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역사 속의 경기 여성

Gijuzzang Dream 2008. 5. 23. 17:25

 

 

 

 

 

(1) 지극한 내조 펼친 전형적인 한국 여인
- 간재 최규서의 어머니 ‘광산 김씨’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고 모든 벼슬을 두루 역임, 대제학, 판서, 영의정에 이르러

신하로서 최고의 영화를 누린 간재 최규서.

그에 뒤에는 평생을 가정 화목과 절도 있는 생활을 위해 헌신한 어머니 ‘광산 김씨’가 있었다.

천성적인 온화성과 한결같은 마음

광산 김씨는 태어나면서 효도하고 우애하는 정신이 남달랐다.

최석유와 혼인하여 경기도 광주에서 아들 최규서를 얻었다. 시집을 가서도 시부모 섬기기를 친정부모 섬기듯 하였고, 남편 받들기를 한결같이 화평하고 공경스럽게 했다.

남편과 시부모가 아무리 싫은 소리를 해도 말과 얼굴빛을 더욱 부드럽게 하였다.

자식들에게는 어려서부터 어른이 될 때까지 지아비의 뜻을 위배하는 것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시어머니인 남부인이 노령과 쇄한 몸으로 의사표현이 잘 되지 않았을 때도 광산 김씨는 밤낮으로 곁에 있으면서 옷과 이불을 챙겼으며, 한결같은 마음으로 시어머니를 부양했다.
지극 정성으로 효를 행하는 어머니를 보고 자란 최규서 역시 어른에 대한 예우로 덕망 있는 신하가 된 것이 아닐까?

자식 사랑에서도 으뜸인 광산 김씨 
최규서가 지위가 높은 계급에 오르자 항상 넘치리라는 걱정을 하였다.
또 광산김씨가 74세가 되던 해에 최규서가 사신으로 북경에 가야 했을 때도

떠나는 아들을 위해 슬픈 기색 없이

‘네가 이미 녹봉을 먹고 있는데 어떻게 사사로운 정을 돌아보겠느냐. 나 때문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배고프고 목마를까는 염려하지 않을 수가 없겠구나’ 라며 되레 위로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귀감

광산 김씨의 이런 행동들은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여성에게

어쩌면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전형적인 가부장제도 아래 순종하고

자신의 삶을 고스란히 양보하며 사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
하지만 광산김씨가 귀감이 되는 건 부모에 대한 효가 한결같고,

남편과 불화를 불러올 수 있는 상황에서도 오히려 부드러운 이미지를 갖추어

가정의 화목을 도모했다는 점일 것이다.

 

비록 최규서의 어머니란 타이틀로 기억되는 ‘광산 김씨’지만

세상에 어렵게 빛을 발할 만큼 그녀의 후덕함은 오랜 여운을 전할 것이다. ◎ 글/ 변효진 기자

 

 

 

 

 

 

(2) 조국 광복을 위한 것이라면...
- 연미당(1908-1981)
: 엄항섭의 아내


제 85주년 '3.1절'이 다가왔다. 이 땅의 광복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많은 여성들이 있다.

연미당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연미당은 3·1운동 이후 남편인 독립운동가 엄항섭을 따라 중국으로 가

조국 광복을 위해 일평생을 바쳤다.

 

고향을 등지고 낯선 땅으로
경기도 여주 출생인 연미당은 동향인 남편 엄항섭과 결혼하였다.


고려대학교 전신인 보성전문을 졸업한 엄항섭 선생은 1919년 3·1운동 이후 중국(中國)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에 참여하게 된다.

 

고향을 등지고 낯선 이국 땅으로 가야하는 맘이 불안하고 막막하지만 ‘조국광복’을 위한 길이기에 그녀는 서슴치 않고 길을 떠났다.


어찌보면 연미당이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늘 남편 엄항섭의 그늘에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일이 아니기에...

그저 조국이 광복만 된다면 그녀는 그 무엇이든, 그 어떤 자리든 그저 감사할 뿐이다.

