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전도비
삼전도비(三田渡碑)
위 치 : 송파구 삼전동 289-3번지에 조성
사적 제101호. 높이 395㎝, 너비 140㎝.
1639년(인조 17)에 한강의 상류인 삼전도(三田渡, 지금의 서울특별시 송파구 삼전동)에 세운
청(淸) 태종의 공덕비. 비문에 새겨져 있는 원래 명칭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 이다.
병자호란 당시 청태종은 직접 대군을 이끌고 서울에 침입하여 삼전도에서 진을 치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를 포위 공격하여 마침내 삼전도(三田渡)에서
직접 청태종에게 항복한 사실을 영원히 기념하려는 청태종의 강요에 의해서 세워졌다.
당시 비문은 이경석(李景奭, 1595-1671)이 짓고,
글씨는 서예가로 이름높던 오준(吳竣, 1587-1666)이 해서로 썼고,
전자(篆字)로 된 '대청황제공덕비' 라는 제액은 여이징(呂爾徵, 1588-1656)이 썼다.
비의 표면 왼쪽에는 몽골문으로, 오른쪽에는 만주문으로,
그리고 뒷면에는 한문으로 사방 7품의 해서로 씌어진 우리 민족의 치욕적인 역사기록이다.
● 삼전도비가 세워진 배경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조선에 대해 조공을 바쳐오던 여진족(만주족)은
임진왜란 때 조선과 명나라가 큰 피해를 입게 된 것을 기화로
누르하치의 영도 아래 급속히 세력을 확장,
숙원이던 부족 통합에 성공하고 후금[後金, 뒤에 청(淸)으로 고침]을 건국하였다.
광해군 11년(1619)에 조선정부는 명의 군사동원 요청에 따라 병력을 만주 지방으로 파견,
후금의 군대와 사투 후 전투에서 대치했다가 곧바로 투항한 적이 있었으며,
1623년 인조반정이 있은 뒤 조선과 후금 사이에는 긴장이 고조되어
인조 5년(1627)에는 후금의 군대가 조선에 쳐들어온 일이 있었다. 이를 정묘호란(丁卯胡亂)이라 한다.
조선이 청과 화약(和約)을 맺은 뒤에도 양국 관계는 원만하게 진전되지 못했는데,
1632년 드디어 후금은 만주 전역을 차지하고 명나라의 수도 북경을 공격하면서,
양국관계를 형제지국에서 군신관계(임금과 신하의 관계)로 고칠 것과
황금ㆍ백금 1만 냥, 전마(戰馬 : 전투에 쓰일 말) 3,000필과 군사 3만명 등을 요구하였다.
1636년 2월에는 후금의 사신 용골대(龍骨大)와 마부대(馬夫大) 등이 조선을 찾아와
조선의 신사(臣事 : 신하의 도리)를 강요하였으나,
인조는 후금사신의 접견마저 거절하고 계속 후금에 대해 강경한 자세로 대하였다.
이 해 12월 청의 태종은 10만 대군을 이끌고 직접 조선에 쳐들어왔다.
곧 병자호란(丙子胡亂)이다.
청나라 군대의 침공을 까마득히 몰랐던 조선은
청나라 선봉부대가 개성을 지날 때쯤인 13일에야 겨우 알게 되었다.
인조와 신하들은 14일 밤 강화도로 피난하려 하였으나 이미 청나라 군에 의해 길이 막혀,
인조는 소현세자와 신하들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
12월 16일부터 청나라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하였고,
1637년 1월 1일 청 태종이 도착하여
남한산성 아래 탄천(炭川)에 20만 청나라 군을 집결시켜 남한산성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당시 남한산성 내에는 군사 1만3000명이 절약해야 겨우 50일 정도를 지탱할 수 있는
식량밖에 없는데다가 봉림대군(인조의 둘째아들)이 피해있던 강화도마저
이듬해 1월 하순에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또한 비축한 식량도 바닥이 나자
50여 일간의 농성 끝에 부득이 1월 30일 청의 군영이 있는 한강가의 나루터인 삼전도에 나아가
수항단(受降壇)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례(降禮 : 인조가 청 태종에게 항복하는 의식)로
청과 굴욕적인 강화협정을 맺게 되었다.
