄였다.

 

이날 이후 정조는 위독한 상태에 빠졌다.

인삼은 명약이다.

그러나 약과 독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아,

적절히 사용하면 약이 되지만 맞지 않는 사람에겐 오히려 독이 된다.

특히 심장의 울화 때문에 종기가 생기고,

그것도 가장 열이 많은 머리 부분에 생겼다면 더욱 맞지 않는다.

 

인삼은 그늘진 곳에서 자란다. 인삼밭에 가보면 검은 가리개가 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추운 사람은 불 가까이 가고 더운 사람은 서늘한 것이 좋다.

인삼도 속이 더운 식물이다 보니 햇빛을 싫어하고 서늘한 곳을 좋아한다.

 

모든 생명은 남을 위해 태어나지 않는다. 인삼이 명약이긴 하지만 인간을 위해 태어난 건 아니다. 몸이 찬 사람이 먹었을 때나 기초대사율을 높여 효험이 있는 것이지,

열이 많은 사람이나 심장의 울화가 있는 사람에겐 독약이 될 것이 자명하다.

정조 암살설을 다룬  ‘조선왕 독살 사건’ 

 

이러한 처방 구성은 사실 한국 한의학의 발달 과정과도 관계가 있다.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에서 <동의보감>에 이르기까지 향약인 인삼을 위주로 허를 보하는 처방을 장려했던 의학정책이 한국 한의학의 눈을 멀게 한 것이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중국의학은

온병학이라는 냉성 약물에 대한 가치를 발견한 반면,

우리는 허를 보해야 한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 때문에 우리 땅에서만 나고 우리가 가장 자랑하는 인삼을 통해

개혁군주인 정조를 의료사고의 피해자로 내몬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정조 타살설의 근거로 삼는 것이 ‘연훈방(烟燻方)’이라는 처방이다.

 

연훈방을 건의한 심인이 노론 강경파 영수인 심환지의 친척이라는 점이

남인들에게 의심의 표적이 됐다.

그러나 연훈방을 사용한 뒤인 6월25일 정조의 증상은 한결 나아졌다.

 

6월26일 재차 사용했고 종기 부위가 눈에 띄게 좋아졌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그와 같은 의혹은 근거가 없다. 이는 어디까지나 근대 서양의학의 눈으로만 판단한 것이다.

 

연훈방은 수은 성분인 경면주사(鏡面朱砂)를 사용한다.

경면주사는 가장 음적인 물질로, 차갑고 열을 식히는 데 으뜸으로 친다.

지금도 화장품에 사용되는 수은 성분이 문제가 되는 것은 수은의 음(陰) 성질이

모든 양(陽)이 모인 얼굴을 식히고 화장을 잘 먹게 하는 특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훈방을 장기간 복용하면 수은중독 위험이 있겠지만,

사흘 정도 사용한다면 문제를 일으킬 수준은 아니다.

실제 필자의 할머니도 연훈방을 사용한 적이 있다.

코에 비중격이 뚫려 있어 물어봤더니 젊었을 때 연훈방을 사용해 비중격천공증이 왔다는 것이다.

몇 달 동안 사용했지만 아흔 수를 누리고 돌아가셨다.

 

 

정조 타살설 근거 삼는 ‘연훈방’ 처방 뒤엔 오히려 상태 호전

 

주사(朱砂)를 남성 성기에 대면 움츠린다는 일설이 있을 정도로 주사는 음의 성질이 강하며

여성적인 물질이다. 모든 생명의 출발이 암컷에서 시작하듯,

가장 음적인 수은을 다른 물질로 변환시키려는 노력이 동서양에서 전개됐다.

 

서양에서는 연금술을 사용해 수은을 금으로 만들고자 했고,

동양에서는 연단술로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했다.

따라서 차갑고 음적인 물질로 정조의 심장 울화를 식히고 종기를 없애려는 노력은

무척 정당한 치료방법이었으며, 그 결과도 긍정적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현재의 시각으로

정조 질병에 대한 치료를 평가하고 독살설로 역사를 재구성하려 하지만,

한의학적 시각에서 봤을 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체질을 무시한 온제와 인삼 처방이 정조의 목숨을 앗아가는 무서운 결과를 낳았다.

