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화성(華城) - '正祖의 꿈' 담아낸 三南 잇는 최초 신도시
수원(水原) 화성(華城)
수원은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이 서로 대립하던 저 옛날에는 고구려와 백제의 중심지였다.
한강 유역의 기름진 땅에서 일찍이 농경문화의 터전을 가꾸어온 수원이 주목을 받은 것은
당연한 역사발전의 순환법칙.
고구려의 끈질긴 남하정책으로 고구려 영토가 남양만에서 죽령을 잇는 선에 도달하자
백제와 신라는 이에 대항하기 위해 일종의 공수동맹인 나·제동맹(493년)을 맺기에 이른다.
이때 고구려의 매홀군(買忽郡)으로 불려온 수원지방이야말로
오래 전부터 고구려 · 백제간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양국이 탐을 내는 지역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한강유역을 가슴에 품은 수원의 역사는 민족사의 발전 궤적에 핀 한떨기 찬란한 꽃이었다.
팔달산의 고인돌, 여기산의 청동기 유적움집터에서 발굴 조사된 철도끼, 철화살촉, 철칼, 철톱 등
농경시대 생활공구에서 수원지방의 생활문화가 손에 잡히는 듯하다.
서까래와 그 위에 갈대를 엮어 덮은 지붕이 고스란히 발견되었고,
특히 철톱의 출토는 당시의 주민들이 톱으로 나무를 켜서 집을 짓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런가하면 주거지 주변에서 채집한 토기의 밑부분에 볍씨자국이 있었고
진흙에 볏짚을 넣어 익힌 흔적이 뚜렷하게 발견되었다.
이는 수원지방이 무늬없는 토기 중기부터 벼농사가 크게 성행했으며 초기철기시대에 들어와서는
볏짚을 사용하는 등, 주민들이 근대의 농촌을 연상케하는 생활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수원지역은 그 발전과정을 역사적으로 볼 때 두 번의 전기가 있었다.
그 첫 번째가 18세기 후반 정조의 화성축조 이후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비상(飛翔)한 것이라면,
두번째는 20세기 후반인 1967년 경기도청이 수원에 정착함으로써
60년대 이후 수부도시로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웅비(雄飛)한 것이라고 하겠다.
2세기에 걸친 격동의 역사 속에서 수원은 신흥 수부도시로서의 면모를 일신하면서
문화도시의 상징인 화성이 복원되었고,
삼성전자, 선경합섬, 연초제 조창의 수원정착으로 경제적 기반을 굳혔다.
수원은 화성(華城)이 포용한 문화와 산업단지를 양대축으로 해서 비약적인 발전을 할 수 있었다.
삼한시대 수원지방은
한강이남의 토착세력인 진국(辰國)의 독자적인 지배권이 형성되어 있었던 지역이었다.
후한서 동이전 한조에 따르면 마한이 54국, 진한과 변한이 각각 12국씩 모두 78국으로 구성돼
경기도의 중심부에 위치하였다. 이때 수원지역과 역사적으로 직접 관련이 닿는 곳은
원양국(爰襄國), 상외국(桑外國), 모수국(牟水國) 3국이다.
원양국은 지금의 화성시에 속해있던 재양현 지역이고,
상외국은 화성시의 장안·우정면 일대로 추측된다.
원양국과 상외국이 수원시 승격이전의 수원관내에 해당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현재의 수원시 일원만을 놓고 볼 때 삼한시대 수원지역은 마한의 모수국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수원지역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시대 백제의 땅이었다가 고구려가 영유할 때 매홀군으로 되었다는 내용이다.
그 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757년(경덕왕 16)에 수성군(水城郡)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고려건국 이후에는 940년(태조 23) 수주(水州)로 다시 바뀌면서 승격되어 주지사가 배치되었고,
1271년(원종 12)에는 수원도호부로 되면서 목사(牧使)의 부임지인 목 (牧)으로 승격되었다.
1310년(충선왕 2) 지방제도가 변경될 때 수원부(水原府)로 강등되었다가,
조선개국 이후 1413년(태종 13) 지방제도의 개편때 도호부(都護府)가 되었다.
