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 떠나고(답사)

구리 - 한강 관방(關防) 요새

Gijuzzang Dream 2008. 2. 19. 01:14

 

 

 

 

 '한강 관방(關防)요새'  -  구리시의 지리 · 역사  

 

한강유역의 상징적 고구려 유적인 아차성(阿且城).
동쪽으로 한강의 물줄기가 하남시 검단산 협곡을 지나 미사리 모퉁이를 돌아,

구리시 한강연안 일원을 오른편으로 느긋하게 껴안으며

아차성 요새의 절벽을 휘감으면서 서쪽으로 흘러 서울 도심을 관통하고 있다.

동서남북이 한눈에 잡히는 곳이다.

양평, 남양주, 하남, 남한산성, 몽촌토성, 풍납토성 송파일대와

남산을 중심으로 한 서울의 도심이 손에 잡힐 듯 하고

아차산 등줄기를 경계로 한 서울시 광장구, 중랑구, 노원구 일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서북으로 도봉산, 북한산, 북악산이 도성의 북방을 수호하듯 둘러있고

관악산 청계산이 남쪽으로 버티어 있다.

아차산성, 과연 천하의 한강요충 관방중지(關防重地)임을 웅변하듯,

이 곳 산성에서 이어진 성벽은 구불구불 등줄기에 이어져 망우리 고개에 이른다.

아차산 능선 남쪽과 동구릉 산자락이 구리시 일원이다.

그야말로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한강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각축전을 벌일 때

구리시 산하는 한강연안의 요충지로 관방의 역할을 했음이 아차산 성벽으로 설명되고 있다.

아차성에서 지호지척에 있는 하남 위례성에 백제가 1세기 무렵 도읍하면서

한강은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 무대가 된다. 한강유역은 한반도에서 노른자위에 해당하기 때문에

이 곳을 차지하는 정치세력이 역사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다.

백제가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국운의 융성기를 맞을 때는 그 세력을 북으로 확대, 고

구려의 평양까지 공격하는 형세였다.

그러나 5세기 무렵 고구려는 광개토왕, 장수왕의 전성기를 맞아 한강유역에 손을 뻗쳤다.

이후 삼국이 서로 겨루면서 한강유역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쟁탈전을 벌였다.

그러던 중 6세기 중반 신라의 진흥왕이 이 지역을 차지하고 그 기반 위에서 삼국을 통일하기전의

고구려 전성시대 판도를 보면 죽령, 조령, 괴산, 진천, 화성의 남양만 당항성이 고구려 영토였고

백제는 천안 이남의 충청, 전라도, 신라는 낙동강 유역의 경상도 일원이 영역이었다.

그후 다시 신라의 전성기때는 경기도, 강원도, 함경도, 경상도 일원이 신라의 수중에 있었다.

이때 경기산하 중심축은 남한산성이 있는 한성(漢城)이었고,

한강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마주보고 있는 구리시의 아차성이 호형호제의 요충이었다.

이 때의 서해안 당항성은 선진문화국 중국과 직결할 수 있는 바다의 루트, 대 중국 교통의 요지였으니

경기도를 아우르는 서해안의 물줄기 한강의 여울목이 구리시 아차산 자락이었다.

이처럼 고구려의 전성기였던 5세기 무렵 아차산성은

동북아시아의 최강자였던 고구려의 최남단 전초기지가 있었던 관방요새였다.

1997~2001 발굴조사에서 온돌시설이 있는 건물터가 밝혀졌고

고구려 중기의 대표적인 토기류들이 출토되었으며, 화살촉과 도끼를 비롯한 많은 양의 철기류들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출토유물 이외에 유적 내부에서 5~6세기의 고구려 유물 이외에는

출토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차산 일원의 성벽유적과 보루는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점령하기 위한 군사 전초기지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신라에게 빼앗긴 한강일원과
조령의 서쪽과 죽령의 북쪽을 되찾으려는 실지회복의 웅지를 불태우며

원정군의 총수로 자원출정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 곳 아차성에서 전사한 고구려장군 온달(溫達)의 일화를 외면할 수 없다.

<삼국사기> 열전 온달편이다.

 

590년이었다. 영양왕이 즉위함에 이르러 온달은 왕에게 아뢰기를

“신라는 우리 한북(漢北)의 땅을 갈라 빼앗아 군(郡), 현(縣)으로 만들었으므로

백성들은 원통함에 싸여 아직 부모의 나라를 잊어버리지 않고 있사오니 원컨대 대왕께서 신을

어리석고 불초하다 마시고 군사를 내어주시면 한번 나가 싸워 우리의 땅을 회복하겠나이다.” 하니

왕은 이를 허락하였다.
온달은 군사를 거느리고 떠날 때 맹세하기를

“내 계립현(鷄立峴, 지금의 문경)과 죽령(竹嶺, 경상~충청 도계(道界))의 서쪽땅을

우리땅으로 돌리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하고 출정하여

드디어는 신라군과 아차성(阿且城, 서울시 광장동 광장리산성, 廣壯里山城)) 밑에서 싸우다가

적의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에 그를 장사 지내고자 하는데 영구(靈柩)가 땅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으므로

공주(公主)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이미 결판이 났사오니 마음놓고 돌아가시오” 하자 비로소 관이 움직여서

드디어 장사를 지냈는데 왕은 이 말을 듣고 크게 통곡하였다.