 

부처님이 바라본 새벽별은 깨달음의 희열로 가득 찬 빛이지만,

새벽까지 노름하다 소변을 보기 위해 나온 춘원 이광수의 별은 허무와 좌절의 빛이었다.

누구나 자기의 시각으로 진실을 평가하려 한다.

그러나 진실은 자신의 시각이 아닌 사실로 바르게 평가돼야만 한다.

- 주간동아, 639호

-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 전 대구한의대 부속 한방병원 진료부장 lsk2302003@hanmail.net

 

 

 

 

 

 

 

 

 

정조 독살설 뒤집고,

인삼 오용 사고사 예언

 

 

지난해 6월 발간된 주간동아 639호에는

‘정조 사망은 인삼 오용 인한 의료사고’

‘독살설은 정치적 상황만 고려한 추리’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원고를 기고한 사람은 서울 갑산한의원 이상곤(45) 원장.

 

한의학 박사로 대구한의대 교수(이비인후과)를 지낸 이 원장은 이 글에서 “독살설을 퍼뜨린 주체는 주로 소설들이며, 이는 사망자의 구체적 질병은 외면한 채 시대상황과 권력관계 등 주변 사정만을 들어 추리했다”고 일갈한 뒤

‘조선왕조실록’ 중 정조의 질병 및 죽음과 관련된 대목들을 분석해

정조의 죽음을 인삼 오용에 의한 의료사고사로 규정했다.

 

그로부터 7개월이 흐른 지난 2월10일 언론매체들은

‘정조 독살설은 허구’라는 제목의 기사들을 쏟아냈다.

또 정조의 사망 원인이 인삼 오용 때문이라는

이 박사의 주장도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이는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등이 공개한

299통의 정조 친필 서간문 내용 때문이었다.

이 서간에서 정조는 당시 그와 대립각을 세운,

그래서 독살설의 배후자로 지목된 노론 벽파의 영수 심환지와 시쳇말을 써가며

국정운영, 주요 인사 문제 등을 일일이 상의했다. 역사학계는 이를 정조 독살설의

허구를 완벽하게 반박하는 증거로 인정하는 분위기다.

 

이 원장은 주간동아 기고에서

“정조가 앓은 질환은 화가 쌓여서 발생한 종기였는데,

열을 내리고 막힌 기를 뚫어주는 약재를 사용하지 않고 오히려 기를 보강해

열을 조장하는 인삼을 처방한 것이 화근이었다”고 주장하며

정조가 죽음에 임박한 시점의 실록을 그 증거로 들었다.

 

심환지의 친척뻘인 심인이 정조에게 처방해 독살설의 한 근거가 된 연훈방에

대해서도 이 박사는 “수은을 함유한 연훈방은 3~4일 써도 문제가 없으며,

실제 정조는 그 처방으로 훨씬 증세가 좋아졌다고 실록에 기록돼 있다”고 밝혔다.

 

이번에 공개된 자료 중 정조가 죽기 13일 전인 1800년 6월15일

심환지에게 보낸 비밀서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배 속의 화기가 내려가지 않아,

열을 내리는 황련이라는 약재를 몇 근이나 먹었는지 모른다.”

- 주간동아, 2009.02.24 674호(p94~95)

 

 

 

 

 

어의 철석같이 믿은 정조, 인삼 오용으로 죽음 불렀다

 

“열로 인한 종기에 열 더한 의료 사고 … 어의 결국 맞아 죽어”

  

근래 몇 년간 개혁군주인 조선 정조에 대한 관심이 가히 폭발적이었다.

정조 독살설은 일부 역사학자와 소설가들이 주장한 이후,

이루지 못한 개혁의 상징이자 우리가 믿고 싶은 ‘비극의 신화’가 됐다.

필자는 지난해 6월 ‘주간동아’(639호)에 정조 독살설을 통박하는 글을 썼다.

‘모두가 그렇게 믿고 싶지만 진실은 사실로써 밝혀야 한다’는 취지에서다.

필자는 정조의 죽음을 인삼 오용에 의한 의료사고라고 주장했다.

