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 떠나고(답사)

정조가 화성 행행(幸行)하던 시흥길, 그리고 과천길

Gijuzzang Dream 2008. 2. 18. 22:37

 

 

 

 

  시흥길과 과천길  

 

 


 

현재의 안양이라는 지명을 유래하게 했다는 안양사(安養寺).

기록상 고려초에 창건되었고 조선 문종때 대규모의 중창불사가 이뤄졌다고 하나

지금의 건물들은 대부분 근세에 들어 다시 조성하게 된 것이다.

 

수원에서 서울 사이에는
동쪽에서 서쪽 방향으로 청계산과 관악산, 그리고 수리산 등 큰산이 가로질러 있다.  

청계산과 관악산 사이로 나아가는 길이 과천길이고

관악산과 수리산 사이가 시흥길이다.

물론 이 ‘시흥’은 현재 시흥시의 ‘시흥’이 아니고 과거 시흥현이었고 지금은 금천구 시흥동인 ‘시흥’이다.

과천길을 흐르는 천은 인덕원천이고 시흥길은 군포천이다.

서울로 가려면 수원에서 지지대 고개를 넘어

모락산(帽洛山)과 오봉산(五峯山) 사이로 나아가다가 나지막한 갈산(葛山)을 만나 이 두 길로 갈라진다.
지금은 수원에서 1번 국도를 타고 올라오다가 47번 도로로 과천 인덕원 쪽으로 올라오다 보면

머리 위로 외곽순환도로가 지나는데, 그 전에 만나는 구릉지대가 과거 주막도 있었던 갈산의 흔적이다.

조선시대에 수원을 둘러싸던 5개 군현,

즉 용인 · 진위 ·안산 · 시흥 · 과천 중에서 북쪽의 두 개 현이 곧 시흥과 과천이다.

4개 시, 즉 과천 · 의왕 · 안양 · 군포는 서로 붙어 있어 한 덩어리로 보이지만

두 길로 갈라지는 서울길 때문에 시흥길에 속한 안양과 군포,

과천길의 과천 그리고 두 길로 갈라지기 전의 의왕으로 나눌 수 있다.

안양(安養)은 부근에 안양사(安養寺) 터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지만

그보다는 조선후기 정조 때 세운 안양참(安養站)과 관련짓는 것이 나을 듯하다.

그런데 그보다 좀 떨어진 곳에 안양촌(安陽村), 또는 안양리(安陽里)란 마을이 1914년 개편 때

아무 이유없이 ‘安養里’가 되었기 때문에 일제 때 시흥군에는 서이면과 동면에

각각 동명의 ‘安養里’가 있게 되었으며, 두 면이 한 읍으로 합쳐지면서

한 때 한 읍에 두 개의 안양리가 공존하는 혼란스런 상황이 벌어진 적도 있다.

 

과천현 하서면(下西面), 또는 시흥군 서이면과 동면 관할의 일개 동리이던 두 안양리가

1941년에 면 이름이 되고, 1949년에는 읍이 되었으며 1973년에 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이제는 과천, 시흥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1989년에 시가 된 군포시(軍浦市)는

본래 과천 소속으로 과천읍내 남쪽이 되므로 남면(南面)이라고 하였는데

1914년에 시흥군 남면이 되었고 1979년에 군포읍으로 승격하였다.

이곳의 군포장은 조선시대에는 군포천장(軍浦川場)이라고도 하였으며 개시일이 3 · 8일로 나와 있는데,

1905년 조사자료에는 1 · 6일로, 1923년 자료에는 5 · 10일로, 1926년에는 2 · 7일로 나타나는 등

변화를 거듭하다가 1960년대에 와서 도시화와 함께 사라진다.

과천(果川)은 고려 때는 광주에 속한 적도 있고,

태종 13년(1413)에는 금천과 병합하여 금과로 칭하다가 곧 세조 때 복구된 적 말고는

조선시대 내내 현(縣) 단위로 있다가 고종 32년(1895)에 군(郡)이 되었다.

