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세종(이 도)은 딸 정소공주의 죽음에 슬퍼하며,

Gijuzzang Dream 2008. 3. 11. 02:44

 

 

  

 

 청년 이도의 슬픔을 기리다  

 

 

 

이 글은 『世宗實錄』23 · 24권,

세종 6년 2월 25일부터 4월 15일 사이에 기록된

열여섯 개의 기사와 『世宗實錄』32권 세종 8년 4월 12일의 기사를 바탕으로 작성하였다.


"슬프다, 연약한 여식이여!
내 기도가 모자라서 인가?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네 목소리, 얼굴은 눈에 어른거리건만 넋은 어디로 갔는가!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어 가슴을 치며 슬퍼하노라"

 

                

 

아비는 말하노라.

목숨이 길고 짧은 것은 이미 운명이 정해져 있으므로

비록 움직일 수 없는 바이지만,

부녀간의 지극한 정리는 스스로 끊을 수가 없도다.

 

슬프다! 너의 일생은 연약한 여식으로 태어나

자태가 단정하고 맑았으며 품성이 곱고 아름다웠도다.

내가 너의 손을 이끌고 다닐 때 너의 행실은 진실로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었다. 

 

나이는 어렸지만 어른같이 훌륭하여

자애의 정이 쏠려 너를 어루만지고 사랑하기를 더욱 두터이 하였도다. 

 

네가 혼인하여 함께 편한 삶을 누리려 하였더니

어찌 하찮은 병에 걸려 좀 더 오래 살지 못하고

마침내 이러한 슬픔을 당할 줄 뜻하였으랴. 

 

내가 병 구호를 잘못한 까닭이냐,

너의 고운 목소리와 아름다운 모습은 눈에 완연하건만

곱고 맑은 너의 영혼은 어디로 갔다는 말이냐.

 

가슴을 치며 통곡하노라. 아무리 참으려 해도 눈물이 가슴을 적시는도다.

이제 현실에 지체하여 나의 슬픈 회포를 풀고자 하노라.

넋이여 앎이 있거든 이 내 말을 부디 들어주려무나.

 

- 세종 6년(1424 갑진 / 명 영락(永樂) 22년) 3월 3일(기묘) 2번째기사 
  내관(內官 최득룡(崔得龍)에게 명하여 왕녀에게 사제한 제문
  

 

 

문 앞에 봄이 와 있던 1424년 2월,

어린 딸이 홀연히 세상을 떠나자 나이 스물여덟의 젊은 아비는 한없는 슬픔을 이렇게 토로하였다.

 

연약하였으나 맑고 아름다웠던 딸이 아니었던가!

손을 이끌고 다니며 어루만져 사랑했던 딸이 아니었던가!

아비 이도(李?)는 조회와 시장을 삼일동안 폐하고 그 비통함을 달랬다.

하찮은 병으로 끝내 죽음에 이르고 말았던 그녀는

세종과 소헌왕후의 맏딸이며 세자 이향(李珦, 훗날의 文宗)의 누이, 정소공주(貞昭公主)였다.

 
世宗 6年 甲辰 2월 25일
王女卒于宮內, 年十三. 停朝市三日

 

열 살을 갓 넘긴 세자(훗날의 문종)는

“조물주가 누이에게 긴 나이를 주지 아니함”을 한탄하며

한 탯줄의 간절한 정을 술잔에 담아 “오직 나의 슬픔을 고(告)한다”라고 하였다.

 

 

- 세종 6년(1424 갑진 / 명 영락(永樂) 22년) 3월 4일(경진) 4번째기사
   세자
(世子)가 중사(中使)를 보내 왕녀에게 치제(致祭)한 제문


"아아, 영(靈)은 자태가 아름다웠고, 품성은 유순하고 아름다웠다.

양궁(兩宮)께서 사랑하시어 집을 이루기를 원하였더니,

슬프다. 조물(造物)이여, 어찌하여 너에게 긴 나이를 주지 아니 하였는가.

한 탯줄의 정이 간절하여 가슴만 만지며 눈물 흘리노라.

영원토록 길이 떠났으니 이 술 한 잔을 권하노라.

영(靈)이여 흠향하라. 오직 나의 슬픔을 고한다.”

 


  

열다섯 나이에 얻은 어여쁜 딸이 혼인하여 집을 이루기를 소망했던 젊은 아비는,

어렸으나 성인(成人)과 같은 품성을 지녔던 딸의 관(槨)에 칠(漆)을 하고

“현철한 아가씨”의 죽음을 애처로워하는 글을 새겨 함께 묻는 것으로

차마 스스로는 끊을 수 없는 부녀간의 정을 달래야 했다.

