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학자 - 김영
독보적인 천문학자 김영(金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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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교환교수로 1년간 머물고 있는 이곳 대만의 정치대학교에는 주인 없는 개들이 유난히 많다. 이놈들은 보통 두세 마리나 서너 마리 씩 떼를 지어다니다가 따뜻한 볕을 찾아 배를 깔고 누워 자는 것이 일인데, 밥 때가 되면 식당 근처나 쓰레기통 주변을 기웃거리며 끼니를 해결한다. 지난 몇 개월 간 관찰해보니, 이 개들에게도 이른바 구역이란 것이 있어서 남의 영역을 침범하는 일은 좀체로 없다. 구역마다에는 으레 두목 격의 개가 한 마리씩 있다. 상경대학 주변에 있는 개들이 덩치가 제일 크고 무리도 많은 편인데, 이곳은 구내식당과 인접해 있고, 학생들이 제 먹다 남은 음식을 종종 가져다 주므로 굶을 일이 없는 곳이다. 이곳의 대장은 덩치가 큰 검은 점박이이다. 녀석은 언제나 서너 마리의 부하들을 이끌고 다니는데, 먹을 것이 생겨도 부하들은 결코 먼저 입을 대지 않는다. 간혹 영문을 모르는 신참내기 개가 주변을 기웃거리다가는 대번에 부하들에게 물어 뜯겨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기 일쑤다. 학교에 한번씩 때아닌 자지러진 개의 비명소리가 들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내 연구실이 있는 외국어문학부 건물 주변은 다리가 짧은 엷은 밤색개의 관할구역이다. 검은 점박이와는 달리 녀석은 부하를 거느리는 법 없이 혼자 다닌다. 아침마다 제 구역을 한바퀴씩 시찰하는 모양인데, 녀석이 짧은 다리로 한참 폼을 잡고 걸어갈 때 차가 옆을 지나갈라치면 물어뜯을 듯 짖어대며 자동차를 향해 덤벼드는 모습을 가끔 볼 수 있다. 녀석의 호전적 성격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보는 사람이 적을 때는 절대로 그러지 않는 것도 특기할만 하다. 먹을 것이 신통찮은 후문 어귀나 후미진 신문관 쪽은 으레 힘없어 쫓겨난 흉터투성이 개들의 차지가 된다. 간혹 거기서도 어떤 위계질서 같은 것을 보게 되는 경우가 있어 실소를 금치 못할 때가 있다. 저는 손 하나 까딱 않고 부하들만 시키는 검은 점박이나, 일일이 제가 다 챙기고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밤색 짧은 다리, 그 밑에서 NO 2나 NO 3를 다투며 충성을 경쟁하는 부하들, 또는 공연히 멋모르고 주위를 서성대다가 아닌 이빨에 제 살을 뜯기고 마는 신참내기, 아니면 아예 눈에 뜨이지 않는 후미진 곳에서 굶주림을 감내하고 있는 상처 입은 개들. 이곳 개들의 사회도 사람 사는 세상의 축소판이란 느낌이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나는 여기에 싸움 잘하는 한국의 진돗개나 풍산개 한 마리를 풀어 놓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강의실을 오가곤 했다.
지난 해 11월 지구촌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자자리 유성우(流星雨)의 장관을 TV화면으로 보다가, 나는 전혀 엉뚱하게도 학교의 개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혜성처럼 나타났다가 유성처럼 사라져버린 조선 후기 한 천문학자의 서글픈 초상이 그 위에 포개져서 떠오른 적이 있었다.
김영(金泳, 1749-1817), 내가 그와 처음 만난 것은 연세대학교 도서관이 유일본으로 소장하고 있는 항해(沆瀣) 홍길주(洪吉周, 1786-1841)의 문집에 대한 해제를 청탁받아 쓰면서였다. 벌써 10년 저쪽의 일이다.
