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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는(문화)

기형도의 삶과 문학 - 기형도 시인 20주기(2009년 3월 7일)

Gijuzzang Dream 2009. 3. 11. 23:52

 

 

 

 

 

 기형도의 삶과 문학 

 

 

 

 

 

기형도 시인의 20주기(3월 7일).

여전한 현재형 이름으로 한국 현대시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는 그의 삶과 문학,

그리고 문화적 징후를 꿰뚫어볼 수 있는 기형도의 시 세계,

 

 

 - 빈 집 -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 질투는 나의 힘 -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거장에서의 충고  - 기형도의 삶과 문학   

 

기형도 20주기 추모 문집. 기형도 시인의 20주기(3월 7일)를 맞아,

문학 · 문화사적 측면에서 기형도의 시 세계를 조명하고 그 현재적 의미를 밝히는 한편,

그를 아끼고 추억하는 지인과 문우들의 산문,

그리고 그의 사후에 그의 시를 분석하고 의미 지은 여러 비평가들의 밀도 높은 평문들을 한데 모았다.



총 3부로 구성되었다.

1부에서는 기형도 시의 현재적 의미를 밝히는 데 도움이 되는 글들을 모았다.

기형도를 통해 문학적 감수성을 키운 2000년대의 젊은 시인들인 김행숙, 심보선, 하재연, 김경주와

문학평론가 조강석의 좌담과 함께 비평가 함돈균, 문학평론가 이광호의 글을 수록하였다.



2부는 직 · 간접적으로 기형도와의 만남을 가졌던 분들의 산문을 모았다.

김병익, 임우기, 박해현, 김훈, 이영진, 조병준, 이문재, 나희덕, 성석제의 글이 실려 있다.

 

3부는 지난 20년간 발표된 기형도에 대한 본격적인 비평문들에서 뽑은 글을 실었다.

김현의 해설로 시작하여 이아라의 논문까지, 다양한 해석과 비평을 담았다.



기형도 사후 20년,

여전한 현재형 이름으로 한국 현대시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는 그의 삶과 문학,

그리고 문화적 징후를 꿰뚫어볼 수 있는 이번 기념문집의 제목 <정거장에서의 충고>

기형도의 시 세계를 압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생전의 시인이 시집의 제목으로 생각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 문학의 뜨거운 신화, 영원한 청년의 표상, 기형도
그가 없는 오늘 이 자리에 그를 다시 부른다

80년대 이후 시를 꿈꾸는 모든 문청의 질투와 부러움, 문학 대중의 압도적인 열광 속에,

한국 문학의 뜨거운 신화로, 그리고 꺼지지 않는 생명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한 시인 기형도.

그가 우리 곁을 떠난 지 어느덧 스무 해가 지났다.

한 청년의 투명하고도 깊이 모를 절망과 우울이 지난 20년 동안 한국 현대시사에 끼친 영향력은

그야말로 ‘기형도 현상’이라고밖에 규정지을 수 없는 엄청난 파문이었다.

 

앞서 시인의 유고시집 <입 속의 검은 잎>(1989)과

그의 10주기에 맞춰 시인의 시, 산문, 소설 등을 한데 모은 <기형도 전집>(1999)을 펴낸 바 있는

문학과지성사가 올해 기형도 시인의 20주기(3월 7일)를 맞아,

문학/문화사적 측면에서 기형도의 시 세계를 새롭게 조명하고 그 현재적 의미를 밝히는 한편,

그를 아끼고 추억하는 지인과 문우들의 산문, 그리고 그의 사후 그의 시를 분석하고 의미 지은

여러 비평가들의 밀도 높은 평문들을 한데 모아 <정거장에서의 충고―기형도의 삶과 문학>

(박해현 성석제 이광호 엮음, 문학과지성사, 2009)을 펴낸다.

 

그의 사후 20년, 여전한 현재형의 이름으로 한국 현대시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는 그의 삶과 문학,

그리고 문화적 징후를 꿰뚫어볼 수 있는 이번 기념문집의 제목 <정거장에서의 충고>

기형도의 시 세계를 압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생전의 시인이 시집의 제목으로 생각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거장에서의 충고―기형도의 삶과 문학>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기형도 시의 현재적 의미를 밝히는 데 도움이 되는 글들을 모았다.

