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 : 1737(영조 13) ∼1805(순조 5)

Gijuzzang Dream 2008. 3. 29. 14:33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 : 1737(영조 13)∼1805(순조 5)

 

 

 

연암의 초상부터 살펴보겠다.
연암의 아들 종채의 기록 <과정록>에 의거하여 연암의 생김은 이러한 것 같다.

 

아버지의 얼굴빛은 아주 붉으레하며 활기가 도셨고 눈자위는 쌍꺼풀이 지셨으며 귀는 크고 희셨다.

광대뼈는 귀밑까지 이어졌으며 기름한 얼굴에 수염이 듬성듬성하셨으며,

이마 위에는 주름이 있는데 마치 달을 치어다 볼 때 그러한 것 같았다.

키는 크시고 살졌으며 어깨와 등은 곧추섰고 정신과 풍채는 활달하셨다.

(先君顔色深紅活澤 眼 重圍 耳大而白 權骨揷   長面 髥 額上有紋 若仰月然 身長而碩 肩背 直 神彩朗然)


위의 기록으로 미루어 보면 연암의 인물이 근사함을 알 수 있다.

키도 훤칠하였으며 풍채도 꽤 크신 것이 여간 아니었던 듯하다.   

 

 

 

 박지원(朴趾源) 초상. 박지원의 손자인 박주수(朴珠壽)의 그림.
눈초리가 올라간 것하며 오똑한 콧날과 턱수염이 매서운 인상을 준다.

그러나 넉넉한 풍채에서 풍기는 기운은 대인처럼 우람하다.

[과정록]에 보이는 아들 종채의 기록과는 얼굴 모양이 사뭇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연암을 판단하면 안 된다.

연암은 매우 여린 심성과 동시에 강인하고 불의를 보면 몸을 파르르 떠는 의협인(義俠人)이었다.

그의 성격에 관한 글을 찾아보면 연암은 상대에 따라 극단으로 다른 야누스적인 모습을 보인다.

강한 자나 위선자들에게는 서슬 퍼런 칼날을 들이대다가도

가난하고 억눌린 자, 심지어는 미물에게까지 담뿍 정을 담아 대하는 것이 그것이다.


연암의 성정(性情)을 단적으로 알 수 있는 말이다.

연암은 집에서 개를 기르지 못하게 했다. 그 이유는 이러하다.

 

"개는 주인을 따르는 동물이다. 또 개를 기른다면 죽이지 않을 수 없고

죽인다는 것은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니 처음부터 기르지 않는 것만 못하다.

(狗能戀主 且畜之 不得無殺 殺之不忍 不如初不畜也)"


한 번은 타던 말이 죽자 묻어 주게 하였으나, 하인이 이를 잡아먹어 버린 일이 있었다.

이 사실을 안 연암은 말의 뼈를 잘 수습하여 묻어주고는

하인들의 볼기를 쳐 몇 달을 내 쫓아 혼쭐내었다. 그때 연암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과 짐승은 비록 차이가 있지만서도 너와 함께 애쓴 짐승이거늘 어찌 이와 같이 잔인한 것이냐?

(人 獸 雖有間 是共汝勞苦者 豈忍如是)" 

미물(微物)에게 조차 따뜻한 마음으로 다가가는 연암의 모습이 아닌가.


종채의 기록을 뒤지면

연암은 아버지가 위독하자

 "곧 칼끝으로 왼손 가운뎃손가락을 그어서는 핏방울을 약에 떨어뜨려 섞어서 이를 드리니

잠시 뒤에 소생하셨다(乃刀尖劃裂左手中指 滴血和藥以進之 俄頃面甦)."라는 기록도 보인다.

그의 효성 또한 연암의 이러한 성품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연암의 성격을 잘 그려내고 있는 또 한편의 글을 보자.

 

선생의 얼굴 모습은 괴이하고 기상은 드넓고 쾌활하고 너그러우며 작은 일에 얽매이지 않아

천하사를 봄에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하잘 것 없는 시문 따위로 사(司)에 간여하지 않고 또 과거보는 것을 싫어하였다.

술이 얼큰하여 귀까지 붉어지면 당대의 지위가 높고 귀한 사람과 세상을 속이는 정도(正道)에

어그러진 학문을 하는 무리들을 거리낌 없이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하고 기롱하여 배척하였다.

