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언론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 조선시대의 언론기관

Gijuzzang Dream 2008. 6. 3. 02:12

 

 

 

 

 

 바른 정치 구현을 위한 조선시대의 언론기관, 언론 삼사

 

  

‘언론’은 ‘언치논도(言治論道)’의 준말로 바람직한 치도(治道)를 둘러싼 논의를 의미한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조선에도 언론기관이라 지칭할 만한 것들이 있었다고 한다.

성리학을 유일무이한 통치사상으로 채택한 조선조에서는 사간원(司諫院)과 사헌부(司憲府),

홍문관(弘文館) 등 소위 언론삼사(言論三司)가 ‘언치논도’를 전담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본래의 언론기관은 사간원이다.

사간원을 구성하는 간관(諫官)의 기본임무는 제왕의 잘못된 정책 및 언행 등에 대해 직간하는 것이다.

최초의 간관은 전한(前漢) 때 출현한 간대부(諫大夫)로 후한 때 간의대부(諫議大夫)로 개칭되었다.

 

사헌부는 재상을 보좌하는 부승상(副丞相)인 어사대부(御史大夫)에서 출발해

백관에 대한 감찰을 전담하다가 수당(隋唐) 이후 간의대부와 함께 언론기관의 역할을 수행케 되었다.

그러나 조선조 언론의 가장 큰 특징은 성종 때 설치된 홍문관에서 찾을 수 있다.

이는 원래 왕의 경연(經筵)을 전담시키기 위해 발족한 전문적인 연구기관이었다.

학술기관에 해당하는 홍문관이 언론기관의 역할을 수행케 된 것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당초 세종은 태종 때 형성된 공신집단을 견제하기 위해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했다.

세조는 즉위 초 집현전 학사들이 대거 참여한 단종복위 사건이 터지자 이내 집현전을 철폐했다.

이후 성종은 세조 때 형성된 훈구세력을 견제할 생각으로 예문관(藝文館)의 일부 기능을 독립시켜

집현전의 후신인 홍문관을 개설했다.

이때 명분을 중시하는 길재(吉再)의 학통을 이어받은 영남사림(嶺南士林)이 대거 진출했다.

왕권과의 마찰도 개의치 않은 언론삼사


홍문관이 언론기관으로 전환된 것은

왕의 자문에 응하면서 조정(朝政)의 시비를 논하는 와중에 자연스럽게 간언을 행한데 따른 것이었다.

이는 학문연마에 전념하는 홍문관이

성리학 이론에 대해 가장 권위적인 해석을 내릴 수 있었던 사실과 무관치 않았다.

당시 언론삼사가 힘을 합쳐 간쟁하는 것을 ‘삼사합사(三司合司)’,

3개 기관 중 2개 기관이 합사하는 것을 ‘양사합사(兩司合司)’라고 했다.

 

양사합사는 대개 사헌부와 사간원의 합사로 이뤄졌으나

홍문관이 사헌부나 사간원을 대신해 합사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이들 언론삼사의 관원들은 소속기관 및 자신의 선명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적잖이 다투었다.

이는 성리학을 채택한 나라가 지닌 특징이자 한계이기도 했다.
대개 홍문관은 양사합사에도 불구하고 군왕이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마지막으로 나서 삼사합사로 간언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만큼 위세가 높았다.

 

실제로 홍문관의 수장인 대제학(大提學 학술원장)은

사헌부의 수장인 대사헌(大司憲, 감사원장)이 종2품,

사간원 수장인 대사간(大司諫, 국영언론 사장)이 정3품인데 반해 그보다 높은 정2품이었다.

소위 문형(文衡)으로 불린 홍문관 대제학은 사대부들로부터 정승보다 더 큰 존경과 권위를 인정받았다.

당시의 상황에서 군왕이 언론삼사의 의견을 무시하는 것은

곧 스스로 사리에 어두운 암군(暗君) 내지, 간언을 무시하는 무지막지한 폭군(暴君)임을

자인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조선 중기 이후 사대부들이 사색당파로 나누어 싸운 것도

이들 언론삼사를 누가 장악하느냐 하는 문제와 깊은 연관이 있었다.

언론삼사는 왕권을 견제하기 위해 군주와 다투는 것을 본연의 임무로 생각한 까닭에

모든 사안에 개입했다. 이에 성군으로 일컬어진 세종과 성종도 이들과 적잖은 마찰을 빚어야만 했다.