우선 기형도를 통해 문학적 감수성을 키운 2000년대의 젊은 시인들인 김행숙 심보선 하재연 김경주와

문학평론가 조강석 씨가 그 생생한 좌담의 현장에 동참해주었다.

이들은 이 자리에서, 처음 기형도 시를 경험했던 순간들에 대해,

기형도 시인이 끈질기게 탐문했던 거대서사에 매몰된 개인 서정의 강렬한 희구와

형식적 측면에서의 집요한 미학적 나르시시즘 추구 등에 대해

각자 느끼고 생각하는 바를 자유로이 주고받았다.

또한 각자의 시 세계에 기형도가 어떤 식으로 영향을 끼쳤는가에 대한 고백을 나누며,

80년대 말에 짧은 생으로 마감한 기형도가

21세기 오늘의 문학적 지형도에 어떤 식으로 깊이 뿌리 내리고

그 현재적 의의를 갱신해가고 있는지에 대한 평가도 함께 내리고 있다.

 

이어서 2000년대 젊은 한국 시단을 적극적으로 호명하고 있는 소장 비평가 함돈균 씨가

기형도 ‘사건-현상-텍스트’라는 틀 속에서

“더할 나위 없이 예민한 청춘의 자의식이 만들어낸 지순한 울림”으로 그의 시를 명명하고,

사후 20년 동안 이른바 ‘기형도 현상’으로 대중에게 자리재김할 수 있었던 요인에 주목하여

그의 문학적 연대기를 새롭게 구성해주었다.

 

문학평론가 이광호 씨는 텍스트 자체에 대한 당대의 미학적 평가 이상의 문화적 상징성에 주목하여

그의 시를 재조명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기형도의 거리의 감성은,

“도시의 익명적 공간에서 ‘예감’의 순간을 발견하는 관찰자인 ‘나’의 시선과

 ‘습관’의 시간 속에 있는 군중들과의 관계” 속에서 구축된다.

이어 그는 거리의 한 순간에, 생의 모든 시간의 무게를 경험하는 기형도 시 속에 응축된

시인의 낯선 시각의 감각을 사회적, 시적 경험으로 정치하게 분석해내고 있다.

더불어 기형도가 거리에서 만나는 다른 삶의 위험한 가능성들은

곧 1990년대 이후 한국 현대시의 중요한 미적 사회적 가능성으로 이미 기능하고 있음을

날카롭게 짚어낸다.


한 청년의 투명한 우울이 도시의 거리에서 맞닥뜨린 다른 시간들,
한국 현대시의 역사는 그렇게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2부는 직 · 간접적으로 기형도와의 만남을 가졌던 분들의 산문을 모았다.

이 산문들은 기형도의 인간적인 면모와 문학적 향기를 따뜻하게 전해주는 역할을 하는데,

이제껏 기형도의 시에서 우리가 읽어온 절망과 우울의 이미지 대신

소탈하면서도 섬세하고, 여리면서도 강건한 시인의 다층 다면적인 생의 스펙트럼을 새롭게 알게 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출판사 대표와 기자로 첫 대면을 가졌던 시절을 회고하는 문학평론가 김병익 씨와

당시 시집의 편집자였던 임우기 씨의 글에서부터

직장 선후배로 시인이 발표하는 시의 영광스런 첫 독자로 자임했던 박해현 기자의 글,

선배기자로서 가슴 먹먹한 추도사를 써내려간 김훈 씨의 글,

한시절을 같이 나면서 우리가 몰랐던 일상의 기형도를 추억케 하는 동창 이영진, 조병준 씨의 글,

문우 이문재 나희덕 시인의 촉촉하면서도 애틋한 산문들이 여기에 함께 실렸다.

시인의 문학적 연대기이면서 가장 충실한 자료와 기록으로 남아 있는 소설가 성석제 씨의 글 역시

 이 지면에 재수록하여 독자들의 이해를 구했다.