영양왕 그는 누구인가?

선왕인 장수왕(長壽王)이 평양으로 천도하며 남진책의 터전으로 마련한 조령, 죽령 이북의 땅을

신라에게 빼앗긴 것을 분통스럽게 여겨 실지회복에 부심하고 있을 때였다.

여기서 말한 공주는 저 유명한 어려서 울기를 잘해 평원왕이 늘 입버릇처럼

네가 울기를 잘하니 사대부에게 시집가기는 틀렸고 바보온달에게나 시집보내야겠다고 해서

온달의 아내가 된 평강공주(平岡公主)였다. 비록 가난하나 착한 성품의 남편을 지성으로 섬겨

후주 무제의 침공군을 선봉에서 격퇴한 무공제일의 전공으로 대형(大兄)이 되게 한 장본인이다.

구리시 아차산성 보루와 연결된 아차성은 백제가 쌓은 성으로

광진구 광장동에 있는 사적 234호의 역사현장이다.

백제 개로왕이 475년 고구려군의 침공으로 한성(남한산성)이 함락되었을 때 시해된 곳도 이 곳이다.

해발 200m의 산정에서 한강을 향하여 동남으로 축성된 말발굽모양의 산성으로

장한성(長漢城), 광장성(廣壯城)으로도 불린다.

제2차 세계대전중 '조지 패튼' 장군 휘하에서 용맹을 떨친 '월턴 워커'대장이

6·25 한국동란 때 미8군 사령관으로 참전, 1950년 12월 이 곳 북방에서 전사하여

그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는 워커힐이 한강변 산하에 묻혀있다.

온달장군의 전사와 연상되는 묘한 여운이다.

 

뿐만 아니라 한강을 동서로 길게 감싸면서 천연방벽을 방불케 하는

해발 200여 m 내외의 구릉에 설치된 성벽은 그대로 한강방어선 그 자체의 지형으로

망우리고개로 이어져 있다. 공격과 방어에 더할 나위없는 최적의 전선(戰線)이다.

 

1907년 풍운급박한 구한말 13도창의 대장 이인영이 8도 의병을 모집,

11월 망우리고개에 집결토록 하여 이듬해 1월 일본군과의 대회전 서울진공작전을 전개했던 곳.

아차산의 지리적 여건은 이렇게 근대전에도 전략거점이 되었다.

6세기말 고구려 원정군의 총수 온달의 전사는

결국 치열한 한강선 돌파작전에 있어서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니

여기서 우리는 신라인의 이 방면 방비의 부동의 태세와 한강의 지리를 또한번 인식해 보는 답사여정이다.

 

강건너 몽촌토성과 풍납토성, 그 배후로 남한산성의 아아(峨峨)한 산세에

5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통일신라기의 경기산하를 그려보는 시간이다.

신라는 한강유역을 확보한 후

고구려의 침입을 방비하기 위하여 요소마다 강력한 군단인 정(停)을 설치한다.

마주 보이는 남한산성에는 한산정(漢山停), 이천방면에는 남천정(南川停),

여주의 한강변에는 골내근정(骨乃斤停)을 배치하여 군사상 편의에 따라 이동하는

강력한 이동식 군단의 편제로 고구려의 남침을 방어하는 총력태세를 완비한다.

삼국통일의 국력이 응집되어가던 6세기 후반 경기산하는 남천정, 골내근정, 한산정이 한강의 요새에서

역사발전의 일익을 담당했던 곳임을 지금도 일깨우고 있다.

구리시를 감아돌아 서울 도심을 관통하는 한강의 물줄기 저멀리

그 옛날 이곳을 지키던 한산정의 상징이었던 황색깃발이 역사의 잔영으로 펄럭이는 듯 하다.

작열하는 7월 정오의 햇살, 그 환영에서 세계로 웅비한 국력의 상징, 올림픽공원 몽촌토성이

서남으로 이곳 구리시 아차산과 기각지세를 이루면서

변함없는 경기산하의 어제와 오늘을 이야기하는 역사의 파노라마 그 소리를 들려주고 있다.