 

최근 발견된 정조 어찰첩 때문에 독살설이 전면 부인되면서

그 글이 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어찰을 통해 독살설의 주체이던 노론벽파와 정조 사이의 갈등이 다른 각도에서

조명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몇몇 소설가들은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듯

언론에 정조 독살설을 더욱 강력하게 퍼뜨리고 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인간의 죽음은 정치적 추론이 아닌 의학적 관점에서 판단해야 옳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아직도 계속되는 독살설을 재반박하기 위해 정조의 사망일(1800년 6월28일) 전후의

급박했던 상황을 실록과 의학서에 기술된 내용을 중심으로 재구성해봤다.  

 

심인이 쓴 수은 연훈방은 毒 아닌 藥

 

정조 독살설의 뿌리가 된 수은 함유 연훈(煙燻)방이 실록에 처음 등장한 것은

정조 24년 6월23일. 정조는 6월14일 제조(提調) 서용보(徐龍輔·1757~1824)에게

종기로 인한 고통을 호소한 이래 병의 진척이 없자 최후의 승부수를 던졌다.

변씨 의원과 장영장관(將營將官) 심인(沈)을 부른 것.

심인은 독살설의 주인공이자 정조 어찰의 상대방인 심환지(沈煥之 · 1730~1802)의 친척뻘이고,

변씨는 저잣거리의 무명 의사였다.

정조는 이전에 저잣거리의 천민의사 피재길의 도움으로 고질병인 종기를 고친 적이 있었기에

이번에도 변씨 같은 무명 의사를 과감하게 종기 치료에 투입했다.

 

조선시대 왕에게 사용하는 치료법은 먼저 안전성이 확보돼야 했다.

기록에 따르면 몇 차례 임상실험 결과 변씨 의원과 심인의 토끼 가죽 치료법 및 연훈방은

안전성이 검증됐다. 기록은 “토끼 가죽은 신봉조, 연훈방은 서정수가 효험을 보았다”고 전한다.

당시 어의(御醫)를 관리 감독하고 진료의 전 과정을 관장하는 도제조 이시수(李時秀, 1745-1821)정조 사망 이틀 전(6월26일) 연훈방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조금 전 연훈방을 사용한 뒤 심인과 여러 의관이 모두 종기 부위가 어제보다 눈에 띄게

좋아져 며칠 지나지 않아 나머지 독도 없어질 것이라 하였습니다.

의관뿐 아니라 아침 연석에서 신들이 본 것으로도 어제보다 매우 좋아졌습니다.”

 

연훈방을 쓰자 정조의 종기에 고여 있던 피고름이 한 바가지나 나와 이불과 옷을 모두 적신다.

 이를 두고 ‘호전이냐 악화냐’라는 논쟁이 있었는데, 정조 24년 실록의 혜경궁 홍씨와 관련된

기록을 보면 피고름은 분명히 호전 증상임을 알 수 있다.

“혜경궁 홍씨가 종기로 고생했는데, 며칠을 끌던 종기에서 많은 피고름이 나오면서 나았다.”

연훈방은 수은을 태운 것으로 유해한 약물임이 틀림없다.

더욱이 정조 후대의 기록은 ‘연훈방을 세 번 사용했다’고 말하지만

당대 기록을 자세히 보면 한 번밖에 사용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연훈방을 쓴 뒤 임금의 원기를 보충하기 위한 여러 약물들이 논의되는데,

한의학 이론에 밝았던 정조는 스스로

“이제는 열을 다스리는 약에 크게 유의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

몸의 열을 내리는 가미소요산(加味逍遙散)에 사물탕(四物湯)을 합방해 사용할 뜻을 내비친다.

하지만 도제조 이시수는 이에 맞서 인삼이 들어간 경옥고(瓊玉膏)를 비롯해

육군자탕, 생맥산, 팔물탕을 추천한다. 모두 몸에 열을 더하는 약재였다.

특히 인삼이 든 경옥고의 사용에 대해선 어의 강명길(康命吉)의 강력한 추천이 곁들여진다.

 

결국 어의가 처방한 약을 먹은 정조의 병세는 눈에 띄게 악화된다.

이시수가 “어제 저녁에도 주무시는 듯 몽롱해 보이셨는데 간밤에 계속 그러하셨습니까”라고

묻자 정조는 “어젯밤의 일은 누누이 다 말하기 어렵다”며 고통을 호소한다.

이후 정조의 증세는 급격히 악화됐고, 정조는 결국 숨을 거뒀다.