3부에는 지난 20년간 발표된 기형도에 대한 본격적인 비평문들에서 뽑은 글들을 실었다.

기형도論의 그동안의 집적과 행방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들을 연대기적으로 수록한 이 지면에는,

유고시집 『입 속의 검은 잎』에 부쳐

이후 기형도 시의 문학적 레테르인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란 결정적 주석을 남긴

문학평론가 김현의 해설(1989)로 시작하여,

기형도 시의 문체와 문장기법을 분석하는 이아라 씨의 논문(2005)까지

다양한 해석과 비평이 차지하고 있다.


그의 시가 그로테스크한 것은 그런 괴이한 이미지들 속에, 뒤에, 아니 밑에, 타인들과의 소통이 불가능해져, 자신 속에서 암종처럼 자라나는 죽음을 바라다보는 개별자, 갇힌 개별자의 비극적 모습이, 마치 무덤 속의 시체처럼-그로테스크라는 말은 원래 무덤을 뜻하는 그로타에서 연유한 말이다-뚜렷하게 드러나 있다는 데에 있다. (김현, 1989)

그는 ‘안개’라는 이름의 사막 속에 갇혀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앞으로만 길게 뻗은 철로 옆에서 마치 푯말처럼 서 있는 자신을.

타락한 세계 속에서 눈물과 울음으로 맞설 수밖에 없는 자는 얼마나 순결한가, 그의 시 곳곳에서 새어나오는 눈물과 울음을 보라. (박철화, 1989)

이 상징적 죽음의 형식을 통해 그의 시는 도시적 삶의 불모성에 대한 소묘 이상이 되었고, 우리는 거기에서 실존적 죽음과 사회적 · 문화적 죽음을 동시에 읽는 것이다. (이광호, 1989)

스스로 고통이 되고 부정성이 됨으로써 현실의 거짓 긍정성이라는 부정성을 거부하고 전복시키는 언어.

기형도의 언어는 바로 도저한 부정성의 언어이다. (성민엽, 1989)

다가오는 90년대 시의 한 징후였고 예감이었던 한 섬세한 자아는

이 세계의 부조리성과 뜻 있음의 결핍에 대한 진지한 성찰 끝에,

그의 넋에 각인된 악몽의 현실들의 다양한 이미지들을 보여주면서,

불안과 자학과 절망을 넘어서서, 삶의 한 원리를 제시한다. (장석주, 1989)

기형도의 시엔 현실의 참혹함에 대한 엄정한 관찰과 인식이 있는가 하면

동화적이고 환상적인 인공낙원으로의 도피적 몰입이 있기도 하고

신성에 대한 갈망과 금욕적인 자기 단련이 있는가 하면 감상적인 나르시시즘의 흔적이 엿보이기도 한다.

지금 이곳의 존재-현실의 나신을 직시하고자 한 이 시인의 노력이 소중한 것처럼

유년의 순진무구함에 대한 깊은 향수 또한 이 시인에겐 중요한 몫이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어떤 한계지점으로의 끝없는 접근,

이것이 기형도의 시의 미덕이자 기형도라는 인간의 진정성의 표지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그의 내적 명령에 충실했고 그럼으로써 1990년대 시의 첫 관문을 열고 나간 시인이 되었다.

(남진우, 1999)

시인은 죽음으로써 타자 옆에 살고, 독자는 삶으로써 죽음 안으로 들어갈 통로를 그 시가 연 것이다.

순수-텍스트는 본래 고정된 장소와 확정된 부피를 갖지 못한다.

그러나, 그의 순수-텍스트는 놀랍게도 작품 안에 자리 잡았다.

그 존재방식 또한 시의 내적 구조에 그대로 반향한다. 그는 사후의 영광을 누릴 만한 시인이었다.

(정과리, 1999)

그에게 죽음은 노년의 죽음이 아니라 청춘의 내밀한 깊이에서 생성된 죽음이다.