(先生 魁顔貌 意氣軒豁磊落 視天下事 無不可爲 然不肯碌碌爲 時文以干有司

酒 耳熱 亦或縱談譏斥 當途貴人及欺世 僞學之流).

 

연암은 주지하듯 많은 적들이 있었다. 또 종채의 기록을 따라가며 다시 한 번 성품을 살펴보자.

 

아버지는 20여세 때부터 의지와 기개가 높고 엄격하였다.

어떤 법규 같은 것에 얽매여 구애되지 않았으며 회해( 諧)나 유희(遊戱)를 하였다.

(先君自弱冠時 志氣高  不拘拘於繩墨 往往 諧游戱).

 

위에서와는 판이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연암이다.

여기서 말하는 회해나 유희의 뜻이, '실없는 농담'이나 '즐겁게 놀며 장난함. 또는 그런 행위'라는

사전적인 의미에 그치지 않음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당시의 세태에 대한 비꼼이었다.

다음을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아버지께서는 젊었을 때부터 말씀과 의론이 엄정하여

겉으로는 안색이 엄격하여 위엄이 있는 것 같이 보이나 속으로는 온유하였다.

권력을 따라 아첨하는 사람을 보면 용납치 않았으며

문득 즐겁게 농담하고 웃고 즐기는 사이에 넌지시 비꼬았기 때문에 평생 노여움과 비방을 많이 받았다.

(先君自小時 言議嚴正 見世之色  內荏浮  取媚者 不能容忍 輒譏諷於 諧談笑之間 以此平生怒謗最多) 

 

그러나 연암은 자신이 지적하는 문제에서 자신 역시 자유롭지는 못했다.

여러 기록을 보면 연암은 선비다운 기질이 있었음이 분명하지만 고집 또한 여간아니었다.

한 번은 함양군수 윤광석(尹光碩)이 <후촌집後村集>을 간행하였는데

선조인 박동면(朴東免)에 관한 사실을 왜곡(歪曲) 기술했다 하여 그와 아주 단교해 버린다. 

 

연암이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유언은 이랬다.
"깨끗이 목욕시켜다오(遺命潔沐洗而已)."

한국 문학사의 큰 별의 유언치고는 좀 싱겁다.

죽으면 모두 깨끗이 염을 하는 것이거늘 유언까지 하는 것일까?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면 마지막 유언으로 꽤 실다운 맛이 있다.

그는 퍽 개결한 성품을 지녔음을 여기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연암은 고질병이 되어버린 사대사상의 타파를 역설하고

양반의 지나침을 경계하고 상민을 따뜻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그래서 유교의 맹목적 패러다임인 주자설을 비판하면서

양반의 처세와 유학자들의 위선을 매도하는 한편 여성의 해방도 부르짖을 수 있었던 것이다.
-
연암 박지원 이야기(고전비평), 간호윤, 한국디지털도서관에서

- 개를 키우지 마라(門內不許畜狗), 간호윤, 경인문화사, 2004

 

 

 

 

 

 

 

 

연암 박지원

 

 

1737년(1세)

반남 박씨로 字는 중미(仲美), 친지들은 미중(美仲)으로 부름. 호는 연암(燕巖).

 

한양 서쪽 반송방(盤松坊) 야동(冶洞, 지금의 서울시 서대문 아현동쯤인 듯하다.

야동은 1850년대 방각본 고소설을 간행하던 곳이었다)에서

아버지 사유(師愈, 1703-1767)와 어머니 함평 이씨의 2남 2녀 중 막내로 2월 5일 축시에 출생.

조부 필균(弼均)은 경기도 관찰사, 지돈녕 부사를 지냈다.

선조 때의 명신인 박소(朴紹) 이후 대단한 명문가였다.

 

1739년(3세)

- 형 희원 장가 들다. 형수는 이씨로 16세에 시집와서 어린 연암을 잘 돌보았다.

- 옛 사람의 편침(扁枕) 온피(溫被) 같은 것을 흉내내다.

 

1741년(5세)

- 경기도 관찰사를 제수 받은 조부를 따라갔다가 한번 본 감영의 모양과 칸수를 말하다.

