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25일치 <한겨레> 2면에는 3단짜리 큼직한 사진과 설명기사가 실렸습니다.
프랑스의 르가메라는 사람이 그린 ‘고종의 행렬(그림 1)’이라는 펜화가 발견됐는데,
이것이 한국을 대상으로 한 최초의 서양화로 확인됐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당시 <한겨레> 사진 설명 기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서양인이 한국을 소재로 그린 최초의 그림으로 추정되는 <고종의 행렬>이 발견됐다고 프랑스 파리에 있는 가나보부르 화랑(대표 전병우)이 24일 밝혔다. 이 그림은 화가 겸 동양전문가로 알려진 르가메(1844~1907)가 파리의 동양예술 전문 기메박물관 설립자 에밀 기메와 함께 한국 등을 여행하던 1876년 무렵 고종이 가마를 타고 서울 수표교를 지나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까지는 휴버트 보스의 고종 초상화(1890년)가 서양인이 그린 최초의 한국 소재 그림으로 알려졌다. 파리/연합
사실 이 기사는 <한겨레>가 직접 취재해 쓴 것이 아니라,
그날치 <대한매일> 가판의 단독 기사를 받은 <연합뉴스>의 기사를 다시 받은 것입니다.
이날 <조선일보>도 이 기사를 1면에 큼지막하게 받았지요.
참고로 ‘받는다’는 것은 일종의 신문용어, 또는 기자들 사이의 표현으로
다른 신문에서 쓴 기사 내용을 최소한의 확인 절차를 거쳐 싣는 것을 말합니다.
보통 각 신문사에서 가판이라고 부르는 1판 신문 기사를 보고 서로 내용을 비교해 본 뒤
‘받는’ 것이지요. 원래 단독 기사인 대한매일의 기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1876년 佛르가메作… 美수집가 소장 고종어가 수표교 지나는 장면 묘사
파리 함혜리 특파원=서양인이 한국을 소재로 그린 그림으로는
가장 연대가 오래된 것으로 평가되는 작품 ‘고종의 행렬’ 존재가 처음으로 확인됐다.
가로 41㎝,세로 21.5㎝ 크기의 종이에 펜으로 드로잉된 ‘고종의 행렬’은
1876년 전후 한국을 여행한 프랑스 화가 펠릭스 르가메가 그린 것으로,
지금까지 한국을 소재로 한 최초의 서양화로 알려진 휴버트 보스의 고종 초상화(1896년경)보다
20년 정도 앞서 그려진 것이다.
파리의 가나보부르 화랑에서 열린 한국 미술인 프랑스 100년사 개관식 참석차 파리에 온
가나화랑 이호재 대표는 23일(현지시간) “미국인 고서화 수집가가 소장하고 있는 ‘고종의 행렬’을
뉴욕에서 직접 보고 펠릭스 르가메가 아시아 지역을 여행한 1876년 전후 그린 것으로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 대표는 “지금까지는 1896년 한국을 방문했던 휴버트 보스가 그린 고종의 초상화가
서양인이 그린 최초의 한국에 대한 그림으로 알려져 있으나
‘고종의 행렬’은 이보다 20년 앞서 그려진 것으로,
한국을 소재로 한 서양그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그림이 확실하다.”고 말했다.
화가 겸 동양전문가로 알려진 펠릭스 르가메(1844∼1907년)는
파리의 아시아예술 전문 국립박물관인 기메미술관 설립자 에밀 기메와 함께
당시 세계 일주 여행을 했으며, 중국 일본 한국을 거쳐 1876년 프랑스로 돌아왔다.
고종이 가마를 타고 청계천 수표교를 지나는 장면을 생생하게 담은 이 그림은
당시 한국 여행 중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기메미술관의 피에르 캉봉 수석학예연구원은
“동양의 아름다움을 프랑스에 소개한 최초의 화가 가운데 한 명인 펠릭스 르가메는 일본 여행 중
그린 작품들을 많이 남겼지만 한국에 대한 그림은 그동안 한 점도 발견되지 않았다.”면서
‘고종의 행렬’은 미술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그런데, 그 다음날 <한겨레> 2면 같은 위치에는 위의 두 기사 내용을 뒤집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습니다. 저와 문화부의 노형석 선배가 쓴 것인데요.
‘고종의 행렬’ 사진보고 그렸다
'한국소재 첫 서양화'도 사실과 달라
한국을 다룬 최초의 서양인 그림으로 프랑스 현지에서 공개된
<고종의 행렬>(<한겨레> 9월25일치 2면)은 최초의 서양인 그림도 아니고,
10여 년 전에 도판이 공개돼 국내에도 이미 잘 알려져 있는 그림인 것으로 25일 밝혀졌다.