그런 죽음을 보여준 점에서 그의 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젊음의 시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죽음을 바라보면서도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움츠러들지 않고

오히려 영원의 젊음의 얼굴로 웃고 있는 시인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오생근, 2001)


2009년 3월 현재, 1989년 5월에 출간된 유고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은

초판 24쇄, 재판 41쇄, 총 65쇄를 찍었으며 24만 부가 판매되었다.

1999년 3월에 출간된 <기형도 전집>은 초판 15쇄를 찍었으며 4만 7천 부가 판매되었다.

문학과지성사는 기형도 20주기 기념문집 출간과 더불어,

3월 5일(목) 저녁 7시에 홍대 인근 이리 카페에서 낭독회 <기형도 시를 읽는 밤> 자리를 마련한다.

우리 시대 기형도와 기형도의 시는 더 이상 추모할 대상이 아닌,

즐겨 읽고, 듣고, 감각하는 문화 현상이기에,

추모 행사가 아닌 문학 축제로, 또한 시를 새롭게 감각하는 자리로 기획된 이 시간은,

시인과 소설가,

음악가(성석제, 이문재, 황인숙, 한강, 김중혁, 함성호, 진은영, 최하연, 성기완, 한유주, 김남윤, 백현진) 등

기형도 시를 향수하는 다양한 세대의 문인과 예술인들이 참여하여,

기형도 시와 그를 추모하는 헌정시를 낭독하고, 이야기하고, 노래하는 뜻 깊은 밤으로 꾸려질 예정이다.

더불어 <기형도 시를 읽는 밤> 은 기형도로부터 자라온 세대와

뒤를 이어 자라날 다음 세대를 중심으로 ‘새로운 기형도’를 모색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 알라딘 책 소개에서

 

 

 

 

 

 

 

[기형도 시인 20주기]

기자 시절 데스크가 말하는 기형도
“기쁨을 찾기 위해 고통스럽게 시를 썼던 완벽주의자”

 


 

3월7일이면 기형도 시인의 20주기다. 시인이 세상을 뜨고 세월은 흘렀지만

그의 시는 여전히 많은 이의 가슴속에 살아 있다.

기형도 시인의 일간지 문화부 기자 시절 데스크였던

정규웅 전 중앙일보 논설위원이 시인과의 인연과 기억을 글에 담아 보내왔다. 

 


 

1987년 유럽여행 중인

27세의 기형도 시인

시의 세계를 종교의 세계에 비유한 철학자가 있었다. 순수하고 투명한 영혼이 머무는 곳이라는 점에서 시와 종교는 유사하다는 것,

그러나 모든 가치관이 전도되고 살벌한 사회일수록 사악한 영혼은 순수하고 투명한 영혼을 두려워해 결코 용납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

사악한 영혼은 순수하고 투명한 영혼에 의해 언젠가는 자신의 껍질이 벗겨지리라 믿기 때문이라는 것,

그러므로 시인의 죽음,

특히 젊은 시인의 돌발적인 죽음은 사악한 영혼의 보이지 않는 작용일 수 있다는 것이다.

 

20년 전, 1989년 3월7일 새벽

서울 종로의 한 허름한 심야극장에서

홀연히 29년의 짧은 생을 마감한 기형도 시인은

바로 그 ‘순수하고 투명한 영혼’의 전형이었다.

그의 삶은 비극적인 것이었으나 그는 비극조차 아름답게 채색하는

특이한 재주를 가진 시인이었다.

그의 시에는 대개 슬프고 어두운 그림자가 깔려 있으되

저 밑바닥에서는 끊임없이 아름다운 삶과 사랑과 희망의 수증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이다.

 

 

문화부 기자와 데스크로서 첫 만남

 

내가 그의 목소리를 처음 들은 것은 1985년의 이른 봄, 한 통의 전화를 통해서였다.

그때 나는 잠깐 편집국을 떠나 출판국에서 계간 문예지의 데스크를 맡고 있었다.

그 전해에 내가 일하던 중앙일보에 입사했고,

그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안개’가 당선돼 기형도라는 이름은 알고 있었으나

그는 사회부 정치부 기자로 대개 외근을 하고 있었으므로 대면한 적은 없었다.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조용하고 사근사근했다.