그러나 일제 때인 1914년에 시흥군에 병합되어

1986년에 시로 승격되기 전까지 일개 면 단위로 머물게 되었다.


군포와 마찬가지로 1989년에 시가 된 의왕(儀旺)은

원래 광주군 의곡면(儀谷面)과 왕륜면(旺倫面)이 1914년에 하나의 면으로 합해져

수원군으로 소속되면서 생긴 이름이다. 1949년에는 화성군 일왕면이 되었다가

1963년에는 시흥군에 소속되면서 의왕면으로 그 이름이 되돌아왔다.

위의 몇 가지 예에서 볼 수 있듯이

1914년은 이름의 반쪽만 남겨지고 한자도 바뀌는 등 고유지명이 일대 수난을 겪은 해이며

이 일대의 구역과 명칭의 변화는 다른 지역에 비해 특히 심했다.

그러나 여기서 잠시 언급하고 싶은 점은

특히 지명유래에 관해서는 일종의 강박증처럼 무조건 일제의 횡포를 들먹이는 경우가 있는데,

이제는 막연히 그럴 것이 아니라 문헌자료에 대한 충분한 섭렵이 그 전제가 되어야 하겠다.

 

예컨대 왕륜면(旺倫面)의 왕(旺)처럼 조선시대에 이미 지명에 들어있는 ‘旺’자에 대해

일제 때 일인들이 고의로 ‘王’ 옆에 일본의 ‘日’자를 붙인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분들을 보게 된다.

마찬가지로 인왕산에 대해서도 같은 오해가 있는데

‘仁王山’이 동시대에 ‘仁旺山’이라고 썼던 것처럼 ‘王’과 ‘旺’은 혼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측량용으로 꽂아둔 쇠꼬챙이를 충분한 근거도 없이 민족정기를 끊는 쇠말뚝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실은 이러한 경우와 다를 바 없는 일종의 피해의식의 발로인지도 모르겠다.

시흥길이 열린 것은 조선 22대 임금인 정조(正祖)의 원행(園幸) 결과다.

정조는 과천과 시흥에 각각 행궁을 설치하고 사근평(肆覲坪)에는 창사(倉舍)를,

안양참(安養站)에는 발사(撥舍, 즉 驛舍)를,

노량(鷺梁)에는 진정(鎭亭)을 두어 원침 배알 때 연로(輦路)가 머물 곳을 마련하였다.

 

현재 의왕시 고천동(古川洞) 동사무소는 사근행궁(肆覲行宮)이 있던 자리인데

1989년에 의왕시로 독립할 때 시청이 들어선 곳이기도 하다.

안양역 앞 안양행궁지는 일제 때 서이면사무소로 사용되다가 안양옥이라는 음식점으로 개조되었고

이제는 폐가가 되었다. 안양참, 또는 안양미륵당참(安養彌勒堂站)의 위치도 지금의 안양역 앞인데

1940년대에 그 자리에 백화점이 들어섰다.

만안교(萬安橋)와 표석 또한 홍수로 제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약 200m 위로 이동하였다.


이처럼 이제는 복원이 힘들어진 시흥길을

1795년에 있었던 원행 당시 정조임금의 거둥을 통해 느껴보자.

 

  

 

 

  

창덕궁 돈화문-숭례문-청파교-만천(너푸내, 용산역 부근)-노량 배다리-노량 행궁(용양봉저정)

<과천길>

-만안고개(만냥고개)-금불고개(숭실대학교 부근)-사당사거리-남태령고개-과천 행궁(온온사)-찬우물점-인덕원사거리-갈산점-원동점-사근참 행궁

<시흥길>

-만안고개(만냥고개)-장승백이-번대방평-문성동-시흥 행궁-대박산-만안교-안양참-군포천다리-청천평(맑은내 벌)-원동천-사근평-사근참 행궁

-지지대고개(미륵고개)-괴목정다리-노송지대(용두앞길)-목욕동다리-여의다리-만석거(일왕저수지)-영화정-대유평-관길야-장안문-화성 행궁-팔달문-상류천점(매교삼거리)-유근다리-만년제-현륭원

 

“비가 올 것을 우려하여 오전 6시에 시흥 행궁을 일찌감치 출발하였는데

임금은 군복을 갖추고 말을 타고 자궁(慈宮), 즉 혜경궁 홍씨는 가교를 탔다.

