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연행길, 연행사, 연행록

Gijuzzang Dream 2008. 1. 25. 20:03

 

 

 

 

 

■ 연행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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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타면 견마 잡히고 싶다"는 속담이 있다. 사람 욕심이 끝이 없다는 뜻이다.

사대부가 말에 오르고, 하인에게 말을 끌게 한 것은 조선의 풍속이었다. 연암 박지원은 이를 개탄했다.

연암은 베이징으로 향하는 연행(燕行)길
에서 견마 잡힌 일행을 보며 말했다.

"몇십 년 안에 베갯머리에서 조그만 담뱃대 통을 말 구유로 삼아 말을 먹이게 될 걸세."

무슨 뜻인가.

 

"(가을에 품어 나오는) 서리배 병아리를 여러 번 씨를 받아 네댓 해가 지나면,

베갯 속에서 우는 꼬마 닭 침계(枕鷄)가 되네.

말도 종자가 작아지기 시작하면 나중에 침마(枕馬)가 되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하겠나."

건장한 말을 타고 나는 듯이 달리는 청나라 군사와, 조랑말을 타고도 견마를 잡히며

그나마 떨어질까 두려워 떠는 조선인을 비교하며 한탄한 것이다.

연행길은 오가는 데 다섯 달이 걸리는 험한 노정이었다.

새벽엔 안개, 낮엔 먼지, 저녁엔 바람이라는 세 가지 괴로움에 시달렸다.

그러나 지적 탐구심에 불탔던 선비들에겐

견문을 넓히고 세계와 호흡할 수 있는 문명의 실크로드였다.

('문명의 연행길을 가다', 김태준, 이승수, 김일환 지음)

연행길은 명대와 청대가 달랐다.

청이 중원의 패권을 차지한 뒤 꼭 거쳐야 할 곳이 새로 생겼다. '선양(瀋陽)'이다.

1625년 선양에 도읍을 정했던 청은 국세(國勢)가 성대해진 곳이란 뜻에서

'성징(盛京)'이라 이름 짓고, 조선 사신들에게 이곳을 경유케 했다.

병자호란으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붙들려 온 곳이자

50만 조선 포로가 끌려온 곳이기도 하다.

 

연행길은 사신만 오갔던 게 아닌 것이다.

"길에는 주인이 없다. 그 위를 가는 사람이 주인일 뿐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신경준의 말이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선양을 거쳐 연행길에 올라 있다고 한다.

북,중 우호 과시로 북한 안보에 대한 불안감을 덜기 위해,

또는 중국의 개혁, 개방을 배우기 위해 등 방중 목적과 관련, 다양한 해석이 나온다.

어찌 됐든 중국의 도움이 필요한 처지다.

"가꾸지 못한 땅은 자기 영토가 아니고, 보살피지 못하는 백성은 자기 백성이 아니다"

라는 말이 있는데 2000년 이후 벌써 네 번씩이나 연행길에 오른 김 위원장 심사는 어떨까.

연암은 연행길 요동 벌을 보며 "천하의 호곡장(好哭場)"이라 했다.

김 위원장도 이곳을 지나며 '통 크게 울어 봤는지' 모르겠다.

- 2006년 1월12일 중앙, 유상철 아시아뉴스팀장.

 

 

 

 

■ 연행사(燕行使)

 

조선 후기 청나라에 보낸 조선 사신의 총칭.

조선 전기에는 명나라에 보내는 사신을 조천사(朝天使)라 했으나,

조선 후기에는 청나라의 도읍인 연경(燕京; 北京)에 간 사신이란 의미로 연행사라 했다.

 

조선에서 청에 파견한 사신은

청의 도읍이 심양(瀋陽)일 때(1637-1644)는

동지사(冬至使) · 정조사(正朝使) · 성절사(聖節使) · 세폐사(歲幣使) 혹은 연공사(年貢使)를

매년 4회씩 정기적으로 보냈다.