“정 부장, 중앙고등학교 나오셨죠? 저도 중앙 출신인데요, 70횝니다.

찾아뵈어야 하는데 전화로 인사드려 죄송합니다. 곧 찾아뵙겠습니다.”

 

그러나 그와의 만남은 그로부터 1년도 훨씬 지난 후에야 이루어졌다.

5년 만에 다시 편집국 문화부장 자리로 되돌아온 어느 날 퇴근 무렵

기형도가 외근에서 귀사하면서 나를 찾아왔다.

여자처럼 수줍게 웃으면서 인사를 하더니 내 귀에다가 들릴 듯 말 듯 소곤거렸다.

“정 부장, 아니 선배님. 문화부에서 일하고 싶습니다. 꼭 힘 좀 써주세요.”

 

그의 첫인상은 매우 복잡하게 느껴졌다.

머릿속에 세상의 모든 슬픔과 외로움과 고통을 가득 담고 있는 듯

눈빛은 깊은 우수에 잠겨 있었으나 그것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감추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보였다.

그 무거운 머리를 이끌고 다니면서도 머릿속에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듯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처럼 구는 적이 많았다.

나이답지 않게 어리광을 부리는가 하면 이따금 10대의 치기를 보이기도 했다.

 

문화부의 막내둥이 기자가 늘 그래왔듯

기형도는 방송담당으로 문화부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그 무렵의 방송은 마치 암흑과도 같았던 제5공화국의 시녀 역을 자임하여

국민을 현혹하는 데 앞장서고 있었고, 양식 있는 젊은 기자들은

그와 같은 방송사들의 행태를 기회 있을 때마다 거세게 비판했다.

기형도는 방송사들이 두려워하는 몇몇 방송기자 가운데 하나였다.

그의 날카로운 방송 비판기사가 나가기만 하면

방송사의 고위층은 신문 쪽의 간부들에게 거칠게 항의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상사들로부터 곤욕을 치러야 하는 내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기형도의 필봉은 갈수록 예리해졌고 나는 그의 방패막이 노릇에 급급해야 했다.

훨씬 후의 일이지만, 이것이 결국 그가 갈망했던 문화부 기자 생활을

만 2년쯤에서 막을 내리게 했으니 자승자박이라고나 해야 할는지.

 

 

술자리 인기 독차지하던 음유시인

 

기형도가 문화부에 들어온 지 몇 달 뒤 문학기자로 일하던 소설가 양헌석 기자가

다른 부서로 전출돼 기형도가 문학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가 맡던 방송은 새로 문화부에 들어온 그의 1년 후배 박해현이 떠맡았다.

문학기자로 일하면서 틈틈이 시를 쓸 수 있었던 1년 반 남짓의 이 기간이

그에게는 짧은 생애를 통틀어 가장 행복했던 시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마치 고기가 물을 만난 듯 신나게 뛰었고 그의 일상에는 생기가 넘쳐흘렀다.

그의 두꺼운 노트는 습작시와 시작(詩作),

그리고 취재 메모 따위로 항상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그가 20년 가까이 나이 차이가 나는 내 문단 친구들과의 술자리에 자주 끼어든 것도

이 무렵부터의 일이었고 그 또래의 문단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시 동인모임인 ‘시운동’에 참여한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신문사 밖 기형도의 일상에 대해선 깜깜하던 내가 그의 진면목을 발견하게 된 것도

밖에서 함께 어울리면서부터였다.

 

기형도는 맥주 한두 잔만 마시면 곧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술에는 약한 편이었으나 술자리의 분위기를 즐거워했고

무엇보다 노래를 잘 불러 문단 술꾼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노래를 부를 때의 기형도는 말 그대로 음유시인이었다.

노래뿐만 아니라 그림솜씨도 뛰어나 문단 친구들을 놀라게 했다.