        **** 대비(大妃: 왕의 모친) : 자전(慈殿), 웃전(그 위의 분이 안 계실 때)이라 칭한다.

        **** 그러나 왕의 모친이더라도 그 신분이 ‘세자빈’(정조 모친 혜빈 홍씨의 경우)일 때, 

              또는 후궁으로서 ‘빈(嬪)’일 때(순조 모친 영빈 박씨의 경우)는 ‘자궁(慈宮)’이라 함.

 

대박산(大博山) 벌판을 지나 안양참(安養站) 앞길에 이르러 잠시 머물러 미음 다반을 든 다음

장산(長山) 모퉁이를 지나 청천(晴川) 들에 이르러

임금이 하마하여 자궁의 어가 앞에 나아가 문후하였다.

이어 원동천(院洞川)을 지나서는 사근참(肆覲站) 행궁에 나아가 점심 식사를 하였다.

이곳에서 화성까지의 거리가 1사(舍), 즉 50리가 못되니 때에 맞추어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세종의 아들 임영대군이 터를 잡은 이후 그 후손들이 지금껏 살고 있는 내손동 능안마을은

큰길을 벗어나 모락산 동쪽 골짜기로 숨듯이 들어가 있어

조선 지배층의 정서에 부합하는 주거지가 바로 이러한 곳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천부터 긴다는 속담은 물론 상경을 앞둔 시골뜨기의 심정을 헤아린 것이지만

이 또한 어명을 기다리는 벼슬아치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조선후기에 들어와서 과천은 소(疏)를 올린 신하들이

임금의 부름을 받들기 위해 머무는 곳이 되어버렸다.

영조 때 영의정 이광좌(李光佐)는 과천 옥(獄)에서 대명(待命)한 일이 있었고,

좌의정 김상로(金尙魯)도 과천 옥에 나아가 엎드려 대명하였다고 한다.

 

고위직 신하들의 이러한 행동을 임금이 가상히 여겨 몸소 그곳에 임하겠다고 하면

신하는 지체없이 도성으로 나아가야지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미움을 사게 된다.

그러므로 과천부터는 몸을 최대한 낮추어야 했을 것이다.

 

참고로 김상로는 청풍 김씨로 그의 형제인 취로(取魯)와 약로(若魯),

큰아버지 구(構)와 사촌 재로(在魯), 그리고 조카, 즉 재로의 아들 치인(致仁)이 정승을 지내

‘3대 정승(구-재로-치인)’ ‘부자 영상(領相)’을 냈다고 장안에 화제가 된 집안인데,

이 집안의 묘가 오봉산이 보이는 곳에 자리하고 있어

그 음덕을 받은 것이라는 풍수가들의 설이 전해지고 있다.

 

만약 이 방면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그곳에 가서 이들 당사자들의 묘가 아니라 그 할아버지 묘를 보아야 할 것이다.

음덕을 내렸다면 그것은 응당 땅에 묻힌 그들 할아버지 모이(=묘)가 내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  정승모 · 지역문화연구소장

-  경기문화재단,  문화재

 

 

 

 

 

 

 

정조 어머니 혜경궁 홍씨, 대비인가 아닌가?

 

 

드라마 <이산>에서 정조의 등극이 이미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정조의 어머니인 홍씨는 대비인가 아닌가?

 

정조 등극 이후의 <이산>을 감상하면서 그런 의문을 가졌을 시청자들이 있을 것이다.

일반적인 경우, 아들이 왕이 되면 그 어머니는 대비가 된다.

그러나 홍씨의 경우에는 문제가 좀 복잡하다.

 

법적으로는 정조의 어머니가 법적으로는 정조의 어머니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영조가 이미 이산을 장남인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양해 놓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홍씨는 대비가 될 수 없는 처지였다.

