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개혁정책과 화성 건설
| |||||
| |||||
김준혁(수원시 학예연구사) | |||||
| |||||
어린 시절 부모와 이별한다는 것은 당사자에게 치명적인 일이다. 그가 아무리 고매한 인격을 지녔다 하더라고 가족과 영원한 이별은 참을 수 없는 슬픔이다.
정조는 11살 때 아버지 사도세자와 비극적인 이별을 하였다. 그리고 그에게는 역적의 아들이라는 오명이 은밀하게 따라다녔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정조의 할아버지였던 영조는 왕실의 계통을 바꾸면서까지 11살에 죽은 자신의 큰 아들 효장세자에게 정조를 입양시켰다. 그래서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이 아닌 효장세자의 아들이 되었고, 이러한 정통성의 취약함을 극복하기 위해 누구보다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정조는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그 누구보다도 성리학 연구에 충실했고, 끊임 없는 활쏘기와 검술 훈련으로 여느 무인보다 무예가 뛰어났다. 요즈음 TV드라마에서도 학문에 능통하고 자신을 호위하는 군사들보다 더 뛰어난 활쏘기 실력을 가지고 있는 정조를 발견할 수 있다.
정조가 즉위한 시기는 태양계 전체에 발생한 소빙하기로 인하여 지구는 가뭄과 홍수 등이 빈번하였고, 조선 또한 계속되는 천재지변으로 경제적 어려움은 극에 달하던 때였다. 이러한 시기에 조선의 관료와 사대부들이 붕당에만 뜻을 둘 뿐 백성들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았으니 조선정부와 민초들의 어려움은 계속되었다.
이때 정조는 조선을 개혁하기 위해 1778년(정조 2) 6월에 ‘경장대고(更張大誥)’를 발표하였다. 그는 당시를 ‘병든 사회’라 인식하였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 민산(民産) · 인재(人才) · 융정(戎政) · 재용(財用)의 4항목을 대내외에 천명하였다. 먼저 백성들을 잘 살게 하는 방법으로 새로운 경제제도를 만들었다.
그것은 시전상인으로 대표되는 독점자본가들의 고유권한이던 금난전권(禁難廛權)을 혁파하는 ‘신해통공(辛亥通共)’ 정책을 수립하였다. 기득권층의 반발이 심하였지만 정조는 백성 누구나 상업행위를 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수요와 공급 등 유통구조가 원활해지면 국가 경제가 활성화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관철시켰다. 또한 정조는 국가 발전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인재양성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를 위해 두 가지 방안을 동시에 추진하였는데, 하나는 공교육의 강화이고 다른 하나는 인재를 선발하여 집중 교육을 시키는 일이었다. 그동안 침체되었던 향교 교육을 활성화하기 위해 교관 등 대대적인 개혁을 통해 평민들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하였다.
이와 함께 규장각을 설치하고, 검서관과 초계문신을 두어 학문 발전과 국가의 미래 정책을 수립하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종래에는 교육을 받고도 관직에 오를 수 없었던 서얼들을 중용하였고, 이들에게 규장각의 많은 서적을 열람케 하여 새로운 조선을 만드는 데 힘을 보태도록 하였다. 결국 인재 양성은 신분제 차별을 없애고 평등한 사회로 나가고자 하는 출발점이기도 하였다.
또 군사제도에 관한 개혁도 커다란 문제였다. 정조 즉위 초에 56%에 달하는 예산이 국방비로 사용되고 있었음에도 칼과 창은 녹슬어 있었고 활은 아교가 녹아 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고위급 무관의 수가 많아 예산만 낭비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정조는 국방문제를 개혁하고자 군사기구를 통합하거나 아예 폐지하기도 하였다. 이를 통해 절감된 국방비를 경제 활성화 또는 사회복지를 위해 사용하였다. 그리고 금위영 · 어영청에 지급될 비용의 상당수를 화성 축성에 토목공사비로 지급하였다. 결국 화성 축성은 어려운 경제상황에서 기술자 및 일반 백성들에게 일자리를 창출하여 경제적 안정의 기틀이 되기도 하였다.
정조는 이와 같은 일련의 개혁정책 추진으로 국가 전체가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지는 사회를 만들고 더 나아가 중국을 비롯한 외세에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만들고자 하였다. 곧 조선이 세계 최고의 문명국가라고 하는 중화의식을 가지고 병자호란의 치욕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공개적으로 북벌을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선대왕의 능행차 때마다 강도 높은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조선의 군사들에게 중원 대륙으로 전진할 수 있도록 마상무예를 익히도록 하였다.
정조는 자신의 개혁정책을 완수하기 위해 친위도시이자 개혁도시로서 화성을 건설하였다. 그곳 화성에서 저수지와 국영농장인 둔전을 개발하여 토지 없는 백성들이 와서 농사를 짓게 하여 농업의 새로운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성곽 내에 시전을 설치하고 전국에서 대표적인 상인들을 유치하여 화성을 중심으로 국내 및 국제적 상업 교류를 추진하고자 하였다.
조선후기 동양 삼국 성곽문화의 결정체이자 서양의 기술까지 망라한 화성은 훗날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고, 축성과정을 기록한 화성성역의궤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정조는 자신이 영원하던 꿈을 채 이루지 못하고 1800년 6월 28일 승하했지만 그가 이루고자했던 꿈과 희망은 늘 우리 곁에 함께하고 있다. 더불어 우리는 그의 꿈을 이루어 평화롭고 평등한 사회 그리고 자주적인 나라를 건설하여 영원히 아름다운 나라를 후세에게 물려 주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