이따금 술자리에서 사인펜으로 종잇조각에 문인들의 얼굴을 스케치하곤 했는데

그림마다 그 인물의 특징이 실감 나게 묘사돼 프로의 솜씨를 느끼게 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다양한 재주, 남다른 친화력에도

그의 본성은 일찍부터 외로움에 깊이 길들어 있었던 것 같다.

아마도 그것은 유년시절 소년시절의 불우했던 가정환경,

그리고 그에 따른 몇 가지 불행한 일이 원인일 수도 있었겠지만

그것을 빼어난 시적 감수성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천성적인 것일는지도 모른다.

 

언젠가 그와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자넨 언제부터 시인이 되겠다는 생각을 품었나?”

“아주 어릴 적, 글을 읽고 쓸 줄 알게 되면서부터요.”

“그럼 왜 대학에선 정치외교학을 공부했지?”

“제 뜻이 아니었어요.”

“무슨 소리지?”

“부모님의 뜻을 저버릴 수 없었어요.”

“그렇다면 시인이 된 것은 부모님의 뜻이 아니었을 텐데.”

“결국 이 길이 제가 가야 할 길이라는 결론을 내렸으니까요.”

“시 쓰는 일이 즐거운가?”

“아니, 괴로워요. 하지만 그 괴로움 뒤쪽에는 아주 커다란 기쁨이 있어요. 그 기쁨을 찾으려 시를 써요.”

 

 

아홉 살 연상 여류작가와의 로맨스

 

시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눌 때의 기형도는 갓 태어난 아기처럼 순진무구해 보였다. 그처럼 그의 언행과 표정은 기분에 따라 수시로 변하는 특이한 체질이었다.

전화 통화를 하거나 글을 쓸 때 남이 간섭하거나 끼어드는 것을 본능적으로

싫어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세계에 틈입해 들어오는 것을 철저하게 경계했고,

그것은 그 특유의 결벽증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가령 자신의 책상이 다른 사람에 의해 어지럽혀져 있거나

누군가 자신의 물건에 손을 댄 흔적이 있으면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냈다.

 

그렇다고 해서 기형도를 괴팍하거나 별난 사람으로 보는 것은 큰 잘못이다.  

그는 신체건강하고 생각이 올바르며 행동거지가 신중한 모범적인 청년이었다.

주변의 몇몇 사람은 그가 혹 여성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편견 같은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의혹의 시선을 보내기도 했지만 그는 진정으로 여성의 아름다움을

사랑할 줄 아는 남성이었다. 그는 여성의 보이는 아름다움에는 말할 것도 없고

보이지 않는 내면적인 아름다움까지 깊이 꿰뚫고 있었다.

 

그 흔한 ‘사랑’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좋아하던 여성이 있었다. 여류작가 K였다.

K는 그 무렵 내가 일하던 신문에 소설을 연재했던 관계로

담당기자인 기형도와 비교적 자주 접촉하고 있었다.

이따금 K와의 통화로 짐작되는 통화 장면을 목격하기도 했지만

나는 짐짓 모른 체했다. 어느 날 한밤중 신문사 근처 음식점에서 회식에 참석했다가

볼일이 남아 있어 신문사에 잠깐 들렀는데 기형도가 문화부에 혼자 남아

누군가와 소곤소곤 통화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술김에 약간의 장난기가 발동해 조용히 그의 곁으로 다가갔는데

기형도는 인기척을 느꼈는지 얼른 전화를 끊고 희미한 미소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 깊은 밤중에 누구랑 전화하는 건가?”

“모르셔도 돼요.”

기형도는 고개를 외로 꼬며 들릴 듯 말 듯 대답했다.

“여자 아닌가, 맞지?”

내가 웃음을 머금고 짓궂게 다그치자 기형도는 말없이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취재노트만 분주하게 뒤적였다.

 

이번에는 목청을 깔고 진지하게 말했다.

 

기형도가 세상을 떠나고

두 달 후에 나온 유고시집

“자네와 통화한 사람, 혹시 K 아닌가?

좋아하면 좋아한다고 당당하게 말하지 그래.

그래야 사랑으로 발전할 수도 있잖아? 그런데 말이야.

