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금서(禁書)들
조선시대의 금서(禁書)들
금서(禁書)란 특정의 책을 읽거나 팔지 못하게 하는 조치이다. 조선시대에는 통치 이데올로기에 반하는 책이나 민심을 선동하는 책의 유통과 읽기를 금지시켜, 지배체제를 다지는 수법으로 삼았다. 곧 이들 서적에 왕씨가 망하고 이씨가 새 나라를 연다는 글귀를 끊임없이 퍼뜨려 이미지를 조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이씨 조선이 건국한 뒤에는 다른 현상이 일어났다. 곧 이씨가 망한 뒤 정씨가 새 왕조를 연다는 글귀들이 비기에 나타난 것이다. 비기는 한 마디로 말해 운명예정설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
태종은 “도참 술수의 책은 혹세무민하는 가장 나쁜 것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마땅히 먼저 이것을 없애야 한다”고 표명했다. 이들 서적을 보관한 백성은 관가에 바치게 하고 관가에서는 이를 모아 모조리 불태우게 했다. 또 이를 보관하고도 신고하지 아니한 자는 요서(妖書)의 규정에 따라 엄하게 처벌하고 자진해 바치는 자에게는 후한 상을 내리게 했다. 오히려 꾸준히 베껴서 은밀하게 돌려읽었다. 조선 후기에는 단순하게 정씨 왕조설이나 10승지설 등만이 아니라 새 세상이 전개되면, 양반과 상놈, 부자와 가난뱅이, 상전과 종, 적자와 서자의 자리가 바뀌고 심지어 여성이 남성보다 우위의 처지에서 살게 된다는 내용들이 삽입되었다. 이들 서적 속에 ‘정감록’이 가장 유행을 타서 비기의 대표처럼 알려졌으며 금서 1호의 목록에 들었다. 이들 관련 서적을 법령 등을 통해 전면적으로 금지한 적은 없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 ‘정감록’과 비슷한 미륵신앙이 출현하자 이들 관련 서적이 한때 금서로 지목되었다. 하지만 교조적 유림들이 배척하는 수준이었다. 양명학은 “지식과 실천을 일치시키고(知行合一), 알기만 하는 것은 아무 쓸모가 없고 실천이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이론은 특히 조선 후기에 통치철학으로 굳어진 관념론적 주자학에 반대되는 개념이었다. 그리하여 ‘전습록’(傳習錄) 등의 관련 서적이 금서로 지목되었다. 송시열 계열의 유림과 집권 노론세력에 의해 배척당했으나 국가통제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한편 ‘홍길동전’과 같은 소설류도 사회혼란을 조장하고 지배 이데올로기에 저촉된다고 하여 배척되었으며 역적으로 몰린 인사의 저작물도 같은 대우를 받았다. ‘천주실의’(天主實義) 등 천주교 관련 서적이 베이징을 통해 들어왔다. 윤지충이 신주를 불태운 진산사건이 일어난 뒤 천주교 관련 서적은 인륜을 저버린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사설(邪說)이라 하여 금서로 지목되었다. 포교들이 천주교 신자의 집을 수색하여 십자가나 마리아의 초상과 함께 이들 서적을 찾아내면 어김없이 불태우게 하고 역적의 율로 다스렸다. 천주교 관련 금서는 적어도 70여년간 계속되었다가 개항이후 차츰 해제되었다. 동학의 내용이 검결(劍訣) 등에서 보이는 대로 민중 변혁을 선동하고 전통적 양반 · 상놈의 신분제를 거부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최시형에 의해 ‘동경대전’(東經大典)과 ‘용담유사’(龍潭遺詞)가 간행된 뒤 동학교도들이 이들 서적을 비밀스럽게 간직하고 읽었다. 하지만 동학교도의 집을 수색해 이들 서적과 부적 등이 발견되면 역적의 율로 다스렸고 어김없이 불에 태워졌다. 