 

성종은 언론삼사가 군주의 재량권인 인사권에까지 간섭하고 나서자 이같이 버럭 화를 내기도 했다.
“지금의 대간을 보면 반드시 들어줄 것을 기대하고 논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지금 한두 명의 대간을 이조의 추천에 의해 외직(外職)에 임명한 것을 놓고

대간이 억측하여 말하고 있다. 이는 임금을 우습게 여기는 것이다.” (성종 24년 7월 30일)


연산군은 즉위 초에 강력한 왕권의 확립을 위해

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신권세력의 발호를 가차 없이 제압했다. 이는 대간들의 기세를 초기에

제압하지 않고는 왕권을 행사하기가 쉽지 않다고 판단한데 따른 것이었다.

 

연산군의 다음 언급이 그 증거이다.
“대간 역시 신하인데 꼭 임금으로 하여금 그 말을 다 듣도록 하는 것이 옳은가.

그렇다면 권력이 위에 있지 않고 대간에 있는 것이다.

나라가 위태로워지는 근원은 권력이 아래로 옮겨지는 데 있다.” (연산군 2년 5월 6일)

서민들을 위한 언론의 통로, 상언과 격쟁


중종반정 이후 조선조는 신권이 왕권을 위압하는 소위 ‘군약신강(君弱臣强)’으로 인해

커다란 병화(兵禍)를 겪어야만 했다.

왜란 당시 명나라 조정이 ‘군약신강’에서 왜란의 원인을 찾은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는 성리학 이론에 기초한 ‘숭문천무(崇文賤武)’ 풍조로 인한 것이었다.

조선조는 ‘숭문천무’로 패망을 자초한 남송(南宋)의 전철을 밟은 셈이다.


언론삼사의 막강한 언론권 행사는 조선조가 끝날 때까지 지속적으로 문제가 되었다.

이는 ‘군약신강’으로 인해 왕권이 극도로 미약해진 상황에서 온갖 대소 사안을 놓고

모든 정파가 갑론을박하는 국론분열 상태가 지속된데 따른 것이었다.

18세기의 실학자 유수원(柳壽垣)은 『우서(迂書)』에서 홍문관의 설치에서 그 원인을 찾은 바 있다.


명분과 선명성을 둘러싼 언론삼사 간의 경쟁은 민생을 피폐케 하는 근인으로 작용했다.

당시 서민들은 자신들의 원억(억울한 일)을 해결키 위해 자구책을 강구해야만 했다.

그 대안으로 나온 것이 바로 상언上言과 격쟁(擊錚)이었다.

상언은 원억의 당사자가 그 내용을 글로 써서 바치면 승정원에서 이를 수합한 뒤

각방 승지의 견해를 덧붙여 보고하는 형식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상언은 횟수가 2회로 제한되어 있는데다 한문으로 본인이 직접 작성해 제출해야 했던 까닭에

문자를 모르는 하층민들은 격쟁을 더 선호했다.


꽹과리와 북을 활용한 격쟁은 비록 형조로 끌려가 형추(刑推)를 받는 신체적 고통이 수반되었으나

횟수의 제한도 없고 글로 써야 하는 부담이 없었던 까닭에 하층민들이 선호했다.

 

격쟁은 16세기에 크게 3가지 형식으로 정착되었다.

직접 대궐 안으로 들어가 국왕에게 호소하는 궐내격쟁(闕內擊錚)을 비롯해

국왕의 행행(行幸) 때 어가 앞에서 행하는 위내격쟁(衛內擊錚)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행하는 위외격쟁(衛外擊錚)이 그것이다.

위외격쟁은 꽹과리 등을 치는 방식 이외에도 커다란 나뭇가지 끝에다 글자를 크게 써서

국왕의 눈에 뜨이게 하거나 크게 소리를 지르는 방식 등이 동원되었다.


원래 격쟁은 조선 전기의 신문고(申聞鼓)가 주로 서울에 거주한 문무 관원의 청원(請願) 도구로 변질돼

하층민과 지방민들에게는 별다른 효용을 갖지 못한 사실과 무관치 않았다.

 

영조는 격쟁이 급격히 늘어나자 재위 47년(1771)에 원래의 취지를 되살려

창덕궁 남쪽에 신문고를 다시 설치해 민원(民怨)을 수렴코자 했으나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정조는 대민접촉을 강화하면서 격쟁의 범위를 통상적인 사안으로 확대하고

관리의 축소보고를 금지시켰다.

이에 정조 14년(1790)에는 서울에 사는 이안묵(李安默)이 산의 소유문제로

3년 동안 7번이나 격쟁을 행해 큰 물의를 빚기도 했다.


상언 및 격쟁의 빈발은

기본적으로 언론삼사가 서민을 위한 언론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치 못한데 따른 것이었다.

여기에는 영정조 때에 들어와 관원들이 상공업의 발달로 인한 이익을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수탈하자

백성들이 스스로 나서 자신들의 권익을 지키고자 한 점도 크게 작용했다.

