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역대 왕들의 경세제민 - 부국강병 노하우

Gijuzzang Dream 2008. 3. 11. 03:13

 

 

 

역대 왕들에게 듣는다 / 국가 살림을 되살린 부국강병 노하우

 

 

 

새 정부가 내세운 국정목표는 일자리 창출을 통한 ‘경제 살리기’이다.

이는 경제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다.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약자인 경제(經濟)는

‘세상을 바르게 다스려 백성을 환난에서 구하다’의 뜻을 담고 있다.

이는 의식주(衣食住)로 요약되는 민생문제의 해결을 의미한다.

 

만백성의 의식주를 해결, 잘 먹고 잘 사는 태평성대를 위해

새로운 개혁과 앞선 아이디어로 부국강병을 꾀했던 역대 왕들의 혜안을 알아본다.


경세제민(經世濟民),

모든 민생문제는 의식주와 연관된다는 이치를 가장 먼저 통찰한 인물이

바로 춘추시대 전기에 활약한 제(齊)나라의 관중(管仲)이다.

 

그는 「관자」 [목민]편에서 이같이 주장했다.
“창고가 가득차야 백성들이 예절을 알게 되고, 의식(衣食)이 족해야 영욕(榮辱)을 알게 된다.”

백성을 부유하게 만드는 ‘부민(富民)’이 달성되어야

예의염치(禮義廉恥)를 가르치는 ‘교민(敎民)’도 실효를 거둘 수 있다는 주장이다.

 

공자가 「논어」[자로]편에서

“백성을 부유하게 만든 뒤 가르쳐야 한다”고 설파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경세제민의 방략에는 크게 두 가지 흐름이 존재했다.

‘경세’를 중시한 중농주의(重農主義)와

‘제민’을 중시한 중상주의(重商主義)가 그것이다.

 

평등을 중시한 중농주의는

‘경자유전(耕者有田)’을 역설하며 전제(田制)개혁에 초점을 맞춘데 반해,

자유를 중시한 중상주의는

‘개국통상(開國通商)’을 강조하며 장시(場市)개방에 주안점을 두었다.

 


경세지민의 첫 흐름이 된 중농주의


동양에서 중농주의의 효시는 맹자이고, 중상주의의 효시는 관중이다.

 

맹자는 기본적으로 ‘경세’가 전제되어야 ‘제민’이 이뤄질 수 있다고 보았다.

 

「맹자」[양혜왕 상]편의 다음 구절이 그 증거이다.
“항산(恒産, 안정된 생업)이 없으면서 항심(恒心, 안정된 마음)을 지니는 것은

오직 선비만이 할 수 있다. 일반 백성은 항산이 없으면 항심을 지닐 수 없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맹자가 사대부들의 ‘무항산(無恒産)’을 언급한 점이다.

 

그가 1차적으로 위정자들의 검박(儉朴)을 역설하면서 백성들에게 토지를 고루 나눠준 뒤

수확량의 10분의 1을 거두는 소위 ‘철법(徹法)’을 제시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는 농업을 본업(本業), 상공업을 말업(末業)으로 간주하는

숭본억말(崇本抑末)의 기조에서 나온 것이다.

 

조선조는 맹자사상에 기초한 성리학을 유일무이한 통치사상으로 내세운 까닭에

시종 농업을 치국의 근본으로 간주했다.

이익(李瀷)과 정약용(丁若鏞) 등의 소위 ‘경세치용(經世致用)’ 학파가 여전제(閭田制)를 비롯한

다양한 전제개혁을 시도한 것은 맹자의 ‘항산항심’ 논리를 구체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조 역대 군왕 중 ‘경세치용’ 사상에 입각해 부국강병을 이룬 대표적인 인물로

세종을 들 수 있다.

그는 토지의 옥척(沃瘠)과 수확의 풍흉(豊凶)에 따른 공평한 전세(田稅)로 ‘부국’을 달성한 뒤

이를 토대로 북쪽 국경을 개척하고 왜구를 소탕해 ‘강병’을 실현했다.

 

조선조가 성종 때에 이르러 「경국대전(經國大典, 보물 제1521호)」을 비롯한

모든 문물제도를 완비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세종의 이런 치국방략이 주효한데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조는 이후 중종반정을 계기로

신권이 강하고 군권이 약한 소위 ‘군약신강(君弱臣强) 현상으로 인해

차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군약신강’은 붕당정치와 권문세가의 토지겸병을 부추겨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정(還政) 등 소위 ‘삼정(三政)’의 문란을 야기했다.

이는 중농정책의 파탄을 의미했다.


중상주의에 입각한 부국강병책 도래

 

지방부호와 조정고관들의 반발 속에서

공물(貢物)을 쌀이나 베로 통일해 바치도록 한

대동법(大同法)이

숙종대에 비로소 전국적으로 실시될 수 있었던 것은

기존의 중농정책이 한계를 드러낸데 따른 것이었다.

 

대동법의 전면실시는 화폐(貨幣) 유통과 더불어

시장경제를 크게 자극했다.