그 해 이른 봄, 세종은 이토록 깊은 슬픔을 안고 있었다.

 

1418년 6월,

세종은 폐세자인 맏형 이제(李?)의 뒤를 이어 세자에 책봉되었고

불과 두 달 후에 부왕인 태종과 여러 신하들의 뜻에 따라 왕위에 올랐다.

 

즉위 여섯 달 전에는 동생 성녕대군이 사망하고

그 해 12월에는 장인 심온이 정치적인 죽임을 당하였으며,

그 1년 후에는 큰아버지인 노상왕(老上王) 정종이,

그 다음 해에는 아버지와 불화했던 어머니 원경왕후가,

그리고 그 두 해 뒤에는 아버지 태종이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부왕의 상(喪)이 끝나갈 무렵 딸 정소공주가 “넋”이 되고 말았다.

 

스물두 살의 청년 국왕 이도(李?)는 즉위 후 십여 년 동안 상중이었는데

이 상황은 공적인 것이었으며 동시에 “집안의 일”이기도 하였다.

육선(肉膳)을 즐기고 풍채가 좋았던 세종이었지만

연이은 국상(國喪)은 정신적으로 또 육체적으로도 감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뿐이던가,

정치적인 이유로 몰락한 외가(外家)와 처가(妻家)로 인한

어머니와 아내의 불행한 삶이 세종의 등 뒤에 서 있었다.

이 무거운 가족사(家族史)의 끝자락에 일어난 어린 딸의 죽음은

“차마 스스로는 어찌할 수 없는” 아프고 아린 것이었다.

 

세종으로 하여금 지극한 효자이게 하였으며,

다정한 지아비이도록 그리고 두터운 정으로 어루만져 사랑하는 아버지이게 한

세 여인의 삶은 온전히 다사롭지 못했다.


공주는 1424년 2월 25일 궁중에서 졸(卒)하였으나 국상(國喪)이 아니었으므로

그녀의 시신은 다음 날 광연루(廣延樓)의 서문으로 나가

어려서 자란 이맹균(李孟畇)의 집에 빈소(殯所)를 마련하였다.

그 해 4월 경기도 고양현 북쪽 산리동(酸梨洞) 언덕에 지석(誌石)을 묻고 묘표를 세워

장사하였으니 일찍 생을 마감한 숙부 성녕대군(誠寧大君)의 묘소 옆이었다.

 

2년 뒤 망자와 마지막 이별을 고하는 담제(禫祭)를 지내며

세종은 딸을 보내는 마음을 제문에 담았다.

“부녀간의 정은 언제나 변할 수가 없으니
사랑하고 귀여워하는 마음이 어찌 변할 리가 있겠는가!
아아, 네가 죽은 것이 갑진년이었는데
세월이 바꾸었어도 생각은 더욱 간절하구나.
이제 담제일이 닥치니 내 마음의 슬픔은 배나 절실하구나”


 

재위(1418-1450년)기간 동안 많은 상(喪)을 치른 세종이었으나

군왕으로서의 공적인 슬픔이 아니라

어린 딸의 죽음에 눈물을 멈추지 못하는 청년 이도(李도)의 개인적인 슬픔이

이토록 절절하게 표현된 적은 없었다.

  

세종은 세월이 여러 번 바뀌어도 딸의 모습을 잊지 못하였으나

뒷날의 사람들은 그의 슬픔을 오래 기억하지 못했다.


1938년, 성녕대군과 정소공주의 묘역 일대는 일제에 의해 농장으로 개발되었고

이 과정에서 정소공주의 묘를 비롯한 조선 초기 왕족의 묘들은 무참히 파괴되어

지금의 고양시 원당리에 있는 서삼릉(西三陵)으로 한꺼번에 이장되었다.

이 과정에서 온전히 지켜지지 못한 부장품들은 허망하게 산일되었으니,

  

 

『世宗實錄』23권 6년 3월 23일에 “아아, 슬픈 일이로다”라고 탄식하며,

“애처롭다, 현철한 아가씨여!
길한 땅으로 점을 치고, 좋은 날로 정했으니
이미 굳고 또 정밀하여, 만세토록 갈무려 계실 곳이라”
 

 

 

 

- 세종 6년(1424 갑진 / 명 영락(永樂) 22년) 3월 23일(기해) 5번째기사
- 예문 제학 윤회가 찬한 왕녀의 묘지명(王女墓誌銘)
 

“영락 22년 갑진 2월 경자에 우리 주상 전하의 맏딸이 병으로 졸(卒)하였으니,

연령이 겨우 13세이다. 특히 공주(公主)의 칭호를 주시고,

올해 4월 신유에 고양현(高陽縣) 북쪽 산리동(酸梨洞) 언덕에다 장사한다.

