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 살아있는 역사 박물관
강화도 (江華都) = 강도(江都)
한반도 경기만의 요해처를 송두리째 거머쥐고 있는 곳이 강화도다.
교동도, 서검도, 말도, 불음도, 주문도, 석모도가 서해의 관문이라면 염하가 시작되는 동검도에서 김포해안을 마주보며 요해처 마다에 설치된 53돈대는 동양의 마지노선이다.
교동도의 고구리산성(古龜里山城)과 강화도를 옹위하는 문수산성이 기각지세를 이루며 강화도를 철옹성이 되게 하였으니 40년 항몽전의 버팀목, 강화도의 지리는 그래서 오늘도 5천년 살아 고동치는 우리의 역사를 일깨우고 있다.
강화도 서남단에 위치한 마리산은 우리나라 땅의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다.
남쪽의 한라산까지와 북쪽의 백두산까지의 거리가 같다. 곧 국토의 중심이다.
뿐만 아니라 마리산 정상에는 우리가 잘 알다시피 개국시조인 단군(檀君)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쌓은 참성단(塹城壇)이 있다. 그래서 마리산 참성단은 민족의 성지이자 정신적 지주다.
동검도 해안에 서서 눈앞에 다가선 마리산의 웅장한 모습을 보며 잠시 명상삼매에 들어본다.
문득 지난 1993년 3월21일 경기도 역사연구회장으로서 연구회 발족을 기념하는 제1차 유적답사를
회원 50여명과 함께 참성단에서 가졌던 날이 어제의 일처럼 떠오른다.
이날 고유제(告由祭)에서 축문을 통해
“국조께서 보우하사 배달자손들은 5천년 유구한 국기의 터전을 베푸신 큰 뜻을 받들어 국운개척에 진력하여 국운은 바야흐로 사해에 진작되어 통일의 소망을 이룩하는 시점입니다… -이하생략- ”라고
국조(國祖)에게 올렸던 그 생생한 기억을 더듬어 본다.
인공위성사진에도 부각된 마리산은 이래서 단군 국조의 홍익인간 정신이 서린 역사의 현장, 문화의 보고이다. 한편 강화도는 한강, 임진강, 예성강의 출구로서 고려시대는 개경(송도)의 목젖이었고 조선시대는 한양(서울)의 인후였다.
강화도 해변은 조석의 간만차가 11m에 달하고 개펄이 섬 전체를 에워싸고 있어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는데 천험의 요새를 갖추고 있다. 개펄체험의 현장 교동도로 들어가던 날 직선거리의 교동섬을 바라보며 개펄을 피해서 뱃길을 돌려 40여분간 항해하던 모습에서 강화의 심한 조수간만을 실감했다.
이처럼 왕도와 직결된 천험의 요새 강화도의 지리는 해상관문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해 왔다.
고려 항몽전때도 조운(漕運)에 의하여 안전한 해상통로를 거쳐 수송되어오는 조세(租稅)의 수입을 변함없이 확보할 수가 있었으며, 한강과 임진강 및 예성강을 통하여 경기, 황해, 충청, 전라, 강원의 각 도와 교통을 하는데 매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와 같은 천혜의 자연에 더하여 강화도는 비옥한 평야가 많고 기후조차 온난하여 농사짓기에 적합할 뿐 아니라 일단 유사시에는 천연지형을 방패로 한 국토의 보장중지(保障重地)로서도 그 기능을 다했다.
국토의 5대 도서중의 하나로서 강화도가 갖고 있는 지리의 중요성은 이처럼 역사의 궤도를 결정짓는데 큰 몫을 담당했다. 다시 말해 국운의 흥망성쇠가 곧 강화의 역사와 직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3국의 첨예한 각축이 전개되었던 고구려, 백제, 신라시대에도 강화도는 국방의 요새였다.
고구려시대는 혈구군으로 해상교통의 거점으로 중요시되었고
신라시대는 해구군, 혈구진으로 해상무역의 요충지로 또는 해적의 제압과 호족세력을 견제하는 서해안의 교두보였으며 강화도의 혈구진, 남양만의 당항성, 완도의 청해진 세곳을 대당무역의 3대관문 군사요충으로 삼았다. 후고구려를 세운 풍운아 궁예도 강화도의 혈구진을 장악함으로써 해상권을 제압한 군사요충으로 이곳의 지리를 십분 활용했다.
격동의 역사무대마다 강화해협의 격랑은 변화무쌍한 조석간만의 해조음처럼 민족의 함성으로 충만했다. 몽고침략에 줄기차게 항쟁하던 39년간의 문화유산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강화도에 도읍을 옮겨 축조된 고려성지와 성곽은 살아있는 역사의 숨결을 토해내는 문화유산으로 강화도의 시련과 고난을 상징하고 있다.
한편 병자호란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강화도는 유사시 정부의 피란처이기도 했다.
강화도로 향하던 인조이하 조정대신이 청군에 의해 길이 차단되자 남한산성으로 발길을 돌렸던 사실,
이때 강화검찰사로서 호란을 피해 강화도로 들어가려는 빈궁, 왕족, 고관대작의 부녀자들을 안전하게 인도하라는 임무를 저버린 김경징이 12월 강추위 발을 동동 구르는 이들 부녀자들을 강화나루터 월곶땅에 내버린 채 자기가족만을 강화도로 피란시킨 권력의 횡포에서 지금도 강화개펄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해초를 ‘경징이풀’로 매도했던 역사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청군에 유린되어 강화해안을 붉게 물들인 부녀자들의 피울음의 원망,
경징아! 경징아! 경징이풀이 된 수난으로 얼룩진 도하(渡河)의 잔영을 역사에 묻고 훤히 뚫린 육지연결, 초지대교에서 이 시대의 또 다른 경기산하를 본다.
병자호란이후 효종(孝宗)은 강화도의 방비책으로 내 · 외 성곽과 문수산성의 축조, 12진보와 53돈대의 설치를 시작하였다. 이 대역사는 현종, 숙종을 거쳐 영조때에 들어 완성을 보게 된다.