K, 좋은 여성임엔 틀림없지만 자네와 나이 차이가 너무 심해. 여자가 남자보다 열 살이나 위라면 누가 봐도 정상이라고는 할 수 없잖아?”

기형도의 옆얼굴이 금세 홍조를 띠는 듯 보였다.

 

그는 이내 고개를 내 쪽으로 돌리고 항의하듯 말했다.

“열 살은 무슨 열 살, 아홉 살 차이밖에 안 되는데…”

나는 ‘밖에’라는 말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나는 K가 1951년생, 기형도가 1960년생이므로

그들의 나이 차이가 아홉 살이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다만 나이 차이가 심하다는 것을 강조하다 보니

한 살 늘려 말한 것뿐인데 나무랄 수 없는 그의 항의에 부닥친 것이다.

그것은 완벽주의자이고자 했던

그의 결벽증을 나타내는 단적인 예라고도 할 수 있겠다.

 

 

글과 삶에 결벽증을 가진 완벽주의자

 

그런데 그런 결벽증이 그가 그토록 갈망했던 문화부의 문학기자를

단명으로 그치게 했으니 결국 그것도 기형도의 운명이었을까. 경위는 이렇다.

나는 그의 결벽증을 일찍부터 눈치 채고 있었으므로

그가 넘긴 기사를 손질할 때면 그를 불러 의견을 묻곤 했다.

대개는 수긍했으나 고집스럽게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때도 간혹 있었다.

그때마다 절충안을 내놓아 그럭저럭 넘어가곤 했는데 그의 기사로 말썽이 생겨

내가 곤욕을 치르게 되면 진심으로 안쓰러워하는 순수함을 보이기도 했다.

1988년 1월 신문사 내의 불협화음으로 나는 문화부장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박해현이 새로 창간되는 신문에서 나와 함께 일하게 됐으므로

기형도는 박해현이 맡았던 방송담당 기자 일을 다시 떠맡게 되었다.

그때까지도 여전했던 방송사들의 파행은 기형도의 펜 끝 아래서

다시 난도질당하기 시작했다. ‘사건’이 발생한 것은 그해 5월 어느 날이었다.

기형도의 날카로운 방송비판 기사가 데스크에 의해 톤다운(tone down)돼

출고됐는데 기형도가 공무국으로 가서 제 기사가 만신창이가 된 것을 확인하고

직원들의 협조로 그 기사를 본래의 기사로 원상 복원시켜놓은 것이다.

 

‘질투는 나의 힘’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신문이 나오자 편집국은 발칵 뒤집혔다.

원인 규명을 위해 기사 원고를 찾아보니 데스크가 고쳐 쓴 것을

기형도 자신이 본래의 기사로 환원시킨 것으로 판명됐다.

신문사 편집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고,

이 일로 해서 기형도는 문화부에서 편집부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그때의 일이 기형도의 죽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후 줄곧 상심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기형도가 세상을 등지기까지 4~5년간의 과정을 살펴보면

잘 짜인 어떤 다큐멘터리의 시나리오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이 시나리오가 완성도를 더욱 높이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시인 박정만이요,

다른 한 사람은 서울대 교수를 지낸 문학평론가 김현이다.

박정만은 기형도보다 약 5개월 먼저,

김현은 기형도보다 약 1년3개월 후에 각각 세상을 떠났다.

 

 

‘엄마 걱정’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중앙일보 기자시절 신문사 동료들과

시인 박정만, 평론가 김현과의 인연

 

기형도가 문학기자로 일하는 동안 가장 공들여 쓴 기사는 박정만에 관한 기사였다.

1981년 5월 이른바 ‘한수산 필화사건’으로 나와 함께 서빙고 보안사령부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했던 박정만은 그 후 술과 방황으로 일관하다가 죽기 1년 전 끼니때마다 소주만 마시며 20일 동안 300여 편의 주옥같은 시를 ‘토’해 냈다고 해서 화제가 됐었다.