고려 때 전 · 후 · 좌 · 우보 제도를 채용할 때 수원은 전보(前保)가 되었고,
이후 조선시대 4대 유부(수원 · 광주 · 강화 · 개성)의 하나로
문화 · 경제적 요충지로서 역사발전의 중심축을 이뤄왔다.
수원이 국난극복의 전략적 거점이 되었던 역사적 사건은
광교산의 김준용 장군 병자호란 전승기록이 말해준다.
1636년(인조 14) 12월 강추위가 몰아 닥친 속에 겪어야 했던 참담한 국난.
조정은 남한산성에서 고립무원의 농성을 해야했고
근왕병의 지원은 겹겹이 포위한 청군으로 인해 차단된 상태였다.
청태종의 13만군을 상대하여 나라의 운명을 지켜야하는 고되고 험난한 시기.
이때 김준용 장군은 호남절도사로서 병사를 모집해 13일만에 수원에 도착,
남한산성과 지척간으로 전략적 요충지인 광교산에 웅거한 청군과 일대 접전을 벌인다.
남한산성을 구하려면 반드시 이곳에 포진한 적진을 격파해야 했다.
청군의 대장도 청태종의 신임으로 그의 사위가 된 양고리(揚古利)였으니,
김준용 장군의 광교산 전투는 양웅(兩雄)이 대치한 결전이 될 수밖에 없었다.
새벽안개를 이용해 김준용 장군의 진을 급습한 청군은 그 기세가 풍우와 같았다.
이에 장군은 큰소리로 “이때야 말로 충신이 국가의 은혜에 보답하는 때다”라며 군사를 지휘한다.
피아의 함성이 천지를 진동하는 광교산 계곡에서 종일토록 진행된 일진일퇴의 결전.
드디어 장군의 포대에서 날아간 포환이 적장에 명중함으로써
청병은 김준용 장군 근왕병의 총공격 앞에 대패하고 만다.
이곳 전승지에서 그 날의 역사를 증언하는
'충양공 김준용 전승지 병자청란 공제호남병 근왕지차 살청삼대장'
'(忠襄公 金俊龍 戰勝地 丙子淸亂公提湖南兵 謹王至此 殺淸三大將)'
이란 병자호란 전승기념 암각문이 후세를 일깨우고 있다.
광교산 형제봉에서 시루봉 정상을 향해 가는 중간 봉우리인
비로봉 동남향 8부 능선 암반에 새겨진 이 전승비는
1794년(정조 18) 수원에 화성 축조를 총괄하던 영의정 채제공이 장군의 승전 사실을 전해듣고
전승지인 광교산 암벽에 기념하는 글을 새기도록 하여
굴욕의 역사 병자호란을 새롭게 조명하는 역사의 현장이 되게 하였다.
'병자호란에 공이 호남의 병사를 거느려 임금을 구하고자 이곳에 이르러
청나라 대장 3명을 죽였다'는 내용이다.
이 암각문은 1972년 경기도 기념물 38호로 지정되어 문화재로 보호되고 있다.

형제봉, 비로봉, 시루봉이 솟아있는 한남정맥의 주봉 광교산은
광교저수지와 수원천이 이어지는 넉넉한 물길까지 더해져 푸근한 아버지의 기상을 느끼게 해준다.
수원(水原), 왕권과 민생을 함께 담은 최초의 신도시
수원에는 아직도 조선 22대 임금인 정조(正祖)의 원행(園幸) 자취가 곳곳에 남아 있다.
그 중 유형의 흔적을 대표하는 것이 바로 화성(華城)이다.
석전(石塼) 읍성인 화성은 1789년에 정조 임금이 아버지 장헌세자의 원(園=현륭원)을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 화산(華山)으로 옮기고
그 부근에 있던 읍치를 수원 팔달산 아래로 옮기면서 축성되었다.
화성 축성과 함께 부속시설물로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 많은 시설물이 건립되었으나
대부분 일 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으로 성곽 일부와 함께 소멸되었다.
화성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외롭게 남아있다가 다행히 최근 화성행궁이 복원되었다.
임금의 효심이 축성의 계기가 되었던 화성은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서 뿐만 아니라
당파정치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정치적 구상이 담긴 흔적이기도 하다.