그로부터 127여 년의 세월, 강화도는 병인·신미양요때 외적을 물리치며 다시 한번 해상관문의 역할을 감당했다. 12진보와 진보를 연결하는 53돈대의 철통방어벽으로 마치 제1차 세계대전때 독일군의 공격을 막아낸 프랑스 북동쪽 국경선지대 '마지노선'의 방어벽을 예상하듯 강화는 1세기를 앞선 동양의 철옹성이 되었다.
새천년 21세기 문턱이다. 그래서 오늘 여기 강화도가 '다시보는 京畿山河'의 역사, 문화 대장정으로 집중 조명되어야 할 역사적 본질을 갖는 것이 아닌가. 역사를 외면했던 민족이 쇠망했던 전철의 교훈, 강화도는 살아있는 민족정신의 용광로라해도 좋을 것이다.
프랑스의 '마지노선'은 독일군의 배후공격으로 무너져 난공불락을 자랑하던 프랑스 국민의 자존심을 훼손시켰다. 하지만 강화도의 마지노선 12진보와 53돈대를 거점으로 치른 병인, 신미양요는 우리의 결연한 호국의지와 그 장엄했던 한국인의 투혼을 세계인에게 각인시킨 쾌거였다.
“이기고도 누구 한사람 승리를 자랑하지 못했다”고 술회한 신미양요의 광성보 전투를 기록한 미 해군의 전사(戰史)에서 역사의 끈끈한 생명력이 다시 꿈틀대는 오늘의 강화도, 살아있는 세계인의 박물관을 본다. 이제 강화도는 우리의 역사를 통시대적으로 꿰뚫고 있는 문화유산이다.
원형이 보존된 역사의 현장, 이것은 우리민족의 자긍심이자 양헌수의 병인양요, 어재연의 신미양요가 말해주는 경기인의 자화상이다.
뜻있는 모든 사람들이 강화도의 문화유산과 자연환경이 개발의 미명하에 파괴되는 일이 없도록
가슴조이며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할 때다.
- 강대욱 · 경기문화재단 편집위원
강화해협에 흐르는 역사의 물결
# 동검도에서 바라본 마리산
강화도는 우리 국토의 허리쯤에서 흘러내려온 물을 고스란히 받고 있는 섬이다.
예성강과 임진강, 한강이 착실하게 모아온 물들을 모두 강화의 머리맡에다 쏟아놓고 있다.
그래서 수로가 발달된 곳이기도 하여 일찍이 역사의 전면에 떠오른 섬이다.
'허리춤'의 물길과 연결되었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고려와 조선의 도읍지로 이어진 수로로 인해 강화는 천 여년을 주목 받아왔다. 세 물길을 지키는 데 없어서는 안될 '목젖' 같은 요새이기 때문이다.
강화를 이루고 있는 20여 개의 섬 모두가 요새 노릇을 했는데 그 중 제일은 강화해협으로 부르는 염하이다. 물살이 빠르고 험하기로 유명한 물길이 강화해협이다. 웬만한 강보다도 좁은 해협이지만, 조선왕조 500여 년 동안 중국의 배들조차 통과시키지 않았던 자존심의 물목이다.
오죽했으면 강화의 동·서쪽에 있는 두 섬 이름을 동검도, 서검도라 붙이고 지나는 배들을 검문까지 했겠는가? 그뿐이랴. 53개의 돈대로 섬 전체를 톱니바퀴처럼 만들지 않았던가.
동검도에서 바라본 민족의 성지 마리산의 모습은 위엄이 있으면서도 가슴이 벅찰 정도로 아름다웠다.
강화의 역사가 곧 우리의 역사요, 우리 국토의 축소판이 곧 강화이다.
삼국시대 백제에서 고구려로, 다시 신라로 역사의 주인공이 바뀔 때마다 강화의 주인도 바뀌었다.
아니, 강화의 주인이 바뀔 때마다 역사의 주인공이 바뀌었다.
강화를 손에 쥔 태조가 고려를 창업하였고 39년 동안 몽고와의 전쟁을 이끌었던 곳도 임시 수도였던 강화도였다. 또 몽고와 그 세력에 빌붙은 정부를 타도하자고 기치를 내건 삼별초의 출발점도 강화였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정묘호란 때 인조가 강화도에서 그들의 예봉을 피했고,
병자호란 때는 강화도를 빼앗겨 치욕을 당하고 만다.
또한 10여년 동안의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양호사건 들로 강화는 몸살을 앓게 된다.
그리고 급기야 조선은 멸망의 순서를 밟는다.
자존심의 해협으로 들어온 외세에 맞서 싸우다가 결국은 강화도를 지키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강화'를 소유한 세력이 우리나라 역사의 주인공이라고도 한다.
# 역사의 섬이 주는 교훈
삼정(三政) 문란의 시대 강화도의 위기는 1866년 병인양요로 시작된다.
'그 크기가 산더미 같고 노질도 하지 않으며 연기를 피우고 다니는' 프랑스 함대 군함 7척이 들어온 것이다. '조선이 프랑스 선교사 9명을 학살하였으니 조선인 9천명을 죽이겠다'는 보복이 명분이었다.
문수산성 전투에서 승리한 프랑스군은 강화도로 들어가 분탕질을 하고 다녔다.
총포의 화력이 절대 열세였던 조선은 속수무책이었고. 이 절체절명의 위기를 구해낸 사람이 순무영 천총 양헌수 장군이다. 양헌수 장군과 500여 군사들은 11월 초 강화해협의 차가운 밤바다를 건너 정족산성으로 들어간다. 김포의 덕포에서 강화의 초지진으로 잠도작전(潛渡作戰)을 펼쳤던 것인데,
그들이 건넜을 해협 바로 아래 초지대교가 새로이 놓여 답사객의 가슴을 찡하게 한다.
양헌수 장군은 정족산성에서 농성하며 귀신 같은 기병작전(奇兵作戰)으로 화력의 열세를 만회한다.
그러나 산성에서의 전투가 불리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프랑스군은 조선에서의 첫 패배를 기록한다.
프랑스는 6명의 전사자와 70여명의 부상자를, 조선은 전사자 1명에 부상자 4명을 내었고,
다음날인 11월 10일 프랑스는 서둘러 함대를 철수한다.
