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 조선시대의 언론기관
바른 정치 구현을 위한 조선시대의 언론기관, 언론 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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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은 ‘언치논도(言治論道)’의 준말로 바람직한 치도(治道)를 둘러싼 논의를 의미한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조선에도 언론기관이라 지칭할 만한 것들이 있었다고 한다. 성리학을 유일무이한 통치사상으로 채택한 조선조에서는 사간원(司諫院)과 사헌부(司憲府), 홍문관(弘文館) 등 소위 언론삼사(言論三司)가 ‘언치논도’를 전담했다. 사간원을 구성하는 간관(諫官)의 기본임무는 제왕의 잘못된 정책 및 언행 등에 대해 직간하는 것이다. 최초의 간관은 전한(前漢) 때 출현한 간대부(諫大夫)로 후한 때 간의대부(諫議大夫)로 개칭되었다.
사헌부는 재상을 보좌하는 부승상(副丞相)인 어사대부(御史大夫)에서 출발해 백관에 대한 감찰을 전담하다가 수당(隋唐) 이후 간의대부와 함께 언론기관의 역할을 수행케 되었다. 그러나 조선조 언론의 가장 큰 특징은 성종 때 설치된 홍문관에서 찾을 수 있다. 이는 원래 왕의 경연(經筵)을 전담시키기 위해 발족한 전문적인 연구기관이었다. 학술기관에 해당하는 홍문관이 언론기관의 역할을 수행케 된 것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세조는 즉위 초 집현전 학사들이 대거 참여한 단종복위 사건이 터지자 이내 집현전을 철폐했다. 이후 성종은 세조 때 형성된 훈구세력을 견제할 생각으로 예문관(藝文館)의 일부 기능을 독립시켜 집현전의 후신인 홍문관을 개설했다. 이때 명분을 중시하는 길재(吉再)의 학통을 이어받은 영남사림(嶺南士林)이 대거 진출했다.
왕의 자문에 응하면서 조정(朝政)의 시비를 논하는 와중에 자연스럽게 간언을 행한데 따른 것이었다. 이는 학문연마에 전념하는 홍문관이 성리학 이론에 대해 가장 권위적인 해석을 내릴 수 있었던 사실과 무관치 않았다. 당시 언론삼사가 힘을 합쳐 간쟁하는 것을 ‘삼사합사(三司合司)’, 3개 기관 중 2개 기관이 합사하는 것을 ‘양사합사(兩司合司)’라고 했다.
양사합사는 대개 사헌부와 사간원의 합사로 이뤄졌으나 홍문관이 사헌부나 사간원을 대신해 합사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이들 언론삼사의 관원들은 소속기관 및 자신의 선명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적잖이 다투었다. 이는 성리학을 채택한 나라가 지닌 특징이자 한계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나서 삼사합사로 간언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만큼 위세가 높았다.
실제로 홍문관의 수장인 대제학(大提學 학술원장)은 사헌부의 수장인 대사헌(大司憲, 감사원장)이 종2품, 사간원 수장인 대사간(大司諫, 국영언론 사장)이 정3품인데 반해 그보다 높은 정2품이었다. 소위 문형(文衡)으로 불린 홍문관 대제학은 사대부들로부터 정승보다 더 큰 존경과 권위를 인정받았다. 당시의 상황에서 군왕이 언론삼사의 의견을 무시하는 것은 곧 스스로 사리에 어두운 암군(暗君) 내지, 간언을 무시하는 무지막지한 폭군(暴君)임을 자인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조선 중기 이후 사대부들이 사색당파로 나누어 싸운 것도 이들 언론삼사를 누가 장악하느냐 하는 문제와 깊은 연관이 있었다. 언론삼사는 왕권을 견제하기 위해 군주와 다투는 것을 본연의 임무로 생각한 까닭에 모든 사안에 개입했다. 이에 성군으로 일컬어진 세종과 성종도 이들과 적잖은 마찰을 빚어야만 했다.