홍길주의 문집은 3종 36권 17책으로, 당시 조선 후기 지식인들의 고양된 문화 역량을 한 눈에 볼 수 있게 해주는 방대호한한 저작이다. 그 가운데 나를 특히 애먹였던 것은 도무지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는 〈기하신설(幾何新說)>과 〈기하잡쇄보(幾何雜碎補)〉〈호각연례(弧角演例)>와 같은 기하학 관련 저술이었다.
자술(自述)에 따르면 그는 7,8세 때 기하학을 배우기 시작해서 12세 때는 이미 연립방정식의 해법 및 평방근과 입방근의 풀이, 피타고라스의 정리 등을 완전히 해득했을 만큼 수학과 기하학에 깊은 조예를 지니고 있었다. 특히 그의 〈호각연례>는 황도와 백도 상 해와 달의 운행을 예측한 것으로, 유클리트의 평면기하학을 넘어선 구면삼각법(球面三角法)의 난해한 이론을 소화하여 천문학에 활용한 것이다. 중국의 《역상고성(曆象考成)》을 보고, 그 내용이 너무 소략하여 이해하기 어려움을 안타깝게 여겨 이를 부연하고 도면으로 풀이한 내용이다.
29세 나던 해(1814)에 착수하여 23년 뒤인 52세 때(1837)에야 완성을 본 한국 과학기술사에서 간과치 못할 특이한 저술이다. 비록 아직 한번도 학계의 주목을 받지 못한 듯 하지만 말이다. 홍길주는 〈호각연례>를 완성한 후 바로 김영에게 보여줄 생각이었으나, 불행히 그가 세상을 뜨는 바람에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을 못내 애석해 했다. 그의 문집에는 어린 시절 자신에게 기하학을 가르쳐 준 스승이기도 했던 김영의 일생을 간략히 정리한 〈김영전(金泳傳)〉이 실려 있다. 이 전기에 따르면, 그는 인천 사람이었고 신분은 미천했다. 용모 또한 꾀죄죄했고, 말은 어눌하여 알아 들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역상산수(曆象算數)의 학(學)에 있어서는 신수(神授)라 할만큼 독보의 조예가 있었다. 그의 학문은 스승 없이 《기하원본(幾何原本)》 1책을 독학해서 익힌 것이 고작이었다. 이에 흥미를 느낀 그는 향후 15,6년간 역상에 더욱 침잠몰두하여 마침내 남들이 넘볼 수 없는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각신(閣臣) 서호수(徐浩修, 1736-1799)는 산학으로 당대에 가장 이름이 높았다. 당시 그는 오늘날 기상대와 천문대의 기능을 아우르고 있던 서운관(書雲館), 즉 관상감(觀象監)의 제거(提擧)로 있었다. 김영의 소문을 듣고 그를 불러 몇 마디 말을 나누어 본 서호수는 대번에 당대 으뜸으로 자부하던 자신의 실력이 그에게는 결코 미칠 수 없음을 알았다. 이에 서호수는 관상감의 책임자로 있던 홍길주의 조부 홍락성(洪樂性, 1718-1798)에게 김영을 추천하였고, 마침내 김영은 관상감에 기용될 수 있었다. 김영이 당대 쟁쟁한 벌열이었던 홍씨 집안과 서씨 집안에 드나들게 된 것은 이런저런 얽히고 설킨 인연이 있었다. 홍길주의 어머니 영수각(令壽閣) 서씨(徐氏)만 해도 《주학계몽(籌學啓蒙)》에서 평분(平分), 약분(約分), 정부(正負), 구고(句股)에 대한 설명이 번잡하여 어려운 것을 보고 스스로 계산법을 창안하기까지 했을 정도로 수학에 대한 조예가 깊었다. 홍길주의 문집에 대한 해제를 쓴 뒤, 김영에 대한 기억이 차츰 희미해져 갈 무렵, 나는 다시 한번 김영과 대면할 기회를 가졌다. 어느날엔가 서호수의 아들인 서유본(徐有本, 1762-1822)의 《좌소산인문집(左蘇山人文集)》을 보다가 또 한편의 그의 전기인 〈김인의영가전(金引儀泳家傳)>과, 그가 김영에게 보낸 두 통의 편지를 찾아냈던 것이다.