 

1744년(8세)

- 영조는 사도세자(10세)의 왕세자빈으로 혜빈 홍씨를 맞이함.

 

1752년(16세)

- 연암은 이보천의 딸과 결혼하다.

- 장인 이보천(李輔天)에게 '맹자'를, 처숙 이양천(李亮天)에게 '사기'의 <신릉군열전>을 배웠다.

- 이 시기에 <항우본기>를 모방하여 <이충무공전>을 지어 칭찬을 받다.

 

1754년(18세)

- 우울증으로 시달려 음악과 서화, 골동품, 기타 잡물을 취미 삼고 객을 초대하여 해학과 고담을 즐김.

- <광문자전>을 짓고, <민옹전>의 민옹을 이 무렵 만남.

 

1755년(19세)

- 11월1일 처숙 이양천(李亮天)이 40세로 사망하고 연암의 정신적 방황과 편력이 시작됨.

 

1756년(20세)

- 봉원사에서 독서하면서 윤영을 만나 허생 이야기를 듣게되다. <허생>의 모티브가 여기서 이루어짐.

- 이 무렵 <마장전>과 <예덕선생전> 지음.

 

1757년(21세)

- 가을에 <민옹전>을 지음. 이 무렵 불면증과 우울증이 깊어짐.

 

1759년(23세)

- 영조, 정순왕후 간택(영조는 66세, 정순왕후는 15세, 사도세자는 25세, 세손 정조는 8세)

- 연암의 모친 사망(59세)

- 「독례통고(讀禮通考, 북학파 인사들의 관심을 모은 책)」를 초(抄)함.

- 장녀(후일 이종목李鍾穆에게 출가) 출생.

 

1760년(24세)

- 조부(76세) 필균 사망. 연암의 곤궁한 생활이 이때부터 더욱 심화됨.

 

1761년(25세)

- 북한산에서 독서. 수염이 은백이 되다.

- 산사나 강가, 정자를 떠돌며 김이소(金履素) 등 10여 명과 과거 공부에 힘쓰다.

- 단릉 처사 이윤영(李胤永)에게 주역 배움. 이 해에 홍대용(洪大容)을 만남.

- 성균관 시험을 치러 들어가서는 고목이나 노송 등만 그려 놓아 과거에 뜻이 없음을 보임.

 

1762년(26세)

-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는 임오화변(노론 벽파가 정권을 잡음).

 

1764년(28세)

- <초구기>를 지음. 이 무렵 <양반전>과 <서광문전후>를 지음.

 

1765년(29세)

- 벗 김이중(金履中, 1736-1793)이 나귀를 팔아 연암에게 금강산 구경을 시켜 줌.

- 금강산을 유람하며 <총석정일출>을 지음. 이 무렵 <김신선전>을 지음.

- 홍대용의 작은아버지 홍억의 수행원으로 연행(12월 27일 북경 도착, 다음 해 5월 2일 귀향).

 

1766년(30세)

- 홍대용의 '건정동회우록'에 서문을 씀.

- 장남 종의(宗儀) 출생.

 

1767년(31세)

- 이 무렵 <우상전>, <역학대도전>, <봉산학자전>을 지음.

- 부친 사망(6월22일, 65세).

- 삼청동(三淸洞, 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삼청동) 백련봉 셋집으로 이사.

 

1768년(32세)

- 백탑(白塔, 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종로 탑골공원)부근으로 이사.

- 이덕무(李德懋), 서상수(徐常修), 유득공(柳得恭) 등과 이웃하여 깊은 교우를 맺으며

- 박제가(朴齊家), 이서구(李書九)가 제자로 입문한다.

- 이른바 북학파(北學派) 혹은 백탑파의 형성시기이다.

 

1769년(33세)

- 이서구가 지은 '녹천관집'에 「녹천관집서」를 씀.

 

1770년(34세)

- 감시(監試) 양장(兩場)에 모두 합격.

 

1771년(35세)

- 다시는 과거에 응시치 않았다. 연암이 술을 마시기 시작한 것은 이 뒤부터였는데 주량이 무척 세었음.

- 장지 문제 발생하여 이상지(李商芝, 1729-1799)와 크게 다툼.

- 9월1일 큰 누이 사망하여 「백자증정부인박씨묘지명」을 지음.