<강대욱, 경기문화재단 편집위원>

 

 

 

 

 

 광나루 · 평구역 지나 관동가는 역사 여정  

 

서울시 광진구와 경기도 구리시는 용마산과 아차산을 이어 만든 아차산성이 경계를 이룬다.

아차산성에서 구리시 방향으로 조금 내려가면 대성암이라는 절이 나오는데,

그 뒤편이 범굴사(梵窟寺) 터라고 한다. 이 곳에서 남쪽으로 광나루까지,

그리고 광나루부터 한강변을 따라 왕숙천까지 각기 서쪽과 남쪽으로 담장을 쌓아 만든 말 목장이 있었다.
원래 있던 망우리 목장에 추가하여 조선 세조 때 만든 것이다.

목장의 동쪽과 북쪽에는 담을 쌓지 않았는데 내와 산이 자연 담장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한창 아파트촌으로 변모해버린 구리시 토평리가 바로 그 곳으로 조선후기에는

유랑민들이 임시거처로 토막(土幕)을 짓고 살았지만 침수가 잦은 저지대라 주거지역은 아니었다.

세종의 여덟 째 아들 영응대군(永膺大君) 이염(李琰)의 원당(願堂)으로 지정된 범굴사는

실은 그 남쪽 광나루 위 용당산 기슭에 있던 양진당(楊津堂 또는 楊津祠)과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 같다. 범굴사는 실록 등 문헌에 호굴사(虎窟寺)라고도 나오는 것을 보면

범굴사의 '범'은 한자어가 아닌 우리말 '범'임을 알 수 있는데 양진당 역시 조선중기까지 '침호두(沈虎頭)',

즉 범 대가리를 한강 물에 넣어 기우제를 지내던 신사(神祠)여서 그렇다.

양진(楊津)은 양주의 나루, 광진(廣津)은 광주의 나루라는 뜻이지만 결국 같은 나루터를 지칭한다.

그러나 이는 시대의 변화를 반영한 것으로

고려 때까지도 이 곳에 양주관아가 있었으므로 '양진'이라고 불러야 마땅한 것이었지만

조선에 들어와 새로운 도읍지 한양과 양주읍치와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

양주읍을 북쪽 주내면으로 옮기면서 광주권의 영향이 커지자 어느새 양진이 광진으로 바뀐 것이다.

그러나 양진당의 명칭은 '광진당'으로 바뀌지 않고 이 곳의 옛 이름을 그대로 간직해 온 것이다.

강 건너 광주 쪽에서 세고탄(洗姑灘)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는 광나루는

한강을 대표하는 제사 장소이기도 하다.

한강은 신라 때는 4대강의 하나인 북독(北瀆)으로서 중사(中祀)의 대상이었고,

이후는 소사(小祀)로서 역사 이래로 나루 위 양진당에서 국가 주관으로 제사를 행해왔다. 

양진당은 화룡제(畵龍祭), 즉 용의 그림을 걸고 기우제를 지내던 곳으로 유명하였다.

비를 내리게 하기 위해 물의 신인 용신(龍神)이 산다는 한강에 범 대가리를 넣는 것은

양으로 음을 달래어 기를 누르려는 음양엽승(陰陽厭勝)의 한 술법인 것이다.

기우제 때 도사(道士)들에게 용왕경(龍王經)을 읽게 한 것이나,

양진당이 위치한 용당산(龍堂山)이란 산이름도 양진당 기우제의 내력을 전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지붕에 차양을 단 두 칸의 양진당 내부에는 정면에 단이 있고,

그 위에 '양진지신(楊津之神)'이라고 쓴 위패를 올려놓았다.

제사는 소재관(所在官)인 양주목사가 주관하였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 번성한 성리학의 기세로

국가 제례에서 도교와 불교, 그리고 무속이 뒷전으로 밀리면서 양진당에 대한 관리도 소홀해져

당 안에 먼지가 쌓이고 기구가 파손되어도 바로 수리되지 않고 방치되었다.

기우제 제물도 구하기 힘든 범 대가리 대신 멧돼지 한 마리를 올렸다.

양진당은 국가의례 장소로서는 쇠퇴하였으나,

조선후기에 이르면 그 동안 융성해진 상업활동을 반영하듯

광나루를 이용하는 뱃꾼들과 상인들에게는 더욱 가까워져 매년 2월과 8월에 용신제가 행해질 정도로

민간신앙의 중심이 되었다. 왕실 원당이었던 범굴사의 처지도 마찬가지였음은

절터에 남아있는 두 건의 암각문을 통해 알 수 있다.
하나는 시주자 명단을 적은 '범굴사불량시주기(梵窟寺佛粮施主記)'이고

다른 하나는 시주한 돈으로 매입한 논밭의 규모와 위치를 적은 '범굴사불량권(梵窟寺佛粮券)'인데,

거래된 전답의 매매가격으로 보아 만들어진 시기는 한말로 추정되며,

시주에 참여한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양민들이었다.