그렇지만 이때 그들은 외규장각에 고이 보관하고 있던 도서와 은괴들을 약탈해 갔으며 나머지 도서들을 불질러 버리는 만행을 일삼았다. 세계 제일의 문화 대국임을 표방하고 있는 프랑스가 1866년에 보인 강화도에서의 행태는 세계 꼴찌였던 셈이다. 더구나 그들은 고속철도와 전투기 사업 등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만 반환 협상을 벌이고 있어 뒷맛을 씁쓸하게 한다.
양헌수 장군이 프랑스군을 격퇴한 정족산성 안에 전등사가 자리잡고 있다.
그 대웅전 안 기둥과 벽체엔 낙서 아닌 낙서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 불리해 보이는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빌며 적었던 그 이름들, 혹시 죽더라도 극락세계에 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적었을 그 간절한 마음들이 콧등을 시리게 한다.
전등사 경내에는 온통 외규장각도서 반환을 위한 연등이 즐비하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염원을 담아 건 등 사이로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였던 사고(史庫)에 오른다.
새롭게 지어서 세월의 때가 묻어 있지는 않지만 그 자리만큼은 대단한 곳이다.
정족산(鼎足山) 자체가 세 봉우리로 이어져 솥발 같고, 석성을 둘러 요새로 만든 가운데에 전등사가 자리하고 있다. 그 전등사 대웅전에서도 보이지 않는 서쪽에 사고를 지은 것인데, 사고에서는 전등사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절묘한 위치를 골라 사고를 지었다.
양헌수 장군과 그 군사들이 대웅전에 이름을 써가며 죽음을 무릅쓰고 지키지 않았다면 조선왕조실록 또한 희생되었을 것이다.
삼정(三政), 즉 전제(田制), 군정(軍政), 환곡(還穀)이 문란하여 조선은 국권을 잃었다.
그렇다면 오늘은 어떤가?
세무비리와 병역비리, 금융사고가 빈번한 것은 정녕 삼정문란과 무관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강화도를 소유한 세력이라고, 그래서 우리가 이 시대 역사의 주역이라고 편협하게 생각하지 말자.
강화도 북쪽 민통선 안의 돈대들은 오늘날에도 군의 요새로 절실하게 쓰이고 있다.
그래서 차가운 긴장이 느껴지는데 철조망 너머 저 바다엔
오늘도 북한의 물과 남한의 물이 서로 얼크러져 흐르지 않겠는가?
강화도의 오늘은 우리에게 무한한 교훈을 주고 있다.
조선을 보장(保障)해 온 국가요충지 江都
강화에 관한 두 차례의 글을 준비하면서 그 첫 번째로 정한 위의 제목은
조선 21대 임금 영조(英祖)가 강화유수(江華留守)를 소견하는 자리에서 한 말을 옮긴 것이다.
보장(保障)이란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말이긴 하지만 새삼 그 의미를 새긴다면 무엇을 통하지 못하게 막음으로써 보호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강도가 뚫리면 곧 국가의 안전을 위협받게 된다는 상황인식이 깔려있다고 하겠다.
북방민족의 침입에 시달려온 고려는 수도인 송도 아래 바다에 위치한 강도를 위기상황을 넘길 수 있는 임시 천도지로 삼았다. 수도를 한양으로 옮긴 조선에서도 이러한 인식은 지속되다가 1636년 병자호란 때 강도가 제구실을 못하고 함락되면서 변화를 겪게 된다.
강도가 함락되는 전후 사정은 이렇다.
적군이 강도를 치겠다고 했을 때 당시 얼음이 녹아 강이 차단되었으므로 그들이 설마 강을 건널 수 있을까 짐작하고 아군에서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던 것 같다. 즉 연미정(燕尾亭)과 광성진(廣成津)에 배를 정비한 정도로 그 이상의 장비를 갖추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결과는 적군이 대포를 갑곶진(甲串津)에 집중 발포하면서 그 틈에 3만의 적군이 강을 건너 진격함으로써 쉽게 성을 포위하였고 이어 함락되었던 것이다. 강도는 천연으로 이루어진 요새이기 때문에
그 동안 성곽과 병기를 수리하고 곡식을 저축하여 사변이 있을 때에는 임금이 머무를 곳으로 삼았던 것인데 결국은 이와 같이 허망하게 함락된 것이다.
그러므로 병자호란 이후 조정에서는 당연히 강도가 보장의 구실을 계속할 수 있을 지에 대한 논의를 계속하다가 숙종 때에 이르러 현실적인 대책을 내놓게 된다.
이중 가장 강력한 것이 바로 북한산성을 새로 축조하는 것인데,
이는 북방으로부터의 침입이 있을 때 서울을 버리고 강도와 남한산성으로 피신하던 이전 방식을 수정하여 조정을 움직이지 않고 북한산성에서 서울을 사수하겠다는 전략상의 변화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결정에는 병자호란 때 강화 사수에 실패한 경험이 작용하였다.
그러나 이것으로 강화의 보장 기능을 포기한 것이 아님은 영조 22년(1746)부터 강화성을 석성(石城)으로 개축하는 작업이 시작된 것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또한 강화의 동북 방향은 이제 한강 물줄기를 따라 내려오는 적을 방어하기 어렵게 되었지만
서쪽은 여전히 방어가 용이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 이유는 마리산 아래 수 십리 땅이 물기가 축축하여 사람들이 다닐 수 없고 조수(潮水)가 찰 때만 배가 정박할 수 있어 약간의 군사만 쓰더라도 여전히 방어가 가능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후 강화 군사시설 보완은 주로 동북쪽 방향에 집중된다.
교동의 군사적 위치를 높인 것도 강도에 대한 보완정책의 하나였다.
지금도 강화 서쪽 끝에서 배를 타고 건너가야 하는 교동은 조선시대는 교동부(喬桐府)로서 군영(軍營)이 있었으며 옛성이 있는 군영 터 뒷산에 오르면 사방이 내려다보이므로 고구려 이후 방어의 요지로 이용되어온 곳이다.
교동 해안에는 또한 수초(水草)가 많아 외적이 침범하기가 어려운 형세를 가지고 있어서
방어에 있어서는 강화보다 더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는데
단지 땅이 협소하기 때문에 강화를 보좌하는 역할에 머물렀던 것이다.