이 병자호란이 수습된 뒤 청의 태종은 조선정부에 대해
삼전도에 자신의 '공덕'을 새긴 기념비를 세우도록 요구했다.
이에 조선은 장유(張維)ㆍ조희일(趙希逸) 등이 지은 글을 청에 보냈지만
모두 그들의 뜻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번번이 거부되었다.
마침내 인조의 특명으로 이경석(李景奭)이 지은 글이 받아들여져서 이를 비석에 새기도록 했다.
이에 따라 공조에서는 삼전도에 제단을 높고 크게 증축한 다음 비석을 세웠다.
이처럼 삼전도비는 비록 조선이 청에 대해 항복하게 된 경위와 더불어
청태종의 침략을 '공덕(功德)' 이라고 예찬한 굴욕적인 내용으로 되어 있으나,
한편 비석 표면의 왼쪽에는 몽고 문자 20행, 오른쪽에는 만주 문자 20행,
뒤쪽에는 '해서체'의 한문으로 쓰여 있어 만주어 및 몽고어 연구의 자료로서 크게 주목받고 있다.
한편 인조가 삼전도비의 비문과 글씨를 쓸 신하들을 뽑으면 그 자리에서 다들 사직을 했고
결국 나라를 위해 비문을 짓고 글씨를 쓴 '이경석과 오준' 은
죽어서도 두고두고 신하들의 탄핵을 받았다.
● 병자호란 당시 조선과 청나라가 맺었던 강화조약의 내용
① 청나라에게 군신(君臣)의 예(禮)를 지킬 것.
② 명나라의 연호를 폐하고 관계를 끊으며, 명나라에서 받은 고명(誥命)ㆍ책인(印)을 내놓을 것.
③ 조선의 세자와 둘째왕자인 봉림대군, 그리고 여러 대신의 자제를 선양에 인질로 보낼 것.
④ 성절(聖節: 중국황제의 생일)ㆍ정조(正朝)ㆍ동지(冬至)ㆍ천추(千秋: 중국 황후ㆍ황태자의 생일)ㆍ
경조(慶弔) 등의 사절(使節)은 명나라 예를 따라 청나라에 시행할 것.
⑤ 명나라를 칠 때 출병(出兵)을 요구하면 어기지 말 것.
⑥ 청나라 군이 돌아갈 때 병선(兵船) 50척을 보낼 것.
⑦ 내외 제신(諸臣)과 혼연(婚緣)을 맺어 화호(和好)를 굳게 할 것.
⑧ 성(城)을 신축하거나 성벽을 수축하지 말 것.
⑨ 기묘년(己卯年: 1639)부터 일정한 세폐(歲幣: 공물)를 보낼 것 등.
● 삼전도비 번역 전문
- 대청국 성황제의 공덕비 -
대청국 숭덕 원년(1636년) 겨울 12월에
어질고 너그럽고 그리고 온화한 성황제는 화평을 깬 것이 우리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크게 성을 내어
위엄 있는 군사를 이끌고 내림(來臨)하여 동녘을 향하여 불붙듯이 진군하니
아무도 두려워서 대항하지 못했다. 그때에 우리의 임금은 남한에 자리를 정하고 두렵고 겁이 나서
봄 얼음을 밟고 날 밝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지내기를 50일, 동남 제도의 우리 군사들은 속속 격파되었고
서북방의 장군들은 산골짝에 피해서 멀리 후퇴한 뒤에 한 걸음도 앞으로 진격하지 못하였다.
성내의 양곡도 모두 떨어졌다.
그때 청의 대군이 성을 탈취하기란 찬바람에 가을 나뭇잎을 떨어뜨리는 일처럼,
화염에 깃털을 태우는 일처럼 쉬운 일이었다.