 

임시정부를 따라 고된 피란길에 오르고
중국상해에서 남편과 함께 활동하던 1930년 8월,
한인여자청년동맹(韓人女子靑年同盟)이

조직되었을 때 김순애, 김구경, 박영봉 등과 함께 임시위원 중 한사람으로 선출되어

상해 청년여자교민에 대한 조사 및 상해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교민들의 단합을 위해 활동하였다.


그 이듬해 10월 일제의 무력침략으로 발발한 만주사변 이후

상해에 있는 한인 각 단체 대표자회의에서 연미당은

여자청년동맹의 대표로 참석, 배일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던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가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 및 상하이사변 전승기념식이 열리는

훙커우공원[虹口公園]에 들어가 일제 거물급들에게 폭탄을 던지는 의거를 일으킨다.

이를 계기로 일제의 탄압은 날로 포악해졌고 대한민국임시정부도 상해를 떠나야만 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가흥(嘉興) · 진강(鎭江), 남경(南京)을 거쳐 장사(長沙)로 이동할 때마다

연미당은 임시정부 요인들을 수행하며 봉사하였고,

장사에 있는 이운한(李雲漢)의 저격을 받아 중상을 입은 김구(金九)를 정성으로 간호하기도 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1938년 10월에는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원이 되어 선전과 홍보활동에 주력하였고

1943년 2월 중경(重慶)에서는한국애국부인회의 조직부장을 맡아

반일의식을 고취하는 방송을 담당하였다.

1944년에는 중국 국민당 정부와 대한민국임시정부간의 협조로

대적선전위원회를 통해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활동상황을 우리말로 방송하기도 했다.

한편, 1944년 3월, 한국독립당에 입당하여 조국 독립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드디어 1945년 8월 15일, 자신의 눈으로 조국 광복을 바라보는 기쁨을 누렸고,

전쟁과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1남 5녀를 훌륭하게 키웠다.

정부에서는 연미당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특히, 그녀의 큰 딸인 엄기선씨는 3.1 여성동지회 대전지회를 오랫동안 이끌어왔고,

어려운 사람을 위한 <루시모자원>도 운영하였다. ◎ 글/ 변효진 기자

 

 

 

 

 


(3) 약천 남구만의 어머니 “안동 권씨(1610-1680)”
- 흔들리지 않는 엄격함으로 가정을 다스리다 !


후세에 길이 남을 위인들에게는 항상 엄격하지만 곧은 품성의 어머니가 있었다.
우리에게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라는 시조로 잘 알려진

약천 남구만 선생에게도 본(本)이 되는 모친 안동 권씨가 있었다.

남구만 선생의 문예 업적은 안동 권씨로부터 대물림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명한 아내 안동 권씨
모친 안동 권씨는 명망 있는 사대부 집안에 태어난 규수로 어려서부터 단아하고 총명하여 권씨의 부친으로부터 남다른 총애를 받으며 성장했다.

 

조선시대에 여성 직분인 길쌈 같은 일 이외에도 남자 형제들이 독서하는 것을 익숙히 듣고 경전의 큰 뜻을 이해, 문예적 재질도 뛰어났다.

이에 권씨의 부친은 "딸아이는 반드시 어진 사람을 보필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권씨는 나이 열 여섯에 남구만 선생의 부친과 결혼, 시댁에서는 한 가문의 전체가 경사로 여기면서 아름다운 며느리를 얻었다며 기뻐했다.

권씨의 남편은 일찍부터 문예에 숙성하여 향시에 여러 차례 높은 등급으로 합격한 젊은 인재였다.

 

남편은 20세 되던 해 병자호란과 정축호란을 만나 가족들을 데리고 시골로(현재의 강원도 홍성군) 내려갔다.
이때, 안동 권씨가 남편에게 "교리 오달제는 서방님의 매제요, 필선 정뇌경은 서방님의 이종형님인데,

모두가 서방님의 비슷한 연령들이지만 문과에 높은 등급으로 합격하여 벼슬길에 올라서

남들이 부러워하고, 사모하는 바가 되었으나 처한 시대가 평탄하지 못하여

두 분 모두 비참한 화란을 당했습니다." 라고 말하며,

벼슬에 마음을 두고 있는 남편에게 덕을 좇기를 바란다며 과거공부를 만류했다.