그나마 그의 문집은 국내에는 없고 일본에만 있는 것을 이우성 선생께서 복사해와 소개함으로써 비로소 알려진 책이었다. 특히 서유본의 전기는 홍길주의 것보다 훨씬 더 상세해, 이 글을 읽고는 김영이란 인물에 대한 느낌이 보다 실감있게 다가왔다. 이 일이 있고 나서 나는 자꾸 그가 나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려주고 싶어 한다는 느낌을 가졌다. 이후에도 《이항견문록(里巷見聞錄)》과 《조선왕조실록》에 그와 관련된 기록이 있는 것을 확인했다.
서유본의 전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그의 이름은 영(泳)이요 자는 계함(季涵)이니 김해 사람이다. 아비는 아무이고 조부는 아무이다. 대대로 농사를 지었는데, 그는 어려서 고아가 되어 가난해 의지할 곳이 없게 되자, 이리저리 떠돌다 서울로 왔다. 사람됨이 성글고 고집불통인데다 기질(氣疾)이 있었다. 키는 후리하게 크고 얼굴은 야위었으나 두 눈동자는 반짝반짝 빛났다.
서유본은 그를 김해 사람이라고 했고, 홍길주는 인천 사람, 《이항견문록》에는 또 영남 사람으로 적혀 있다. 이로 보아 그는 출신조차 분명찮은 미천한 신분이었던 듯 하다. 여기에 홍길주의 기록까지 더하면 비쩍 마른 꾀죄죄한 용모에 후리후리한 키, 성깔 있고 고집 있게 생겼으되, 말은 어눌하여 우물대기만 하는 괴퍅한 성격의 한 사내의 모습이 우리 앞에 떠오른다. 기질(氣疾)이 있다고 했는데, 《이항견문록》에는 그가 젊은 시절 산술에 통달하고도 본원(本源)의 깨달음에는 이르지 못함을 안타까이 여겨 여러 해 고심진력하느라, 마침내 유울지질(幽鬱之疾)을 앓아 여러번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었다고 적고 있다. 이로 보아, 상당히 심각한 우울증 증세도 앓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성격이 남과 잘 어울리지 못했고, 남과 교통이 없는 폐쇄적인 상황 속에서 공부하다 모르는 것이 있어도 물어볼 스승조차 없는 답답함이 종내는 그에게 히스테리 발작 증세까지 안겨 주었던 모양이다. 그가 세상의 인정을 받게 된 것은 1789년의 천역(遷役), 즉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현륭원(顯隆園)을 수원 화산으로 이장할 당시였다. 그 전 해에도 일식(日食)의 도수가 북경과 큰 차이를 보이자 김영이 들어가 그 원인을 규명한 일이 있었다.
해 뜰 무렵이나 해 질 무렵 정남방에 보이는 별인 중성(中星)의 위치를 측정한 지 50년이 지난지라 별자리의 위치가 거의 1도 이상 어긋나 있었고, 해시계와 물시계의 시간이 실제와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었으므로, 관상감사(觀象監事) 김익(金익)이 김영을 천거하여 그로 하여금 새로 적도경위의(赤道經緯儀)와 지평일구(地平日晷) 등을 만들게 했다.