성황제는 살생하지 않는 것을 가장 큰 덕으로 여겨 전유(傳諭)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이라 여겨,
황지(皇旨)를 내려 깨우치기를, "항복해 오는 경우에는 예전처럼 온전케 할 것이나
항복하지 않으면 파멸시키겠다"라고 말하였다.
그로부터 영아이대(용골대), 마복탑(마부대) 등 여러 장군들이 성황제의 황지를 받들고 전하고자 찾아오매
우리의 임금은 문무 여러 대신을 소집하여 이르기를, "내가 대국을 향하여 화친을 맺은 지 10년이 되었다.
내가 무지하고 어두워 하늘의 정벌을 서두르게 하여 만백성이 우환에 봉착하고 말았다.
이 죄는 내 일신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성황제는 차마 살생치 못하여 이와 같이 깨우쳐 주시니
내 어찌 감히 사직을 온전케 하고 백성을 보호할 황지를 받들지 않겠는가" 라고 말하였다.
여러 대신들이 칭양(稱揚)하며 복종하니 임금은 수십 기를 이끌고 청군 앞으로 와 죄를 받으려 했다.
성황제는 예를 갖추고 인자하게 대하며 은혜를 베푸사 무양(撫養)하며, 흉금을 털어놓고 이야기했다.
수행한 대신들 모두에게 은혜로운 상이 돌아갔다.
예를 행한 뒤 즉시 우리의 임금을 도성으로 되돌아가게 하고 즉시 남쪽으로 떠났던 군사들을 철수시켜
서쪽으로 물러나며 백성들을 무양하고 농사를 권장하니 가깝고 멀리 떠나갔던 백성들이 모두 돌아와
다시 살게 되었다 이 아니 큰 은혜인가?
소국(우리나라)이 상국에 죄 지은 지 오래이다.
기미년(광해군 11년, 1627년)에 도원수 강홍립을 명나라에 원군으로 파견하였다가 격파되어 나포되었으나
청 태조 무황제는 다만 강홍립 등 몇 사람만 억류하고 모두 되돌려 보냈다.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없음에도 소국은 다시 혼미해져 깨달음을 얻지 못한 탓에
정묘년(1627년)에 성황제가 장군을 파견하여 동쪽 땅을 정벌하러 왔다.
우리나라는 임금과 대신이 모두 바다에 있는 섬으로 피하여 들어가고 사신을 보내 화친하자고 칭했다.
성황제는 이 청언을 받아들여 형제의 나라가 되게 하고 강토를 예전처럼 온전케 해주었다.
더하여 강홍립을 돌려보내주었다.
이 일이 있은 뒤로 예를 행함에 소홀함이 없이 사신을 끊임없이 파견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경솔한 의논이 일어나 분규의 조짐이 싹터
소국은 변방의 대관에게 청국에 대한 불손한 글을 써서 보냈다.
이 글이 청에서 조선으로 온 사신들이 입수하여 가지고 갔다.
성황제는 그럼에도 관대하게 그 글을 보고 바로 군사를 보내지 않았으며
밝은 성지를 내려 출병할 시기를 알려주면서 거듭하여 일깨워주었다.
이는 귀를 잡고 가르쳐주는 것보다 더한 것이었으나 우리는 기꺼이 복종하지 않았으니,
그 죄는 소국의 대신들이 더욱 면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성황제의 대군은 남한을 포위하고 또 황지를 내려,
먼저 일단의 군사를 보내 강화도를 탈취하고 왕자들과 왕비, 대신들의 처자를 모두 나포하였다.
성황제는 여러 장군들에게 "범하지 말라, 침해하지 말라"고 계고(戒告)하고,
우리의 관원들과 대감들을 시켜 그들을 간수케 했다.