그러나 정조 13년(1789)에는 교동부에 삼도통어사(三道統禦使)를 설치하고 부사를 수군절도사로 올림으로써 강도를 더 한층 안전지대로 만들었다.
답사팀이 강화에서 여객선을 타고 교동을 건너가던 경험을 잠시 소개하면 위의 정황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곳에 사시는 분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하고 익숙한 것이긴 하지만 우리가 교동행 여객선을 타기 위해 터미널에 도착했을 때 우선 여객선 운항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은 데 당황하였다. 그러나 그 이유를 곧 알게 되었는데, 그것은 만조 때와는 달리 간조 때는 개펄이 드러날 정도로 수심이 낮아져서 바로 가면 10분이면 갈 거리를 수심의 변화에 따라 낮은 곳을 피해가며 크게 우회해서 30분이나 더 걸려 가야하기 때문이었다.
지금처럼 조선시대에도 이 상황은 그대로 적용된다.
즉 강도에 배를 매어 두는 것은 거의 육지에 매어 두는 것과 같아 매달 음력 초여드레와 스무사흘 두 차례 오는 조금 때를 당하면 백 척의 배가 있은 들 하나도 움직일 수 없으므로 이를 이용하면 적선은 진퇴양난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강화를 통과하는 뱃길 역시 이를 반영하여 설정된 것이다.
황해도나 평안도에서 서울로 오는 배들은 모두 강화 위쪽으로 통해가지만 삼남(三南: 충청 · 경상 · 전라)에서는 두 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 하나는 덕적도(德積島) 앞 바다에서 교동과 강도 사이를 통과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영종도(永宗島)를 지나 강도 앞으로 통과하는 것인데 후자, 즉 물길이 험한 손돌목이 있는 강도 앞길을 굳이 택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얼마 전에 경험했던 것처럼 교동과 강도 사이를 통과할 수 없는 상황이 주기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강도에 대한 보강책에는 더욱 세련된 방법도 동원되었는데,
그것은 마치 인센티브제처럼 과거시험에 유리한 조건을 걸어 그곳 인심을 달래는 것이었다.
즉 제도적으로는 지방 향시, 또는 초시에 합격하더라도 복시(覆試)라는 단계를 더 거쳐야 임금 앞에서 시험을 치르는 최종 시험인 전시(殿試)에 나아갈 자격이 주어지는 것인데 정조 임금의 경우는 특명을 내려 초시에 합격한 강화 유생들에게 바로 전시로 나아갈 수 있는 직부전시(直赴殿試)의 자격을 내린 것이다. 아마 이러한 일이 요즈음 일어난다면 이곳으로 전국의 입시생이 몰리게 됨은 물론 부동산 가격도 덩달아 요동칠 것이 뻔하다.
강도를 지키기 위해서는 탄탄한 군사시설 못지 않게 이를 지키는 군사들의 식량 보급도 소홀히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강도에는 대동법 시행 이후 지방 특히 호남에서 올라오는 군향미가 현물인 쌀을 대신한 대전(代錢), 즉 화폐와 면포(綿布)로 올라왔는데 이것들은 현지에서 당장 쌀로 바꾸기가 힘들었다.
강화에 둔전(屯田)이 확대된 데는 이러한 사연에다가 방어시설인 12개의 진보(鎭堡)가 모두 포구 가의 방죽을 쌓은 자리에 있었으므로 만일 둔전을 사거나 만든다면 이곳 만한 데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영조 40년(1764) 이후로 국가에서 이곳에 논을 사거나 개간하여 둔전을 설치하는 일이 본격화되었다. 강화 사람들은 일년 농사지어 삼년을 먹는다는 말이 있는데 아마도 그 출발은 이 때에 시작된 둔전확대정책에 두어야 할 것 같다.
정작 강화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석주(石洲) 권필(權필 · 1569~1612)은 과거도 보지 않고 시주(詩酒)로 낙을 삼고 가난하게 살다간 당대의 문인이다. 그가 강화부에 갔을 때 그곳 유생들이 가르침을 받고자 대거 몰려올 정도였다.
'남포어등(南浦漁燈)'은 그가 한강 하류에서 고기잡이 하는 배를 보며 쓴 시인데,
내용인즉 잡은 고기들이 공물로 모두 한양으로 바쳐질 것이라는 점을 읊고 있다.
역시 당대의 문인으로서 그와 친분이 있던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 · 1571~1637)은
1617년 6월에 강화부사로 부임하여 봄을 맞는 그곳 사람들의 삶을 아름다운 시로 담았다.
“북산 봉화가 평안을 알릴 때 동각(東閣)의 매화 차례로 피어난다.
농부님들 고삿술에 마을마다 북소리 울리고,
어부님들 고기잡이노래에 포구마다 배들이 들어선다.
누에치는 마을 보리심은 언덕에 노랫소리 울려와
제발 어부집과 염부집 올해 부역 가벼워지기를.”
동악은 1628년에 강화부 유수로 복직하여 1630년까지 재직한다.
그는 1629년 회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강도 객지에서 추석을 맞아 사람들이 달이 비치는 길거리에서 노래부르는 소리를 듣고 느낌을 시로 쓴다.
“작년에는 보리농사며 벼농사며 모두 흉년이라
떠도는 유민들을 위로하지도 못하고 앉아서 볼 수밖에 없었는데,
올해는 추수한 것을 보니 풍년이라
밝은 달 아래 사람들의 노랫소리를 자주 듣게 되는구나.”
- 정승모 · 지역문화연구소장
# 자존심의 섬 강화
강화해협은 그 자체가 고려와 조선의 자존심을 내세운 물목이었다.
이 자존심의 물목을 건너 강화도로 들어가면 강화 사람들의 자존심 또한 만만치 않음을 느낄 수 있다.
다른 지방에서 서울로 가는 길을 '올라간다(上京)' 라고 하는 데 비해 강화 사람은 ‘서울 내려간다'고 하였다. 한때 고려의 도읍지였다는 자부심에서 싹튼 현상이리라.
여기에는 '1개성 2강화'라는 개성 정신도 녹아 있어 일제시대 그 위력을 톡톡히 발휘한다.
인천에서 강화를 잇는 뱃길엔 강화 자본의 삼신상회 발동선이 있었다.