그 뒤 도읍을 연경(燕京)으로 옮긴 1645년부터는 모두 동지사에 통합되어

연 1회의 정기사행으로 단일화되었다.

 

임시사행의 경우는 사행 목적에 따라

사은사(謝恩使) · 주청사(奏請使) · 진하사(進賀使) · 진주사(陳奏使) · 진위사(陳慰使) ·

진향사(進香使) · 고부사(告訃使) · 문안사(問安使) · 성절사(聖節使) · 재자사(齎咨使) 등이

부정기적으로 파견되었다.

 

부정기적인 사행은 동지사에 순부(順付 : 임무를 동시에 붙임)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그 경우에는 동지 겸 사은사· 동지 겸 진하사 등 임무를 표시하는 복합적인 명칭을 붙였다.

 

사행의 임무는 매우 복잡하였다.

모든 사행은 반드시 표문(表文 : 왕복 외교문서)이나 자문(咨文 : 일정한 청원을 담아 올리는 글) 등

사대문서(事大文書)와 조공품(朝貢品)을 가지고 가서

조공(朝貢)과 회사(回謝) 형태로 이루어지는 연행무역(燕行貿易)을 행했다.

 

사행원의 구성과 인원은 사행의 종류에 따라서 다르다.

대부분의 사행은 사(使) 2인(正使 · 副使), 서장관(書狀官) 1인, 대통관(大通官) 3인,

압물관(押物官) 24인으로 합계 30인이 원칙이었고,

각 정관의 수행원을 합치면 일행의 총인원은 200인에서 300인 내외가 되었다.

 

 

정사와 부사는 정3품 이상의 종반(宗班)이나 관리 중에서 선발하고,

서장관은 4품에서 6품 사이에서 선발하였다.

이들은 모두 임시로 한 품계 올려서 임명하였다.

정사 · 부사 · 서장관을 삼사(三使)라고 칭했다.

 

특히 서장관은 사행 기간 중에 매일의 기록을 맡았고,

귀국 후에는 국왕에게 보고들은 것을 보고할 의무를 지녔으며,

일행을 감찰하며 도강(渡江)할 때는 인원과 짐을 점검하였다.

삼사 이외의 정관은 대부분 사역원(司譯院)의 관리로 임명하였다.

 

사행원은 출발에 앞서 상당히 일찍 선발하였다.

동지사의 경우 출발은 대체로 10월말이지만 보통 6∼7월중에 임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행원이 임명되면, 출발에 앞서서 세폐(歲幣 ) ·방물(方物)을 비롯해

각종 표 · 자문을 작성했는데, 문서의 수는 보통 10통을 넘었다.

 

더구나 한 사행이 여러 임무를 겸할 때는 문서의 수도 증가하였다.

사행은 모든 경비를 현물로 지급받았으며,

사행 도중의 국내에서의 지공(支供 : 음식을 제공함)은 연로의 각 지방에서 부담하였다.

 

그러나 세폐와 공물, 공·사무역을 위한 물품, 식량·사료 등 많은 짐을 휴대했으며,

많을 경우는 350포(包)를 초과하기도 했다.

명대에는 사행로가 해로와 육로가 있었으나, 청대에는 육로만을 이용했는데,

육로는 명대와 큰 차이가 없었다.

 

청대의 육로 중 중요한 지점을 열거하면,

평양 · 의주 · 압록강 · 봉황성(鳳凰城) · 연산관(連山關) · 요동(遼東) · 심양(瀋陽) · 광녕(廣寧) ·

사하(沙河) · 산해관(山海關) · 통주(通州) · 북경(北京)으로,

총 3,100리의 거리며 40일의 여정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50∼60일이 걸렸고, 북경에서의 체류기일을 합치면 통상 5개월 내외가 소요되었다.

 

사행은 의주에 이르러 압록강을 건너기 앞서

정관 이하 인원 · 마필 · 세폐 · 노비(路費) · 기타 적재물을 국왕에게 보고하였다.