그와 같은 큰 은혜를 베풀었기에 소국의 군주, 대신, 나포되었던 아이들, 부인들이 모두 전 그대로
복귀하니 서리와 눈이 변하여 봄이 된 것만 같고 메마른 가뭄이 끝나 단비가 내리는 것 같았다.
소국이 멸망했던 것을 다시 고쳐 존속하게 되고 조상의 사직이 단절 되었던 것이 다시 승계되었다.
동쪽 땅 수천리의 사람이 모두 살아나는 큰 은혜를 두루 입었다.
이러한 일은 진실로 옛날의 법례에서는 보지 못했던 것이다.
한수(한강)의 상류 삼전도의 남쪽이 곧 성황제가 내림했던 곳이다. 그곳에 단위(壇位)가 있다.
우리의 임금은 역사부(役事部)의 사람에게 일러 단위를 늘리고 높여 확장시키고
또 돌을 가져와 비를 세워서 영구히 존속케 하며 성황제의 공덕을 천지와 함께 하고 싶노라고 공표하였다.
이것은 우리 소국만이 대대손손 영구히 신뢰하고 살아가는 것뿐만 아니라
대국의 어진 명성과 무위(武威)의 행지(行止)를 먼 곳으로부터 떠받들어 모두가 복종하는 것도
또한 이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비록 하늘과 땅의 거대함을 글로 짓고, 해와 달의 밝음을 그렸다 해도
그 공덕의 만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이제 조잡하게나마 지은 것을 새겨 공표하는 것이다.
하늘은 서리와 이슬을 내려 만물을 황량하게 하기도 하고 살아나게 하기도 한다.
성황제 또한 이를 본받아 무와 덕을 함께 고루 전령(傳令)한다.
성황제가 동쪽 땅을 정벌한 십만 군사는 그 수가 장대히 많고 호랑이와 비휴(맹수)처럼 용맹스러웠다.
서북국들이 모두 병기를 손에 잡고 선봉을 다투니 그 위세가 매우 두려웠다.
성황제가 매우 인자하여 가련히 여겨 내린 칙언과 십행의 하서(下書)는 위엄이 있으면서도 부드러웠다.
우리는 본디 혼미하여 그것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 화를 입었다.
성황제의 명지가 도착하니 잠을 자다가 막 깨어난 듯하였다.
우리의 임금이 항복을 택한 것은 그 위세를 두려워한 때문만이 아니라, 그 덕에 복종한 것이다.
성황제가 어엿비 여겨 은혜를 미치게 하며, 예를 갖추고 좋은 낯, 웃는 얼굴로 병기를 거두고
훌륭한 말과 가죽으로 만든 예복을 상으로 내릴 때
성의 남녀가 노래하며 칭송한 것과 우리의 임금이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성황제가 내린 은혜이다.
성황제는 우리의 백성을 살리고자 군사를 철수시켰다.
우리가 문란하게 되고 산산이 흩어진 것을 가련히 여겨 농사를 권장해 주었다.
패하여 부서진 이 나라가 옛 그대로 돌아온 것이, 바로 이 단을 세우게 된 까닭이다.
마른 뼈에 다시 살이 생겨나고 겨울 풀의 뿌리가 다시 봄을 만난 것처럼 되었다.
큰 강머리에 큰 비석을 세우니, 삼한의 땅이 만세 이어가게 될 것이다.
이는 모두 성황제의 어진 덕에 의한 것이다.
숭덕 4년(1639년) 12월 초8일에 세우는 바이다.
● 삼전도비(三田渡碑)의 수난
이 비석은 청일전쟁까지 세워져 있다가 청일전쟁 후 청나라의 힘이 약해지자
사대의 상징이라 하여 영은문(迎恩門)이 지체없이 헐어낸 것처럼
이른바 청태종의 공덕비 역시 그 무렵에 치욕스럽다하여
고종 32년(1895)에 뒤로 넘어졌던 것이다.
혹자는 이때에 비석을 땅에 파묻었다고 적어놓은 자료들이 간간이 보이긴 하는데,
구체적으로 그러했다는 흔적은 없다.