서울을 가기 위해 광나루를 건너는 여행객들은

주로 영남에서 올라온 자들로 서울 목적지에 따라 현 옥수동 부근인 두모포(杜毛浦)를 거쳐

수구(水口)가 있는 광희문에 이르는 길과, 살곶이다리를 건너 동대문에 이르는 두 길로 나뉘어 갔다. 

그러나 가평 등 동북쪽에서 서울로 오는 여행객들은 광나루를 거칠 일이 없었는데,

그 이유는 이들이 반드시 들리게 되어있는 평구역에서 서울까지는

곧장 망우리 고개를 넘어가는 것이 최단거리였기 때문이다.

평구역(平丘驛 혹은 平邱驛)의 위치는 현 남양주시 와부읍 삼패동 철로변 북쪽이다.

찰방(察訪) 한사람이 우역(郵驛)을 맡았으며 촌락이 있고 주점이 있어 항상 행상들로 붐볐다.

 

평구역이 서울과 관동(關東)을 왕래하는 여행객들을 모으고 또 흩어지게 하는 교통 중심지였던 것처럼,

서울에서 평구역에 도착하기 조금 못미쳐 만나게 되는

수석동의 석실서원(石室書院) 또한 문객(文客)들의 중심지였다.  

게다가 석실서원은 미음나루에 접해 있어서 강상교통의 이점까지 갖추고 있었다.

물론 이 모든 것을 갖추었더라도 그 곳에 제향(祭享)된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1652) 이하

위 장동 김씨들의 위세와 실력이 받쳐주지 않았다면 모두 헛일이었을 것이다.

평구역에서 가평 방향으로 가는 길을 더듬어 보면 지금의 86번 지방도로와 거의 일치한다.

길 도중에 수리넘이재(車逾嶺), 너븐바위(廣巖)를 만나고

더 진행하면 되고개(胡峴)와 야아목고개(耶兒項峴)를 넘는다.

이 코스는 평구역말에서 만난 우종성(70)씨로부터 들은 소의 이동경로와도 일치한다.

'채꾼(소몰이꾼)'들에 의해 춘천 등지에서 마석우리로 모인 소와,

원주 등지에서 양평 무드리나루를 건넌 소가 앞서 말한 길을 타고 내려와 이 곳 역말로 와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새벽 3~4시께에 출발하면 아침에 여는 숭인동 우시장에 닿을 수 있었다. 

기차가 이동수단으로 이용되기 전까지 소의 집결지로 번성했던 평구역말의 모습은

'윤순돌'이라는 마방 주인의 문패가 그대로 걸려있는 '큰대문 한정식' 식당 안으로 들어가면

일부나마 그 흔적을 접할 수 있다.

평구역말과는 달리 평구마을은
현재 대동법 시행을 주도한 김육(金堉, 1580-1658)과

아들 김좌명(金佐明, 1616~1671) 등 청풍 김씨 묘와 신도비가 있는 묘역으로 남아있다.

 

와부읍 월문리에서 동남방향 양수리 쪽으로 내려오면 조안면 송촌리 송곡에서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1561~1613)이 은퇴 후 거주한 별서(別墅) 터를 볼 수 있다.

 

월문리에서 동북방향으로 진행을 계속하여 수리넘이재를 넘으면 화도읍 차산리가 나오는데

이곳에서는 이순지(李純之, ?~1465)의 묘를 만날 수 있다.

 본관이 양성(陽城)인 이순지는 문과에 급제한 사대부출신이지만

세종의 명을 받아 기술직 소관인 역법(曆法)을 연구하여 정인지(鄭麟趾), 김담(金淡) 등과 함께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을 저술하는 등 당대는 물론 그 이후로도 보기 드문

천문지리학의 대가가 되었다. 간의(簡儀) · 규표(圭表) · 앙부일구(仰釜日晷),

그리고 보루각(報漏閣) · 흠경각(欽敬閣)도 모두 이순지가 세종의 명(命)을 받아 이룬 것이다.
세종 때에 이루어낸 빛나는 과학사 업적 이면에는 이와 같이 기술직에 인재를 투입한 임금과

어명을 적극 받아들인 신하간의 합심이 있었던 것이어서

오직 돈벌이에만 인재가 몰리는 요즈음 세태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세종은 물론 세조 때까지도 천문과 지리에 관한 방대한 지식으로 임금의 사랑을 받아온 그였지만

일찍 과부가 된 딸이 여장을 한 사노와 간통한 사건으로 인해 말년은 그다지 순탄하지 않았다.

<정승모 지역문화연구소장〉

 

 

 

 

 

 경기북부 국찰, 봉선사  

 

경기도는 예나 지금이나 왕경(현재의 수도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지리적 특징을 지니고 있는 땅이다.

