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송곳으로 귀를 찌르다 - 서문장과 박제가

Gijuzzang Dream 2008. 5. 23. 16:56
 
 
 
 

 

 

송곳으로 귀를 찌르다 - 박제가와 서문장

 

 

  

9월이라 기러기 울어예니 햇살은 희고 서리발 푸르다.

13일 동쪽으로 묘향산 길을 떠났다.

초록빛 도포에 자줏빛 나귀, 허리에는 칼을 차고 안장에는 책을 얹었다.

북산(北山)의 끊어진 언덕, 약산(藥山) 동대(東臺)의 가파른 절벽이 양켠으로 늘어서

수문 길이 되니 골짜기의 형세와 아주 비슷하다.

마치 마른 진흙이 제풀에 갈라져 터진 것처럼 양쪽이 들쭉날쭉 서로 마주 하고 있고

시냇물이 그 가운데로 흐른다. 시냇가 어지런 돌은 모두 분을 바른 것만 같다.

그 위 꼭대기에 누각이 있는데 음박루(飮博樓)라 이름하였다.

동쪽으로 60리를 가서 석창(石倉)에 이르렀다. 날이 기울었기로 예서 길을 멈추었다.

석창 앞 시내는 잔잔했다. 푸른 시내 위로는 온갖 나무들이 산에 기대어 서 있다.

온통 시골 집을 위해 맞은편 언덕이 되어준 것만 같았다.

새벽에 일어나 등불을 혀고 원중랑(袁中郞)이 지은〈서문장전(徐文長傳)>을 읽었다.

이몽직(李夢直)이 말했다. "밤 깊은데 함께 시냇가에 와 자게 될 줄 어찌 알았겠나?"

내가 말했다. "달은 지붕 위에 가득한데 꿈은 집 가운데 있군 그래!

고개 들면 맑은 이슬, 들리느니 찬 소리 뿐. 그대들이 잠 못들 줄 또 어찌 알았으리."

 

박제가(朴齊家, 1750-1805)의 기행산문 〈묘향산소기(妙香山小記)〉의 앞대목이다.

전문은 근 6천자에 달하는 장편인데, 그 서사가 너무도 아름다워

마치 꿈결인 듯 묘향산의 모습이 눈에 선한 명문이다.

 

초록 도포를 늘씬하게 차려 입고, 허리엔 칼을 찼으니 한껏 멋을 내었다.

가을 바람 서늘한데 안장 곁엔 책을 함께 꾸려 두었다.

여로의 새벽, 묵었던 시골 마을에서 그네들은 피곤함도 잊고서 잠을 깨었다.

9월 13일이라 했으니 양력으로 치면 10월 말 어름이다.

신 새벽의 기운이 선듯한데, 오두마니 앉아서 책을 펴든다.

이슬 맑고 가을 소리 뼈에 저미는 새벽, 달빛은 푸르게 지붕 위를 덮고 있다.

그는 그 새벽에 무슨 글을 읽었을까?

 

명나라 원종도(1568-1610)가 지은 〈서문장전〉이다. 그 글은 이렇게 시작된다.

 

어느날 저녁 내가 도태사(陶太史)의 다락에 앉아 마음 가는대로 시렁 위 책을 뽑아 보다가

《궐편(闕編)》시 한 질을 얻었다.

조악한 종이에 붓으로 썼는데 그을음이 앉아 거무튀튀해서 글자 모양이 희미했다.

등불 가까이 가서 이를 읽었다.

채 몇 수 읽기도 전에 나도 몰래 놀라 뛰면서 황급히 도주망(陶周望)을 불렀다.

"이 책 누가 지은겐가? 지금 사람이야? 아니면 옛날 사람인가?"

주망이 말했다. "이건 우리 고향의 서문장 선생의 책일세."

두 사람은 떨쳐 일어나 등불 그림자 아래서 읽다가는 소리지르고,

소리지르다간 다시 읽었다. 잠자고 있던 종들이 그 서슬에 모두 놀라 일어났다.

내가 서른 해를 살고도 이제야 비로소 해내(海內)에 서문장 선생이 있음을 알았구나.

아! 어찌 이토록 서로 앎이 늦었더란 말인가?

 

전기(傳記) 치고는 시작이 조금은 뜻밖이다.

"이 책 누가 지은겐가? 지금 사람이야? 아니면 옛날 사람인가?"

그 놀라 당황하고 다급함이 눈에 뵈는 것만 같다.

읽다가는 소리지르고, 소리지르다간 다시 읽는 호흡이 몹시도 가빴겠다.

온 집안에 아닌 밤중에 소동이 벌어졌던 것이다.

서문장! 그는 어떤 사람이었던가? 그의 이름은 서위(徐渭, 1521-1593),

늘 그렇듯이 비상한 재주를 지녔으되 세상은 그를 알아주지 않았다.

시문과 그림은 탁월했고, 병법에도 능하였다. 불우를 곱씹으며 타관을 떠돌았다.

그 무료불평을 글로 남겼다. 그러나 그 책은 질나쁜 종이에 필사된,

그나마 그을음이 잔뜩 앉아 알아보기조차 어려운, 우연히 손길이 가지 않았더라면

영영 세상에 알려지지도 않았을 그런 것이었다.