 

공주는 나면서부터 현숙하고 완순(婉順)하며,

자태와 용모가 단정하고 개결(介潔)하였다.

총명하고 슬기롭기가 범인과 달랐으며,

자라서는 장중(莊重)하고 말이 적었고,

즐거워하고 성냄이 얼굴빛에 나타나지 아니하였다.

 

양궁(兩宮)께서 자애하기를 더욱 두터이 하였으며,

궁액(宮掖) 가운데에서 모두 공경하고 우러러보아,

엄숙하면서 화목한 행실이 있어

길이 귀척(貴戚)들의 의범이 될 것을 기대하였더니,

불행하게도 나이가 계(?)할 때도 미치지 못하고

급거히 양궁(兩宮)의 슬픔을 끼치었으니,

진실로 천도(天道)란 앎이 없는 것이라 하겠다.

아아, 슬픈 일이로다.” 

 

명(銘)에 말하기를,  


“애처롭다 현철한 아가씨여,
일찍부터 태교(胎敎)를 받으시어
덕도 있고 용모도 뛰어났으며,
능히 삼가하며 효도하였는데,
천도가 창망(蒼茫)하여
어느덧 유명을 달리 하였도다.

 

국인(國人)들의 슬픔을
어찌 다함이 있으리오.
길한 땅으로 점을 치고
좋은 날로 정했으니,
이미 굳고 또 정밀하여
만세토록 갈무려 계실 곳이라.”


하였으니, 예문 제학(藝文提學) 윤회(尹淮)가 찬(撰)한 것이었다.

  

예문관 제학 윤회(尹淮)가 찬(撰)한 그대로 새긴 묘지(墓誌)는 고려대학교박물관에,  

공주의 태(胎)를 넣었던 것으로 알려진 네 귀가 달린 두 개의 항아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사진 1,  사진 2). 

 

 

 

<사진 1> 정소공주 묘 출토 분청사기상감초화문항아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진 2> 정소공주 묘 출토 분청사기인화문항아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덧없어라! 허망하여라!

만세토록 갈무려 계실 곳이라 하였건만,

오늘 나에게는 오래전 스물여덟 청년 세종의 안타까운 슬픔을 기릴 곳이 없다.

 

박물관 유리장 너머에 마치 열 세 살의 어린 그녀처럼 서 있는 이 항아리를

오롯이 그녀인양 바라보며 건널 수 없는 시간의 강가를 서성인다.

문화재청 청주국제공항 문화재감정관실 박경자감정위원

- 2008-03-10  문화재칼럼

 

 

 

 

(1) 분청사지 상감 풀무늬 항아리 (粉靑沙器 象嵌 草花文 四耳壺) - 내항아리(內壺)

 

 

 

15세기 전반, 높이 21.2㎝,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유물번호: 덕수(德壽) 6483)

세종대왕(1418~1450 재위)의 장녀 정소(貞昭)공주의 묘에서 출토

 

 

원래 정소공주 묘소는 경기도 고양군 벽제면 대자리에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서삼릉으로 강제 이장되면서 함께 묻혔던 유물이 출토된 것으로 보인다.

분청사기의 초창기 모습을 잘 보여주는

3점의 분청사기 네 귀 달린 항아리(사이호, 四耳壺)가 나왔는데,

풀꽃무늬(초화문)를 간소하게 상감하여 표현한 항아리와

4줄의 연속된 작은 원무늬를 도장으로 촘촘하게 인화 장식한 항아리 2점이 잘 알려져 있다. 

 

묘 출토품이지만 태(胎) 항아리의 형태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그 제작 시기를

정소공주가 태어난 1412년(태종 12)부터 사망한 1424년경(세종 6) 사이로 추정한다.

 

내항아리(內壺)와 외항아리(外壺)가 함께 출토되었으며,

두 항아리는 무늬를 장식하는 기법이 대조적인데, 이러한 차이점은

고려 말 상감청자에서 인화기법 분청사기로 발전하는 과도기적인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내항아리는 풀꽃무늬(초화문)가 있으며, 주로 상감기법을 써서 무늬를 넣었다.

인화기법의 국화무늬가 약간 곁들인 활달한 초화무늬로 그릇 전체를 메웠고,

회색 태토에 담청색 유약을 입힌 전형적인 상감기법의 분청사기이다.