 

고종 말기의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는 국가 패망의 위기상황에서

사대부들을 위해 봉사했던 기존의 언론삼사와

하층민의 자구책으로 강구된 격쟁 및 상언이 하나로 결합한 특이한 언론양식으로 볼 수 있다.
- 신동준 21세기 정치연구소 소장
- 일러스트, 홍동선

- 문화재청, 월간문화재사랑, 2008-05-29

 

 

 

 

 

 

 

 언론은 공론(公論), 조선 역대 왕들의 언론 정책

널리 말이 통하게 하라 - 세종과 성종

 

언론은 공론이라는 말을 가장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언론 진흥에 앞장섰던 왕은 세종과 성종이다.

 

세종은 상소문을 도승지가 받아서 추려내 올리던 관행을 없애고,

왕에게 직접 언론이 전달되게 했다.

또한 사간원, 사헌부에 이어 집현전도 언론 기능을 하게 했다.

 

성종 역시 세조가 없앤 집현전을 홍문관으로 부활시키는 등

위축된 언론권을 되살리려 애썼다.

이들도 한편 언론이 부담스러웠다.

세종은 날로 건강이 나빠지는데다 사랑하던 왕후까지 잃고 불교에 심취해

궁궐에 내불당을 지으려 했더니, 언론에서 결사반대에 나섰던 것이다.

“전하께서는 도대체 불당 건설 말고는 생각이 없으십니까?”
“그러면 네가 달려가서 직접 불당을 부숴버리지 그러느냐?”
항상 화기애애하던 어전에서 이처럼 막말이 오갈 정도였다.

 

언론의 지나친 간섭 때문에 사냥이나 술자리 한 번 마음 놓고 갖지 못하는 상황도 벌어졌다.
그러나 세종과 성종은 “도대체 바른 정치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고민했고,

그 해답은 “널리 말이 통하게 해야 한다”였다.

 

정승부터 말단 관료까지 거침없이 말할 수 있고, 그 말이 여과 없이 임금의 귀에 들어와야만

지금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이들은 끝까지 언론을 멀리하지 않았다.

특히 세종이 세법을 개혁하는 과정에서 사대부만이 아니라 일반 백성의 의견을 널리 묻고,

훈민정음을 만들어 “누구나 그 뜻을 담아서 펴도록” 한 것은 최고의 언론 진흥 정책이라고 하겠다.


듣기 싫으면 입을 막아라 - 세조와 연산군

세종과 성종의 언론진흥책이 가장 불만이었던 사람들은 그들을 계승한 세조와 연산군이었다.

쿠데타로 왕이 된 세조는 언론이 늘 껄끄러웠다.

게다가 성미가 급하던 그는 사소한 문제에도 한없이 토론을 벌이는

언론의 생태가 못마땅했다.

그래서 사헌부와 사간원을 크게 축소하고, 집현전을 없애 버렸다.

 

세조는 경연마저 폐지해

신하들이 왕에게 직접 말할 기회를 최소화했으며,

집현전 출신 소장파들(사육신)이 그에게 맞서다 몰살된 후에는

아무도 감히 ‘바른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연산군은 본래 정석대로 정치를 하려 했다.

그러나 ‘새파란 젊은이’(19세)가 새로 임금이 되자

‘군기를 잡자’고 작정한 언론은 첫날부터 공세를 퍼부었다.

언론이 앞장선 총파업으로 정부 기능이 마비되는 일이 일 년 중에 거의 절반에 달했다.

이렇게 되자 연산군은 언론에 대해 깊은 불신을 갖는다.

그리고 몇 년 뒤, 사관 김일손이 세조에 대해 무례한 내용을 사초에 적은 사건이 터지자

그것을 기회로 언론을 전면 탄압한다(무오사화).

 

자신감(?)이 생긴 연산군은 다시 생모인 윤씨의 폐비 사건을 들먹이며

언론을 비롯한 신권세력을 대거 숙청한다(갑자사화).

또 사간원과 홍문관은 폐지하고, 사헌부도 이름만 남겨, 언론기관을 아예 없애버린다.

이들의 언론 탄압에 변명의 여지는 일부 있다.

요즘도 흔히 듣는 “언론이 아무 대안도 없이, 비판을 위한 비판을 한다”는 말은

특히 연산군 초기 언론에 맞아떨어졌다.

그러나 권력이 타락하지 않고 자체 정화를 하려면 언론이 필수적이다.

이 점을 무시했던 세조는 공신 집단이 지나치게 커져

그들 앞에 왕도 백성도 기를 못 펴는 상황을 초래했고, 연산군은 스스로의 왕위마저 잃고 말았다.


언론은 나의 힘이다 - 중종과 광해군

훈구파와 사림파가 마지막으로 정면충돌한 것은 중종 때였다.

중종은 반정공신들에게 발목이 잡혀 왕권이 자유롭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언론권을 대폭 키워 공신에 맞서게 한다. 그 대표주자는 조광조였다.