이것을 도강장(渡江狀)이라 한다.

 

그리고 중국측의 책문(柵門)에 도착했을 때는

그와 같은 사항을 중국측의 지방관에게도 보고하였다. 이것을 책문보단(柵門報單)이라 한다.

 

그 뒤 사행이 심양에 도착하면 방물의 일부를 요동도사(遼東都司)에게 전달했고,

요동도사는 이 내용을 황제에게 보고하는 동시에 물품을 북경에 전송하였다.

 

사행이 북경의 숙소인 회동관(會同館)에 도착하면 청의 역관이 이들을 영접하였다.

중국에서의 연로와 회동관의 공궤(供饋 : 음식을 공급함)는

모두 청의 광록시(光祿寺)가 부담하였다.

북경에 도착한 다음 날 예부(禮部)에 표 · 자문를 전달하며,

청의 황제를 알현하는 조하(朝賀) 때에는 여러 차례 연습을 한 뒤 매우 복잡한 의식을 행하였다.

 

가지고 간 세폐와 방물은 예부로 보냈고, 예부에서 황제에게 보고하였다.

예부에서는 도착 후 하마연(下馬宴)을 베풀었고, 귀환에 앞서서는 상마연(上馬宴)을 열어 주었다. 황제는 국왕에 대한 회사를 비롯해 사행의 정관 전원과 수행원 30인에게 하사품을 주었다.

 

북경에 체류하는 기일은 명대에는 40일이었으나

청대에는 정한 기일이 없으며 대개 60일까지 체류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 기간 동안 사행원들은 공적인 활동 이외에 사적으로 중국의 학자들과 접촉해

문화교류를 했고, 서점과 명소고적 등을 방문하였다.

 

예를 들면 1765년 서장관 홍억(洪檍)을 수행한 북학파 실학자 홍대용(洪大容)은

북경에 62일간 체류하는 동안 33일을 청의 학자와 교류하면서

서점가인 유리창과 천주교 성당 등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관람하였다.

 

사행이 귀국하면 삼사는 국왕을 알현하고,

서장관은 사행 중에 보고들은 문견록(聞見錄)을 작성해 국왕에게 보고했다.

그리고 역관 중의 상위자인 수역(首譯)도 문건으로 보고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사행의 정사 이하 정관이나 수행원들도 사행의 기록을 사적으로 작성하기도 했다.

 

‘동문휘고(同文彙考)’에는

370종의 사신별단(使臣別單 : 서장관의 문견록과 역관의 보고문)이 있으며,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발간한 ≪연행록선집≫에는

30종의 ‘연행록’(燕行錄) 및 ‘조천록’(朝天綠)이 수록되어 있어

당시의 중국사정과 한중관계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된다.

 

참고로 1637년부터 1894년까지 조선에서 청에 간 연행사는 총 507회이며,

같은 시기 청에서 조선에 파견한 대조선사행인 칙사(勅使)는 169회였다.

 

≪참고문헌≫

朝鮮王朝實錄, 同文彙考, 大典會通, 萬機要覽. 通文館志, 韓中關係史硏究(全海宗, 一潮閣, 1977).

 

출전 : 손승철,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 연행록(燕行錄)

 

 

1791년(정조 15) 문인 김정중(金正中)이 청나라에 다녀온 사행 일기. 2권 1책. 필사본.

 

1791년 동지 겸 사은사(冬至兼謝恩使)로

정사 김이소(金履素), 부사 이조원(李祖源), 서장관 심능익(沈能翼)을 따라 청나라에 다녀오면서

그 해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5개월 간을 기록한 것이다.

 

내용은 도리(道里) · 장관(壯觀) · 연행일기 · 기유록(奇遊錄) 등으로 이루어졌다.

저자는 당시 50세 정도로 평양에 살았으며, 벼슬한 일은 없으나 시문을 좋아하는 문인으로

정사가 일기를 쓰게 하고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개인 자격으로 데리고 간 듯하다.

