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대형화포
국난 극복의 원동력이 되다. 조선의 대형화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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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던 무기체계를 총동원하여 싸운 국제전쟁이다.
전쟁 초기만 해도 조선은 일본의 조총 전술에 맥없이 무너져 육상전투에서 연패를 거듭하였지만, 조선 수군의 연승과 의병들의 활약, 명군의 지원 등을 바탕으로 전란을 극복할 수 있었다. 조선이 전란을 극복하는데 있어서는 우수한 무기체계도 한 몫을 하였는데, 활을 비롯하여 쇠뇌, 대형화포, 화차, 비격진천뢰, 신기전, 거북선·판옥선으로 대변되는 전함 등을 꼽을 수 있다.
이순신을 중심으로 한 조선 수군은 해전에서 연전연승을 구가하여 국난의 위기에서 조선을 구하였다.
여러 측면에서 열세에 있었던 조선 수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데는 여러 요인이 있었겠으나 대형 화포의 우수성 또한 그중의 하나였다. 당시 거북선과 판옥선에는 천자총통 · 지자총통 · 현자총통 · 황자총통 · 별황자총통 등의 대형화포가 장착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들 화포의 우수성은 해전에서의 조선 수군이 전술을 펼치는데 강점으로 작용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 수군은 고유의 등선육박전술(登船肉薄戰術)을 사용하였다. 이 전술은 선박 위로 뛰어들어 개인 휴대무기를 이용하여 적을 살상하는 단병전술(백병전)이었는데, 주로 약탈 선박의 선원을 살해하고 물품을 빼앗기 위한 왜구의 전술에서 기인된 것이라 하겠다.
이후 16세기 중반 조총이 전래되면서 기존의 단병전술 외에 조총을 활용한 사격전술이 추가되었으나 전체적인 전술 변화는 크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반해 조선 수군은 대형 전함의 전후좌우에 장착된 각종 대형화포를 바탕으로 함포전술(艦砲戰術)을 구사하였고, 전함을 이용한 당파전술(撞破戰術), 화공전술(火攻戰術)을 구사했다. 특히 조선군의 화포는 일본군의 조총에 비해 사거리가 월등히 길었기 때문에 접근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적을 공격할 수 있었으므로 육전과는 다르게 조선 수군이 절대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이순신은 거제도의 목동 김천손으로부터 왜선 70여 척이 거제와 고성의 경계인 견내량에 머무르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출동하였다.
이후 일본군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의 함대 73척이 견내량에 정박 중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순신은 견내량 지형이 좁고 암초가 많아 전투하기 곤란할 뿐 아니라, 형세가 불리하게 되면 적군이 기슭을 타고 육지로 올라갈 것이므로 한산도 앞바다로 끌어내어 전투를 벌이고자 했다.
이순신은 판옥선 5~6척으로 왜군을 총공격하는 것으로 보이게 하여 적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는 작전을 펼쳤고, 이 작전에 넘어간 일본 수군은 돛을 올리고 조총을 쏘며 쫓아왔다.
조선 수군이 퇴각하는 것처럼 바깥 바다로 나오자, 이순신은 후퇴하는 속도를 조절하여 적선이 일렬로 서도록 유인한 뒤 급선회의 명령을 내려 마치 학의 날개와 같이 전개하여 전선을 좌우에서 포위하는 학익진(鶴翼陣)을 펼치면서 적선에 포격을 가하였다.
모든 전선에서 각종 화포와 화전을 발사하여 일본 수군의 전선을 격파하였다.
이 전투에서 조선 수군은 와키자카의 휘하 전선 47척을 격파하였고 12척은 나포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것이 임진왜란 3대첩이라 일컬어지는 한산대첩이다.
이로 인해 조선 수군은 남해의 해상권을 장악하여 일본군의 해상을 통한 진격에 제동을 걸었고, 수세에 있던 전황을 뒤바꿔 전란을 극복하는데 결정적인 계기를 부여하였던 것이다. 이 한산대첩은 이순신의 탁월한 작전 지휘와 그 지휘 아래의 조선 수군의 눈부신 활약, 거북선·판옥선의 우수성, 그리고 대형 화포의 성능이 어우러져 큰 위력을 발휘한 것이었다.