한국통감부의 입김에 놀아난 대한제국의 친일파들이 ‘금수회의록’ 등 13종의 책을 금서로 지정했다. 1910년 11월 일제 당국은 대대적인 금서령을 발동했다. 전기로는 신채호의 ‘을지문덕전’ 등, 교과서로는 장지연의 ‘여자독본’ 등, 논설문으로는 최학소의 ‘남녀평등론’ 등, 가사로는 윤치호의 ‘찬미가’ 등, 번역서로는 중국 양계초의 ‘음빙실문집’ 등이 포함되었다. 단순하게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우리나라 역사를 소개한 글만이 아니었다. 서양의 영걸스런 인물을 통해 민족의식과 독립정신을 고취한 내용이나 식민지 정책을 배격하는 논조를 깐 소설이나 가사까지 포함시켰던 것이다. 더욱이 일본군의 만행을 적은 임진왜란 관련 서적도 포함시켰다. 치안유지법 또는 출판법 위반 명목으로 발매금지조치를 내렸다. 그리하여 원천적으로 출판이 봉쇄되었으며 설령 출판을 한다하더라도 한번 발매금지처분을 받으면 망하는 지경이었다. 해외로 망명한 민족독립운동가의 저작물들, 사회주의를 소개한 서적들, 우리말 관련의 글과 언문으로 된 민요 · 악보, 무궁화 태극기 애국가와 풍속 관련 글도 포함시켰다. (월간 신동아 1977년 부록 ‘일정하의 금서 33권’ 참고) 민족의식을 깡그리 말살하려는 사상통제였으며 사회주의와 외국의 영웅전기 또는 서양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멸망한 나라의 역사들은 읽을 수도 알 수도 없었다. 완전히 식민지 백성을 황도정신과 파시즘으로 무장시켜 맹목적 복종을 강요키 위한 조치였다. 금서와 관련된 서적이 발견되면 어김없이 관계 법령에 걸어 처벌했다. 그런 탓으로 학생들은 비밀스럽게 독서회를 만들어 금서를 구해 읽으면서 토론을 벌였다. 해방 뒤 역대 독재정권은 체제유지를 위해 일제의 수법을 그대로 써먹어 무수한 금서를 남발했다. 언론인이자 한국사학자, 독립지사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또 두 사람은 1910년 같은 시기에 연해주 등지로 망명한 뒤 상하이를 활동거점으로 삼았으며 비슷한 시기에 사망했다. 논설을 쓰고 경영에 참여하기도 했다. 신채호 역시 박은식의 후배로서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에 참여해 피를 토하듯 애국 논설을 썼다. 스위스가 외국의 압제에서 벗어나 독립국가를 건설한다는 내용의 정치소설이다. 잡지 ‘소년’에 쓴 ‘왕양명실기’(1910년)는 지식인들이 양명학의 실천적 행동으로 구국운동에 나서야 한다는 요지를 담았다. 일제 당국은 이 두 글을 압수하고 ‘소년’의 발행을 금지시켰다. 1920년에는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펴냈다. 두 책은 많은 독립지사들이 읽었으며 은밀하게 국내로 흘러들어왔다. 일제 당국은 1927년 이 책들도 금서로 지정해 읽지 못하게 했다. 이어 ‘을지문덕전’과 최영의 전기인 ‘동국거걸 최도통전’, 충무공의 전기인 ‘이순신전’을 잇따라 발표했다. 이 글들은 1910년 일제 당국에 의해 금서로 지정되었다. 그는 특히 1922년 의열단 선언문으로 집필한 ‘조선혁명선언’에서 “조선민족의 생존을 유지하려면 조선총독과 일본 천황과 그 모든 관공리, 일제의 탐정노와 매국적들과 적의 일체의 시설에 대해 암살 파괴 폭동으로 일제를 구축하자” 고 외쳤다. 그는 복역하면서 동아일보에 ‘조선사연구초’, 조선일보에 ‘조선상고사’와 ‘조선상고문화사’를 연재했다. 그는 이 글들에서도 고대 우리 민족의 기상과 위대함을 강조했으며 사대와 노예 근성을 불식해야 한다고 질타했다. 그러나 그는 원고를 끝내지 못하고 옥사하고 말았다. 일제 당국은 두 역사학자의 글이 나올 때마다 금서로 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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