이때 김영은 이들 의기(儀器)와 함께《신법중성기(新法中星記)》와 《누주통의(漏籌通義)》를 편찬하여 바쳤다. 이것으로 중성을 관측하여 올바른 시간을 추산해 천역의 일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이때 일은 《조선왕조실록》 정조 13년 8월 21일자 기록에도 자세히 나와 있다. 김영은 이 공로를 인정받아 특례로 역관(曆官)에 발탁되었다. 그의 나이 41세 때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전문직이었던 관상감에는 과거 시험을 통하지 않고 특례로 발탁된 전례가 없었다. 정조가 특명으로 그에게 벼슬을 내리면서 "김영과 같이 재주가 뛰어난 사람은 상례에 따를 수 없다"고 하자, 관상감의 관리들은 모두 그를 시기하여 "이는 우리 관규를 무너뜨리는 것이다"라고 하며 격렬히 반발하였다. 그러나 정조는 이들의 반발을 무시하고, 그를 역관에 임명했을 뿐 아니라 아예 관상감의 관원들을 그에게 나아가 배우게 하였다. 그들은 매번 추보(推步)의 일이 있을 때마다 김영에게 묻지 않고서는 위로 보고조차 할 수 없었다. 출신도 불분명한 미천한 농군의 아들이 과거도 거치지 않고 관상감에 관직을 얻은 것은 조선조를 통털어 달리 전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일이다. 이후 그는 종6품의 사재감직장(司宰監直長), 통례원인의(通禮院引儀) 등의 벼슬을 거쳤다. 다른 일을 하면서도 역관의 일은 늘 겸임하였다. 나라에 성력(星曆)과 관련된 큰 논의, 즉 일식이 있거나 혜성이 나타나면 그는 관상감에 불려 들어가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의 능력은 다른 이의 추종을 불허할만큼 탁월하였다. 그의 계산은 역상 서적상의 오자까지도 정확히 잡아낼 정도였다. 정조가 승하하고 그의 후원자였던 서호수 마저 세상을 뜨자, 주변머리 없던 그는 달리 청탁할 데도 없고, 그럴 마음도 없어 그만 벼슬에서 쫓겨나고 만다. 그러나 1807년 혜성이 나타나더니 1811년 다시 큰 혜성이 나타나자, 나라에서 관상감에 명하여 혜성의 운행 도수를 계산해 올리라 했는데, 아무도 이를 할 수 있는 자가 없었으므로 하는 수 없이 김영을 다시 불러 들였다.
또 1813년 겨울에 역법상의 문제로 중국 흠천감(欽天監)에 가 자문을 청할 적에도 관상감에서는 그 외에 달리 적임자가 없었다. 그때 그는 연경에 가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한편으로 《만년력》몇 권을 사가지고 돌아왔다. 이후로 역법 상의 해묵은 문제들이 말끔히 해결되었다. 그러자 관상감원들의 질투는 극에 달했고, 이들은 이제 무서울 것도 없어 거리낌 없이 김영을 못살게 굴었다.
서유본은 이때 일을 이렇게 적고 있다.
그가 관상감에 들어간 뒤 일이 있을 때는 추중을 입었고, 일이 끝나면 그 능력을 질투하여 왁자하게 떼거리로 일어나 그를 괴롭혔다. 혹 여러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면전에다 욕을 하고 주먹으로 때리기까지 하였다.
용렬한 소인배들의 행태가 눈에 선하게 다 보이는 듯 하다. 성깔 있던 그는 더러운 꼴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벼슬을 걷어치고 나와 버렸다. 벼슬을 그만 둔 후 그는 집도 절도 없이 이리저리 떠돌며 아이들 서당 선생 노릇으로 근근히 연명하며 지냈다. 아무도 늙고 병든 그를 기억하지 않았다.
서유본은 "그가 사색 공부에 힘쏟음이 적었으므로 마침내 기질(氣質)이 되고 말았는데, 늙어서는 더욱 심하여졌다"고 적고 있다. 아마도 그는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세상에 대한 환멸을 못이겨 종내는 젊은 날의 우울증 증세가 도져 심각한 지경까지 이르렀던 모양이다. 그는 수학을 공부하다가 자연스레 《주역》에 대한 공부로 관심을 확장시켰다. 40이 훨씬 넘어서야 영의정 김익의 종용으로 장가들었는데, 먹고 살 일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비바람도 가리지 못할 다 부서진 집에서 《주역》연구에 몰두하였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주역선생이라고 불렀다. 《주역》에 대한 경지가 깊어지자, 그는 스스로, "사람이 오래 살아야 백 살인데, 이제부터 내게 30년의 세월만 주어진다면 오히려 깊고 오묘한 이치를 두루 캐어 물리(物理)의 학문을 크게 펼쳐 이 세상을 위해 한 사업을 마련할 수 있을텐데."라고 말하고 있을만큼 제 스스로에 대한 자부도 대단하였다.