 

<도리>에는 서울에서부터 연경(燕京)에 이르는 지명과 그 이수를 적었는데,

지명에는 잘못 쓴 글자가 많다.

 

<장관>은 기이한 광경이나 고적을 나열한 내용이다.

 

<연행일기>는 같이 동행한 김이교(金履喬), 저자의 맏형, 그리고 연경에서 만나 친해진

중국인 정가현(程嘉賢) 등과 왕래한 서한, 정가현이 지은 서문으로 되어 있다.

 

<기유록>은 사행 행로의 상황·경치·풍속 등을 보고들은 대로 적고,

여행 중 읊은 시 수십 편과 김이교 · 정가현의 시도 들어 있다.

이 가운데는 중국의 문물이 웅장하고 풍부함을 찬탄하고

청나라 관문(關門) · 책문(柵門) · 사찰 등을 지키는 군사나 내시들이 토색(討索)을 일삼으며,

조선 사행 중 마부들의 부정을 개탄한 내용이 곳곳에 보인다.

 

맨 끝에는 제목도 없이 일기에 빠진 풍속 · 음식 · 건축 · 물산 · 인물 등에 관한 것을 모아 적고,

다음으로 연경의 여덟 가지 경치를 소개했으며, 세 사신의 명단을 적었다.

 

연행 기록이 단순한 일기체에서 벗어나 그 내용을 분류, 체재를 달리하기 시작한 것은

김창업(金昌業)의 ≪연행일기(燕行日記)≫로부터 비롯되었다.

이 책도 그 같은 짜임새를 의도했으나 산만하고 내용이 깊지 못한 흠이 있다.

 

≪참고문헌≫ 국역연행록선집 Ⅵ(민족문화추진회, 1976)

 

 

 

 

■ 한글연행록 발견 - 국내 5번째 한글 '연행록'

 

의왕시사편찬을 위한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입수한 이 한글 연행록은

철종 때 품산(品山) 김직연(1811∼1884)이 작성한 문집으로,

국내에서 5번째로 발굴된 것이면서 현존하는 마지막 사행(使行)기록이다.

 

의왕시사편찬위원회에 따르면

이 연행록은 철종 9년인 1858년 10월26일부터 이듬해 3월20일까지

동지사(冬至使 · 조선시대에 명과 청에 정기적으로 파견한 사신)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동행한

김직연이 기록한 기행문집이다.

 

모두 3권으로 된 연행록은 정사(正使)인 이근우(1801∼1872)를 비롯해 310명으로 구성된 사신단이 대궐을 떠나 중국 베이징에 이르는 과정이며,

베이징에 도착한 다음날부터 사행 목적을 완수하고 떠나기 전날까지의 상황,

베이징을 떠나 귀국해 복명하기까지의 과정으로 각 권을 구분했다.

 

강남대 경기문화연구소 김근태 박사는

“조선시대에 모두 870차례에 걸쳐 중국 명과 청에 공식 외교사절을 보냈고 이를 기록한 연행록은

100여 편이 전하지만 이 중 한글본은 드물어 학술적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확인된 한글 연행록은

허목의 ‘죽천행록’(1624년 10월∼1625년 10월),

홍대용의 ‘을병연행록’(1765년 11월∼1766년 4월),

이계호의 ‘연행록’(1793년 8∼10월),

서유문의 ‘무오연행록’(1798년 10월) 등이 있다.

 

이번에 발굴된 연행록은

한글본과 함께 한문필사본 ‘연사록(燕사錄)´도 발견돼

이를 비교 분석하면 한글과 한문으로 구분해 기록을 남긴 의도 등을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학계는 보고 있다.

 

 

  

 

 

■ 문명의 연행길

  

《의무려산(醫巫閭山)은 접경이었다…홍대용은 기존의 어떤 질서의 지배를 받지 않는 곳,

그러면서도 새로운 질서를 잉태하는 곳으로 의무려산을 설정했던 것이다.