특히 도성에서 100리 안에 왕릉이 만들어진 점에서 경기도는 '왕릉의 땅'이다.

조선의 왕릉은 강원도 영월 땅에 있는 단종의 장릉(莊陵)을 제외하고

38선 이북 정종의 후릉(厚陵)까지 포함해 모두 경기도 땅에 있다. 
더욱이 조선 왕실의 대표적 능침이 구리 · 남양주에 몰려있는 만큼 능침을 수호하는 원찰 또한 유별나다.

그 대표가 봉선사(奉先寺)지만 봉영사 · 봉인사 등의 '봉(奉)'자 돌림의 사찰이

확연히 눈에 띄는 것도 그 때문이다.

 

19세기로 들어오면서 궁궐의 비빈과 상궁들의 원찰에 대한 시주는

이전 시기와 확연히 다르게 양성적인 형태로 이루어진다.

이에 19세기 이전 불화(佛畵)는 수원 용주사 · 만의사, 남양주 흥국사 등의 불화를 그린

'화성성역의궤'에 나오는 연홍(演弘)의 불화가 대표적이었지만

19세기 들어와 경기지역 불화는 새롭게 화려한 장식성을 강조하며

원찰이 많은 이 지역에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변화의 중심이 '흥국사'로 화사(畵師) 양성소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한수 이북을 대표하는 사찰은 봉선사다.

봉선사를 찾아가는 길은 울울한 광릉과 수목원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설렘으로 시작된다.

물론 봉선사 아랫마을 능안마을의 구수하고 칼칼한 된장국과 텃밭에서 기른 푸성귀를 뜯어다 내놓는

쌈밥 맛을 기억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 사하촌에서 100여m를 지나면 봉선사를 알리는 몇 기의 기념비를 만날 수 있다.

'홍월초대선사 추모비'와 '봉선사사적기'  '운허당대종사'라 써 있는 운허 스님의 부도,

그리고 '춘원 이광수 기념비'와 '이월파 공덕비'까지.

봉선사의 근대를 온전히 보여주는 공간이 자리하고 있다.
봉선사가 광릉의 원찰이 된 이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한국전쟁 등 국난을

한번도 비켜가지 못하고 불탄 비운과 중건의 역사를 사적지는 알려주고 있다.

봉선사가 서울 외곽의 춘천 · 포천 등 북방지역을 잇는 중요한 길목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조선 후기 마지막 총섭이었던 홍월초(洪月初, 1858∼1934)는

현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명진학교를 설립하는 등 근대 불교사의 큰 족적을 남긴 스님이다.

더욱이 자신의 전 재산을 봉선사에 헌납하여 '홍법강원(弘法講院)'이라는 전문강원을 만들도록 함으로써

봉선사를 교학의 근본도량으로 거듭나게 하는 등 봉선사의 중흥을 이끈 인물이기도 하다.

그렇게 운허스님의 부도까지 당연히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기념비와는 달리

낯선 '춘원 이광수 기념비'가 서 있다. 아마도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서 있는 그의 기념비는

당시 봉선사의 주지였던 운허 스님의 너른 품이 아니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
“왜 친일을 이제 와서 문제 삼는지 몰라! 나라를 위해 뭔 이득이 있다고?” 마치 우리에게 들으란 듯

춘원의 기념비 앞 연로한 세 어른들이 나누는 말은 운허스님의 너른 품과 같은 의미일까?

춘원 이광수와 8촌 동갑내기였던 운허(耘虛, 1892∼1980), 즉 이학수(李學洙)는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30세에 출가하여 월초 스님의 법손으로 향후 봉선사를 이끌었던 당대의 고승이었다.

그러했기에 춘원의 기념비를 세울 수 있었으니,

독립운동을 했던 자신의 떳떳함과 큰스님으로서 걸림없는 무애,

친일파라 치부되었던 유약한 동갑내기 형 춘원에 대한 연민,

그리고 미국에서 살고 있던 춘원의 부인 허영숙의 간곡한 부탁이 이루어낸 복잡한 산물인 것이다.
더욱이 세워진 시점이 1975년 가을이라는 것은 옆에 서 있는 월파(月波)공덕비의 존재와 연결된다.

월파는 당시 유신체제의 정치적 실세였던 '이후락'으로 봉선사의 대공덕주가 그와 그의 어머니였으니,

물질적으로도 어려움이 없었을 터.

 

그 자리에 혹여 님 웨일즈와 김산의 '아리랑'에 나오는 김충창, 즉 운암 김성숙(金星淑, 1898∼1969)의

기념비를 꿈꾸는 것은 욕심일까?

