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세에 길이 남을 위인들에게는 항상 엄격하지만 곧은 품성의 어머니가 있었다.
우리에게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라는 시조로 잘 알려진
약천 남구만 선생에게도 본(本)이 되는 모친 안동 권씨가 있었다.
남구만 선생의 문예 업적은 안동 권씨로부터 대물림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명한 아내 안동 권씨
모친 안동 권씨는 명망 있는 사대부 집안에 태어난 규수로 어려서부터 단아하고 총명하여 권씨의 부친으로부터 남다른 총애를 받으며 성장했다.
조선시대에 여성 직분인 길쌈 같은 일 이외에도 남자 형제들이 독서하는 것을 익숙히 듣고 경전의 큰 뜻을 이해, 문예적 재질도 뛰어났다.
이에 권씨의 부친은 "딸아이는 반드시 어진 사람을 보필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권씨는 나이 열 여섯에 남구만 선생의 부친과 결혼, 시댁에서는 한 가문의 전체가 경사로 여기면서 아름다운 며느리를 얻었다며 기뻐했다.
권씨의 남편은 일찍부터 문예에 숙성하여 향시에 여러 차례 높은 등급으로 합격한 젊은 인재였다.
남편은 20세 되던 해 병자호란과 정축호란을 만나 가족들을 데리고 시골로(현재의 강원도 홍성군) 내려갔다.
이때, 안동 권씨가 남편에게 "교리 오달제는 서방님의 매제요, 필선 정뇌경은 서방님의 이종형님인데,
모두가 서방님의 비슷한 연령들이지만 문과에 높은 등급으로 합격하여 벼슬길에 올라서
남들이 부러워하고, 사모하는 바가 되었으나 처한 시대가 평탄하지 못하여
두 분 모두 비참한 화란을 당했습니다." 라고 말하며,
벼슬에 마음을 두고 있는 남편에게 덕을 좇기를 바란다며 과거공부를 만류했다.
칠순의 나이에도 흔들리지 않은 엄격함
안동 권씨는 두 아우가 일찍 죽고 홀로 남겨진 남구만 선생이 가련했지만
글을 배우는 과정에서는 매우 엄격했다.
남구만 선생이 게으르고 미련하여 더러 글 외우기에 익숙치 못하면 매를 때리는 데
피가 흘러도 용서해 주지 않았다. 이런 안동 권씨의 엄격한 가르침에
남구만 선생은 배우기를 귀하게 여겨 훗날 주요 관직에 올라 갈 수가 있었다.
남구만 선생이 벼슬 반열에 올라 있을 때,
인물들의 진퇴나 득실에 대해 옳고 그름은 정확히 하고 바른 길로 가기를 항시 가르쳐 주었다.
이에 선생도 항상 조심스럽게 안동 권씨의 뜻을 따랐고 주위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 있었으며,
안동 권씨 또한 아들이 정치를 잘 한다는 소리를 듣는데 흠집이 없게 하였다.
그러나 숙종 1년(1675) 남구만 선생은 올바른 권위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려
모친과 함께 낙향해야 했다. 집안 살림이 궁색하여 입에 풀칠하기 어려웠던 이때에
권씨는 칠순이 다 된 나이에도 손에서 부업을 놓지 않고,
집안사람들을 단단히 타일러 정돈시키는 강인함을 보여 주었다.
이런 든든한 모친 덕에 남구만 선생은 누명에서 벗어나 임금의 부름을 다시 받고 벼슬길에 올랐다.
가문의 영광의 원조
안동 권씨의 엄중하고 절도 있는 교육을 받은 남구만 선생은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생을 살았지만 ‘동창이 밝았느냐’와 같은 멋진 전원적인 시조를 남겼다.
그의 묘소는 현재 용인시 모현면 갈담리 45번 국도변에 놓여 있다.
안동권씨의 본을 받은 자녀들은 남구만을 비롯 시집간 딸들도 여러 가족으로부터 모범이 되었다.
핏줄은 못 속인다고 했던가? 증손, 외손 모두 주요 관직에 진출, 올바른 권위를 주장했다.
때로는 바른 소리에 죽음을 맞이하기도 귀향 가는 경우도 있었지만,
결국 누명을 벗고 임금으로부터 은혜를 받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안동 권씨의 삶이 현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고달파 보일 수도 있지만,
지금 그리고 훗날에 후회하지 않을 인생임을
그리고 어린 후손들에게 귀감이 되는 인간상으로 기억되는 것만은 틀림없다. ◎ 글/ 변효진 기자
(4) 시아버지를 위해 외아들을 받친 효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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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지만 효성이 지극한 부부의 행복 옛날 용인 땅에는 한 가난한 시골부부가 있었다.
이들에게 가족은 홀로된 시아버지와 외아들뿐이었다.
