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율의 사당, 기공사(紀功祠)
권율의 사당, 기공사(紀功祠) |
|
김포공항에서 행주대교를 지나 오른쪽으로 돌면 행주산성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이 길을 가다보면 한강변을 끼고 들어선 식당가가 나오는데,
음식점 틈새에서 '행주서원' 표지판을 볼 수 있다.
표지판을 따라 오른쪽으로 좁은 골목길을 더듬어 들어가면 이내 행주서원이 나타난다.
행주서원의 역사는 1842년(헌종 8)에 건립된 기공사에서 시작된다.
1841년 8월에 헌종은 고양에 행차하여 명릉(숙종과 두 왕비의 능)에 제사를 올렸고
인근에 있던 익릉과 홍릉을 참배했다.
이 때 영의정 조인영은 임진왜란 때 권율장군이 행주산성에서 승리를 거두어 큰 공적을 남겼는데
그를 제사하는 곳은 한 군데도 없다고 하면서 권율을 위한 사당을 세울 것을 건의했다.
조인영이 내건 명분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그 해(1841)가
선조가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공신들의 녹훈을 결정한 해(1601)인 신축년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헌종이 행주산성이 있는 고양을 방문한 것을 계기로 삼자는 것이었다.
헌종은 이를 받아들여 행주산성 아래쪽의 한강변에 사당을 짓게 했고,
1842년 봄 건물이 완공되자 '기공사(紀功祠)' 란 현판을 내렸다.
'권율의 공적을 기념하는 사당'이라는 뜻이다.
당대의 세도가였던 조인영이 이처럼 기공사의 건립을 제안한 것은
자신의 선조와 권율의 인연 때문이었다.
1763년(영조 39)에 조인영의 조부인 조엄은 통신사로 일본을 방문했는데,
일본인들이 권율과 이순신의 후손에 관한 소식을 물으면서
임진왜란 때 두 장군이 일본군을 섬멸했기 때문에 그때까지도 일본에서는 두 장군의 이름을 들으면
학질을 쫓아내고 아이의 울음까지 멈추게 한다고 말했다.
조엄이 돌아와 이 사실을 보고하자 영조는 두 장군의 후손들에게 벼슬을 줄 것을 명령했다.
기공사의 건립에 참여한 사람들도 권율과 인연이 있었는데,
외손인 이계조, 방계 후손인 권대긍, 이순신의 후손인 이유수가 그들이었다.
권율의 행주대첩을 기념하는 행주대첩비가 처음 세워진 것은 1602년(선조 35)의 일이었다.
1599년 권율이 사망하자
임진왜란 당시 막료였던 사람들이 장군의 공적을 영원히 전할 비석을 세우자고 제안했고,
권율의 사위였던 이항복이 비석의 건립을 주도했다.
행주대첩비의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인 최립이 짓고 명필가인 한석봉이 썼는데,
이 비석은 현재 덕양산(행주산성) 정상에 있다.
그런데 기공사를 건립할 무렵 행주대첩비의 마모가 심하여 비문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자 조인영은 1845년(헌종 11)에 원래의 비문을 그대로 옮겨 쓴 다음
후대의 사실과 명문(銘文)을 추가한 새 비석을 만들어 기공사 옆에 세웠다.
비문을 쓴 사람은 권율의 외손이 되는 이유원이었다.
조인영은 권율이 1604년에 선무공신 일등공신에 책록되고 충장공(忠莊公)이란 시호를 받았고,
권율의 양자이면서 병자호란 때 순절한 이익경이 1844년에 좌승지에 증직되었으며,
1842년에 기공사가 건립된 내력을 추가로 기록했다.
이후 기공사에서는 권율을 위한 제사가 정기적으로 거행되었고,
1871년(고종 8) 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릴 때에도 기공사는 살아남았다.
국가가 어려울 때에 충절과 대의를 지킨 권율을 모신 사당으로 헌종의 사액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기공사 건물은 불타버리고 주춧돌만 남았으며,
기공사에 있던 행주대첩비는
1970년 행주산성 정화사업 때 충장사(忠奬祠)를 건립하면서 그 앞으로 옮겨졌다.
기공사가 행주서원으로 확대되는 과정은 분명하지가 않다.
현재 행주서원의 안내판을 보면
기공사가 후에 행주서원으로 이름을 고치고 후학들의 교육을 담당했는데
읍지에 의하면 조선후기에 20명 정도의 원생이 있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서원철폐령 당시 실록에서는 '고양 기공사'라 했고,
19세기의 읍지에서도 기공사만 보이고 기공사 소속 관속(官屬)으로 사직(祠直) 20명이 나타난다.
행주서원에 관한 기록을 확인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현재 남아있는 예서체 '행주서원(杏洲書院)' 현판은 추사의 제자인 신헌이 쓴 것이라 전해지는데,
신헌은 1884년에 사망한 인물이다.
고양시에서는 1988년에 행주서원의 강당을 복원하고, 1997년에는 기공사 건물을 복원했다.
주변을 정비하는 사업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필자는 원형을 복원한다는 차원에서 충장사 앞으로 옮겨진 행주대첩비를 기공사로 되돌리고,
이곳의 명칭을 기공사라고 부르거나 행주서원과 기공사를 병칭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현재 행주서원지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71호로 지정되어 있다.
|
- 김문식(단국대 사학과 교수)
- 경기문화재단, 제 2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