 

한편, 정순왕후 김씨는 영조의 사망과 함께,

중전에서 대비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왕대비로 ‘2단계 특진’ 하는 ‘행운’을 얻었다.

남들은 한창 중전을 하고 있을 나이인 32세에 정순왕후는 이미 왕대비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조 즉위 직후에 조선왕실에는 공식적으로 대비가 존재하지 않았다.

정조가 즉위 후에 자신의 양부인 효장세자를 진종(眞宗)으로,

효장세자의 부인인 김씨를 효순왕후로 올렸기 때문에,

효순왕후 김씨가 대비가 되는 게 마땅했지만 그 역시 이미 영조 27년(1751)에 사망한 뒤였다.

 

그럼, 이산의 생모인 홍씨. 그의 신분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그 점을 이해하기 위해 사도세자의 폐위 때로부터 홍씨의 지위가 어떠했는지를 살펴보자.

 

홍씨의 입지는 사도세자의 폐위 이후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세자인 남편이 폐위된 데에다가 뒤주에서 죽기까지 했으므로,

그의 지위 역시 불안정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영조는 사도세자의 사망 직후에 그에게 혜빈이란 칭호를 내렸다.

그가 세손의 생모이기 때문이기도 했고,

남편 사망 후에도 여전히 시아버지에게 극진한 그의 효심에 영조가 감동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남편이 죄인으로 몰려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아버지의 신임과 세손의 존재 덕분에

왕실 내에서 지위를 유지해가던 홍씨.

아들이 보위에 오르고 난 이후 조선정부에서는 그의 신분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군주의 생모이므로 대비가 되는 게 마땅하지만,

법적으로는 그렇지 않으므로 그는 대비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법적으로 대비가 될 수 없다고 하여 그를 그저 세자빈 정도로만 대우할 수도 없었다.

아들이 지존인데 그 어머니를 세자빈 정도로 대우한다면

그것도 부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대비가 될 수 없는, 군주의 살아 있는 생모.

그에 대한 예우는 복잡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군주의 살아 있는 생부였던 흥선대원군을 대우하는 것만큼이나

그를 대우하는 것도 여간 까다로운 문제가 아니었다.

 

이런 난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정조시대의 조선 사람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대비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대비가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홍씨의 처우문제를 놓고

그 당시 사람들은 하나의 절충적 방안을 채택했다.

형식적 대우와 실질적 대우를 이원화하는 약간 ‘애매모호한’ 방법을 취한 것이다.

 

그에 대한 형식적 대우는 이랬다.

정조 즉위 이후에 조선정부에서는 사도세자를 장헌세자로 높이면서

그를 왕보다 한 단계 아래로 대우하기로 했다.

남편을 왕보다 한 단계 아래에 두었으니 그 부인도 왕비보다 한 단계 아래에 두는 것이 마땅했다. 그래서 혜빈 홍씨를 혜경궁으로 높이면서 그를 왕비보다 한 단계 아래로 대우하기로 했다.

 

이미 남편이 죽고 아들이 군주가 된 이후이기 때문에 ‘왕비보다 한 단계 아래’라는 것은

‘대비보다 한 단계 아래’라는 말로 변용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정조 즉위 이후의 홍씨는 형식적으로는 대비보다 한 단계 아래인 사람으로

대우를 받았다. 정확히 말하면, 중전과 대비의 중간 정도의 대우를 받은 것이다.

 

중전과 대비의 중간?

중전이면 중전이고 대비이면 대비이지 그 중간이 대체 뭐냐면 ? 

그런 관념적인 조치가 일반 백성들에게 쉽게 납득될 리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홍씨에 대한 실질적 대우는 위와 같은 형식적 대우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실질적 대우는 보다 구체적이고 명확한 수준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순조실록>에 따르면, 정조 즉위 이후의 홍씨는 ‘장락(長樂) 같은’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장락이란 대비를 가리키는 표현이었다.

한나라 고조 때에 태후(대비)가 장락궁 안에 살았기 때문에 '장락'이란 표현은

대비를 가리키는 표현이 되었다.