그러나 일제 강점 후(1913)에 일제가
우리 민족이 원래 힘이 없어 다른 민족에게 지배되어 왔던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다시 세워 놓았는데 이에 관해서도 분명한 기록 하나가 남아 있다.
야츠이 세이이치(谷井濟一) 등이 정리한 <대정6년도 고적조사보고>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인다.
"외교사상 중대한 일등 사료이며, 조선에 다시없는 만몽문(滿蒙文)을 새긴 비석인데,
나아가 조선시대 중기에 있어서 석비의 대표적 작품으로서 영원히 보존의 가치가 있는 유물이다.
..... (중략) .....
명치 27, 8년 전역(즉 청일전쟁) 후에 넘어졌고,
1909년 세키노 박사가 조사할 제에는 더욱이 민가의 담장 안에 드러누워 뒤집어져 있었으나
근년에 본부(本府)에서 수립보존의 의논이 점차 무르익어 대정 6년 즉 1917년 9월,
때마침 본관들이 송파리(松坡里)에 머물던 중 영선과원(營繕課員)의 손으로 수립(竪立)이 완료되었다."
나아가 1916년에 '고적급유물보존규칙'이 제정되자마자 그 등록대장의 첫머리에
삼전도비를 '등록번호 제11호'로 등재하여 적극적인 보호대상으로 삼았고,
다시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에 따라
조선의 숱한 고적유물들이 이른바 '보물'로 잇달아 지정이 되었을 때
이 삼전도비가 보물 제164호 '삼전도 청태종공덕비'(1935년 5월 24일)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삼전도비의 소재지는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송파리 187번지였다.
이곳은 인조 임금이 청태종에게 항복의 예를 올렸던 수항단이 세워졌던 자리라고 보면 되겠다.
그 사이에 을축년 대홍수로 인해 인근의 송파마을은 거의 사라졌으나,
삼전도비만은 황량하나마 원래의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해방이 되자 삼전도비의 처지는 청일전쟁 직후의 상황으로 되돌아간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수치의 역사였고,
그러기에 이 비석의 존재를 순순히 받아들이기는 참으로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1955년 11월 4일에 개최된 '국보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회' 제2차 총회에서는
"내무부 치안국장의 요청에 의하여 국보 제164호로 지정되었던 삼전도 청태종공덕비가
치욕의 역사물이란 이유로 지정 해제되어 땅속에 매몰되게 되었다"는 결정이 내려졌던 것으로 확인된다.
위의 결정이 지체 없이 시행에 옮겨졌는지는 분명하진 않지만, 어떤 기록에는 1956년이라고도 하고
또 다른 곳에서는 "1958년 봄에 부근의 지하 7척 깊이에 매몰하였다"고 적어놓은 내용도 보인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삼전도비는 즉각 국보 지정에서 해제되었고,
그 대신에 비석이 서있던 자리가 1957년 2월 1일자로
고적 제147호 '삼전도 청태종공덕비지'라는 이름을 새로이 얻는 절차가 이어졌고,
그 후 1962년의 문화재보호법 제정과 더불어 이 명칭은 다시 '사적 제101호'로 재분류되었다.
그러나 애써 땅속에 파묻었던 비석이 우연찮게도 비석을 매몰하던 그 무렵에
한강에 대홍수가 밀려들었고, 그로 인해 삼전도비는 금세 원래의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이처럼 애물단지가 되어버린 삼전도비가
지금의 모습처럼 정비된 것은 1980년대 초반의 일이었다.
남한산성을 순시하던 차,
"삼전도에서 인조가 청태종에게 패하여 항복한 굴욕의 사실을 복원하여
굴욕의 역사 속에서도 교훈을 찾도록 하라"고 했다는 대통령의 지시내용에 충실히 한 결과이다.
그 동안 사용되어 왔던 '삼전도 청태종공덕비'라는 것이 과분하다 하여
'삼전도비'로 이름을 바로 잡은 것도 1981년 7월 10일의 일이었다.