 

데뷔 이후 20여 년 동안 시집을 2권밖에 내지 못한 ‘과작(寡作)의 시인’이었던

박정만으로서는 놀라운 일임에 틀림없었다.

그 이야기를 처음 기사화한 사람이 기형도였다.

 

박정만은 서울올림픽이 개막되기 직전인 1988년 10월2일 저녁 5시께

화장실에 앉은 채 자는 듯 숨을 거두었는데

그날 저녁 나와 함께 문상을 가는 차 안에서 기형도는 혼잣말처럼

‘그처럼 접신의 경지에서 시를 쓸 수 있었으니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소리를

여러 번 되풀이했다. 그 무렵은 기형도도 문화부를 떠나 왕성하게 시를 쓰던 때였다.

 

김현과 얽힌 사연은 기형도가 아직 문학기자로 일하던 1988년 3월의 일이었다.

그 무렵 나는 출판국의 한 귀퉁이에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기형도는 틈틈이 내 자리로 찾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돌아가곤 했다.

어느 날 오후 기형도는 잔뜩 심각한 얼굴로 나를 찾아왔다

그의 손에는 원고지 몇 장이 들려 있었다.

내미는 원고를 읽어보니 중앙일보에 게재될 김현의 시 월평 원고였다.

그런데 원고지 10장 분량의 그 원고는

그달에 발표된 기형도의 시작품을 집중적으로 거론하고 있었다.

 

“제가 문학담당 기자인데 월평에서 제 작품만 집중적으로 다루면

제 입장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김현 선생과 가까운 친구잖습니까?

제 작품 이야기는 빼고 원고를 새로 써주십사 부탁 좀 드려주셨으면 해서요.”

 

얼마간 승강이가 오갔지만 나는 하는 수 없이 그 자리에서 김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연을 들은 김현은 너털웃음을 웃으며 기형도의 소심함을 탓했지만

대범하게 원고를 새로 써주겠노라 약속했다. 기형도는 밝은 얼굴로 돌아갔다.

나중에 신문에 게재된 김현의 월평을 보니 다른 몇몇 시인의 작품이 거론되기는

했지만 후반부에서는 역시 기형도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있었다.

 

기형도가 세상을 떠난뒤 나는 이따금 김현을 만나 기형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현은 ‘기형도는 젊어 죽을 수밖에 없는 시인’이라고 잘라 말하곤 했다.

그의 시를 읽으면 곳곳에서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죽음의 냄새가 난다는 것이다.

기형도의 유일한 시집이자 유고 시집인 ‘입 속의 검은 잎’의 해설을

김현이 맡았다는 사실도 예사롭지 않다.

그 해설에서 김현은 기형도의 시세계가 ‘아주 극단적인 비극적 세계관의 표현’이라고

보면서 ‘그의 시가 충격하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는 빨리 되살아나

그의 육체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그의 육체를 상상할 수 있게 해줄 것’이라고 썼다.

 

기이하게도 김현의 그 말은 마치 주술과도 같은 힘을 발휘해서

기형도가 죽은 뒤 폭발적인 ‘기형도 신드롬’을 낳고 있다.

‘입 속의 검은 잎’은 지난 20년 동안 수십만부가 팔려나갔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의 시를 읽으면서 그를 상상한다.

아니, 상상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가 어디엔가 존재하리라고 믿는다.

 

 

기형도가 떠난 자리

 

기형도가 죽던 날, 그날 오후 나는 여러 시간 자리를 비웠는데

그는 서너 차례 내 자리로 와 나를 찾았다고 한다. 내게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는데

결국 나는 그가 마지막으로 하려 했던 이야기를 듣지 못하고 말았다.

어쩌면 우회적으로라도 나에게 영원한 작별을 고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의 마지막 목소리를 듣지 못한 대신,

그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쓴 몇 편의 시 가운데 하나인 ‘빈 집’ 에서

떨리는 듯한 그의 목소리를 듣는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정규웅, 전 중앙일보 논설위원

 2009.03.01 통권 594호(p558~566)

 

 

 

 

 

 

 

 - Beautiful Dreamer (꿈길에서) /  Mandy Barnet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