 

극단적 이상주의자였던 조광조는 언론의 힘으로 훈구파의 비리를 탄핵하고,

기득권을 없애는 일에 앞장섰다. 그러나 조광조의 언론은 종종 왕까지도 타깃으로 삼았다.

특히 오랜 전통을 가지며 왕실, 국가의 안녕을 비는 소격서를 “성리학 이념에 맞지 않다”라며

폐지하려 들자, 중종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제대로 된 임금이면 반대하실 리 없습니다”며 줄기차게 밀어붙이는 조광조에게

결국 손을 든다. 손은 들었지만 앙금은 남았고,

그래서 결국 “조광조가 임금조차 능멸하며, 스스로 왕 노릇하려 한다”는 모함을 받아들여

그와 그의 동지들을 제거해 버린다(기묘사화).

사림은 끝내 훈구파를 물리치고 선조대에 집권하는데, 곧바로 당파에 따라 분열한다.

광해군은 이를 이용해 다수파인 서인과 남인에게 고위직을 나눠주고,

자신을 지지하던 소수파 북인에게는 언론을 맡기면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한다.

이이첨, 허균을 중심으로 하는 ‘어용언론’은 서인과 남인 대신들에 맞서 왕을 변호하고,

대신들은 탄핵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 결과 여러 역모 사건에 서인과 남인들을 끌어넣는데 성공, 정권은 북인 일색이 된다.

그러나 언론을 친위세력으로 활용한 뒤끝은 좋지 않았다.

중종은 역으로 언론에게 ‘배신’당하여 스스로 키운 언론을 스스로 탄압했고,

광해군은 어용언론으로 일당독재를 구축한 결과 격렬한 반동에 부딪쳐 정권을 송두리째 잃어버렸다.


언론을 따돌려라 - 숙종과 정조

숙종도 당파 싸움을 이용해 왕권을 강화하려 했다.

그는 한때는 서인, 다음에는 남인 위주의 내각을 만들며 냉온탕을 오갔다.

서인-남인이 서로 갈등, 견제하느라 왕에 대한 공격은 할 틈이 없게 하려는 의도였다.

그 과정에서 언론도 십분 활용되었다.

언론이 정쟁의 도구가 됨으로써 서로 상대 당파를 공격하느라

조정에 바람 잘 날이 없었다. 그래서 겉보기에는 불안한 정치였으나,

숙종은 ‘견제와 균형’을 토대로 안정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언론이라도 때로는 숙종의 비위를 크게 건드렸다.

서인인 김만중이 어전에서 남인 재상을 지나칠 만큼 비하하자, 그를 처벌했다.

그러나 당시 언론을 장악했던 서인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김만중을 옹호하고 왕을 비난하는 상소가 줄을 잇자,

숙종은 “너희들이 언론권만 귀중한 줄 알고, 왕권은 귀중한 줄 모르는구나”하고 분통을 터뜨렸다.

정조는 아예 언론이 손도 발도 못 내밀게 하자는 방침을 세웠다.

어려서부터 비범했던 학문과 문장력을 바탕으로,

정조는 상소가 오면 그 본질은 젖혀두고 마치 선생이 학생 작문을 평가하듯이 일일이 트집을 잡았다.

“이 문장은 뜻이 모호하다…. 이 구절은 고사를 잘못 인용했다….” 이렇게 면박을 당한 언관은

그만 기가 꺾이고, 더 이상 왕 앞에 고개를 바짝 들고 말할 수 없기 마련이었다.


또한 정조는 왕의 고유권한인 인사권으로 언론을 압박했다.

언론기관의 장들은 그야말로 파리 목숨이었다. 평균 재임기간 보름 미만.

오전에 임명된 사람이 오후에 파직되기도 했다.

이렇게 어수선한 상황에서 전열을 가다듬어 정치를 비판할 여유는 없었다.

정조는 “나는 언론권을 최대한 존중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교묘하게 따돌렸던 것이다.
론 기능을 왜곡하거나 언론을 회피한 정권은 끝내 대가를 치렀다.

정조 역시 말년에 “어째서 아무도 나의 개혁을 지지해 주지 않는가”라고 한탄하자

“주상께서 사대부의 기를 꺾고, 의견이 아닌 아첨만 말할 수 있게 하셨기 때문이 아닙니까” 했다.

 

언론은 정치의 동반자다.

정치를 너무 조여 악처가 되어서도 안 되고, 거꾸로 억압당해 시녀가 되어서도 안 된다.

그것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지금 이 시대에도 진리로 남아 있다.
- 함규진 성균관대 국가경영전략연구소 연구원
- 일러스트, 홍동선
- 2008-05-29, 문화재청, 월간문화재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