성종은 언론삼사가 군주의 재량권인 인사권에까지 간섭하고 나서자 이같이 버럭 화를 내기도 했다. 지금 한두 명의 대간을 이조의 추천에 의해 외직(外職)에 임명한 것을 놓고 대간이 억측하여 말하고 있다. 이는 임금을 우습게 여기는 것이다.” (성종 24년 7월 30일)
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신권세력의 발호를 가차 없이 제압했다. 이는 대간들의 기세를 초기에 제압하지 않고는 왕권을 행사하기가 쉽지 않다고 판단한데 따른 것이었다.
연산군의 다음 언급이 그 증거이다. 그렇다면 권력이 위에 있지 않고 대간에 있는 것이다. 나라가 위태로워지는 근원은 권력이 아래로 옮겨지는 데 있다.” (연산군 2년 5월 6일)
커다란 병화(兵禍)를 겪어야만 했다. 왜란 당시 명나라 조정이 ‘군약신강’에서 왜란의 원인을 찾은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는 성리학 이론에 기초한 ‘숭문천무(崇文賤武)’ 풍조로 인한 것이었다. 조선조는 ‘숭문천무’로 패망을 자초한 남송(南宋)의 전철을 밟은 셈이다.
이는 ‘군약신강’으로 인해 왕권이 극도로 미약해진 상황에서 온갖 대소 사안을 놓고 모든 정파가 갑론을박하는 국론분열 상태가 지속된데 따른 것이었다. 18세기의 실학자 유수원(柳壽垣)은 『우서(迂書)』에서 홍문관의 설치에서 그 원인을 찾은 바 있다.
당시 서민들은 자신들의 원억(억울한 일)을 해결키 위해 자구책을 강구해야만 했다. 그 대안으로 나온 것이 바로 상언上言과 격쟁(擊錚)이었다. 상언은 원억의 당사자가 그 내용을 글로 써서 바치면 승정원에서 이를 수합한 뒤 각방 승지의 견해를 덧붙여 보고하는 형식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상언은 횟수가 2회로 제한되어 있는데다 한문으로 본인이 직접 작성해 제출해야 했던 까닭에 문자를 모르는 하층민들은 격쟁을 더 선호했다.
횟수의 제한도 없고 글로 써야 하는 부담이 없었던 까닭에 하층민들이 선호했다.
격쟁은 16세기에 크게 3가지 형식으로 정착되었다. 직접 대궐 안으로 들어가 국왕에게 호소하는 궐내격쟁(闕內擊錚)을 비롯해 국왕의 행행(行幸) 때 어가 앞에서 행하는 위내격쟁(衛內擊錚)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행하는 위외격쟁(衛外擊錚)이 그것이다. 위외격쟁은 꽹과리 등을 치는 방식 이외에도 커다란 나뭇가지 끝에다 글자를 크게 써서 국왕의 눈에 뜨이게 하거나 크게 소리를 지르는 방식 등이 동원되었다.
하층민과 지방민들에게는 별다른 효용을 갖지 못한 사실과 무관치 않았다.
영조는 격쟁이 급격히 늘어나자 재위 47년(1771)에 원래의 취지를 되살려 창덕궁 남쪽에 신문고를 다시 설치해 민원(民怨)을 수렴코자 했으나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정조는 대민접촉을 강화하면서 격쟁의 범위를 통상적인 사안으로 확대하고 관리의 축소보고를 금지시켰다. 이에 정조 14년(1790)에는 서울에 사는 이안묵(李安默)이 산의 소유문제로 3년 동안 7번이나 격쟁을 행해 큰 물의를 빚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언론삼사가 서민을 위한 언론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치 못한데 따른 것이었다. 여기에는 영정조 때에 들어와 관원들이 상공업의 발달로 인한 이익을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수탈하자 백성들이 스스로 나서 자신들의 권익을 지키고자 한 점도 크게 작용했다.
고종 말기의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는 국가 패망의 위기상황에서 사대부들을 위해 봉사했던 기존의 언론삼사와 하층민의 자구책으로 강구된 격쟁 및 상언이 하나로 결합한 특이한 언론양식으로 볼 수 있다. - 문화재청, 월간문화재사랑, 2008-05-2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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