썩 좋은 배는 아니었지만 독점으로 인해 쏠쏠한 재미를 보았는데, 여기에 일본인이 경영하는 다나카 기선회사가 끼어든다. 그러나 강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담배와 수건, 과자 따위를 사은품으로 주며 판촉을 벌여도 다나카 배를 타지 않는다. 나중에는 뱃삯까지 받지 않겠다고 하여도 소용이 없어 결국 망하고 만다. 또 나무 장수가 나무를 팔 때에도 날이 저물도록 팔리지 않아야만 일본 사람에게 파는데 값은 더 비싸게 받았다고 한다.
이 정도로 배타성이 강하면서도 자존심을 내세운 것이 강화 사람들의 기질이다.
이런 기질을 닮았는지 강화 인삼과 약쑥의 약효는 말할 것도 없고, 마늘과 순무조차 강화 특유의 맛을 자랑한다. 보랏빛을 살짝 머금은 순무와 마늘은 답사객의 과식을 불러오기 일쑤이니 조심할 일이다.
# 전등사 대조루 아래서 대웅전을 바라보니
나막신 신고 산에 오르니 흥이 절로 맑은데
전등사 노승이 나의 행차를 인도하네
창 밖의 먼산은 하늘 끝에 벌렸고
누(樓) 아래 부는 바람 물결치고 일어나네
... (중략) ...
정화궁주의 원당(願幢)을 뉘라서 고쳐 세울건가
벽기(壁記)에 쌓인 먼지 내 마음 상하게 하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목은 이색의 시(詩)다.
전등사 대웅전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대조루 아래를 통과해야 하는데,
대조루 기둥들과 천장, 그리고 지표면으로 인해 생기는 액자 속에 대웅전이 쏙 들어온다.
누하진입(樓下進入) 방식을 효과적으로 구현한 것이다.
어두운 곳에서 밝은 대웅전을 바라보게 하면서 흐트러지려는 시각을 폐쇄하여 집중시킨 때문이다.
귀퉁이에 있는 기둥들을 다른 기둥들보다 크게 만드는 '귀솟음 기법'과
기둥들을 대웅전의 중심 쪽으로 약간씩 쏠리게 세운 '안쏠림 기법'으로 안정감을 주었고
기와 지붕에 얹은 백자연봉들이 액자 속을 멋지게 장식하고 있다. 이는 모두 우리의 옛 건축이 만드는 사람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중요한 건축 정신이다.
시각적인 안정감을 확보하기 위해서 착시 현상을 역이용한 고도의 건축 기술이다.
그러나 속된 눈으로는 대웅전 추녀를 받치고 있는 나녀상(裸女像)이 먼저 보인다.
도편수의 순정어린 돈을 떼어먹고 달아난 주모의 모습이라고, '전설 따라 삼천리'과 사람들이 말하는데
원숭이를 닮은 듯한 추녀상(醜女像)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신성한 법당에 사사로운 감정을 담아낼 간 큰 도편수가 과연 있을까?
이색의 시에도 들어 있는 것처럼 전등사는 정화궁주의 원찰이었다.
정화궁주가 옥등잔을 시주했다고도 하고 송나라에서 '경덕전등록'을 들여와 전등사에 바치기도 하였다.
정화궁주가 누구인가?
39년간의 강화도 임시정부를 끝내고 개성으로 다시 옮겨간 고려는 이제 원나라의 지배를 받는 복속국가가 된다. 고려 왕들의 칭호도 '조'나 '종'이 아닌 '왕'으로 격하된 시기였으며, 원나라에 충성하였다는 의미로 충성할 '충(忠)'자를 붙인 왕호, 게다가 원나라 황실의 사위가 되어야만 하였다.
'충'자 왕의 첫번째인 충렬왕은, 몽고족 공주와 강제 혼인을 하기에 앞서 이미 정화궁주와 정식 혼례를 올리고 아이까지 낳은 상태였다. 그러나 원나라의 압력에 의해 정화궁주는 어쩔 수 없이 왕비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고 그 자리에는 못생기고 음탕한 '홀도로게리미실'이라는 원나라 공주가 앉았다.
투기가 심한 '홀도로게리미실'은 정화궁주를 학대한 것은 물론이고,
오늘날의 비아그라와 같은 '조양환(助陽丸)'을 복용하게 하면서까지 음심을 채웠다고 한다.
강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정화궁주 이후 30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조선 광해군 13년(1621) 전등사 대웅전을 다시 지으면서도 결코 잊을 수 없었으리라. '홀도로게리미실'에게 정화궁주의 원찰 네 추녀를 받들고 부처님 말씀 들으며 회개하라고 새겨 넣은 것은 아닐까? 못생긴 그 모습에 발가벗은 순수의 마음으로, 하지만 진정한 용서의 마음으로.
# 대한성공회의 탁월한 선택
강화읍내 관청리에 있는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에 갔다.
기와 지붕에 판문을 단 정문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우리가 혹시 절에 온 것은 아닐까?
문에는 성공회의 문장(紋章)이 그려져 있어 성당임에는 틀림 없는 것 같다.
그런데 그 문장도 자세히 보면 태극 무늬가 들어있다. 성공회 문장과 태극이 절묘하게 결합된 것이다.
또 이 성당의 종 역시 우리나라 범종의 모습과 흡사한데 성공회 문장과 성경이 적혀 있다.
그뿐인가! 성당 건물은 아예 사찰의 대웅전처럼 생긴 모습에 '천주성전(天主聖殿)'이라는 편액을 달았고, 주련까지 걸었으며 멋드러진 한옥 구조이다.
1900년에 경복궁을 중건한 도편수가 지었다고 하니 100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이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있으니 너무나 멀쩡한 셈이다. 밖에서 보면 2층이지만 안에서는 다 개방되어 있어 천장이 무척 높다.
튼실한 대들보가 안정감을 주고, 기둥을 늘어 세워(열주·列柱) 그윽한 종교적 엄숙을 강조한다.
이는 서양의 바실리카 건축 양식이 한옥에 녹아 든 최초의 일일 것이다.
즉,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행복하게 만난 현장이다.