● 삼전도비 옆에 있는 또 다른 돌거북의 정체
송파 석촌동의 역사공원 구역에 옮겨진 삼전도 비석의 바로 옆에는 비록 비신을 갖추지는 못했으나
약간 작은 크기의 돌거북 하나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는 원래의 삼전도비와 무관하다고 설명하는 견해도 있고,
그렇지 않다고 적어놓은 기록도 있다.
하지만 한눈에 보더라도 그 크기만 약간 다를 뿐 세부적인 표현양식이나 조각수법이
거의 흡사하다는 점에서 둘 사이의 연관성을 완전히 부인하기는 어렵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삼전도비의 조성과 관련된 문헌상의 기록에 비춰 보더라도
여러 차례 석물(石物)이 준비되었다던가 조성계획이 때때로 변경된 흔적이 확연하다는 점에서
그 당시에 만들어진 잔여물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말하자면 더 큰 규모로 비석이 조성되기를 바라는 청나라 측의 변덕으로
원래에 만들어진 귀부(龜趺)가 용도 폐기되면서 남겨진 것이 아닌가도 싶다.
실제로 이 돌거북의 존재에 대해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제출한 <대정5년도 고적조사보고>에서는
위와 같은 취지의 설명문을 달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경성전기에서 발행한 '경성하이킹 코스 제3집' <풍납리토성> (1937년)에도
작은 귀부가 삼전도비와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고 적고 있는 것이 보인다.
다만 여기에는 "부락민의 말로는 1925년 홍수에,
혹은 그 이전에 작은 귀부에 있던 비신이 행방불명된 바 있다"는 증언을 덧붙이고 있으나,
그다지 신빙성 있는 얘기로 들리지는 않는다.
하나 덧붙이자면 이 책에는 '삼전도비와 10여 발짝 떨어진 곳에 놓여진 작은 돌거북'의 사진이
그대로 남아 있어 그것을 참고할 만하다고 하겠다.
삼전도비 원위치로 이전
인조 17년(1639) 병자호란에서 패한 조선이 당시 청 태종의 요구에 따라 그의 공덕을 적어 세운
삼전도비의 정식명칭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 총높이 5.7m.
삼전도비는
1895년 고종의 명으로 땅에 묻혔다가 일제강점기 다시 세워졌으나
광복 후에 주민들에 의해 다시 땅속에 묻혔다가 1963년 홍수로 모습이 드러났고,
석촌동 내에서도 2~3차례 이전을 거쳐
1983년 옮겨져 최근까지 송파구 석촌동 289의3번지 주택가 근린공원 안에 있었다.
2007년 2월 삼전도비 철거를 주장하는 사람에 의해 붉은색 스프레이 페인트로
‘철거 370'이라는 글자를 비석에 뿌려 표면이 심하게 훼손되는 수난을 겪고,
삼전도비가 역사적 연고가 없는 삼전동에 자리해 재산권 피해를 요구하는 민원이 계속되자
문화재청에 원 위치 고증 후 이전해 줄 것을 줄기차게 요구했다.
학술적 고증을 거쳐 115년만에 원래 원위치와 가장 가까운 송파구 잠실동 롯데월드 바로 뒤편이며, 석촌호수 서호(西湖) 한가운데 있는 롯데월드의 매직아일랜드 입구 근처로 2010년 4월 25일 옮겨갔다.
이전작업은 그동안 풍화로 마모된 비를 보호하기 위해 현대적인 양식의 보호각을 설치하고
균열된 비신을 보수하는 등 문화재보존 작업이 병행됐다.
또 삼전도비 훼손을 감시하기 위한 CC TV를 설치했다.
인조의 항복 광경을 묘사한 비석 옆의 동판은 1983년에 세워진 것으로,
문화재적 가치가 없다는 문화재위원회의 판단을 근거로 철거되었다.