인화분청사기 초기의 양상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어깨 부분과 풀꽃 무늬 사이에 어우러져 인화 장식된 국화무늬는

고려말 상감청자의 여운이 다소 남아있지만,

조선화된 새로운 상감 분청사기의 면모를 잘 살펴볼 수 있다.

 

 

   

 

 

 

(2) 분청사기 인화무늬 항아리 (粉靑沙器 印花文 四耳壺) - 외항아리(外壺)

 

 

15세기 전반, 높이 19.1㎝,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유물번호: 덕수(德壽) 6484)

세종대왕의 장녀 정소(貞昭)공주의 묘에서 출토

 

 

외항아리(外壺)는

이 분청상감초화문사이호(내항아리)와 한 조를 이루는 분청인화문사이호(외항아리) 역시

분청으로서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몸체 중심에 작은 원이 집단으로 이루어진

꽃무늬 도장을 촘촘하게 찍는 인화기법을 사용하였는데,

아랫부분이 변형된 연판문은 상감기법으로 처리하여

고려의 상감청자에서 조선 분청사기로 정착해가는 단계를 시사한다.

 

 

앞에 소개한 분청상감초화문사이호는 원통형으로 특이한데,

이 분청인화문사이호는 구연이 외반하고 동체가 긴 입호로 흔한 기형이다.

그러나 중앙에서 저부까지 거의 사면을 이루며 줄어드는 등

기형에는 긴장감도 없고 풍만감도 없다.

 

이 정소공주묘 출토 항아리 한 쌍(내항아리와 외항아리)은

유태의 질과 문양 및 구도 등에 있어 상감문과 인화문이 주요 문양으로 사용되어

상감분청, 인화분청이 각각 발달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는 유물이다.

 

 

 

 

 

분청사기의 성격은 15세기 초에 뚜렷해진다.

 

15세기 초에는

정소공주묘(貞昭公主墓) 출토 분청상감초화문 사이호(粉靑象嵌草花文四耳壺, 1412∼1424),

분청상감연어문 정통5년명 대반(粉靑象嵌蓮魚文正統五年銘大盤, 1440),

분청박지연어문 고봉화상 골호(粉靑剝地蓮魚文高峯和尙骨壺, 1430),

분청귀얄 성화14년명 호(粉靑―成化十四年銘壺, 1478),

분청귀얄철화 가정15년명 묘지편(粉靑―鐵畵嘉靖十五年銘墓誌片, 1536) 등의 예에서 보다시피

 

인화무늬와 상감무늬수법이 조선초기부터 거의 동시에 발달하였고,

이어서 박지기법→귀얄기법→철화기법의 순으로 발달하였음을 보여준다.

 

15세기 중엽에 이르면 인화기법 · 상감기법 · 박지기법 · 음각기법 등이 더욱 세련되어지며,

철화기법 · 귀얄기법 · 분장(덤벙)기법은 15세기 후반에 성행했다.

16세기에 들어오면 인화기법과 귀얄기법이 함께 사용되고 귀얄기법과 분장기법이 더욱 증가한다.

 

 

 

 

 

 

분청사기

발생기

(약 1360년경∼약 1420년경)

- 고려와 조선왕조의 교체시기와 겹치는 시기

 

- 상감청자는 무늬, 형태 등이 흐트러지고 청자의 색도 압록색을 띄면서 쇠퇴해

간다.

 

- 조선왕조의 성립을 배경으로 퇴화해 간 고려 상감청자무늬가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하여 인화기법이 새로 정착되어 가는 시기

- 특징은 공안부 · 경승부 · 인녕부(仁寧府) 등의 관사명이 새겨있다.

- 청자상감무늬의 여운과 변모를 보여주는

정릉(正陵) 능호가 새겨진 청자상감정릉명연당초문대접

(1365년경)

 

분청사기공안명연당초문대접

(1400∼1420년)

발전기

(약 1420년경∼약 1470년경)

-분장기법이 다양하게 발전하여 분청사기의 특질이 뚜렷해지는 시기

 

태토가 밝아지고 유약이 투명해져 세종치세 연간에 그 절정을 맞는다.

-이 시기에 우수한 백자도 생산되어 1425년에는 명나라 인종이 조선왕조에 백자를 요구해 오기도 한다.

분청사기의 인화기법은 더 세련되어짐.