그와 같이 당시 사람들은 홍씨를 ‘장락처럼’ 대우했다. ‘대비처럼’ 모신 것이다.

그러므로 홍씨에 대한 실질적인 예우는 대비 수준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홍씨에 대한 실질적인 호칭으로는 혜경궁 대신 자궁(慈宮)이 사용되었다.

평소에는 그냥 '자궁'이라고들 불렀다고 한다.

'자궁'이란 말 속에는 어머니(慈)란 뜻이 담겨 있다. 그러므로 '자궁'이란 표현은 실질적으로는 대비를 가리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사도세자가 아직 왕으로 추존되지 않은 상태인지라 대비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부러 '자궁'이란 애매모호한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장락처럼’ 즉 ‘대비처럼’ 대하면서 '자궁'이라는 애매모호한 표현으로 그를 불렀던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정조시대에 홍씨에 대한 예우는 형식적으로는 ‘대비와 중전의 중간’에서,

실질적으로는 대비 수준에서 이루어졌다.

여러 가지 조건을 고려한 절충적 조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죽은 남편이 왕이 아닌데다가 군주의 법적 어머니도 아니었으므로

정식 대비로 대우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엄연히 지존의 생모였으므로 실질적으로는 대비로 대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대비가 아니면서 대비인 존재였던 것이다.

요즘 말로 하면, ‘대비 대우’ 혹은 ‘대우 대비’라고 해도 될 것이다.

 

이런 복잡한 문제는 훗날 고종 임금에 의해 ‘한 큐’에 해결되었다.

고종 임금이 사도세자를 장조 임금으로 추존하면서 홍씨도 헌경왕후로 추존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홍씨는 그때서야 비로소 대비가 될 자격을 얻은 셈이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대비가 되기에는 너무나 뒤늦은 시점이었다.

모두 다 죽은 뒤였기 때문이다. 생전의 그는 그저 ‘대비 대우’로 만족하며 살 수밖에 없었다.

정식 대비는 못 되었다 해도, 아들이 무사히 지존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감사하며 살 수 있었는지 모른다.

- 오마이뉴스, 김종성 기자, 2008-03-23

 

 

 

 

 백성을 위한 화성행차 그 길을 찾아서

 

 길에서 찾는 역사, 왕의 능 행차



사람들은 그렇게 이야기한다. 정조는 길 위의 군주라고….

길에서 사람을 만나고 인생을 깨우치듯 정조는 길에서 백성을 만나고 조선을 생각했다.

정조에게 길이란 단순히 걷기 위한 도로가 아닌 억조창생의 시작이었다.

우리는 현재 ‘이산’이라는 드라마를 통해 세손의 길 떠남을 보았고 길 위에서의 흐느낌을 보았다.

그러나 진정 정조의 길 떠남은 사랑하는 연인 송연이를 만나기 위해서도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것은 억울하게 돌아가신 아버님을 만나기 위한

것이었고, 길 위에서 만난 여리고 슬픈 질곡의 백성들을 보듬기 위함이었다.

잘 알려져있다시피

정조는 능 행차를 통해 국왕의 지위를 강화하고 백성들의 현실을 직접 눈으로 보았다.

조선 대부분의 국왕들이 연중 1회 정도의 능 행차를 추진함과 달리

정조는 재위 25년 동안 66회의 능 행차를 단행하였고,

행차 중 상언(上言)과 격쟁(擊錚) 3천 355건을 처리했다.

 

더불어 정조는 선대왕의 능을 참배하고 도성으로 돌아오는 도중

자신을 호위한 군사들로 하여금 강력한 군사훈련을 지시하고

이를 통해 국왕 자신이 다스리는 조선을 그 어느 누구도 침범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백성들은 그 모습을 보기 위해 전국에서 모여들었고

자신의 국왕 정조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 능행의 절정이 바로 혜경궁의 회갑연을 치르기 위한 8일간의 화성행차였다.