- 이덕무, 이서구, 백동수(白東修)와 여행

   (북으로는 송도, 평양, 천마산, 묘향산과 남으로는 속리산, 가야산, 화양, 단양 등)

   이때 연암골을 발견하여 ‘연암(燕巖)’을 호로 삼음.

 

1772년(36세)

- 여름철에 전의감동(典醫監洞, 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낙원동)에서 피서.

- 광릉 석마향(石馬鄕, 지금의 경기도 성남시 분당 일대)에 있는 처가로 식구들을 보내고

  전의감동의 우사(寓舍)에서 혼자 거처함.

- 박제가의 문집 '초정집'에 「초정집서」를 씀.

 

1773년(37세)

- 윤 3월, 이덕무, 유득공과 파주 등을 거처 평양 유람.

 

1774년(38세)

- 「제이당화(題李唐畵)」를 지음.

 

1775년(39세)

- 12월. 정조의 대리청정.

 

1776년(40세)

- 3월 5일, 영조 승하(82세)

- 3월 10일, 정조(正祖) 즉위, 홍국영 득세.

- 6월, 규장각 설치.

- '한객건연집' 출간.

   이 책은 조선후기 북학파 실학자 이덕무,유득공, 박제가, 이서구 등 4명의 시를 모아 엮은 책이다.

   중국인 이조원이 ‘사가지시(四家之詩)’라 하여 ‘사가시집(四家詩集)’으로 더 유명하였다.

 

1777년(41세)

- 6월, 장인 이보천 사망(64세) . 「제외구처사유안재이공문(祭外舅處士遺安齋李公文)」을 지어 추도.

 

1778년(42세)

- 3월17일, 이덕무, 박제가 연행. 박제가 '북학의'를 지음.

- 형수(형 희원의 아내) 사망하자 형수를 위해  「백수공인이씨묘지명(伯嫂恭人李氏墓誌銘)」을 지었다.

- 7월, 홍국영의 화를 피해 연암 골짜기로 이주.

  (정조의 비인 효의 김씨가 생산을 하지 못하자 홍국영이 자신의 누이를 후궁, 원빈 홍씨로 입궁시켜

  원자를 얻은 뒤 득세하려 한데서 비롯되었다. 이를 차마 볼 수 없었던 연암이 상소를 올렸으나

  정조에게는 전달 안 되었고, 이 사건으로 홍국영은 연암을 미워하게 되었다.)

- 개성 유수로 부임한 유언호가 생계를 살핌. 일시적으로 개성 금학동 양호맹의 별장으로 이주.

   (이때 유언호에게 빌린 돈 1000민을 양호맹, 최진관이 대신 갚았다.)

 

1779년(43세)

-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서이수가 규장각 검서관(檢書官)으로 등용.

 

1780년(44세)

- 2월, 홍국영 실각하고 4월에 사약을 받아 죽자 서울로 돌아와 평계(平溪)에 있는 처남집에서 기거.

- 5월 25일, 삼종형 박명원과 청 고종 70수연에 동행. 10월 27일 귀국.

   연암은 <열하일기> <산장잡기> ‘후지(後識)’에서 “평생토록 궤이함을 봄에 열하에 있을 때를

   능가한 적이 없었다(平生詭異之觀 無逾在熱河之時)”라고 그 놀라움을 적었다.

- 귀국 즉시 처남 이재성의 집과 연암 골짜기를 왕래하며

   2000여리 장정의 여행기 <열하일기> 저술시작.

- 이 무렵 <허생>, <호질>을 지음.

- 차남 종채(宗采, 宗侃이라고도 함) 출생.

 

1781년(45세)

- 당시 영천 군수로 있던 홍대용은 얼룩소 2마리, 공책 20권, 돈 200민(緡) 등을 보내면서

  연암의 <열하일기> 저술을 격려.

- 9월, 박제가의 '북학의'에 「북학의서」를 씀.

- 친구 정철조 사망하자 그를 위해 「제정석치문(祭鄭石癡文)」을 지음.

 

1783년(47세)

- 10월 담헌(湛軒, 즐거운 집) 홍대용이 노모를 핑계로 낙향하였다가 사망하자

   「홍덕보묘지명(洪德保墓誌銘)」을 지음. 홍대용의 염을 하며 반함(飯含)을 못하게 함.