서유본의 기록은 이렇게 이어진다.
그가 평소에 몸이 약하고 병을 잘 앓는데다가 알량한 녹(祿)마저 끊어지자 굶주림과 곤궁함이 또 닥쳐왔다. 이따금 호상(湖上)으로 나를 찾아오면 머리를 푹 숙이고 기운도 없이 풀이 죽어 마치 피곤해 꾸벅꾸벅 조으는 사람 같았다. 내가 시험삼아 상수(象數)의 요결(要訣)을 가지고 슬쩍 그를 돋울라치면 문득 눈을 부릅뜨고 손바닥을 쳐가면서 정채가 환하게 사람을 격동시켰다.
요컨대 이 시기 그는 완전히 탈진해 있었던 것이다. 오직 학문만이 그를 버티게 하는 힘이 되었다. 《주역》외에 율려(律呂), 즉 음악 방면에 대해서도 그의 관심은 확장되었는데, 서유본이 그에게 보낸 편지 〈답김생영서(答金生泳書)〉를 보면 상세한 언급이 있다. 혼자서 침잠하는 동안 지적 희열과 성취욕에 빠져 있던 그는 아마 서유본에게 자신이 깨달은 이런저런 사실을 이야기 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 이야기란 것이 주자가 말한 `오십상승(五十相乘)`의 주장이 전혀 근거가 없다거나, 소강절(邵康節)의 주장이 견강부회의 억지 주장이라거나 하는 식으로, 선현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으므로, 서유본은 선현의 말씀을 자신의 얄팍한 지식만으로 그렇게 함부로 말할 수 없다고 근거를 대어 준절히 나무랐던 것이다. 둘 사이에 오간 논의의 시비를 가리는 것은 필자의 능력 밖에 있는 일이나, 서유본이 김영에게 보낸 두 통의 편지는 이러한 지적 성취감에 한창 고무되어있던 만년 김영의 내면을 들여다 보기에는 충분한 자료들이다.
또 서유본은 김영에게 당시 남사고(南師古)의 저작으로 전해지던 《동국분야기(東國分野記)》를 보완해 여지도(輿地圖)에 따라 성수(星宿)의 분야를 재배열하여 한 권의 완성된 책을 만들어 볼 것을 권면하기도 했다. 그만큼 그는 김영을 아꼈다. 김영은 자신이 공부한 것을 〈역설(易說)>과 〈악률설(樂律說)>로 정리해 두었다. 이밖에도 《역상계몽(易象啓蒙)》·《기삼백해(朞三百解)》·《도교전의(道敎全議)》· 《관물유약(觀物유약)》 등의 저술을 남겼다고 하나 지금 전하는 것은 없다.