 

칠순의 나이에도 흔들리지 않은 엄격함
안동 권씨는 두 아우가 일찍 죽고 홀로 남겨진 남구만 선생이 가련했지만

글을 배우는 과정에서는 매우 엄격했다.

남구만 선생이 게으르고 미련하여 더러 글 외우기에 익숙치 못하면 매를 때리는 데

피가 흘러도 용서해 주지 않았다. 이런 안동 권씨의 엄격한 가르침에

남구만 선생은 배우기를 귀하게 여겨 훗날 주요 관직에 올라 갈 수가 있었다.

남구만 선생이 벼슬 반열에 올라 있을 때,

인물들의 진퇴나 득실에 대해 옳고 그름은 정확히 하고 바른 길로 가기를 항시 가르쳐 주었다.

이에 선생도 항상 조심스럽게 안동 권씨의 뜻을 따랐고 주위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 있었으며,

안동 권씨 또한 아들이 정치를 잘 한다는 소리를 듣는데 흠집이 없게 하였다.

그러나 숙종 1년(1675) 남구만 선생은 올바른 권위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려

모친과 함께 낙향해야 했다. 집안 살림이 궁색하여 입에 풀칠하기 어려웠던 이때에

권씨는 칠순이 다 된 나이에도 손에서 부업을 놓지 않고,

집안사람들을 단단히 타일러 정돈시키는 강인함을 보여 주었다.

이런 든든한 모친 덕에 남구만 선생은 누명에서 벗어나 임금의 부름을 다시 받고 벼슬길에 올랐다.

 

가문의 영광의 원조
안동 권씨의 엄중하고 절도 있는 교육을 받은 남구만 선생은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생을 살았지만 ‘동창이 밝았느냐’와 같은 멋진 전원적인 시조를 남겼다.

그의 묘소는 현재 용인시 모현면 갈담리 45번 국도변에 놓여 있다.

 

안동권씨의 본을 받은 자녀들은 남구만을 비롯 시집간 딸들도 여러 가족으로부터 모범이 되었다.

핏줄은 못 속인다고 했던가? 증손, 외손 모두 주요 관직에 진출, 올바른 권위를 주장했다.

때로는 바른 소리에 죽음을 맞이하기도 귀향 가는 경우도 있었지만,

결국 누명을 벗고 임금으로부터 은혜를 받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안동 권씨의 삶이 현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고달파 보일 수도 있지만,

지금 그리고 훗날에 후회하지 않을 인생임을

그리고 어린 후손들에게 귀감이 되는 인간상으로 기억되는 것만은 틀림없다. ◎ 글/ 변효진 기자

 

 

 

 

 

 

(4) 시아버지를 위해 외아들을 받친 효부 이야기

 

가난하지만 효성이 지극한 부부의 행복
옛날 용인 땅에는 한 가난한 시골부부가 있었다.
이들에게 가족은 홀로된 시아버지와 외아들뿐이었다.
이들 부부는 비록 가난하였지만 남들이 부러워하는 한가지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부친에 대한 지극한 효성이었다. 물론 시아버지 역시 자식과 손자를 끔찍하게
아껴주었기에 이들 부부의 집안은 항상 행복이 넘쳐났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부역에 나가게 되어 오랫동안 집을 비우게 되었다.

하지만 며느리는 남편이 없는 동안에도 시아버지를 극진히 모셨고,

시아버지 역시 아들을 대신하여 나무를 해서 시장에 내다 팔면서 며느리와 손자를 돌보았다.

며느리는 시아버지가 시장에서 돌아올 때쯤이면 늘 아이를 등에 업고

고갯마루에서 시아버지를 기다리곤 했다.

 

그런데 하루는 밤이 깊었는데도 웬일인지 시아버지가 돌아오지 않는 것이었다.

아이를 등에 업고 기다리던 며느리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장 쪽을 향해 조금씩 나아가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길을 헤매게 되었다.