 

 

정조의 8일간 화성행차에 대한 기억

1795년 윤2월 9일. 드디어 새벽의 정적을 깨는 종소리와 더불어 창덕궁 돈화문(보물 제383호) 앞은 융복을 차려입은 정조의 모습이 드러났다. 아버지의 묘소를 수원으로 옮긴지 6년 만에 처음으로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화성유수부로 행차를 시작하고자 한 것이다.

 

정조는 행차를 1년 전부터 준비하면서 수원으로 내려오는 길을 새로 만들었다. 그 길이 지금의 1번 국도이다.

원래 길은 지금의 남태령을 넘어 과천과 인덕원을 거쳐 가는 ‘과천길’이었으나 노량진에서 시흥을 지나 군포와 의왕 등을 거쳐 지지대고개로 통하는 시흥길을 새로 만들었다.


정조는 돈화문을 나와 종루 앞의 큰 길로 향했다.

지금의 보신각 종 앞으로 행차한 것이다.

그리고 대광통교와 소광통교를 지나 숭례문(국보 제1호)을 지나갔다.

숭례문을 지나 현재의 서울역 앞을 거쳐 노량진으로 향한 행차는 정약용이 설치한 그 유명한 배다리를 건너 노량행궁에 도착하게 된다.

 

정조는 배다리를 원활하게 설치하기 위해 주교사(舟橋司)라고 하는 특별 관청을 설치하였는데 그 자리가 바로 노량본동의 동사무소 자리이다. 그 자리에서 약간 위쪽으로 올라가면 아직도 노량행궁의 중심 건물인 용양봉저정(시도유형문화재 제6호)이 초라한 모습으로 흔적을 남기고 있다.

과거 정조시대 노량행궁은 단순히 정조의 수원 행차 시에 점심 수라를 들기 위한 주정소만이 아닌

노량 일대의 조운선을 관장하고 상인들을 통제하던 막강한 곳이었다.

하지만 세월의 변화를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대부분의 건물들은 모두 사라지고 용양봉저정 하나만 남아 정조의 옛 자취를 느끼게 할 뿐이다.

 

첫날 점심 수라를 이곳에서 마친 정조는

6천여 군사들을 거느리고 위풍도 당당하게 시흥행궁에 도착하였다.

현재 시흥행궁은 완전히 사라지고 그 흔적도 희미하다.


정조의 행차길은 시흥행궁을 뒤로하고 현재의 1번 국도를 그대로 따라 수원으로 내려가다

관악 전철역 옆의 만안교(萬安橋, 시도유형문화재 제38호)를 만나게 된다.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위해 새로운 시흥대로를 만들면서 안양천을 건너기 위해 만든 만안교는

원래 관악전철역사 바로 옆에 있었는데 전철역을 만들면서

안양천의 원래 위치에서 약 200여 미터 아래로 이동하여 다시 축조되었다.

만안교의 글씨는 일반적인 글씨체와는 완전히 다르다.

무엇인가 튀어 올라가는 이 글씨체는 정조시대 최고의 명필이었던 유한지(兪漢芝)의 글씨로

만안교 아래로 흐르는 장쾌한 물의 역동성을 표현한 것이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통해 무수히 많은 문화유산들이 파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우리를 위해 남아있는 것은 정조시대 문화의 풍요로움을 우리가 깨달을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한 정조의 배려가 아닌가 한다. 


만안교에서 안양전철역 앞의 안양1번지를 지나 군포사거리로 그리고 다시 1번 국도를 지나게 되면

정조가 둘째 날 점심을 먹었던 사근행궁에 도착한다. 물론 사근행궁은 현재 남아있지 않다.

의왕시의 중심 지역인 고천동이 바로 사근현이었고

현재 고천동 주문자치센터가 바로 사근행궁의 터였다.

의왕시의 문화예술인들이 사근행궁을 복원하고자

고증을 통해 최근 3D입체영상을 제작하고 있고 필자가 지속적인 자문을 해주었다.


            


부친의 묘역을 보며 눈물 흘리던 왕의 자취

사근행궁에서 수원으로 올라가는 길은 큰 고개를 올라가야 했다.