   이 충격으로 이후 연암은 음악을 끊었다.

- <열하일기(熱河日記)>를 완성하였다.

 

1784년(48세)

- 유득공이 '발해고(渤海考)'를 탈고하였다.

 

1786년(50세)

- 7월, 친구인 이조판서 유언호의 천거로 벼슬살이 시작하다.

  종 9품 벼슬인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 건축물의 신축과 보수업무의 감독으로 오늘날의 공사감독관)

  격임에 임명됨.

- 연암이 음보(蔭補)로 처음 출사하자 노론 벽파의 실력자 심환지(沈煥之), 정일환(鄭日煥) 등이 찾아와

  자파로 끌어 들이려 했으나 연암은 그때마다 해학적인 말로 쫓아낸다.

 

1787년(51세)

- 1월, 동갑내기 부인인 전주 이씨(1737-1787)가 51세로 사망.

   (처음 시집와서는 선생의 조부 장간공의 집이 좁아 친정에 가 있었으며, 중년 이래 몹시 가난하여

   자주 이사 하는 등 고생이 심했으나 잘 견뎌냈다. 집안 살림을 주도한 큰동서를 공경하여 우애

   좋았으며 큰동서가 후사 없이 죽자, 당시 십여 세 밖에 안 되는 아들 종의를 상주로 세우도록 했다.

   한 번은 연암이 옷을 해 입으라고 돈을 주니 형님 댁은 끼니를 거른다며 집에 돈을 들일 수 없다고

   하였다. 연암은 평소 이러한 부인 이씨의 부덕을 존경했으며 부인 별세 이후 독신으로 지내었다.)

- 부인의 상을 당하여 이를 애도한 절구 20수를 지었다하나 전하지 않는다.

- 7월, 형 희원이 향년 58세로 사망하자 「연암억선형(燕巖憶先兄)」을 지음.

- <송자대전> 편수에 참여하다.

   연암은 우암 송시열의 편지 중 윤휴의 일을 논한 대목에 전아(典雅)하지 못한 칭위(稱謂)가 있어

   한두 자를 삭제할 것을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개탄한다.

 

1788년(52세)

- 3월, 일가족이 모두 전염병에 걸려 큰며느리가 죽고 장남 종의도 위독한 끝에 간신히 회생.

   큰며느리가 죽자 주위에서는 살림할 사람이 없다고 연암에게 재혼을 권했으나 거절함.

- 종제 박수원(朴綬源)이 선산 부사로 나아가 집이 비게 되었으므로

   연암은 계산동(桂山洞, 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가회동)에 있던 그의 집에서 잠시 머무른다.

- 12월, 선공감 감역 임기 만료됨.

 

1789년(53세)

- 6월, 종 6품의 평시서(平市署, 시전의 斗量검사와 물가등락을 관할하던 관청)의  주부(主簿)로 승진,

- 가을에 공무의 여가를 얻어 다시 연암 골짜기로 들어갔다.

 

1790년(54세)

- 삼종형 박명원이 사망하자 「삼종형금성위증시충희공묘지명(三從兄錦城尉贈諡忠僖公墓誌銘)」 지음.

   박명원은 연암의 재주를 아끼고 인정하였다.

- 사헌부 감찰로 옮겼으나 ‘사헌부(司憲府)’라는 이름이 중부(仲父)의 이름 ‘사헌(師憲)’과 같다하여

  사양하고,

- 제릉(齊陵, 태조비였던 신의왕후의 능으로 경기도 개풍군에 있다)의 영(令)으로 옮김.

 

1791년(55세)

- 종 5품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으로 전보되다.

   당시 흉년이 들어 곡상들이 쌀을 비싸게 팔거나 매점매석을 하여 곡가가 폭등했다.

   이때 곡가를 억제하고 매점을 금지하려는 의견들이 지배적이었으나, 연암은 그러한 정책을 쓰면

   상인들이 다른 지역으로 쌀을 팔러 가 버릴 것이므로 도리어 쌀 품귀현상이 심해질 것이며 또한

   서울에 이미 집적되어 있는 쌀의 방출을 막으면 다른 지역의 백성들이 굶주리게 된다는 이유로

   강력히 반대하였다. 이와 같이 곡가의 귀천과 곡물의 집산을 인위적으로 통제해서는 안 된다는

   연암의 견해가 채택됨으로써 그 후년의 기근에도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 12월, 유안준이 연암의 품계가 원칙이 없이 올라간다고 소를 올려, 종 6품으로 강등되어

  안의현감(安義縣監, 지금의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일대)으로 제수(除授, 천거의 절차를 밟지 않고

  임금이 직접 벼슬을 임명하는 것)되었다.