한참을 길을 잃고 헤매는 며느리 귀에 어디선가 사람의 비명 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혹시 시아버님이 짐승에게 해를 입고 있는 것은 아닌가?'
며느리는 불길한 생각에 부랴부랴 소리가 나는 곳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자식과 맞바꾼 시아버지의 생명
과연 그곳에서는 시아버지가 호랑이와 피를 흘리면서 싸우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본 며느리는 호랑이를 크게 꾸짖으며 이렇게 말했다.
"네가 정말 배가 고파서 그렇다면 내 등에 업힌 아이라도 줄 터이니 우리 시아버님은 해치지 말아라"

그리고는 어린 아들을 호랑이 앞에 내려놓자 호랑이는 아이를 물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목숨은 건졌지만 시아버지는 손자를 잃은 슬픔에 오열을 참지 못하고 애통하며 며느리에게 "나는 이미 늙었으니 죽어도 한이 없을 터인데, 어쩌자고 어린아이를 대신 죽게 하였느냐" 말했다.


그러자 며느리는
"어린아이는 다시 낳을 수도 있으나 부모님은 한 번 돌아가시면 어찌 다시 모실 수 있겠습니까" 하며 마음 상한 시아버지를 오히려 위로하였다.

 

그 후로 시아버지 역시 자신이 슬퍼하면 오히려 며느리 마음이 더 아플까봐 겉으로는 슬픈 내색을 하지 않았다.

 

용인의 '부아산'은 바로 이 '부인이 아이를 헤매던 곳'이라는 데서 유래되었으며,

시아버지를 찾아 넘던 고개를 '멱조현'이라고 불렀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요즘 모습을 보면 자식에게는 끔찍할 정도로 잘한다.

하지만 나와 내 생명의 시작인 부모에게는 어떠한가?

용인 '부아산'에 내려오는 이름 없는 한 여인의 이야기를 통해

부모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과 자세를 되돌아보았으면 한다.

 

 

 

 

 

(5) 별처럼 살다가 바람처럼 사라진 여배우 '차홍녀'

 

타고난 기품과 아름다운 심성을 지닌 기생출신의 여배우
차홍녀(車紅女 : 1919∼1940)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늘 빠지지 않는 것이 '동양극장'이야기다. 이유인즉 그녀는 동양극장 설립 이후 최고 인기배우라는 찬사를 들어왔기 때문이다.

1919년 경기도 동두천에서 태어난 차홍녀는 애초 기생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차홍녀는 극단 신무대(新舞臺)의〈장화홍련전〉에서 홍련역으로 데뷔하면서 여배우의 길을 걷게 된다.

이런 가운데 1935년 평양 출생의 유지 홍순언과 악극단을 이끌던 배구자는 공동으로 서대문구 충정로에 국내 유일의 연극전문극장인 동양극장을 설립한다.
차홍녀는 동양극장 설립과 함께 동양극장 전속극단에 입단한다.
입단 후 최독견(崔獨鵑) 작〈승방비곡>을 시작으로 차홍녀는 수많은 작품에서 조역과 주역으로 활약하였고, 타고난 기품과 아름다운 심성, 그리고 연극에 대한 열정으로 최고의 인기를 독차지하는 주연배우로 성장하게 되었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의 홍도역
차홍녀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춘향전〉과 1936년 여름에 공연된 임선규(林仙圭) 작품, 박진 연출의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이다.

 

차홍녀는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에서 여주인공 홍도역을 맡았는데

공연이 있는 날은 많은 사람들이 몰려 서대문 근교가 막혀 전차가 못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1939년 가을 , 동양극장의 경영자가 바뀌면서 차홍녀의 인생에도 큰 변화가 생긴다.


차홍녀는 동양극장을 탈퇴하고, 같이 활동한 남자배우 황철 · 양백명 등과 함께 극단 아랑(阿娘)을 조직하여 독자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극단 아랑은 꾸준한 활동 속에서 1940년 2월에는 관북(關北) 및 만주일대 순회공연도 가졌다.