시인의 운명이란 그렇듯 곤고(困苦)한 것이던가?

 

만년엔 분(憤)을 품음이 더욱 깊어져서 미친 짓도 점점 심해갔다.

지체 높은 이가 문에 이르러도 이를 막고 들이지 않더니,

이따금 돈을 지니고 술집에 가서는 천한 아랫 것들을 불러다가 함께 술 마셨다.

한 번은 도끼를 가지고 제 머리를 쳐서 깨뜨려 피가 흘러 얼굴을 덮었다.

두개골이 모두 깨져, 만지면 소리가 났다.

 

또 한 번은 날카로운 송곳으로 양쪽 귀를 찔렀는데

한 치도 더 되게 들어갔지만 겨우 죽지 않았다.

 

그는 기이한 짓을 수도 없이 많이 했다. 가슴 속의 분(憤)은 쌓여 광질(狂疾)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계실(繼室)을 죽인 혐의로 감옥에 갇혀 사형선고를 받았다.

집행 직전 그의 재주를 아낀 장태사의 주선으로 겨우 사형만은 면하였다.

그는 왜 도끼로 제 머리를 쳤을까? 머리가 없었다면 번뇌(煩惱)도 없었을 것이 아닌가.

송곳으로 두 귀는 왜 찔렀을까?

귀가 멀어야만 이 미친 세상의 소음이 내 마음을 어지럽히지 못할 것이 아닌가.

전기는 그럼에도 서문장이 뜻을 얻지 못한 채 분을 품고 세상을 떴다고 적고 있다.

원종도는 "선생의 시문이 우뚝하여 근대의 무잡스럽고 더러운 습속을 일소하였거니와,

백세의 아래에 절로 정해진 의론이 있으리라. 어찌 불우했다고만 하랴?"하며 글을 맺었다.

하지만 그는 후세의 기림을 알지 못한 채 땅에 묻혔다.

 

이제 내가 정작 궁금한 것은 그날 새벽 박제가의 마음이다.

여행지의 숙소에서 잠을 설친 젊은 나그네는

많은 글 중에 왜 하필 〈서문장전〉을 골라 읽었을까?

그 새벽에 이 글은 그에게 어떤 의미로 읽혔을까?

 

그는 서얼이었다.

품은 바 포부의 크기와 관계 없이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분명하게 한계 지워져 있었다.

그렇지만 설레는 여행길에 오른 패기에 찬 청년의 내면 속에 떠오르던 생각이

신분의 질곡을 숨막혀 하는 그런 답답함만이었을까?

모든 것이 다 바뀌었는데도 하나도 바뀌지 않는 세상,

뜻 있는 이로 하여금 도끼로 제 머리를 찍고, 송곳으로 제 귀를 찌르게 만드는 세상,

그리하여 마침내 미쳐서 분을 품고 죽게 만들고는 너무 쉽게 잊고 마는 세상에 대한

어떤 절망 때문은 아니었을까? 나는 그 속내가 종내 궁금했던 것이다.

서문장, 바로 그가 지은 짧은 글 한편을 여기에 소개한다.

 

꿈에 돌아가신 적모(嫡母)를 뵙고서 울며 지은 글이다.

제목은 〈감몽제적모문(感夢祭嫡母文)〉이다.

 

벌써 예전에 어머님은 병으로 돌아가셨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간 밤 꿈에서는 돌아가시지 않고 병이 드신 채

옷을 벗고 방 구석에 앉아 문짝으로 몸을 가리고 계셨다.

내가 그 증세를 진맥하고는 한숨 쉬며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흘렀다.

맥이 빠른데다 답답하여 치료할 수 없는 줄을 알았지만, 거짓으로 말씀드렸다.

"이제 곧 나으실거예요." 얼굴을 가리고서 통곡하다가 어머님을 부축해서 침상에 모셨다.

울음을 그치고 잠에서 깨었는데, 울음과 눈물은 여태도 흐르고 있었다.

꿈에 어머님이 병들어 계신 것만으로도 슬픔을 견디지 못하였는데,

깨고서 하마 돌아가신 것을 슬퍼하니 자식의 마음이 어떠하릿가!

 

그는 꿈에 뵌 어머니의 병든 모습에 잠을 깨고도 가슴 아파 눈물을 줄줄 흘리던 효자였었다.

그런데 적모(嫡母)란 서자(庶子)가 아버지의 정실(正室)을 일컫는 말이다.

아! 서문장 그도 서자였구나. 

세상은 날로 강팍해지고, 도탑던 고인의 마음은 이제 찾아볼 길이 없다.

그날 새벽 스산한 가을 소리를 들으며 등불 아래서〈서문장전>을 펼쳐 읽던

박제가의 모습이 오늘 따라 더욱 그립다.

그렇지만 정작 슬픈 것은 그의 불우나 그 시대의 암울이 아니라 먼지만 풀풀 이는,

감동을 잊은 지 오래인 건조한 우리네의 마음이다.

무연히 박제가의〈묘향산소기>를 읽다 말고 나는 한참이나 딴 생각을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