이들 부부는 비록 가난하였지만 남들이 부러워하는 한가지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부친에 대한 지극한 효성이었다. 물론 시아버지 역시 자식과 손자를 끔찍하게
아껴주었기에 이들 부부의 집안은 항상 행복이 넘쳐났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부역에 나가게 되어 오랫동안 집을 비우게 되었다.
하지만 며느리는 남편이 없는 동안에도 시아버지를 극진히 모셨고,
시아버지 역시 아들을 대신하여 나무를 해서 시장에 내다 팔면서 며느리와 손자를 돌보았다.
며느리는 시아버지가 시장에서 돌아올 때쯤이면 늘 아이를 등에 업고
고갯마루에서 시아버지를 기다리곤 했다.
그런데 하루는 밤이 깊었는데도 웬일인지 시아버지가 돌아오지 않는 것이었다.
아이를 등에 업고 기다리던 며느리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장 쪽을 향해 조금씩 나아가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길을 헤매게 되었다.
한참을 길을 잃고 헤매는 며느리 귀에 어디선가 사람의 비명 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혹시 시아버님이 짐승에게 해를 입고 있는 것은 아닌가?' 며느리는 불길한 생각에 부랴부랴 소리가 나는 곳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자식과 맞바꾼 시아버지의 생명 과연 그곳에서는 시아버지가 호랑이와 피를 흘리면서 싸우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본 며느리는 호랑이를 크게 꾸짖으며 이렇게 말했다. "네가 정말 배가 고파서 그렇다면 내 등에 업힌 아이라도 줄 터이니 우리 시아버님은 해치지 말아라"
그리고는 어린 아들을 호랑이 앞에 내려놓자 호랑이는 아이를 물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목숨은 건졌지만 시아버지는 손자를 잃은 슬픔에 오열을 참지 못하고 애통하며 며느리에게 "나는 이미 늙었으니 죽어도 한이 없을 터인데, 어쩌자고 어린아이를 대신 죽게 하였느냐" 말했다.
그러자 며느리는 "어린아이는 다시 낳을 수도 있으나 부모님은 한 번 돌아가시면 어찌 다시 모실 수 있겠습니까" 하며 마음 상한 시아버지를 오히려 위로하였다.
그 후로 시아버지 역시 자신이 슬퍼하면 오히려 며느리 마음이 더 아플까봐 겉으로는 슬픈 내색을 하지 않았다.
용인의 '부아산'은 바로 이 '부인이 아이를 헤매던 곳'이라는 데서 유래되었으며,
시아버지를 찾아 넘던 고개를 '멱조현'이라고 불렀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요즘 모습을 보면 자식에게는 끔찍할 정도로 잘한다.
하지만 나와 내 생명의 시작인 부모에게는 어떠한가?
용인 '부아산'에 내려오는 이름 없는 한 여인의 이야기를 통해
부모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과 자세를 되돌아보았으면 한다. |
(5) 별처럼 살다가 바람처럼 사라진 여배우 '차홍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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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난 기품과 아름다운 심성을 지닌 기생출신의 여배우 차홍녀(車紅女 : 1919∼1940)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늘 빠지지 않는 것이 '동양극장'이야기다. 이유인즉 그녀는 동양극장 설립 이후 최고 인기배우라는 찬사를 들어왔기 때문이다.
1919년 경기도 동두천에서 태어난 차홍녀는 애초 기생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차홍녀는 극단 신무대(新舞臺)의〈장화홍련전〉에서 홍련역으로 데뷔하면서 여배우의 길을 걷게 된다.
이런 가운데 1935년 평양 출생의 유지 홍순언과 악극단을 이끌던 배구자는 공동으로 서대문구 충정로에 국내 유일의 연극전문극장인 동양극장을 설립한다.
차홍녀는 동양극장 설립과 함께 동양극장 전속극단에 입단한다.
입단 후 최독견(崔獨鵑) 작〈승방비곡>을 시작으로 차홍녀는 수많은 작품에서 조역과 주역으로 활약하였고, 타고난 기품과 아름다운 심성, 그리고 연극에 대한 열정으로 최고의 인기를 독차지하는 주연배우로 성장하게 되었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의 홍도역 차홍녀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춘향전〉과 1936년 여름에 공연된 임선규(林仙圭) 작품, 박진 연출의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이다.
차홍녀는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에서 여주인공 홍도역을 맡았는데
공연이 있는 날은 많은 사람들이 몰려 서대문 근교가 막혀 전차가 못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1939년 가을 , 동양극장의 경영자가 바뀌면서 차홍녀의 인생에도 큰 변화가 생긴다.
차홍녀는 동양극장을 탈퇴하고, 같이 활동한 남자배우 황철 · 양백명 등과 함께 극단 아랑(阿娘)을 조직하여 독자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극단 아랑은 꾸준한 활동 속에서 1940년 2월에는 관북(關北) 및 만주일대 순회공연도 가졌다.