월초 스님에게 '성숙'이라는 법명을 받은 그가 중국으로 건너가 항일투쟁으로 일관했고,

해방 후에는 좌우합작 및 통일운동을, 5·16 이후에는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길을 걸었던 그를

봉선사는 기억하고 기념할 일이다.

일제강점기 친일문학작품을 가장 많이 남긴 문인은 단연 춘원 이광수였다.
103편의 시와 소설

그리고 논설을 통해 일본제국주의의 강고한 지배에 대한 확신을 설파하고 있었던 인물이다.

그런 상황에서 어느 날 불현듯 찾아온 해방은 경악 그 자체였고, 해방으로 운신의 폭이 좁아진 춘원은

운허스님이 있는 봉선사를 근거로 인근 사릉 근처에서 은거하게 된다.

그러나 일제 때의 친일행적 때문에 1949년 반민법에 의하여 구속되었고

병보석으로 풀려나 다시 봉선사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듬해 한국전쟁 때 인민군에 의해 이북으로 끌려갔으니,

봉선사는 춘원의 굴절 많은 삶의 뒷모습을 지켜본 셈이다.

홍명희 · 이광수 · 최남선을 조선의 3대 천재라 일컫던 시절,

이러한 천재들은 조선을 위해 살다간 삶이 아니라는데 있다.

벽초 홍명희 외에 춘원과 육당이 걸었던 길은

그들이 살다간 궁핍한 식민지시대의 고통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추앙되는 바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는 망우리 공동묘지로 알려진 그곳에서 한강을 바라보며 잠들어 있는
만해 한용운이나 호암 문일평,

위창 오세창, 죽산 조봉암 등을 떠올리면 확연해 지는 일이다.

총독부 건물을 향하는 것조차 역겨워 성북동 집을 북향으로 지었던 만해 한용운의 심우장을

우리는 고집불통의 벽창호같은 짓으로 치부하지 않는다.

동시대를 살았던 만해는 벽초와 교류하지만 춘원 이광수를 조롱하며 조우하지 않고 살아갔다는 점은

서로 원(願)이 달랐기 때문이다.

만해와 죽산과 호암의 호화롭지 못한 무덤에서

지나간 근대사의 신산함을 떠올리며 예를 올리고 한강을 굽어본다.

산하의 절묘한 만남은 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진 복된 터전을 만들었으니

아차산 자락에 안겨 한강을 앞에 둔 우미내, 아치울, 한다리의 마을들이다.


박완서의 연작소설 '저문날의 삽화' 5편은 아치울의 가을을 그리고 있다.

우미내 마을에 1976년 석유비축기지가 만들어지면서

이 곳에 살던 사람들을 이주시키기 위해 만든 동네가 아치울이다.
지금은 박완서를 비롯하여 이이화(역사학자) 주현(탤런트) 등 아치울마을 주민들이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 해제 반대 운동에 나서 개발 이익이 아닌 삶의 질을 선택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아치울 환경보존회 회장을 맡고 있는 이이화 선생의 아치울 자랑은 유별나다.

원작보다 TV드라마로 잘 알려진 박영한의 소설 '왕룽일가'는
남양주 와부읍 도곡 4리,

일명 쑥배미 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소설에서는 우묵배미로 나오지만.

쑥배미는 6가구가 살던 마을로 윗말 · 아랫말 · 돌박재와 더불어 마을을 이루고 있다.

마지막으로 한강을 조망하는 명당으로 선전되며 자리잡은 마을 앞 아파트들로 하여

쑥배미 일명 우묵배미의 사랑은 더욱 격렬해질 수밖에 없을 터이다.

서울에서 경주까지 이어주는 중앙선은
1939년 4월 청량리∼양평 구간이 개통되고

이듬해 원주까지 연결되었다가 1942년 전 구간이 개통되었다.

중앙선은 경부선과 함께 국토를 종단하는 철도로

특히 영서 내륙지방의 전통적 장시와 유통의 질서를 일변시켰다.

더욱이 연탄이 주요 난방수단이었던 시절, 1955년 설립된 삼천리연탄은

서울 인근의 수원역, 수색역과 더불어 도농역을 적탄의 최적지로 만들었다.

그러나 도농역에 이르면 우리는 원진의 냄새를 맡고자 했다.

원진은 1959년 설립된 국내 유일의 인조견사(화학섬유) 제조업체인 '원진레이온'을 말한다.

원진은 1966년 일본에서 중고 기계설비를 들여와 대량생산에 들어가면서

노동자들을 아황화탄소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시켜 1993년 폐업까지 792명의 노동자를

아황화탄소 중독이라는 직업병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이 가운데 38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

단일 사업장에서 그렇게 많은 중독환자를 만들어냈기 때문에 원진은 곧 직업병의 대명사가 되었다.