쉴 새 없는 공연과 무리한 지방공연으로 차홍녀는 차츰 건강을 잃게 되었고

결국 한창 인기절정의 22살의 나이에 삶을 마감하게 되었다.
차홍녀의 일생에 대한 이야기는

지난 2001년에 KBS 특별기획 드라마(동양극장)로 제작되어 소개된 바 있다. ◎글: 박효진

 

 

 

 

 

(6) 해남 윤씨와 풍산 홍씨
- 다산 정약용의 삶을 이끌어준 두 여인


정약용의 어머니 해남윤씨
다산 정약용은 1762년(영조 38) 경기도 초부면 마재(현재의 남양주군 조안면 능내리)에서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윤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유년시절을 지도하고 가르친 그의 어머니는 해남 윤씨로, 그녀는 유명한 고산 윤선도의 후손이었다.
아마도 정약용의 천재성은 이런 모친의 혈통을 이어받은 듯 하다.

다산의 고향 마재는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류하고 다시 경안천이 흘러 들어오는 지점으로 풍광이 아름다운 곳이다. 이런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부모의 반듯한 가르침 속에서 정약용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의 모친 해남 윤씨는 중앙관직에 자리잡지 못하고 거의 대부분의 생애를 지방관으로 떠돌던 남편(정재윤)을 따라 다니며 힘든 집안 살림을 이끌었다.
아무런 불평 없이 자신의 뜻을 따라주는 아내 해남윤씨 덕에 정재윤은 정직하고 부지런한 관리로 생을 살았고 이런 삶의 자세를 자식인 정약용에게 물려줄 수 있었다.
또한 남편은 늘 빈곤한 백성을 보살펴야하는 탓에 자녀 교육은 전적으로 해남 윤씨의 몫이었다.
 
해남 윤씨는 정약용이 아버지를 존경할 수 있도록 늘 이야기 해주면서 정약용이 늘 책을 가까이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덕분에 정약용은 네 살 때 천자문을 떼더니 일곱 살 때는 산술(算術 : 수학)과 역학을 익혔다.
그런데 정약용이 아홉 살 되던 해 그만 해남 윤씨가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와의 이별이 힘들었던 탓일까? 정약용은 그해 마마병을 심하게 앓았다.

 

다산과 부인 풍산 홍씨와의 부부애
풍산 홍씨(1761-1838)는 그의 나이 열 다섯에 한 살 연하인 다산과 혼인을 하여

일생동안 6남 3녀를 출산하였지만 4남 2녀가 요절하는 아픔을 겪은 여인이다.

 

더구나 10대 중반의 철없던 나이에 결혼하였지만 남편의 힘든 과거공부와 분주한 벼슬살이로 인해

부부간의 애틋한 정을 제대로 나누지도 못한 채 살았다.

하지만 이 부부는 몸은 떨어져 있으나 마음은 늘 하나였다.

또 다산은 자신의 삶 뒤편에서 힘든 환경 속에서도 늘 불평 없이 꿋꿋하게 자식을 키우고

시부모를 공경하는 아내를 둔 덕분에 유배지에서 훌륭한 책들을 저술할 수 있었다.

풍산 홍씨는 시어머니(다산의 의붓어머니로 다산의 부친 정재원의 4번째 부인)를 모시며

지아비 없는 허전한 집을 지키며 생계를 꾸려 나갔다.

 

어느 날, 사랑하는 지아비를 강진으로 유배 보내고 자식들을 키우며 그리운 정을 삭이던 홍씨는

누에치기를 좋아하는 자신에게 시를 지어줄 정도로 다정하였던 남편에게

시집올 때 입고 왔던 여섯 폭 다홍치마를 보낸다. 남편에게 힘을 주고자...
10여 년의 유배생활에 몸과 마음이 지쳐있던 다산은 아내의 다홍치마를 보며 위안을 얻고,

그 치마를 재단하여 두 아들에게 교훈의 글을 써주고

외동딸에게는 매화에 새를 그린 매조도(梅鳥圖)를 선물하였다.