쉴 새 없는 공연과 무리한 지방공연으로 차홍녀는 차츰 건강을 잃게 되었고
결국 한창 인기절정의 22살의 나이에 삶을 마감하게 되었다. 차홍녀의 일생에 대한 이야기는
지난 2001년에 KBS 특별기획 드라마(동양극장)로 제작되어 소개된 바 있다. ◎글: 박효진
(6) 해남 윤씨와 풍산 홍씨 - 다산 정약용의 삶을 이끌어준 두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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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약용의 어머니 해남윤씨 다산 정약용은 1762년(영조 38) 경기도 초부면 마재(현재의 남양주군 조안면 능내리)에서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윤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유년시절을 지도하고 가르친 그의 어머니는 해남 윤씨로, 그녀는 유명한 고산 윤선도의 후손이었다.
아마도 정약용의 천재성은 이런 모친의 혈통을 이어받은 듯 하다.
다산의 고향 마재는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류하고 다시 경안천이 흘러 들어오는 지점으로 풍광이 아름다운 곳이다. 이런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부모의 반듯한 가르침 속에서 정약용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의 모친 해남 윤씨는 중앙관직에 자리잡지 못하고 거의 대부분의 생애를 지방관으로 떠돌던 남편(정재윤)을 따라 다니며 힘든 집안 살림을 이끌었다.
아무런 불평 없이 자신의 뜻을 따라주는 아내 해남윤씨 덕에 정재윤은 정직하고 부지런한 관리로 생을 살았고 이런 삶의 자세를 자식인 정약용에게 물려줄 수 있었다.
또한 남편은 늘 빈곤한 백성을 보살펴야하는 탓에 자녀 교육은 전적으로 해남 윤씨의 몫이었다.
해남 윤씨는 정약용이 아버지를 존경할 수 있도록 늘 이야기 해주면서 정약용이 늘 책을 가까이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덕분에 정약용은 네 살 때 천자문을 떼더니 일곱 살 때는 산술(算術 : 수학)과 역학을 익혔다.
그런데 정약용이 아홉 살 되던 해 그만 해남 윤씨가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와의 이별이 힘들었던 탓일까? 정약용은 그해 마마병을 심하게 앓았다.
다산과 부인 풍산 홍씨와의 부부애 풍산 홍씨(1761-1838)는 그의 나이 열 다섯에 한 살 연하인 다산과 혼인을 하여
일생동안 6남 3녀를 출산하였지만 4남 2녀가 요절하는 아픔을 겪은 여인이다.
더구나 10대 중반의 철없던 나이에 결혼하였지만 남편의 힘든 과거공부와 분주한 벼슬살이로 인해
부부간의 애틋한 정을 제대로 나누지도 못한 채 살았다.
하지만 이 부부는 몸은 떨어져 있으나 마음은 늘 하나였다.
또 다산은 자신의 삶 뒤편에서 힘든 환경 속에서도 늘 불평 없이 꿋꿋하게 자식을 키우고
시부모를 공경하는 아내를 둔 덕분에 유배지에서 훌륭한 책들을 저술할 수 있었다.
풍산 홍씨는 시어머니(다산의 의붓어머니로 다산의 부친 정재원의 4번째 부인)를 모시며
지아비 없는 허전한 집을 지키며 생계를 꾸려 나갔다.
어느 날, 사랑하는 지아비를 강진으로 유배 보내고 자식들을 키우며 그리운 정을 삭이던 홍씨는
누에치기를 좋아하는 자신에게 시를 지어줄 정도로 다정하였던 남편에게
시집올 때 입고 왔던 여섯 폭 다홍치마를 보낸다. 남편에게 힘을 주고자... 10여 년의 유배생활에 몸과 마음이 지쳐있던 다산은 아내의 다홍치마를 보며 위안을 얻고,
그 치마를 재단하여 두 아들에게 교훈의 글을 써주고
외동딸에게는 매화에 새를 그린 매조도(梅鳥圖)를 선물하였다.

남편을 손꼽아 기다리던 고향 마재 마을을 지키던 홍씨 앞에 나타난 남편은
떠날 때의 건장한 모습은 온데 간데 없고 깊이 패인 주름살에 백발이 성성한 초로의 모습이었다. 홍씨는 “나는 그렇다 치더라도 당신만은 덜 늙었기를 바랐다”며
기쁨과 회한의 눈물로 남편을 맞이한다.
그리고 남은 일생을 그의 곁에서 다산의 저술작업을 도왔다.
다산은 부인 홍씨와 결혼 한지 60년(회혼)이 되던 해 부인에게 시를 하나 선물한다.
그리고 이 시를 마지막으로 이 부부는 이승에서의 인연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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