 

1468∼1470년경 전후 경기도 광주에 관요(官窯; 分院의 개념이 이때에 생김)가 운영되면서 공물(貢物)의 하나였던 분청사기의 제작은 줄어들어 쇠퇴하기 시작

- 정소공주묘 출토

분청상감초화문사이호(1412∼1424)

 

분청박지연어문고봉화상골호(1430)

 

분청상감연어문 정통5년명대반(1440) 등

쇠퇴기

(약 1470년경∼약 1540년경)

- 상감 · 인화기법의 분청사기가 쇠퇴해 가는 반면 지역특색이 뚜렷해진다.

충남 공주 학봉리의 철화기법 분청사기가 그 대표적인 예.

 

- 발전기와 쇠퇴기의 구획선은 광주 분원의 성립시기에 근거하고,

 

- 쇠퇴기에 들어서자 분청사기를 만들던 가마들은 분청사기 제작을 그만두거나 백자생산으로 이행해가는 현상.

 

- 백자생산으로 이행

→ 대표적인 가마는 광주직할시 충효동가마(1963년과 1991년 발굴)와 공주 학봉리가마(1927년과 1992년 발굴)

-《신증동국여지승람》 토산조에 자기소 · 사기소 · 도기소 지역이 전국에 48개소만 기록.(1481년경 상황)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모두 324개소(자기소 139, 도기소 185)의 자기와 도기를 굽던 곳이 조사되었다.

(1424∼1432년 상황)

 

- 두 문헌기록을 비교하면 분청사기가 쇠퇴한 현상이 파악된다.

- 쇠퇴기는

백자로의 이행과 표면백자화의 길을 모색하여 귀얄기법과 담금분장(덤벙) 기법이 성행하면서 서민용의 막그릇을 생산한다.

소멸기

(약 1540년경∼약 1600년경)

 

- 백자에 흡수당하여 분청사기의 제작은

  상감청자로부터 자연발생한 것처럼 자연 소멸한다.

 

 

 

 

 

  **** 정소공주에 관한 <세종실록> 내용 **** 

  

 

세종실록

세종 6년 갑진

(1424,  영락 22)

3월 23일(기해) 

 

왕녀의 추증을 시행하도록 예조에서 아뢰다

예조에서 계하기를,

“아이로 성인(成人) 전에 죽은 왕녀(王女)에 대한 추증(追贈)은

옛날 법제를 참고하여 보건대,

송나라 공복제(恭福帝)의 딸이 나이 다섯 살에 훙서(薨逝)하였는데

수국공주(隋國公主)를 봉하였으니,

이제 왕녀의 추증도 이 제도에 의하여 시행하소서.” 하였다.

세종 6년 갑진

(1424, 영락 22)

4월 10일(을묘)

 

예조에서 정소공주의 추증 방법에 대해 아뢰다

예조에서 계하기를,

“정소 공주(貞昭公主)를 추증(追贈)하는 것은 옛 제도대로

계빈(啓殯)하는 날에 내시(內侍)를 보내어 추증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세종 6년 갑진

(1424, 영락 22)

4월 15일(경신)

 

정소공주를 고양현에 장사지내다

정소공주(貞昭公主)를 고양현(高陽縣)에 장사(葬事)지냈다.

세 공신(功臣)과 의정부 육조 당상이 성문 밖까지 장송(葬送)하고

각기 노제(路祭)를 베풀었다.

세종 8년 병오

(1426, 선덕 1)

4월 12일(을해)

 

고 정소공주의 담제를 지내다

 

정소공주(貞昭公主)의 담제(禫祭)를 지냈는데, 그 제문에 이르기를,

 

“장수(長壽)와 단명(短命)에 기수(氣數)가 있으니,

예로부터 피하기 어렵지만,

녀간(父女間)의 정은 언제나 변할 리가 없는 것이다.

대개 사랑하고 귀여워하는 마음은 천성에서 나오는데

어찌 존망(存亡)을 가지고서 다름이 있다 하겠는가.

아아, 네가 죽은 것이 갑진년(甲辰年)이었는데,

세월이 여러번 바뀌매 느끼어 생각함이 더욱 더하도다.

 

이제 담제일(禫祭日)이 닥쳐오매 내 마음의 슬픔은 배나 절실하며,

나이 젊고 예쁜 모습을 생각하매 영원히 유명(幽明)이 가로막혔도다.

이에 중관(中官)을 명하여 사실을 진술하고 전(奠)을 드리게 하노라.

 

아아, 제도는 비록 한정이 있지마는 정에는 한정이 없도다.

영혼이여, 어둡지 않거든 와서 흠향하기를 바라노라.” 하였다.

 

 

 

 

 

 

- 꿈의 요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