 

종기는 현대적 의미로 ‘스트레스’

 

정조가 먹은 경옥고를 만들고 있다.

정조를 죽음에 이르게 한 질환은 종기가 분명하다. 종기의 한의학적 명칭은 ‘옹저(癰疽)’.

‘동의보감’은 종기의 원인을 “억울한 일을 당해

마음이 상하거나 소갈병이 오래되면

반드시 옹저나 종창이 생긴다”고 지적한다.

현대적 의미로는 ‘스트레스’나 ‘화’가 그것이다.

 

이번에 발견된 정조 어찰은 열을 잘 받고 격정적인 그의 면모와 체질을 낱낱이 보여준다.

‘후레자식’ ‘젖비린내’ ‘분노로 새벽 5시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편지를 쓴다’는 표현이 그것이다.

또 “가슴속의 열기로 황련이라는 약을 물마시듯 했고

젊은 날 우황과 금은화 먹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고 술회했다.

 

열을 잘 받는 정조의 몸이 경옥고에 든 인삼 때문에 더 많은 열을 받았을 것은

불 보듯 자명한 이치.

그렇다면 정조에게 인삼이 든 약물을 극구 권유한 어의 강명길은 과연 어떻게 됐을까.

강명길은 1737년에 태어나 1801년에 죽었다.

33세에 내의원에 들어가 54세까지 20년간을 내의원에 종사했으며,

17년을 내의원의 수의(首醫)로 근무했다.

36세에 수의가 됐다는 사실은 그에 대한 정조의 총애가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사실 강명길은 정조가 임금이 되기 전부터 그의 건강을 보살폈다.

그는 정조의 체질적 특성을 잘 파악해 고암심신환과 가미소요산, 청심연자음을 처방했는데

이는 정조가 상복하고 극찬한 약물이다.

특히 가미소요산은 의학 입문의 옹저편에 나오는 처방으로 부인의 갱년기에도 사용한다.

갱년기의 부인은 등에 식은땀이 나고 가슴이 답답하면서 불면증에 시달리며 찬물을 자꾸

들이켜게 된다. 정조의 해묵은 화병이 갱년기 증세와 비슷하다는 점을 파악한 강명길은

몸에 열을 내리는 가미소요산으로 정조의 절대적 신임을 받는다.

‘동의보감’에도 없는 약을 처방해 신기한 효험을 보자 정조는 강명길과 공동저작을 기획한다. 정조 23년 완성된 ‘제중신편(濟衆新編)’이 바로 그 결과물.

 

정조는 편애에 가까울 정도로 어의 강명길을 감싸고돌았다.

당시 경기북부 어사였던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부평부사를 지낸 강명길의 죄상을

밝히고 그를 탄핵한다. 실제로 갖은 죄상이 드러났지만 정조는 그를 귀양 보내는 척하다가

한 달 후 어의로 복직시킨다.

 

정조의 최후는 강명길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의학에 관한 한 탁월한 이론가였던 정조는 누구보다 자신의 체질을 잘 알고 있었다.

종기가 번지게 된 원인이 인삼이 든 육화탕에 있음을 알고 누누이 인삼 사용을 강력히 피했던

그는 마지막 순간 자신의 평생 건강 처방인 가미소요산 합방 사물탕과 경옥고 사이에서

갈등한다. 결국 강명길의 추천이라는 말에 인삼이 든 경옥고를 복용한다.

 

정조가 숨을 거둔 후 강명길은 ‘노륙(戮)형’에 처해진다.

그에게 가해진 노륙형은 자신은 극형에 처해지고 아들들은 외딴 섬에 보내지는 것.

그런데 그는 고문 후유증으로 바로 죽는다.

효종의 종기를 치료하다 죽음에 이르게 한 ‘현행범’ 신가기가 극형에 처해진 이후

최악의 형을 받은 셈이다. 정조의 신임 아래 어의 중 수의가 되고 ‘제중신편’을 저작하면서

최고의 권세를 누리던 강명길은 마지막 순간 최악의 구렁으로 빠졌던 것이다.

 -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前 대구한의대 교수

 - 2009.03.03 675호(p52~53) 주간동아[CULTURE/ 한의사가 본 독살설의 허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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