이 그림은 1986년 조선일보사가 발행한 <격동의 구한말 역사의 현장>이라는 화보집 117쪽에
수록돼 있으며, 지난해 서울시가 발간한 <청계천의 역사와 문화>75쪽(2003년판은 78∼79쪽)에도 실려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화보집 <격동의…>에는 19세기 말 프랑스 신문인 ’르 주르날 일뤼스트레’라는 이름과
’1894년 9월2일’이라고 기록돼 있어 이날치 신문삽화로 게재됐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 그림은 프랑스 화가인 펠릭스 르가메가 한국을 여행하던 중
수표교에서 고종 어가행렬을 보고 그린 것으로 설명됐지만,
당시 사진 자료들에 따르면 이 역시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1892~1894년 주한 프랑스 공사를 지낸 이폴리트 프랑뎅의 사진집 <먼 나라 꼬레>(경인문화사·2002년)에는 고종이 광통교를 지나는 모습을 담은 두 장의 사진(사진 1~2)이 있는데,
문제의 그림은 교각이 5줄(광교는 2줄)인 것만 제외하면
행렬, 깃발 모양, 구경하는 아이들, 다리 밑 모습까지 똑같다.
르가메는 이 두 장의 사진을 합성해 그림을 그렸을 가능성이 높다.
한국을 다룬 최초의 서양인 그림이란 것도 사실과 다르다.
1818년 영국해군 장교 배질 홀은 <조선서해탐사기>(신복룡 역주, 집문당)에 동행한
화가 윌리엄 하벨이 그린 비인 현감 이승렬 등의 그림을 수록해 놓았다.
1866년 병인양요 당시에도 강화도를 침공한 프랑스인들이 현지 풍경 그림을 남겼다.
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 박용철 연구원은
“충분한 비교·검토없이 공개하는 과정에서 고증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고종의 행렬’ 그림을 새로 공개한 이호재 전 가나아트센터 대표는
“그림의 사진은 수년전 미국 뉴욕의 고서적상한테서 입수한 것”이라며
“사진을 본 프랑스 기메박물관 관계자가 1876년 르가메가 조선에 들어가 그림을 그렸다고
얘기해 그렇게 추정했다”라고 말했다. - 노형석 김규원 기자 che@hani.co.kr
이 기사가 소략해 다 다루지 못한 내용과 아직 남은 의문을 조금 소개할까 합니다.
제 생각에는 이 그림에 관한 가장 극적인 반전은
르가메가 직접 고종의 행차를 보고 그린 것이 아니라, 사진을 보고 그렸다는 점일 것입니다.

<사진 1>

<사진 2>
이것은 2002년 경기도가 사진 전시회를 열며 펴낸 <먼 나라 꼬레>(경인문화사)라는 책에 실린
‘왕의 행차’라는 사진 2점으로 증명됩니다.
이 두 장의 사진과 그림을 비교해보면
그림이 사진을 보고 그렸다는 점을 아주 쉽고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먼저 깃발과 깃대의 모양입니다. <그림>과 <사진 1 >에 나타난 바람에 날리는 큰 깃발의 모양과
깃대들이 기운 정도를 보면 완전히 똑같습니다.
또 고종을 호위하는 말 탄 장교들의 모습을 봐도
<그림>과 <사진 1>이 같다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말 탄 장교 셋 가운데, 가운데 장교가 사진 찍는 쪽을 바라보는 것까지 똑같습니다.
<그림>과 <사진 2>도 고종의 가마 모습이나 군사들이 세워든 장대 등의 모습으로 보면
사진과 그림이 같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은 좋게 말해서 합성, 나쁘게 말해서 조작된 것입니다.
이것은 르가메가 당시 고종의 행차를 직접 보지 못했고,
단지 사진만을 보고 그렸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르가메가 왕의 행차를 직접 보고 뒤에 사진을 참고해 그린 것이 아니라,
아예 왕의 행차를 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그림이 사진만을 보고 합성, 조작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는
다리의 기둥 숫자입니다.
이 사진에서 고종 행차의 배경은 ‘광통교’입니다
(이 그림과 사진들을 소개한 대부분 책들이 이 다리를 ‘수표교’로 소개하고 있는데,
이는 명백한 오류입니다. 난간의 모습으로 볼 때 광통교가 100% 확실합니다).
따라서 다리기둥은 2줄이 돼야 맞는데, 이 그림에서는 5줄입니다. 르가메가 잘못 그린 것입니다.
왜 르가메는 2줄인 광통교의 다리 기둥을 5줄로 그렸을까요.
아마 르가메가 두 장의 사진을 보고 그릴 때
각각의 사진에 담긴 중심 내용을 한 장의 그림에 모두 담고 싶어 했던 것 같습니다.