경기지역은 화성축조 이전만 해도 동에서 서로 흐르는 한강을 따라 발전해 왔으며
그 요지마다 핵심 양반세력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정조는 남북을 잇는 화성행차를 통해
소외된 지역세력에게 힘을 실어주어 그 축을 바꾸고자 하였던 것이다.
임금의 거둥길을 필로라고 하는데 지금은 효행로라고 부르는 이 길은 군데 군데 끊어져 있는 상태다.
동작진(銅雀津)을 건너 남하하는 역로가 지지대가 있는 미륵고개를 넘어,
수원 관내로 접어드는 초입에 파장동 미륵당이 있으며,
더 내려오면 정조가 내탕금을 하사하여 심었다는 노송들이 울창한 노송로가 나온다.
이 길가에 총 35기의 선정비가 나란히 서서 이곳이 옛 진입로였음을 보여주며,
서호천 상류를 가로지르는 다리 남쪽에 수령 200년이 넘는 느티나무군락도 옛 역로임을 나타낸다.
일용리, 여의교, 만석거, 기하동, 대유평, 영화역, 관길야를 거치면
화성 북문인 장안문에 이르렀으며,
이어 만년제를 거쳐 현륭원에서 필로는 멈추었다.
정조의 원행이 가져다 준 효과는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이를 계기로 수원은 광주(廣州)와 더불어 삼남(三南)으로 가는 주요 길목으로 부각되었다.
그 중심 역원이 바로 장안문 밖의 영화역(迎華驛)이다.
화성 축성 이전까지 서울을 떠나는 주요 시발점은 양재역이었으며
광주에 이르러 용인과 수원으로 길이 나뉘는데,
용인의 구흥과 김령을 경유하여 죽산과 음죽으로 이어지는 길이 대로(大路)였던 반면
수원으로 가는 길은 낙생역에서 갈라지는 간로(間路)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잦은 원행에 따라 수원으로의 길이 크게 열리고
1795년 원행 때는 안양과 시흥을 잇는 새 길이 마련됨으로써
지금처럼 수원이 충청남도와 전라도로 가는 대로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양재에 두었던 찰방역(察訪驛)이 신설 영화역으로 이관된 것도 그러한 변화의 반영이었다.
정조 임금은 성군답게 행차가 가져다 줄 민폐를 최소화하기 위해 여러가지 자급 기반을 마련하였다.
행사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둔전(屯田)을 조성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둔전 운영을 위해 만석거(일왕저수지)와 축만제(서호) 등 저수시설을 만들었고
주민들에게는 경작에 필요한 소를 키우도록 권장하였다.
우만동(牛滿洞)이나 지소동(紙所洞)은 물론이고
조원동(棗園洞), 율전동(栗田洞), 이목동(梨木洞), 시목동(枾木洞) 등의 지명에 들어있는 조율이시가
제수 공급과 관련하여 붙여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또한 지역경제의 활성화를 위해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나 두었던 시전(市廛) 거리를 조성하였다.
읍지(邑誌) 기록에 의하면 장사를 할만한 수원 사람들에게 1만5천량을 대여하여
입색전(立色廛), 어물전(魚物廛), 목포전(木布廛), 미곡전(米穀廛), 유철전(鍮鐵廛), 관곽전(棺槨廛),
지혜전(紙鞋廛) 등의 점포를 관문 밖 대로주변에 개설하게 하니
사람들이 몰려들고 시전이 번성하여 완연히 대도회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고 하였다.
수원의 소갈비 요리가 전국적인 명물이 된 것은 해방 후의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곰탕이나 설렁탕이 전국의 소가 집결했던 서울에서 발전했던 것과 같은 이치로
수원에서도 정조 이후부터는 쇠고기 음식이 발달할만한 충분한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넓은 둔전 땅을 경작하기 위해서는 소는 물론 소를 부릴 일꾼도 많아야 했기 때문에
마땅히 경작할 땅이 없는 전국의 농민들이 모여들었고,
시전의 활성화로 상인들도 모여듬으로써
수원은 자연히 경제규모가 큰 도시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이다.
상설점포인 시전을 두게 된 수원은 사방이 장길로 연결되는 시장권의 중심지가 되었다.