도농동의 원진레이온 공장은 1993년 폐쇄되었고 지금은 5천 가구가 넘는 대단위 아파트 단지로 바뀌었다.

1988년 이래 원진의 직업병 피해노동자 792명이

1997년 4월 회사 매각 때 받은 보상금 206억원 중 110억원으로

1999년 6월 구리시 인창동에 직업병 전문진료병원 '원진녹색병원'을 세웠다.

이제 직업병의 대명사 원진이 직업병 치료의 희망으로 바뀐 셈인가?

<한동민, 중앙大 강사>

 

 

 

 

 

 수락산 지맥 한강까지 뻗친 명당  

 

수락산 꼭대기에서 산 이름대로 물이 떨어질 때,

서북 방향이면 의정부요, 동남이면 남양주요, 서남이면 서울시 노원구가 된다.

또 동북쪽으로 방향을 잡아 사기막고개, 숫돌고개 등 고갯마루를 가로지르면 깃대봉을 지나게 되고

비루고개까지 관통하면 이내 용암산에 닿게 된다.

이 용암산 일대에 광릉이 있고 국립수목원이 있다.

그런데 용암산은 한강의 북쪽 울타리를 이루고 있는 한북정맥의 여러 산 가운데 들어있으니,

광릉의 세조는 한북정맥을 베고 누워있는 셈이다.


# 최초의 대원군과 흥국사
 
수락산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능선은 한강까지 이어지는데

계속 서울과 경기도를 가르는 분수령이 되기도 한다.

이 능선의 동쪽, 즉 경기도 쪽이 나라안에서 최고가는 명당이어서인지

수많은 역사인물들의 활동무대이면서 안식처가 되었다.

 

수락산에서 한강으로 내려오면서 가장 처음 만나는 인물이

중종의 아홉째 아들이면서 선조의 아버지가 되는 '덕흥대원군'이다.

조선왕조 4명의 대원군 중에서 최초의 인물이다.
그러니까 덕흥대원군으로부터 대원군 제도가 시작된 것이다.

덕흥대원군의 묘가 수락산 동남쪽 자락에 자리하고, 그의 원당이 '흥국사'인데 묘원 뒤쪽에 있다.

덕흥대원군 묘 바로 아래는 남양주시 별내면에서 노원구 상계동으로 이어지는 고개가 있는데

묘원의 격을 높여 덕릉고개라고 한다.
 
흥국사는 바깥으로 드러내고 싶지 않은 듯 고즈넉한 분위기를 아직 유지한 채

품위를 잃지 않고 있는 모습이다.

더구나 흥선대원군의 친필 현판은 가히 추사 김정희 선생 제자로서의 필치를 아낌없이 보여주고 있다.

같은 대원군이라서 일까? 첫 번째 대원군의 원당에 마지막 대원군의 현판이 걸린 것이다.


# 불암사의 새 마애삼존불
 
흥국사에서 산길로 1시간 남짓 오르내리다 보면 불암산이다.

큰 바위 봉우리가 마치 부처님처럼 보인다고 하여 불암산이라는 명칭이 붙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 산에 불암사가 있다. 산 이름이 먼저인지 절 이름이 먼저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석씨 원류'의 목판을 비롯해 36종의 목판을 소장하고 있어 가치가 높은 절이다.

세조 때 왕성 사방에 왕실의 원찰을 정할 때 동쪽을 담당하는 동불암으로 꼽힌 전력 때문이리라.

최근에 절 뒤 큰바위에 조성한 마애삼존불은 그 모양이 수려하여 많은 참배객을 맞이하고 있다.

 

부처님이 들어 있는 듯한 바위가 있어 불암산이라고 불렀을까?

커다란 바위와 마애삼존불은 너무나도 잘 어울려

우리시대의 문화가 결코 쇠퇴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마애삼존불 바위 위에 5층 석탑을 세우고

테두리마다 빙 둘러 조명장치를 설치하였는가 하면, 마애삼존불 앞 제단의 모습이 눈에 거슬려

또한 어쩔 수 없는 우리시대 문화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 명당 중의 명당
 
불암사에서 남쪽으로 더 내려오면 구리시가 되고 곧 동구릉과 만나게 된다.

자리가 얼마나 좋으면 9기의 능 터를 찾아냈을까?

명나라 사신들조차 이 지역을 둘러보고 '천작지구(天作地區)'라고 감탄하였으며

질투심에 한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필시 조산(造山)일 것' 이라고 하였다는 명당이다.

 

동구릉 가운데 중요 인물의 능만 꼽아도

 태조의 건원릉, 선조의 목릉, 현조의 숭릉, 영조의 원릉 등이 흡사 나뭇가지에 매달린 열매 같다.