의무려산은

두 세계가 만나는, 인습과 관례를 전도시키고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접경이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신경준은 최고 지리학자다운 탁월한 안목을 보여 주는 말을 남겼다.   

“길에는 주인이 없다. 그 위를 가는 사람이 주인일 뿐이다.”    

이 말을 그대로 실천한 이 책의 저자들은

과거 조선과 중국을 잇는 연행(燕行)길에 담겨 있는 숱한 역사와 문학의 자취를 찾아 나섰다.

   

연행이란 무엇인가. 연경행(燕京行)의 줄임말로서,

연경은 원 · 명 · 청의 수도였던 베이징(北京)의 옛 이름이다.

그래서 조선 후기에 베이징을 다녀오는 사절단을 ‘연행사’,

이들이 오간 길을 ‘연행로’, 그들이 남긴 기록을 ‘연행록’이라 했다.

 

조선 초에는 천자를 보러 가는 것을 ‘조천(朝天)’이라 했지만,

오랑캐 청나라에 이 말을 쓰기에는 소중화(小中華)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아

그냥 ‘연행’이라 했다.

   

그런데 그 연행길을 오가며 조선의 젊은 지식인들이 소중화의 허위의식을 내동댕이치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조선이 나아갈 길을 찾았던 것도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당시 연행은 넓은 세계로 통하는 유일한 출구였다.

김창업, 박지원, 박제가, 홍대용 등 조선의 뜻있는 젊은 지식인들은 앞을 다투어 연행길에 나섰고

그곳에서 자신들의 안목을 넓히고 새로운 세계 질서와 호흡하고자 했다.    

게다가 이들은 오가는 연행길조차 자신들의 무대로 만들었다.

지나치는 산수(山水)가 예사롭지 않고, 또한 사람들과의 만남과 이별이 이어지고,

감회어린 역사의 현장들을 만나니 이를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숱한 문장과 시(詩)들이 곳곳에 남겨졌다.

이런 명문장이, 탄생한 바로 그 현장에서 그대로 되살아나고 있으니,

이 책은 일견 역사 현장을 찾는 답사기이고 일견 문학과 사상의 기행이기도 하다. 

 

사실 수백 년 동안 많은 조선 지식인이 연행을 하고 수백 권의 연행록을 남겼다.

이렇게 오랫동안 하나의 길을 그 숱한 사람이 지나가고,

또 이렇게 풍부한 기행문학을 남긴 예는 세계사적으로도 거의 드문 일이다.

이런 풍부한 문화적 자산을 통해 오래 격절(隔絶)했던 이국땅을

우리 시각으로 되새겨 보는 기행이 이 책이 갖는 미덕이다.    

또한 요동 땅에서 마주친 고구려의 유적과 역사를 환기하는 연행사의 발길도,

고구려사를 둘러싼 역사 분쟁이 한창인 요즘에는 예상치 않은 보너스로 읽힌다. 

 

이 책이 단순한 기행문이 아닌 이유는,

그 길에 차곡차곡 쌓여 있는 역사를 한 걸음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지 과거의 복원이라면 그리 새로울 것도 없다.

저자들은 ‘신연행록’을 짓는 마음으로

연행길에 대한 진한 애정과 깊은 학문적 조사와 또렷한 문제의식을 담아냈다.

   

이 책에서는 압록강 건너 단둥(丹東)에서 만리장성의 동쪽 끝인 산해관까지만 탐방하였다.

연행길의 절반만 돌아본 셈이니,

나머지 베이징과 열하(熱河 · 지금의 청더 · 承德)까지의 연행길이 기다려진다.

동아일보. 2007.04.04 / 임기환 서울교대 교수 · 한국사 

 

 

(1) 문명의 연행길을 가다 / 김태준 등 지음 / 푸른역사 / 560쪽

 

 

 

그림에 보이듯 조선 지식인들의 연행길은 황량하고, 외롭고, 긴 여정이었다.