그러나 이 성당을 세우기 전에 성공회는 의료 봉사와 교육 봉사 등으로 강화 사람들의 마음을 위무하였다. 그런 다음 성당을 지으면서 한국적인 요소에 치중하면서 그들의 종교적 목표를 실현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자존심 강하고 배타성 짙은 고장인데 오죽했으랴.
성공회 강화성당에서도 강화인의 한 기질을 읽어낼 수 있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강화의 자존심!
그 빛깔은 마늘과 순무의 보랏빛으로, 그 맛은 인삼과 약쑥의 쌉쌀한 맛으로,
그 모습은 정수사 법당의 아름다운 꽃창살처럼 화려함으로,
그 정신은 강화학파의 고집스런 지행합일(知行合一)의 학문으로,
그 타협은 성공회 강화성당의 건축처럼 동화(同和)로 불 타오를지어다 정녕.
강화학, 우국충정의 진원
“십년이 지나도록 돌아간 것이 슬프드니 / 가을 산에 이제는 나지막한 무덤뿐이라 /
몸은 가볍게 고도(古道)를 행하였고 / 사문(斯文)에 연모(戀慕)만 끼치셨네 /
아득한 창공에 기러기 같고 / 망망한 극포(極浦)에 구름만 솟네 /
혼자 누웠다고 슬퍼하지 마소 / 계실 때에도 세상의 무리를 떠나지 않았소.”
강화학파로 지칭되는 한말의 대학자 매천 황현(梅泉 黃玹)이 이건창 선생의 생애를 추모한 시(詩)다.
강화도의 독특한 학문의 옹달샘이 강화학이다.
이건창선생은 강화학파의 중심인물, 의열의 선비였다.
선생을 끔직히 사랑했던 할아버지 이시원(李是遠)공의 등에 업힌 다섯 살의 어린이 이건창의 시음(詩音)이 시공을 초월하여 낭랑하게 들리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이시원공이 화창한 봄 한때 손자를 등에 업고 버들가지를 꺾어 손자에게 주자 읊은 시다.
“조절양유지 앵실일지춘(祖折楊柳枝 鶯失一枝春)
: 할아버지가 버들가지를 꺾으시니 꾀꼬리는 한가지의 봄을 잃었네.”
역사의 흐름을 꿰뚫은 신동(神童) 이건창의 생애는 이렇게 시작된다.
모진 바람이 지난 뒤에야 뿌리깊은 나무를 알고 거친 물결이 스치고 간 뒤에야 훌륭한 지주(支柱)를 볼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말 격동의 풍운속에 큰 뜻과 불굴의 정신으로 민족정기를 영세(永世)에 밝힌 의열(義烈)을 찾는다면 의당 강화학파의 종주(宗主)인 이시원 선생과 이건창 선생일 것이다.
이시원공은 1871년 병인양요때 프랑스군이 강화도에 침입하자 관직을 물러난 중신으로서 두 마디의 말이 구차하다면서 영혼이 되어서도 적을 섬멸하겠다는 내용의 상소문을 쓰고 아우 지원(止遠)과 함께 음독 자결한 선비다. 그 손자 이건창은 학식과 명망이 전국을 풍미하던 큰 재목이었으나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말해주듯 조국이 왜적에게 넘어가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 고종황제께 누누이 자신의 충정을 진달하였으나 그 뜻이 관철되지 않자 울화병을 얻어 47세에 분사(憤死)한 선비였다.
여기서 필자는 역사의 단면을 도도하게 관류(貫流)했던 강화학의 흐름을 개관해 보고자 한다.
해방공간이었던 1950년 한문학자로 연세대 교수, 국학대학 초대학장을 지낸 정인보(鄭寅普) 선생이
한국전쟁 때 북한군에 의해 피랍되기까지의 과정이다.
강화학은 안산과 강화도의 하곡에 살면서 학문을 이어가던 소론계의 학자 정제두(鄭齊斗)에 의해서 옹달샘을 이뤄 신대우(申大羽) 부자와 이충익(李忠翊), 이건창(李建昌)일가에 의해 가학(家學)으로 명맥이 유지되어 왔다.
근세에 이르러서는 1900년대 초 역사학자 박은식(朴殷植), 정인보로 이어졌다.
정제두가 숙종, 경종, 영조 연간에 강화도에서 양명학을 연구 강론한 후 그의 자손들과 정종의 아들 덕천군의 후예인 정제두의 손자 사위 이광명(李匡明)과 신대우가 강화로 옮겨 살게되어 정(鄭), 이(李), 신(申)씨 가문을 중심으로 강화학파란 독특한 학맥을 형성, 200년간 전수되기에 이른다.
다시 부연해 본다.
이광사의 학문은 아들인 이영익(李令翊), 이긍익(李肯翊)으로 승계되는데
이긍익은 근조선에 관한 기사본말체의 야사(野史)를 대표하는 '연려실기술'의 저자로 너무나 유명하다.
이면백(李勉伯)은 '해동순사(海東淳史)' 이시원은 '국조문헌', 이건창은 '당의통략' 저술로 당대를 풍미한 석학이다.
이밖에도 이광신, 이광여, 정동유, 김택수, 신대우, 신작, 신헌, 심육, 이진병, 정준일, 송덕연, 최상복, 이선학, 이선협, 성이관, 오세태 등이 강화학파의 맥을 잇는다.
여기서 '매천야록(梅泉野錄)'을 저술, 한말 기우는 국운을 통탄하며 자결로 생애를 마감한 황현선생이
강화학맥을 대변하는 이건창선생을 추모하는 제문(祭文)의 일단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이시원공의 자결, 이건창선생의 분사, 그리고 자신의 자결로 이어지는 우국충정의 맥락에서 강화학의 분출하는 애국열정과 선비의 올곧은 지사(志士)정신을 본다.