관상감에 있는 동안 많은 편찬 사업이 있었는데, 《국조역상고(國朝曆象考)》와 《칠정보법(七政步法)》등은 그가 중심이 되어 작업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지금 그의 이름은 이 책의 맨 끄트머리에 실무 기사의 한 사람으로 올라 있을 뿐이다. 다만 그가 만든 적도경위의와 지평일구만은 관상감에 보존되어 지금까지 전해진다. 세상을 뜨기 직전 그 처절한 가난 속에서도 그는 자신의 학문을 저술로 남길 것을 권하는 서유본에게, 서양의 양법(量法)과 시학(視學)을 실용화하고, 불편한 용미거(龍尾車) 대신 편리한 용골거(龍骨車)의 기아(機牙) 도설을 완성해 수리와 농공에 보탬이 되게 하며, 자명종과 시계의 도설(圖說)을 정리해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있게 하는 것, 이 네 가지를 필생의 사업으로 알고 민생에 작은 보탬이라도 되고자 밤낮 힘쏟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다만 시간이 넉넉치 않음을 안타까워 했다. 수학에서 출발한 그의 관심은 죽기 직전까지도 천문과 역법, 주역과 악률, 그리고 서구의 자연과학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탐구욕으로 확산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를 미처 탈고하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죽기 전 그는 어린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초해 둔 난고(亂稿)가 상자에 가득한데, 반드시 훗날 책을 이루어 내려 했으나 이제는 글렀구나. 내 죽은 뒤에 삼가 다른 사람에게 주지 말고, 가서 삼호(三湖)의 서유본에게 전하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그의 부고를 들은 서유본이 그 집에 사람을 보냈을 때, 그의 원고가 가득차 있던 책 상자는 관상감의 생도가 이미 훔쳐가버린 뒤였다. 이미 그의 연구를 도적질하려고 호시탐탐 노리던 손길이 있었다. 살았을 때 면전에서 그를 욕하고, 주먹을 휘두르던 자들이었다. 그래서 그 필생의 저작들은 보아도 무슨 소린지도 모를 자들의 손에 들어가 오유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는 아들 하나와 딸 둘을 두었다고 했다. 워낙에 늦은 결혼이었으므로 그가 세상을 떴을 때 모두 어린 나이였다.
홍길주는 〈김영전〉에서 "어린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유락(流落)하여 간 곳을 알지 못한다 한다"고 적고 있다. 그가 죽자 식솔들마저 유리걸식하며 뿔뿔히 흩어져 갔던 것이다. 그의 죽음에 대한 기록은 차이가 있다. 《이항견문록》에서는 을해년, 즉 1815년 봄에 곤궁 속에 굶어 죽었다고 적었다. 서유본은 그 보다 두 해 뒤인 1817년에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고 했다. 년도는 서유본의 기록에 더 신뢰가 가지만, 굶어 죽었다는 《이항견문록》의 기록이 마음에 맺힌다. 학문의 성취가 높아질수록 주변의 질시는 높아만 갔다. 그는 세상에 버림받은 채 학문에만 몰두하다가 평생을 따라다니던 곤궁을 떨치지 못하고 굶어 죽었다. 언젠가 한 번은 대학 본관 앞에서 나는 참혹한 형상의 개 한 마리를 만난 적이 있다. 목 둘레가 온통 피투성이였는데, 숨 쉬는 것조차 힘이 든 듯 숨을 쉴 때마다 목에서 쇳소리가 났다. 보아하니 아마 어릴 때 주인을 잃은 개로, 집을 나온 후 몸집은 커가는데 목줄은 그대로 있어 서서히 숨통을 조여오자 제깐엔 그것을 풀어보려고 몸부림을 쳤던 모양이다. 이제 목줄은 살 속 깊이 박혔고, 목 둘레는 온통 벌겋게 피로 물들어 있어 참혹해서 차마 손을 댈 수조차 없었다. 그는 이제 숨쉴 기력도 없이, 다른 개들의 텃세를 피해 학교 구석진 곳만을 골라 맴도는 것이다. 녀석은 제 몸이 커갈수록 점점더 죄어오는 고삐의 질곡을 괴로워 하다 그렇게 세상을 마쳤으리라. 세상은 재주 있는 자를 결코 사랑하지 않는다.
홍길주는〈김영전〉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능력 있는 사람이 손가락질을 당하는 세상, 모자란 것들이 작당을 지어 욕을 하고 주먹질을 해대는 사회, 그리고는 슬쩍 남의 것을 훔쳐다가 제것인양 속이는 세상은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나는 그날 밤 하늘을 휘황하게 수놓고 사라져버린 유성을 보다가, 자꾸만 어느 보이지 않는 그늘 아래서 피투성이인 채로 죽어갔을 그 개를 생각했다. 사자자리 유성우의 최초 관측 보고는 김영이 51세 나던 1799년 11월에 미국에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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