이 고개 이름은 지지대고개라고 불리우는데 정조에 의해 만들어진 이름이다.

 

정조는 이 고개에 오르면 멀리 화산 쪽에 있는 부친의 현륭원이 보이는데

그곳까지 가는 시간이 너무도 답답하기 이를 데 없어 “왜 이렇게 더딘가?”하고 한탄을 하였으며,

참배를 마치고 서울로 환궁 할 때는 이 고개의 마루턱에 어가를 멈추어 서게 하고 뒤돌아서서

오랫동안 부친의 묘역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이 고개 위에는 정조의 거룩한 효행을 기념하여 순조 때 지지대비를 건립하였는데

현재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되어 있다. 

 

지지대고개를 지나 프랑스 참전비를 지나

본격적인 노송지대로 들어오면 첫번째로 맞이하는 곳이

바로 정조의 동상과 효행기념관이다.

도심에서 너무 떨어져 있어 찾는 이가 많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조의 효심이 깊이 담겨 있는 이 길 위에

만들어진 것이기에 그 어느 기념관보다 의미있다고 할 수 있다.

 

효행기념관을 지나면

곧바로 정조가 지나갔던 괴목정교(槐木亭橋)가 나온다.

수원으로 들어와서 첫 번째 맞이한 괴목정교는 누구의 글씨인지 알 수는 없지만 당대 최고 명필의 글씨임에는 틀림없다. ‘느티나무정자 다리’란 이름답게 괴목정교 남쪽으로 약 10m 지점에 370여 년 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 아직도 그 위용은 대단하다.


괴목정교에서 남쪽으로 조금 내려오면 현재 법화당이란 이름으로 바뀐 미륵당이 있다. 정조의 행차 시절에도 그대로 있던 미륵당으로 그 시절 그 모습대로 오늘날까지 있는 몇 안 되는 것 중의 하나이다.

 

앞서 말한 지지대 고개의 이름이 사근내고개에서 미륵고개로 불리었는데 바로 이 미륵당 때문이었다. 이 미륵은 조선후기 경기남부지역이 많이 생겨난 전형적인 마을 미륵으로 이 지역 백성들의 소망을 모두 받았던 작은 미륵님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현재 이 미륵 옆에는 대형버스 차고지가 생겨 미륵의 영험함은 사라지고 버스 시동 거는 소리에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지경이다.
   

 

백성의 나라를 이루고자 했던 정조의 마음

 

정조는 자신의 행차길에 특별히 많은 소나무를 심었다. 그 소나무가 이제는 노송지대란 이름으로 수원시민들의 명소가 되었는데 1970~80년대에는 이 주변에 참으로 많은 포도밭과 딸기밭이 있었다. 이제는 딸기밭의 흔적은 사라지고 오직 수원갈비를 파는 음식점으로 가득하다.

 

노송지대에 가득한 화성유수부의 송덕비를 보며 정조의 능행길은 계속된다.

아직도 2차선인 이 길은 그대로 이어져 ‘만석거’라는 큰 저수지에 다다른다.

정조가 만든 이 저수지는 조선의 농업개혁의 산실이자 우리 농업을 한 단계 발전시킨 대표적 문화유산이다. 이 저수지 옆에 정조는 잠시 쉬면서 융복 위에 황금갑주를 걸치고 장안문으로 향했다.

 

그가 장안문으로 들어올 때는 세차게 내리던 비도 멈추고 갑자기 태양빛이 가득하여 사람들은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호위하는 군사들과 온 백성들의 마음을 담고 화성유수부의 종루 앞을 지나 화성행궁으로 들어갔다.

 

서울에서 무려 100여 리. 요즘의 미터법으로 환산해서 무려 56㎞를 내려온 그의 능행길은

단순한 국왕의 행차가 아닌 백성들을 위해 행복을 주는 행행(幸行)이었다.

- 글, 사진 : 김준혁 수원시 학예연구사 / 사진제공 : 국립고궁박물관 유물과학과 

- 2008년 2월 4일 월간문화재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