수원 주변의 장시는
북쪽으로 서울 방면, 동쪽으로 용인 방면, 남서쪽으로 남양·발안 방면,
그리고 남쪽으로 평택 방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모두가 삼남에서 서울로 향하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는 점이 공통이다.
안양~군포~수원~오산으로 이어지는 길과
용인~광주를 경유하는 경로는 역로 가운데에서도 대로에 해당되니 말할 것도 없고
세류천~고색~오목천을 경유하여 남양으로 가는 길도 주요 간로로 발전하였다.
수원 오목천 삼거리에서 봉담면을 거쳐 발안으로 가는 길 역시
평택 포승면의 만호나루를 건너 충청도 서북부 지방에 이르는 주요 도로였다.
한편 수원장은 시대에 따라 다소간의 변화가 있었다.
1827년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간행 당시까지도
수원에는 북문과 남문 밖에 각각 장시가 개설되어 있었으나
1894년 '기전읍지(畿甸邑誌)'에는
남암문(南暗門 · 화홍문) 바깥의 남문외장(南門外場)만이 기록되어 있고,
불과 16년이 경과한 1910년 간행된 '한국수산지'에는
장시가 남암문 안팎에 있어서 격번(隔番)으로 개시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들을 통해 볼 때 북문밖장은 19세기 중 · 후반에 이미 소멸하였고
1894~1909년 사이에 새로이 남문안장이 신설되었던 것 같다.
그 위치나 시대상황으로 미루어 보아 조선왕조가 사실상 붕괴되자
화성 시전이 있었던 외곽을 상인들이 점하면서 정기시장으로 변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렇듯 성안장은 뒤늦게 신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급격히 성장하여 1926년에는 성밖장을 압도할 정도가 되었다.
우시장은 성안장과 성밖장에 각각 1개소씩 있었다.
성안장의 경우 매향여중을 마주보는 수원천 서쪽 북수동 274 일원에 있었으며
1960년경 영화동으 로 이전하였다가 최근에 곡반정동 신촌으로 다시 옮겼다.
성밖장의 우시장은 화홍문 밖 수원천 서쪽에 있었다고 하는데 소멸 시기는 불분명하다.
조선후기에 삼남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물산의 대부분이 송파의 송파장을 경유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수원의 동쪽인 용인의 김량장은 송파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장시였기 때문에
수원이 커지면서 수원장과 김량장은 경합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1925년 속칭 ‘을축년 대홍수’로 송파장이 침수되었고
더욱이 그 이전에 경부선 철도가 시흥대로를 기반으로 수원을 경유하였으며
또한 수인선과 수여선이 수원을 기점으로 삼으면서 수원의 우위는 확고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수원의 상업이 발전하면서 수원 성밖장에는 상업적인 ‘상부도가(喪輿都家)'까지 출현하게 되었다.
이 상부도가는 3개소가 있어
북으로는 시흥, 동 으로는 용인, 남으로는 평택까지 사방 70리에 걸쳐 영업을 하였다고 한다.
아울러 성밖장, 즉 지금의 영동시장에는 ‘거북산당’이라는 당집이 있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비록 최근에 개작(改作)한 것이기는 하나 신당에 모셔진 당신이 관우(關羽)와 흡사하다는 점에서
본래는 상인들이 재신(財神)인 관우를 모셨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 거북산당에서는 지금도 일부 상인들의 주도로 무당을 불러 제를 올리고 있다.
화성 성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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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에 건설된 대표적인 신도시는 수원 화성이다. 18세기 조선 사회는 지적인 차원과 사회경제적 차원에서 각각 조선전기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화성은 철저하게 계획적으로 건설된 신도시로서 이와 같은 18세기 조선의 새로운 모습이 화성 건설에 종합적으로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화성이 조선후기 실학의 결정체라는 격찬을 받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군사기술적 측면에 한정해서 화성을 살펴본다.