 

 

 

 

 

 

 

 

 

남편을 손꼽아 기다리던 고향 마재 마을을 지키던 홍씨 앞에 나타난 남편은

떠날 때의 건장한 모습은 온데 간데 없고 깊이 패인 주름살에 백발이 성성한 초로의 모습이었다.
홍씨는 “나는 그렇다 치더라도 당신만은 덜 늙었기를 바랐다”며

기쁨과 회한의 눈물로 남편을 맞이한다.

그리고 남은 일생을 그의 곁에서 다산의 저술작업을 도왔다.


다산은 부인 홍씨와 결혼 한지 60년(회혼)이 되던 해 부인에게 시를 하나 선물한다.

그리고 이 시를 마지막으로 이 부부는 이승에서의 인연을 마무리한다.






 

 

  

(7) 용서하되 잊지는 말자!
- 제암리에 잠든 두 여인

(강태성 부인 김씨와 홍원식 부인 김씨)

 
꺼지지 않는 독립만세운동 물결
1919년 3·1운동 이후 독립만세운동은 전국으로 퍼져갔다. 경기도 화성 땅도 예외는 아니었다.
3월 30일 제암리를 비롯한 인근의 주민 천 여명은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 만세운동을 벌였다.
발안장날을 이용한 독립 만세시위는
팔탄면 가재리의 유학자 이정근, 장안면 수촌리의 천도교 지도자 백낙렬,
향남면 제암리의 안정옥(천도교), 고주리의 천도교 지도자 김흥렬 등에 의해 계획되었다.

1907년의 군대해산에 반대하여 일본군과 직접 대결하다가 부상하여,
고향인 제암리로 내려온 홍원식(1877년 출생)도 그의 아내와 함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
당시 홍원식은 구국동지회를 조직하여 활약하다 일본헌병 2명을 살해하고 피신생활을 하던 중이었다.

3월 30일 정오.
유학자 이정근의 '대한독립만세' 선창으로 시작된 장날시위는 순식간에 8백여명으로 불어났다.
‘대한독립만세’소리는 파도처럼 끊임없이 펼쳐졌다.
독립만세 물결은 발안주재소로 이어졌다.
놀란 일본군은 위협사격을 가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일본군 진압부대는 주재소를 향해 다가서는 군중들에게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이정근과 그의 제자 김경태가 칼에 맞아 순국하였고,
홍원식 · 강태성 · 안종후 · 안진순 · 김정헌 · 김성렬 등이 수비대에 붙잡혀갔다.
얼마 후 강태성 부인 김씨와 홍원식 부인 김씨는
일제의 혹독한 고문을 받고 풀려난 남편들을 슬픔을 삭히며 맞이했다.

일본의 보복학살로 한 줌의 재가 되어
1919년 3월 30일 발안장날 시위는 일제의 보복학살로 이어졌다.
4월 15일 오후, 일본군 아리타는 부하 11명을 인솔하고 제암리로 마을에 도착했다.

그리고 마을의 성인 남자들을 교회로 모이게 했다.

미리 명단을 파악한 듯 오지 않은 사람은 직접 찾아가 불렀다.

 

잠시 후, 일본군 아리타는 교회 밖으로 나오면서 출입문과 창문을 잠그게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사격 명령.

사격이 끝난 후에는 짚더미와 석유를 끼얹고 불을 질렀다.

불은 교회 아래쪽 마을로 옮겨 붙었다.

마을에 불이 난 것을 보고 강태성의 아내가 남편의 안위가 궁금해 교회로 달려왔다.

그러나 그녀를 맞이한 것은 무참한 일본군의 총살뿐이었다.

홍원식 부인도 교회를 찾아왔지만 그녀 역시 일본군 총에 죽음을 맞이했다.

이렇게 죽어간 그녀들은 지금 남편과 함께 제암리에 잠들었다.
그녀들의 잠든 묘지 아래에 위치한 ‘3·1운동기념관’ 전시장안에는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는 주제로 꾸며진 전시실을 있다.

광복절을 맞이하여 그 동안 잊고 지냈던 우리의 암울한 역사를 곱씹어 보면 어떨까?
아울러 조국 광복을 위해 앞에서 혹은 뒤에서 이름 없이 살다간 여인들의 삶도 되새겨보자.
◎글: 박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