학익진 전법은 후에 나폴레옹이 트라팔가 해전에서 사용했던 전법이나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제독이 대한해협에서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격파한 전법과 매우 유사한 전술이다.
서구의 전쟁사가 발라드(G.A. Ballard)는 이순신이 펼친 이 전술에 대해 고도로 훈련된 정예함대만이 펼칠 수 있는 것으로 그 기동성은 놀라운 것이었다고 극찬하기도 했다.
당시 조선 수군이 사용했던 대형 화포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들 문화재를 통해서 국난극복을 위해 충절을 바친 선열들의 체취를 느끼고, 자랑스러운 우리의 문화유산을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 문화재청, 월간문화재사랑, 2008-05-01 | ||||||||||||||||||||||||||||||||||
★지자총통(地字銃筒) 조선중기에 사용된 화포로서 천자 총통(天字銃筒) 다음으로 큰 화포이며, 조란탄(鳥卵彈) 200개나 장군전(將軍箭) 1발을 쏘았고, 사정거리는 900미터 입니다.
★승자총통(勝字銃筒) 조선 선조때 종래의 화기를 휴대하기 좋게 개량한것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널리 사용되었고, 철환 15알을 한번에 발사 할수 있고, 피령목전(皮翎木箭)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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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자총통(黃字銃筒)
조선 초,중기에 사용하던 가장 작은 화포로서 조란탄 40개와 피령차중전 1개를 쏘았습니다.
사정거리는 1100미터입니다.
- 월간 온오프 세종대왕릉 세종전 내용 중에서 발췌
임진왜란 당시 육전에서는 연패하였던 반면, 해전에서는 거북선과 판옥선에 장착되어 있던 천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 황자총통, 별화자총통 등 화포의 성능이 매우 우수하여 연전연승을 구가할 수 있었다.
일본수군은 중, 소형선과 조총을 중심으로 배를 붙이고 백병전을 폈으나, 조선수군은 대형선박의 전후좌우에 장작된 각종 화포를 바탕으로 한 포전(砲戰)을 위주로 하였고, 조선수군이 사용한 화포는 일본군의 조총에 비해 사거리가 훨씬 길었기 때문에 적에게 접근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적을 공격할 수 있었다.
불씨를 손으로 점화발사하는 유통식(有筒式) 대형화포(火砲)는 그 크기와 사용되는 화약의 양, 발사거리에 따라 4가지로 분리하여 천자문에서 그 이름을 따서 ‘천(天), 지(地), 현(玄), 황(黃)자’총통이라 붙였다.
지자총통은 천자총통 다음으로 큰 우리나라 고유의 대포이며, 조선 태종 때 만들어 사용한 기록이 있으며, 세종 27년(1445)에 이르러 화약병기 개발정책에 따라 종래의 형체를 개량, 발전시켰다.
현자총통은 조선 태종때부터 만들기 시작하였는데, 이순신의 <난중일기>에서는 장군이 12척의 배로 133척의 일본전함을 격파한 명량해전에서 이 화포를 크게 활용하였음을 적고 있다. 화약이 들어가는 약실은 통몸보다 약간 도톰하게 되어 있고, 점화구멍은 약실 오른쪽에 뚫려 있다. 발사물은 화살(차대전)과 둥근포탄(철환)을 사용한다.
별황자총통은 천자, 지자, 현자, 황자총통 가운데 황자총통을 개량하여 만든 데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황자총통보다 약간 크다. 총통의 약통 뒤에 조정손잡이를 부착시켰으며, 총통의 중간 부위에 달려있는 포이(砲耳)를 삼각다리 형태의 받침대와 결합시켜 배의 갑판 등에 고정시킴으로써 상하좌우로 쉽게 조정할 수 있게 하고 그 사용을 편리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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