“유세차, 기해 4월 황현은 약간의 주과(酒果)를 갖추고 북으로 800리를 달려와서 경허히 선생의 영전에 고합니다. 아아 슬프도다. 인생이 죽지 않으면 서로 볼 수 있다고 전에 선생이 글을 보낼때에 이같이 말씀하셨지요. 어찌 지금 내가 왔는데 선생은 계시지 않으니… 대계(大界)는 뜬 거품이요 군생(群生)도 초파리라. 광연(曠然)히 사방(四方)을 돌아보니… 술이 거나하고 밤이 깊어지면 작은 한숨 긴 탄식으로 국가를 생각하며 눈물을 쏟으셨습니다. 벽동으로 보성으로 귀양살이 하면서 바람에 꺾이고 서리에 부서졌습니다…이름이 큰 고기같이 전파되니 해치는 자 개미떼 같이 덤볐습니다. 한돗대로 바다를 건너가니 죄가 아니라 영광이요 호남(湖南)의 부유(婦孺)들이 큰 별을 다시 보았습니다…
이름이 썩지 않으면 그만이지 하필 오래 살 필요가 있겠습니까?
슬프게도 저 개울에는 개구리와 맹꽁이만 뛰노는 것을 높은 구름가에서 굽어 보시고 탄식하실 것입니다… 내가 늙지 않으려는 것은 선생을 통곡하기 위함이라……, 상향“
전라도 구례땅에서 달려온 한말의 지사 황현이 그의 나이 45세때인 1899년 이건창선생의 제사(祭祀)에 참석, 추상 같았던 의열의 생애를 회고한 것이다.
결국 그도 56세때 경술국치로 나라가 송두리째 일본에 강점되는 비극을 보자 음독자살로 생애를 마감했으니 진정 강화도는 역사의 보루, 민족정신의 보고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강화도에 충만한 강화학의 미풍이 서서히 강풍으로 바뀌는 날,
일제강점기 국운쇠미에서 초래된 분단의 아픈 역사를 청산하고 통일의 대서사시를 민족의 이름으로 소리높이 낭송하는날, 강화도는 그 중심축에 서리라.
“담담중 나는 낯빛 천상선자 분명하다 /
옥란간 어디메뇨 인간연이 무겁던가 /
연(緣)쫓아 의(義)생기나니 언다저어하리요.”
강화학의 마지막 주자 정인보선생의 매화사(梅花詞)다.
인간과 맺은 인연이 무거워 그 인연을 따라 의로움이 생기니 어떠한 핍박으로 얼어붙은들 두려워하겠느냐는 강화학의 지사정신이 오늘을 일깨우고 있다.
마리산이 국토의 중심으로 매화(梅花)의 꽃술일진대
강화도를 비롯한 인천, 김포 일원 경기산하는 매화꽃잎이 되어
그 진한 선비의 지조를 일깨우며 국운융성, 통일한국의 정신적 고향이 될 것이다.
다만 나그네 여정의 이정표와 같이 고려산 기슭 국화리의 한 공간을 차지하여
천년의 역사를 증언하는 고려 고종 홍릉(洪陵)에서다.
민족의 자존심을 지켜온 한사람의 당당한 주역임에도 일반 사대부의 묘역에도 못미치는 왕릉의 모습에서 역사무대의 명암을 실감했다면 지나친 감상일까.
1214년에 왕위에 올라 재위 18년째인 1231년에 몽고 침략을 당해 강화도를 임시수도로 항몽전의 전열(前列)에 섰던 고려의 상징이 아니었던가. 비록 최씨 정권의 그늘에서 46년 왕좌를 지키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는지 아니면 들러리 조연에서 오는 허탈감으로 덧없는 세월을 보내야 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유배지서 선비의 가거지(可居地)로
‘가히 살만한 땅’이란 뜻의 가거지(可居地)는
주로 사대부들이 벼슬에서 물러나 서울을 떠나야 할 때 고심하게 되는 대목이다.
미련없이 고향으로 돌아가면 되겠지만 그곳이 서울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면 다시 올라오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 때문에 후손들을 위해서라도 근기(近畿) 지역에 살 만한 곳을 물색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경향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있었던 것이므로 결국 경기의 지역특성은 이것이 누적된 결과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옛날 형벌체계에는 오늘날과 달리 감옥에 가두는 징역형이 없다. 대신 우리말로 귀양이라고 하는 유배형(流配刑)이 있었는데 이는 다섯 가지 형벌단계에서 사형 다음으로 무거운 죄다.
부처(付處)는 중도부처(中途付處)의 준말로 유배에 처한 죄인에게 정상을 참작하여 유배소까지 보내지 않고 도중에 한 곳을 정해 지내게 하는 유배형의 일종이다. 강화와 교동은 주로 폐위된 왕과 왕족, 그리고 변란을 일으킨 역사의 거물들이 유배 또는 부처된 곳이다.
고려시기에는 혜종 때 왕규, 명종 때 태자 수, 최충헌에 의해 폐위된 희종,
그리고 말기의 충정왕, 우왕, 창왕 등이 줄줄이 강화에 유배되어 생을 마쳤다.
조선에 들어와서도 왕과 왕족들의 수난은 유배지 강화와 교동에서 그 결말을 맺었다.
안평대군, 양녕대군 셋째아들 이혜와 그 가족들,
연산군, 광해군 때의 임해군 · 영창대군 · 능창대군, 그리고 광해군 그 자신과 세자 내외,
숙종 때의 임창군과 임성군이 당사자들이다.
신하들로는 태조 때 윤방경(尹邦慶) · 오몽을(吳蒙乙) · 김용삼(金龍三), 태종 때 이덕시(李德時),
세종 때 이의생(李義生), 연산군 때 내관 서수진(徐守眞), 효종 때의 이징과 이숙 등 그 예는 많다.
유배지를 정할 때 강화 · 교동과 함께 거론되는 곳이 제주다.
두 지역은 해도(海島), 또는 절도(絶島)라는 점에서는 같은 유배조건이지만 서울로부터 떨어진 거리를 고려하면 큰 차이가 있다. 유배 상황도 대조적이어서 아득히 먼 제주로의 귀양은 사형 다음으로 가혹한 것이지만 죄인의 동향이 파악되지 않아 불안한 면이 있는데 반해, 서울로부터 최근거리 유배지인 강화·교동으로의 귀양은 죄인을 배려하는 듯 하면서도 멀리 두는 데에 따른 불안감을 해소할 수 있다.
왕족이나 정치적 거물에 대한 유배지로 강화·교동을 선호한 데는 배역자에 대한 군왕의 아량을 과시하면서도 위리별장(圍籬別將)을 두어 죄인을 철저히 감시할 수 있는 일거양득의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국가를 보장(保障)하는 요충지, 전쟁시에는 격전지로서의 강화는 그만큼 많은 순국열사를 배출할 수밖에 없었고 그 중에는 강화사람들도 상당수가 있었다.