"치욕의 역사지만 자라나는 세대에게
국력의 중요함을 일깨우는 역사교육의 장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 2010년 4월 25일
● '대청황제 공덕비'에 얽힌 이야기
'삼전도비'라 불리는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는
병자호란이 끝나고 난 2년 후인 1639년(인조 17)에 청나라의 강요에 따라 건립한 것으로
청나라가 조선에 출병(出兵)한 이유, 조선이 항복한 사실,
항복한 뒤 청태종이 피해를 끼치지 않고 곧 회군(回軍)한 사실 등을 담고 있다.
삼전도비와 관련하여 사실처럼 믿어지는 얘기 하나가 전해오고 있는데
인조가 청 태종을 앞에 두고 머리를 조아리며 항복의 예를 행할 때 피가 나지 않는다며
청장 용골대(龍骨大)가 인조를 핍박했다는 것이 그것이다.
하는 수 없이 이마에서 피가 날 때까지 머리를 땅에 찧어야 했기에
인조와 배석한 신료들이 모두 피눈물을 흘렸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모두 힘없는 나라의 설움에 대해 원통해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다른 주장이 있다.
<인조실록>을 비롯한 공식적인 기록 어디에도
이처럼 처절한 항복의식이 있었다는 내용은 없다는 것이다.
『용골대와 마부대가 성 밖에 와서 상의 출성(出城)을 재촉하였다.
상이 남염의(藍染衣)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의장(儀仗)은 모두 제거한 채
시종(侍從) 50여 명을 거느리고 서문(西門)을 통해 성을 나갔는데, 왕세자가 따랐다.
백관으로 뒤쳐진 자는 서문 안에 서서 가슴을 치고 뛰면서 통곡하였다.
상이 산에서 내려가 가시를 펴고 앉았는데,
얼마 뒤 갑옷을 입은 청나라 군사 수백 기(騎)가 달려 왔다.
상이 이르기를, “이들은 뭐하는 자들인가?”하니,
도승지 이경직이 대답하기를,
“이는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영접하는 자들인 듯합니다.”하였다.
한참 뒤에 용골대 등이 왔는데,
상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아 두 번 읍(揖)하는 예를 행하고
동서(東西)로 나누어 앉았다. 용골대 등이 위로하니, 상이 답하기를,
“오늘의 일은 오로지 황제의 말과 두 대인이 힘써준 것만을 믿을 뿐입니다.”하자,
용골대가 말하기를,
“지금 이후로는 두 나라가 한 집안이 되는데,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시간이 이미 늦었으니 속히 갔으면 합니다.”하고,
마침내 말을 달려 앞에서 인도하였다.
상이 단지 삼공 및 판서 · 승지 각 5인, 한림(翰林)ㆍ주서(注書) 각 1인을 거느렸으며,
세자는 시강원(侍講院)ㆍ익위사(翊衛司)의 제관(諸官)을 거느리고
삼전도(三田渡)에 따라 나아갔다.
멀리 바라보니 한(汗)이 황옥(黃屋)을 펼치고 앉아 있고
갑옷과 투구 차림에 활과 칼을 휴대한 자가 방진(方陣)을 치고
좌우에 옹립(擁立)하였으며, 악기를 진열하여 연주했는데,
대략 중국 제도를 모방한 것이었다.
상이 걸어서 진(陣) 앞에 이르고, 용골대 등이 상을 진문(陣門) 동쪽에 머물게 하였다.
용골대가 들어가 보고하고 나와 한의 말을 전하기를,
“지난날의 일을 말하려 하면 길다. 이제 용단을 내려 왔으니 매우 다행스럽고 기쁘다.”
하자, 상이 대답하기를, “천은(天恩)이 망극합니다.”하였다.
용골대 등이 인도하여 들어가 단(壇) 아래에 북쪽을 향해 자리를 마련하고
상에게 자리로 나가기를 청하였는데, 청나라 사람을 시켜 여창(臚唱)하게 하였다.