 

1792년(56세)

- 1월, 임지 안의에 도착. 안의는 거창현과 함양군을 이웃에 두고 있었으며 당시 인구는 5천여 호였다. 

  연암은 부임 즉시 송사를 엄격히 처리하여 고을 백성들 간에 분쟁을 일삼던 풍조를 바로잡고

  아전들의 상습적인 관곡 횡령을 근절했으며 관아에까지 출몰하던 도적들을 퇴치했다.

  또한 연암은 함양군의 제방 보수공사에 고을 백성들이 동원되자, 행군 대형을 짜서 일사불란하게

  지휘하여 공사를 완벽하게 해냄으로써 매년 동원되는 폐단을 막았다.

- 벗 김이소(金履素)가 우의정에 임명되자 「하김우상이소서(賀金右相履素書)」를 보냄.

  이 편지에서 화폐유통을 바로잡고 은의 국외 유출을 막는 방안에 대한 의견 피력.

- 문체반정의 바람이 서서히 일기 시작.

 

1793년(57세)

- 문체반정의 주동자로 지목하는 정조의 글을 갖고 남공철이 오자 연암은 자송문(自訟文)을 바침.

- 1월 24일, 역시 문체 반정으로 지목당한 이덕무(53세)도 병중에 자송문을 바치고는 다음날 사망.

   연암은 정조의 어명에 따라 「형암행장(炯菴行狀)」을 지음.

- 이덕무가 죽자 그의 유고집 출간.

- 유한준은 연암을 ‘호복임민(胡服臨民, 오랑캐 복장을 하고서 백성을 다스림)’,

   ‘노호지고(虜號之稿, 오랑캐의 연호를 쓴 원고)’라는 말로 모함.

- 봄에 도내에 흉년이 든 가운데 안의 고을이 가장 심하여 응당 공진(公賑)을 설치해야 했으나,

   연암은 녹미(祿米)를 떼어 사진(私賑)을 설치했으며 조정에서 내린 초피(貂皮) 등속도 받지 않고

   공명첩도 돌려보내었다. 죽을 끊여 기민들을 구휼함.

- 관아의 낡은 층고(層庫)를 헐어버리고 남과 북에 못을 파고 백척오동각(百尺梧桐閣), 공작관(孔雀館),

   하풍죽로당(荷風竹露堂), 연상각(烟湘閣) 등의 정자와 누각을 지음.

   담을 쌓을 때에도 중국의 제도를 모방하여 벽돌을 구워 썼다. 이에 대해서 유한준이 비방하였다.

- <열녀함양박씨 병서>를 지음.

 

1794년(58세)

- 차원(差員)으로 상경하다.

  특명으로 입시하여 안의현 및 연로의 농작 상황과 도내 민정들을 사실대로 보고하였다.

- 장남 종의가 성균시(成均試)에 응시하려 하자,

   이서구가 성균관장으로 있다고 편지를 보내 응시하지 못하게 함.

 

1795년(59세)

- 가을에 차남 종채 혼인.

- 9월 해인사를 구경하고 <해인사(海印寺)>라는 장편시를 지음.

 

1796년(60세)

- 3월, 임기가 만료되어 귀경.

- 서울에 돌아온 연암은 장차 저술 활동에 전념할 생각으로 계산동에서 거주

 

1798년(62세)

- 정조에게 <과농소초>를 지어 올리다.

 

1800년(64세)

- 정조 승하 

 

1801년(65세)

- 신유박해 일어남

 

1805년(69세)

- 10월20일, 가회방 재동 자택에서 연암 죽다.

 

 

(박종채 지음, 박회병 옮김/ 나의 아버지 박지원/ 돌베개, 1998)

 

 

 

 

 

 

 

 

 

 

 

 

- Praha / Flight Od Winter Bi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