이는 조선 19대 임금 숙종이 23년(1697) 2월에 강화에서 사절(死節)한 사람의 자손 37인에게 먹을 것을 지급하도록 명한 데서도 짐작할 수 있다. 반면 강화와 인연을 맺었지만 자신의 임무를 다하지 못함으로써 곤욕을 치른 명문 집안들도 못지 않게 많다.
선원면 선행리에 있는 충렬사(忠烈祠)는
병자호란 때 강화에서 순절한 김상용(金尙容) · 이상길(李尙吉) · 이시직(李時稷) · 송시영(宋時英) · 심현 · 구원일(具元一)을 향사(享祀)하기 위해 1642년에 건립한 사우(祠宇)로,
1657년에는 이들과 함께 순절한 황선신(黃善身)과 강흥업(康興業)을,
1658년에는 권순장(權順長) · 김익겸(金益謙) · 윤전을,
1728년에 홍명형(洪命亨)을, 1787년에 이돈오(李惇五)를,
1788년에는 척화파로서 순절했던 홍익한(洪翼漢)과 근왕병을 모아 남한산성으로 가려다 순절한 윤계(尹棨)를 함께 추향(追享)하였다. 이 사우는 충절을 장려한다는 뜻에서 정부의 특별한 지원을 받아왔다.
김류(1571~1648)는 명문 순천 김씨로서 아버지 김여물은 임진왜란 때 충주에서 신립장군과 함께 순절하였으며 본인은 인조반정 때 일등공신으로 승평부원군이 되었다. 병자호란 당시 파천(播遷)이 결정되어 종묘 신주(神主)를 강화로 옮길 때 그는 영의정으로서 아들 김경징(金慶徵)을 검찰사(檢察使)로 임명하여 호위하게 하였다. 이때 지봉 이수광의 아들이며 병조 판서 이성구의 아우인 이민구(李敏求)는 부검찰사로 배행하였고 당시 강도유수(江都留守)는 계곡 장유의 아우 장신(張紳)이었다.
집안 배경이 하나같이 모두 쟁쟁한 이들은 막중한 직책을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강도의 함락이었다.
김경징과 장신은 누차에 걸친 임금의 만류와 부탁에도 불구하고 신진세력들의 주장에 밀려 결국 사사(賜死)되었다. 이를 두고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김류는 부귀 때문에 나라를 망치고 또 제 아들을 죽였다”고 하였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강화는 둔전과 같은 경작지의 확대 등 사회경제적 변화에 힘입어 꽤 괜찮은 가거지가 되고 이에 따라 이전과는 다른 강화의 역사가 전개된다.
강화에 대해서는 물론 경기도내 각 지역의 형편의 영역을 구분하여 비교적 자세하게 소개한 당시의 문헌으로는 우하영(禹夏永 · 1741~1812)의 ‘천일록(千一錄)’을 꼽는다.
수원 매곡 사람 우하영은 강화에서의 삶에 대해 다음과 같이 후한 평가를 내렸다.
“강화부는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이를 경계로 삼는다.
서쪽과 남쪽은 바다와 접해있고 동쪽은 통진, 북쪽은 교동과 물 건너 서로 마주보고 있다.
마리산이 진산(鎭山)이다. 비록 해도(海島)지만 산과 들이 서로 섞여있고 땅은 붉은 점토여서 매우 기름지고 근해에는 소금밭이 있다. 도민들은 자유롭게 다른 지역으로 이주할 수 없기 때문에 농사와 고기잡이, 그리고 소금생산에 온 힘을 다 쏟는다. 혹 배를 부려 생산한 어염(魚鹽)을 싣고 타지에 나가 팔아 이익을 취하는 주민들도 있다. 농가에서는 농사 외에 왕골 등으로 돗자리도 짜고 감나무도 심어 수입을 올린다. 비록 해도이지만 땔감도 충분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강화를 낙토(樂土)라고 부른다.”
(‘천일록’ 중 '建都 附風土'條)
외교적인 안정으로 변란의 위험이 줄어든 데다가 낙토라고 표현될 정도로 살기도 좋고 또 서울과의 교통도 편리한 이곳 강화를 양반 사대부들이 은퇴 후의 가거지로 삼으려 하였음은 당연한 추세라 하겠다.
서울에서 태어난 정제두(鄭齊斗·1649~1736)는
숙종 말년에 61세의 나이로 강화도 하곡(霞谷)에 자리를 잡고 학문에 정진한 것이나, 정권에서 밀려나 이곳에 거주지를 잡은 소론계통의 집안들이 그의 양명학적 학풍을 이어받아 강화학파(江華學派)를 형성하게 된 것도 우연이 아닌 것 같다.
전주 이씨 덕천군파(德泉君派)의 이진유(李眞儒·1669~1730)의 자손들, 그리고 정제두의 손자사위인 평산 신씨 신대우(申大羽·1735~1809)와 그 자손들이 대표적인 집안이다. 덕천군파 가계는 강화도령 철종의 등극으로 이시원(李是遠·1790~1866)이 중앙권력에 편입됨으로써 정치적으로 복권되는 영예를 누렸다. 그야말로 가거지를 잘 선택한 효험일까.
한남정맥을 마감하는 글로는 이상과 같은 시시콜콜한 개인과 가문의 이야기가 썩 적절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결국 이것은 앞으로도 경기지역을 이해하는 한 방법이 되리라 믿는다.
답사팀이 교동에서 본 한증막은 흔치 않은 소중한 문화재일 것이라는 판단이 들어 이를 소개하려고 이리저리 문헌을 뒤져보았다. 그러나 세종과 문종 때 동서활인원(東西活人院)과 서울 안에 한증소(汗蒸所)가 있었다는 기록 정도밖에 없었다. 이 정도면 시대도 너무 멀어 우선 감이 오지 않는데 설명은 더더군다나 불가능하다. 즉 한증소를 이용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그 문화재도 생명을 얻지 못하듯이 경기산하도 그곳에 묻혀 살아간 사람들의 숨결이 느껴져야 비로소 다시 볼 수 있는 대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