이 두 장의 사진은 각각 인상적인 모습을 담고 있는데,
하나는 무기와 깃발을 든 군사들의 호위 행렬이며, 둘은 왕이 탄 가마입니다.
문제는 이 두 가지 모습이 한 사진에 온전히 나와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르가메는 <사진 1>을 <그림>의 왼쪽에, <사진 2>를 <그림>의 오른쪽에 배치해서
그림을 완성했던 것 같습니다.
두 사진의 모습을 모두 담으려다 보니 다리 길이가 길어졌고,
다리 기둥의 숫자도 늘어나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심지어 르가메는 사진에 나와 있는 다리의 모습도 엉터리로 그리기도 했습니다.
이를테면 사진에는 난간 기둥 2개마다 다리 기둥이 하나씩 받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난간 기둥 아래마다 다리 기둥을 하나씩 그려놓았습니다. 말하자면 ‘사족’을 그린 것이지요.
그가 왜 이런 실수를 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추측컨대 르가메는 광통교를 직접 보지 못했고,
이 다리가 사진에 나와 있는 것보다 상당히 더 길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웬만한 하천의 다리는 기둥이 2줄보다는 많을 테니까요.
그러나 불행히도 광통교의 길이는 12m에 불과했고,
이 사진에 나와 있는 모습이 전체 길이의 3/4쯤 됩니다.
이 그림에 나타난 합성, 조작된 모습 가운데는 퍽 귀여운 점도 있는데요.
다름 아닌 댕기를 늘어뜨린 아이들의 뒷모습입니다.
<사진 2>에 보면 가마 바로 왼쪽에 아이들 넷이 네모난 상자 위에 올라가 왕의 행차를 구경하고
있는데요. 이 아이들의 뒷모습이 <사진 1>을 주로 베낀 그림의 왼편 끝에 슬쩍 나옵니다.
2명으로 줄어있으나, 댕기를 늘어뜨리고 정신없이 바라보는 뒷모습은 똑같습니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사진 찍는 모습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표정입니다.
<사진 1>에서는 왼쪽 다리기둥 위쪽에 한 상투 튼 아저씨가 렌즈를 조심스레 응시하고 있고,
<사진 2>에서는 아까 댕기머리 소년들 바로 왼쪽에 한 아이가 역시 뭔가 신기하고 불안한 표정
으로 이쪽을 보고 있습니다. 이들은 어디 살던 누구였을까요?
아마 지금은 모두 죽었겠으나(이 사진은 1894년 이전에 찍힌 것임),
그 후손들은 서울 어디엔가 살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일제 때나 6·25전쟁에서 모두 죽지 않았다면 말이죠.
이 사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새로운 사실도 있는데요.
우리가 책이나 드라마에서 보면
보통 지체 높은 양반이나 왕족이 길에 가마나 말을 타고 지나갈 때는
앞장 선 가마꾼이나 말잡이 등이 “물렀거라”라고 외치고
주변의 백성들은 길을 비킨 뒤 엎드려 고개를 숙이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이 사진을 보면 당시 만인지상인 왕의 가마가 지나는 데도
엎드리는 사람이 하나도 없이 모두 구경하느라 난리입니다.
어찌된 일일까요?
1894년이라는 연대로 보면 고종이 개혁정치를 펼 때도 아닌데 말이죠.
아마 조선 후기에 양반이 급증해 왕이 지나가도 엎드려 고개를 숙일 필요가 없었을까요?
아니면 왕의 권위가 땅에 떨어져 굳이 그러지 않았던 것일까요?
아니면 그때 이미 조선의 민주주의가 성숙하기 시작한 걸까요?
이 사진 자체에 관해서도 근본적인 의문이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이를테면 이것을 프랑스 공사 이폴리트 프랑댕이 직접 찍은 것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사람이 찍은 사진을 자신의 사진 콜렉션에 포함시킨 것인지?
또 이 사진을 찍은 연대가 프랑댕이 머문 1892~1894년 사이인지 아니면 그 이전인지?
(그 이후일 가능성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진을 바탕으로 그린 그림이 처음 등장한 것이
1894년 9월2일이니 사진은 아무리 늦어도 그 이전입니다)
제가 한 가지 퀴즈를 내볼까요?
이 사진을 찍은 사람은 청계천 바닥에 내려가 찍었을까요?
아니면 청계천 주변 길가에서 찍었을까요?
눈높이로 볼 때 그 이는 아마도 주변 길가, 그 가운데서도 현재의 한국관광공사 쪽 아니면,
광교약국 쪽에 서서 찍었던 것 같습니다.
한편, 이 사진에서 남북 방향을 판단하기는 좀 어렵습니다.
- 2003-09-30,
- 2007/03/13, 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