58만여 평의 숲 모두가 '천작지구' 같아 여름날의 더위를 씻기에도 좋은 곳이다.
명당 중의 명당은 아무래도 태조가 잠들어있는 건원릉일 터이다.

 

좌우의 산들이 부복하고 있는 신하들의 모습처럼 보이고 겹겹이 둘러친 앞산의 모습들은

구불구불 용을 닮은 것 같은데, 저 멀리 고층 아파트 숲이며 골프연습장 등이 스카이라인을 구기고 있다.

그래도 다른 능에 비해 당당한 품위를 지니고 있는 것은 봉분을 덮고 있는 억새 때문이리라.

태조의 고향 함흥에서 옮겨 심었다는 억새로 인해 건원릉은 훨씬 더 위풍당당해 보인다.
 
영조의 능인 원릉은 문예부흥기를 맞이한 조선의 역량이 그대로 드러난다.

문인석과 무인석의 사실적이고도 아름다운 조각, 봉분을 둘러친 난간석과

난간을 받친 동자기둥들의 절묘한 비례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한없이 감탄들만 하면서 조선의 문화 전성기에 흠뻑 빠져 있을 때

유재명 기자가 밥 때가 지났다고 현실로 돌려놓는다.

그러면서 영조의 83세 초장수와 52년 장기집권의 이면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끼니를 거르지 않는 습관이 한몫하고 있었다고 부연한다.

사실 영조는 어전회의를 하다가도 때가 되면 혼자서 수라를 챙기고 돌아와서 회의를 계속 하였다니

그 회의가 임금의 생각대로 결론 날 것은 뻔한 일이다.


# 망우리 애국지사 묘역에 서서
 
식당을 찾다가 훌쩍 넘은 망우리고개. 점심을 먹고 다시 망우리고개에 오른다.

거기에는 그 유명한 망우리묘지가 있고, 묘지 안에 애국지사의 묘역이 있기 때문이다.

망우리묘지가 있는 산 능선이 경기도와 서울의 경계선인데 아슬아슬하게 넘나들게 된다.

수락산에서 시작된 경계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망우리 묘역 경기도 땅에 애국지사의 묘역이 줄지어 있다.

특히 독립운동가 10여인의 묘가 띄엄띄엄 늘어섰는데

그 중 소파 방정환(1899~1931)선생과 위창 오세창 선생의 묘에 눈길이 간다.


# 영원한 어린이와 문화재 지킴이
 
소파 선생은 1931년 33세의 젊은 나이에 과로로 별세하신 분이다.

19세에 의암 손병희 선생의 셋째 딸과 결혼해 동학의 뿌리를 계승하였고,

그 연장선상에서 '어린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였다.

'사람이 곧 하늘이요, 물건마다 하늘이며, 일마다 하늘이라(人乃天 物物天 事事天)'는 동학사상에서

어린이는 하늘이 보낸 천사(天使)라는 개념이다.

어른이 어린이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어린이를 보호하기 위해 주변 어른들까지 보살핌을 받는 것이라고 설파한 사람이

바로 소파 선생이다. '어린이 날'을 선포하고 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한

영원한 어린이 소파 선생의 묘역엔 봉분이 없다. 자연석 몇 개 쌓은 위에 자연석 비석만이 서 있는데

'동심여선(童心如仙)'이라고 써 있는 아래에 '소파방정환지묘'라고 써 있으며

뒷면에는 '동무들이' 세웠다고 써 있어 보는 사람들조차 동심으로 돌아가게 한다.
 
위창 오세창(1864~1953) 선생은 민족 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독립운동을 주도한다.

그는 추사 김정희 선생의 제자인 아버지 역매 오경석의 영향을 받은 당대 최고의 문화인이었다.

자신도 명필이었고 서화 감상 능력이 특히 뛰어나 당대의 감식안으로 불렸던 사람이다.

청년 실업가인 간송 전형필 선생에게 문화재를 구입하고 일본으로 반출된 문화재를 사들여 오게 하는 등

일제 강점기 우리 문화재를 지키는 데 앞장섰던 선구자이다.

오늘날 '간송학파'로까지 부르게 되는 간송미술관의 이면에는

위창 선생의 꼬장꼬장한 눈매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소파 선생의 묘역에서나 위창 선생의 묘역에서나 한강의 흐름이 시원스레 보인다.

애국지사들의 숭고한 뜻이 한강의 흐름처럼 미래로 흘러가는가?

수락산 지맥이 남쪽으로 흘러와 아차산에서 한강의 유장한 흐름에 머리를 담근 것 같다.

아니, 한강에서 몸을 일으켜 백두대간을 향해 뻗어 나간 것 같다.

이 시대의 역사 또한 명당 줄기를 타고 백두산까지 뻗어나갈 그 날이 올 것이다. 반드시.

<염상균 · 문화재답사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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