이는 이앙법의 보급에 따른 광작(廣作)으로

많은 잉여인력이 도시로 대거 몰려들어

상업 내지 수공업에 종사한 사실과 무관치 않았다.

그럼에도 공상(公商)에 해당하는 시전(市廛)상인들은

소위 ‘금난전권(禁難廛權)'을 휘둘러 농민출신 사상(私商)들의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방해하고 나섰다.

이는 상업종사 인구의 증가로 인해 자연스럽게 형성된 시장경제의 발전흐름과 완전 배치되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조는 재위 15년(1791)

시전상인들의 금난전권을 박탈하는

소위 ‘신해통공(辛亥通共)'을 선언하고 나섰다.

정조의 중상정책 기조는 재위 18년(1794)의

‘갑인통공(甲寅通共)'으로 거듭 확인되었다.

 

이에 조선에도 경상(京商 서울상인)과 송상(松商 개성상인),

만상(灣商 의주상인), 내상(萊商 동래상인) 등의 거상(巨商)이

출현케 되었다. 이들은 인삼과 곡물, 비단 등을 소재로

일본 및 청국과의 삼각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백성들이 그 혜택을 직간접적으로 입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당시 중국은 이미 진상(晉商 산서성 상인)과 휘상(徽商 안휘성 상인), 조상(潮商 광동성 상인) 등의 눈부신 활약으로 최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박지원(
朴趾源)과 박제가(朴濟家)등

소위 ‘이용후생(利用厚生)'학파가

연경사행(燕京使行)을 다녀온 뒤 이구동성으로

개국통상(開國通商)을 통한 부국강병을 역설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들은 중상정책으로의 전환만이 피폐한 국세(國勢)를

만회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확신했다.

사실 당시 대토지소유가 일반화된 상황에서 한정된 토지로는

아무리 생산성을 높일지라도 민생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었다.

 

시대는 바야흐로 ‘경세 → 제민’의 중농정책에서

‘제민 → 경세’의 중상정책으로의 전환을 강하게 요청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용후생학파의 주장은 산업혁명 이후 서구 열강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며

중상주의에 입각한 부국강병을 추구한 흐름에 부응하는 것이기도 했다.

정조의 통공조치는 바로 이들 중상학파의 주장을 현실화한 것이었다.

정조가 도성 밖으로 자주 행차해 사영장인(私營匠人)을 비롯해 여러 사상(私商)들과

직접 접촉한 것도 통공조치의 일환으로 나온 것이었다.

당시 도성 일대는 상공업의 발달로 인해 사회 변동이 급격히 진행돼 국왕이 직접 나서

분쟁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중상주의에 입각한 정조의 부국강병책은

서양의 기중기 원리를 이용한 화성(華城)축조와

막강한 전력을 배경으로 한 장용영(壯勇營)의 설치로 나타났다.

당시 ‘친군위(親軍衛)'로 불린 장용영은 왕권강화의 상징이었다.


역사를 되짚어 21세기형 부국강병 이루고자


그러나 조선조는 정조 사후 세도정치(勢道政治)가 등장하면서 다시 급속히 피폐해지기 시작했다.

세도가들은 사상들의 이윤을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거두면서 매관매직(賣官賣職)을 일삼았다.

수령들의 가렴주구(苛斂誅求)로 크고 작은 민란이 접종하면서 조선조는 망국의 길로 치달았다.

대원군과 고종이 정조를 본받아 나름대로 개혁을 시도했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

당초 대원군이 시도한 일련의 개혁은 매우 볼만했다.

그는 당파를 초월해 인재를 고루 등용하고,

서민 중에도 유능한 자는 과감히 발탁하는 새로운 인사 정책을 펼쳤다.

특히 서원에 대한 대대적인 혁파조치는 조정의 권위와 통제력을 회복시켜

수령과 토호의 착취를 봉쇄하고, 국고 수입을 획기적으로 늘이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가져왔다.

대원군은 민생안정으로 다져진 ‘부국’을 토대로 함포를 건조하는 등

양이(洋夷)의 침공에 대비한 ‘강병’을 추진했다.

그러나 조선조는 그의 퇴진 이후 민씨의 세도정치가 부활하면서

다시 패망의 길로 치닫기 시작했다.

고종이 구본신참(舊本新參)의 정신에 입각해 추진한 광무개혁(光武改革)은

조선의 자주독립을 지키기 위한 최후의 부국강병 방략이었다.

그러나 이 또한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를 거둠으로써 끝내 무산되고 말았다.

격벽하는 21세기 동북아시대는
1백여 년 전의 상황을 방불하고 있다.

일제의 식민지배와 조국분단이라는 오욕의 역사를 안고 있는 우리에게

부국강병보다 더 중요한 목표는 있을 수 없다.

새 정부의 ‘경제 살리기’는 세종과 정조의 치국방략을 종합한

21세기 형 부국강병 책략으로 진행될 필요가 있다.
- 신동준 21세기 정치연구소 소장

2008-02-28. 월간문화재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