화성의 성체를 보면 사실 유별난 모습을 보기 어려우며, 보통 10여m가 넘는 웅장한 중국의 성벽과 비교해서 불과 4-5미터에 불과한 화성의 성벽을 보고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특히 바깥쪽 성벽과는 달리 단지 흙으로만 두텁게 채워 장엄한 모습을 찾을 수 없고 아담하다고까지 느낄 수 있는 안쪽 성벽을 보면 그 실망은 더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실망은 군사기술적 측면을 고려하면 감동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18세기 군사무기의 발달에 따라 전쟁 양상은 과거와 완전히 달라졌다. 특히 불랑기나 홍이포 같은 대형 화포의 등장으로 화약 무기의 파괴력이 막강해지면서 전투의 양상과 전략이 바뀔 수밖에 없었다. 특히 강력한 화포의 공격에 버틸 수 있는 성체의 구조와 방어 전략이 필요했다. 성벽 양쪽을 돌로 쌓아 높게 쌓아 올려 웅장한 자태를 자랑하던 예전의 성벽은 종이 호랑이에 불과했다. 적의 대포 공격에 취약할 수밖에 없을 뿐 아니라 가까이 진격해 들어오는 적들을 대포로 공격하기에도 부적합했다. 결국 외벽은 큰 돌로 낮게 쌓아 올리고, 내벽은 자갈과 흙을 이용해 두텁게 쌓는 소위 '내탁' 방식을 채택한 것이다.
현재 화성의 성체 구조는 이와 같이 강력한 적의 화포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설계된 구조였던 것이다.
이러한 성체 구조와 함께 화포가 주력 무기가 되어버린 전투의 양상에 대응해서 획기적인 방어진지들이 개발 구축되었다. 포루와 공심돈이 그것이다. 포루는 치성의 구조와 기능을 개량한 것이다. '치성'이란 성벽을 타고 올라오는 적들을 좌우에서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적극적인 방어진지로 오래 전부터 성곽에는 이러한 치성이 있었다. 화성에는 고전적인 치성들이 모두 여덟 개나 설치되었을 뿐 아니라 그것을 개량해서 포루를 구축했던 것이다.
포루(舍+甫 樓=鋪樓)는 약 7m 정도 돌출된 치성의 위에 벽돌로 여장을 구축하고 누각을 지은 것이다. 누각이 없는 치성에 비해 기상 여건에 상관없이 화포를 설치 발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포루(舍+甫 樓)가 치성 위에 누각을 설치한 것에 불과했지만 포루(砲樓)는 치성과는 상당히 달랐다. 성벽에서 약 8.8m 정도 돌출된 진지 전체를 벽돌로 쌓았으며, 그 내부는 비워 삼층으로 만들었다. 각 층마다 화포를 설치해 성벽 위보다 훨씬 낮은 위치에서 공격해 오는 적들을 더욱 효과적으로 격파할 수 있었다. 각각의 층에 설치한 대형 화포에서 품어 나오는 화력은 그야말로 가공할 위력을 발휘했을 것이다. 이와 같은 포루는 화성의 시설물 중에서 공심돈과 함께 가장 화력이 강한 공격적인 방어진지였다.
공심돈은 돈대의 기능을 활용한 방어진지이다. 원래 돈대는 성곽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설치해 적의 공격을 미리 알리고 차단하는 진지였는데, 화포의 파괴력이 강해지면서 본성에서 외로이 떨어진 돈대는 공성용 화포에 의해 각개격파 당할 취약점을 드러내게 되었다.
화성에서는 이러한 돈대를 아예 본성에 붙여서 치성 위에 구축해 버린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공심돈이다. 이와 같이 돈대를 응용해 성벽에 붙여 획기적으로 구축한 것은 화성이 처음이었다.
치성을 활용한 방어진지의 구축은 봉화 시설인 '봉돈'에서도 이루어졌다. 봉돈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봉화시설이다. 그런데 화성의 봉돈은 봉화시설의 기능만 지닌 것이 아니었다.
화성의 봉돈은 성벽에 붙여서 돌출되게 축조했는데, 그 내부는 비워두고 삼층으로 나누어 각각의 층에 대포와 총을 장착하고 쏠 수 있도록 했다. 대포 구멍과 총 구멍이 각각 무려 18개나 나 있으니 포루와 공심돈의 화력에 비해서 결코 작지 않은 공격적인 방어진지였던 것이다.
- 2007년 01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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