 

조선왕조는 빈번하게 중국에 외교사절단을 파견했다.

동지사(동지 때 가는 사절), 정조사(신년 하례 사절), 성절사(황제 · 황후 생일 축하사절)….

사절단의 이름도 많고 보내는 이유도 많았다.

이렇게 떠난 조선시대의 사절단은 얼마나 될까. 수백 아니면 수천차례?

 

다양한 해양루트를 통해 외부 세계와 교류했던 삼국~고려시대와 달리

조선은 중국을 통해서만 문물을 접했다. 중국은 세계로 향한 유일한 창이었고,

사행길은 문명의 실크로드였다.

‘조천’(천자에게 조회하러 간다는 뜻으로 명나라에 사신가는 것을 이름)

또는 ‘연행’(연경, 즉 베이징에 간다는 뜻으로 청나라 사행길을 말함)이란 이름으로

중국으로 향한 조선의 지식인들은 연행길에서 무엇을 보고 느꼈을까.

 

김태준 전 동국대 교수 등 저자들은

연행에 나선 조선 지식인들이 가졌던 문제의식을 파헤치고자 그들이 밟았던 길을 뒤따랐다.

2003년 2월(9박10일), 2003년 8월(9박10일)과 11월(5박6일),

그리고 지난 1월 한차례 더 답사를 다녀온 저자들은

메모하고 사진찍고 현지인들과 만나면서 연행길의 노정을 꼼꼼히 기록했다.

 

한문학을 전공한 저자들은 연행길을 답사하는 특별한 ‘무기’를 갖고 있었다.

조선시대의 연행자들이 남겼던 수많은 연행록이 그것이다.

이들 기록을 섭렵한 저자들은 때론 수백년 전의 사절단의 일원으로,

때론 21세기를 살아가는 지식인의 눈으로 연행길의 옛 풍경과 오늘을 그려냈다.

    

21세기에 시작된 저자들의 연행길은 신의주 건너편 단둥에서 시작해 산해관에서 종지부를 찍는다. 분단으로 압록강을 건너지 못하고 중국 땅에서 연행에 나선 저자들은

정몽주 이후 중원을 다녀온 조선의 지식인들을 하나하나 불러낸다.

 

조선과 명나라간의 오해를 풀기 위해 막중한 임무를 띠고 간 월사 이정구,

뛰어난 중국어 실력으로 통역관의 농간을 물리친 오리 이원익,

20여 차례에 걸쳐 대대로 연행길에 오른 안동김씨 가문의 김상용 · 상헌 · 수항 · 수흥 · 창집,

그리고 연행을 통해 ‘청나라에게서 배우자’는 슬로건을 높이 치켜든 홍대용 · 박지원 · 박제가 등

북학파에 이르기까지.

 

저자들은 앞서 연행길에 오른 조선 지식인들의 시와 산문들을 들추며

당시 연행길의 고통과 즐거움을 얘기한다.

남용익이 ‘연행 도중 겪은 세가지 괴로운 일’(行役三苦: 새벽 안개, 낮 먼지, 저녁 바람)은

고역축에도 끼지 못한다.

조선후기 문인 이만수가 연행의 풍정을 한시 아홉수(한가로움, 바쁨, 우스운 일, 탄식, 통쾌함,

부끄러움, 부러움, 괴로움, 기쁨)로 정리했다는 것도 그다지 특기할 일은 아니다.

 

조선 지식인들의 연행 목표가 결코 여행의 흥미나 이국 풍물에 대한 관심에 있지 않고,

새로운 문명에 비판적 수용에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말한다. 수백년전 연행길에 오를 지식인들의 고민은 지금도 유효하다고.

이런 측면에서 이 책은 단순한 인문학적 답사기로만 그치지 않는다.

새로운 중화주의가 고개를 들고 있는 오늘날,

우리의 시공간적 위치를 돌아보게 하는 ‘신(新)열하일기’이자 ‘신(新)북학의’이기도 하다.