상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였다.
용골대 등이 상을 인도하여 진의 동문을 통해 나왔다가 다시 동쪽에 앉게 하였다.
대군(大君) 이하가 강도(江都)에서 잡혀왔는데, 단 아래 조금 서쪽에 늘어섰다.
용골대가 한의 말로 상에게 단에 오르도록 청하였다.
한은 남쪽을 향해 앉고 상은 동북 모퉁이에 서쪽을 향해 앉았으며,
청나라 왕자 3인이 차례로 나란히 앉고 왕세자가 또 그 아래에 앉았는데
모두 서쪽을 향하였다. 또 청나라 왕자 4인이 서북 모퉁이에서 동쪽을 향해 앉고
두 대군이 그 아래에 잇따라 앉았다.
우리나라 시신(侍臣)에게는 단 아래 동쪽 모퉁이에 자리를 내주고,
강도에서 잡혀 온 제신(諸臣)은 단 아래 서쪽 모퉁이에 들어가 앉게 하였다.』
龍、馬兩胡, 來城外, 趣上出城。 上着藍染衣, 乘白馬, 盡去儀仗, 率侍從五十餘人, 由西門出城, 王世子從焉。 百官落後者, 立於西門內, 搥胸哭踊。 上下山, 班荊而坐。 俄而, 淸兵被甲者數百騎馳來。 上曰: “此何爲者耶?” 都承旨李景稷對曰: “此似我國之所謂迎逢者也。” 良久, 龍胡等至。 上離坐迎之, 行再揖禮, 分東西而坐。 龍胡等致慰, 上答曰: “今日之事, 專恃皇帝之言與兩大人之宣力矣。” 龍胡曰: “今而後, 兩國爲一家, 有何憂哉? 日已晩矣, 請速去。” 遂馳馬前導。 上只率三公及判書、承旨各五人, 翰、注各一人, 世子率侍講院、翊衛司諸官, 隨詣三田渡。 望見, 汗張黃屋而坐, 甲冑而帶弓劍者, 爲方陣而擁立左右, 張樂鼓吹, 略倣華制。 上步至陣前, 龍胡等留上於陣門東。 龍胡入報, 出傳汗言曰: “前日之事, 欲言則長矣。 今能勇決而來, 深用喜幸。” 上答曰: “天恩罔極。” 龍胡等引入, 設席於壇下北面, 請上就席, 使淸人臚唱。 上行三拜九叩頭禮。 龍胡等引上由陣東門出, 更由東北隅而入, 使坐於壇東。 大君以下, 自江都被執而來, 列立於壇下少西矣。 龍胡以汗言, 請上登壇, 汗南面而坐, 上坐於東北隅西面, 而淸王子三人, 以次連坐, 王世子又坐其下, 竝西面。 又淸王子四人, 坐於西北隅東面, 二大君連坐於其下。 我國侍臣, 給席於壇下東隅, 江都被執諸臣, 入坐於壇下西隅, ....
이것이 공식기록이다.
이를 근거로 전해 내려오는 얘기들과 같이 '과격한' 항복의식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실록이라 하더라도 사실이 이와 같았다면
역사적 치욕이 되는 국왕에 관한 이 모든 사항을 사진과 같이 정확하게 기록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모양새가 어떠했든지 간에 인조는 오천년 우리 역사를 통틀어 나라가 망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적국의 왕에게 머리를 조아린 몇 안 되는 왕들 중 하나가 된다.
항복한 임금 인조에 대한 민초들의 동정심과 청에 대한 적개심이 더해져
사실이 조금 더 과장되었을 수도 있으리라.
이 삼전도에 세워진 비석은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모습을 조각한 이수(螭首)와
비문을 새긴 몸돌이 가지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 석조예술품이자 금석문이라는 높은 평가와 더불어
3개국의 문자가 함께 기입된 유일한 비석으로서의 가치에도 불구하고 끝없는 수난을 당해야만 했다.
- 오마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