- 경향, 조운찬기자 

 

 

 

“압록강 동쪽은 도를 논하기 좁으니, 사해의 영웅 준걸 좇아서 노닐고저.”

조선 후기 대학자로 이름을 날린 삼연 김창흡이 1712년 연행(燕行)을 떠나는 아우 창업에게 준 시다.

 

연행은

조선시대 외교적 목적으로 중국에 가는 사신들의 행차를 가리키는 말.

수도 베이징(北京)의 당시 명칭인 연경(燕京)행의 줄임 말이다.

 

당시 선진 문명의 체험을 꿈꾸던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연행로는

문명의 실크로드였다.

 

저자들은 압록강→책문→요양→심양→산해관을 거쳐

북경에 이르는 조선 시대 연행로의 현장을 답사했다.

연행사들은 압록강을 넘어 책문을 통과하면서 문화쇼크를 받았다.

책문은 당시 청과의 공식 국경. 버드나무 가지로 이은 울타리가 전부였지만,

청의 전성기에는 아무도 넘보는 사람이 없었다.

아무리 튼튼한 장성을 쌓아도 정치가 혼란하면 무너지고,

정치가 건실하면 사립문 같은 국경이라도 엿보지 못한다는 교훈을 얻는다.

 

18세기 들어 연행은 변화하는 세계 정세를 파악하고,

조선의 문화적 정체성을 수립하는 계기가 됐다.

 

- 조선일보, 김기철기자

 

 

(2) 열하로 가는 길에 무엇이 있나

 

<연암 박지원과 열하를 가다> / 최정동 지음 / 푸른역사 / 2005

 

 

일찍이 국어교과서에서 마주치고선 천둥과 같은 충격을 받았던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

연암이 내 머리 속에 새겨 놓은 이미지는 '단번에 본질을 꿰뚫어버리는 직관'이었다.

 

그리하여 그의 글을 풍요롭게 하는 유머도, 날카로운 시대 인식도, 정세 판별도

모두 '단번에 본질을 포착해내는 직관'에서 창출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연암 박지원 서거 200주년이 되는 2005년, 유쾌한 책 한 권이 출간되었다. 책의 시작은 이러하다.

중앙일보는 "한중수교 10주년 기획의 하나로 조선시대 사신들의 발길을 따라 중국 현지를 답사해보고,

두 나라 교류의 현대적 의미를 생각해보는 연재물을 싣기로 한 것"이다.

이때 저자 최정동 기자가 기라성 같은 학자들로 꾸려진

'2002년 연행단' 답사팀의 사진 기록 담당으로 끼게 된다.

   

단동에서 출발하여 산해관을 지나 북경을 거쳐 열하에 이르는 열흘간의 연행 기록이 바로 이 책,

<연암 박지원과 열하를 가다>이다.

연암이 열하를 다녀오고서 3년을 다듬어 <열하일기>를 완성해낸 것처럼

저자는 3년 동안 답사기록을 어루만지고 깎아 완성도 높은 책을 펴냈다.

   

세계화된 세상을 들여다보는 '오늘의 연행'

   

이 책의 미덕 가운데 으뜸은 읽는 재미이다.

웬만한 소설 뺨치는 읽는 재미는 손에서 쉽게 책을 놓지 못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흘이 걸려서야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수 있었다.

이 책을 손에 들었을 때는 불행하게도 분초를 다투는 월간지 마감 기간.

새벽과 한밤중의 출퇴근 시간 전철 안에서 20분씩 쪼개 읽을 수밖에 없었던 결과이다.

내려야 할 곳을 지나쳐버린 때가 여럿 있었을 만큼 책에 흠뻑 빠져들었다.

   

읽는 재미는 발견의 재미로도 연결된다. 연행록의 본의를 곳곳에 포진시켜 놓았기 때문.

 

연행(燕行)이란 "조선의 사신들이 중국 청나라의 수도인 연경(燕京)에 가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연행록이란 "연경을 다녀와서 쓴 기행문"이다.

   

신(新) 연행록이라 할 수 있을 이 책에는 답사 과정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상세히 써놓았다.

이는 당대 현지의 문화와 인식을 파악하는 행위이며,

이를 통하여 자신과 우리와 나라와 사회 전반에 걸쳐 비교 분석하여

장려 혹은 반성의 계기로 삼겠다는 의도라고도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저자는 연암에 위축되지 않고, 고만고만한 답사기행문으로 전락시키지도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또렷하게 드러낼 수 있었다.

  

연암을 포함하여 250명에 이르는 건륭제 고희 축하 특별사행단 일행은

1780년 6월 24일, 압록강을 건넌 후 8월 1일 북경에 도착하고,

다시 닷새 후 북경을 출발 무박5일만에 열하에 이른다.

열흘간 열하에 머무른 후 다시 북경을 거쳐 10월말에야 서울에 도착한다.

   

그로부터 222년 후에 그 길을 따라 가는 일은 222년 저쪽과의 대화이며,

역사의 숨결을 더듬는 것이며, 고금(古今)의 소통길을 여는 일이다.

이러한 넘나듦이

저자가 보여주는 날카로운 분석과 엄정한 비판정신, 해박한 지식에서 기인한다면,

이를 풀어내는 과정은 놀라울 정도로 꼼꼼한 기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현장기록이 이 책의 근골(筋骨)을 형성시켰다면,

답사 후 3년에 걸쳐 수많은 자료와 책을 찾아 한 공부와 숙성이 육혈(肉血)을 더하여

책을 풍요롭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끝까지 다 읽은 나는 예민하게 작동하는 신경을 얻어올 수 있었다.

 

현재의 길을 가다  

   

출판사 리뷰 말마따나 이 책은 연암이 포함되었던 222년 전 연행단이나

저자가 포함된 222년 후의 연행단 모두 시종 현재의 상태로 전개된다.

책을 읽는 내내 동행에 대한 부러움을 느끼게 했던 스타급 연행단 일행 또한

현재형으로 연행을 나선다. 배를 잡는 에피소드는 물론, 헛걸음하기 일쑤인 밤 연행,

일반인이면 갖지 않을 법한 것에 대한 호기심 등을 입체화시켜 주었다.

   

출발할 때부터 '움직이는 강의실'을 표방한 '2002년 연행단' 팀원들의 면면은 가히 놀랍다.

조선시대 3대 연행록인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담헌 홍대용의 <을병연행록>,

노가제 김창업의 <노가제연행록>을 연구한 학자들 중심으로 구성되었는데,

박태근 명지대 LG연암문고 연구위원, 김태준 동국대 교수,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

유홍준 명지대 교수, 이광호 연세대 교수, 박지선 박사, 임옥상 화백, 김혈조 영남대 교수,

한명기 명지대 교수 등이 그들이다. 전문가들은 적확한 분석과 그것이 지닌 현재의 의미를

추적해 들어가는 데 환한 전조등 역할을 해준다.

   

이 책이 주는 마지막 재미는 보는 재미이다.

'사진 기록 담당'이었던 저자의 직무답게 '오늘의 열하일기'에는

풍부한 사진도판들을 곳곳에 실었다.

새벽에 홀로 깨어나 북한과 중국의 국경 압록강 철교를 찍기도 하고,

요동벌의 이정표인 백탑의 장대함을 담기 위하여 아파트 문을 두드리기도 하며,

달리는 차 안에서도 셔터를 누른다. 이렇게 담아낸 도판들은

연행을 입체화시키는 데 한몫할 뿐만 아니라 안복(眼福)을 누리게도 해준다.

연암을 뒤따라, 저자의 안내를 받아가며 열하로 가는 길, 썩 괜찮다.

- 오마이뉴스 2005-12-08  이용진 기자

 

 

 

 

 ■ HD역사스페셜 - 다시보기 

 

 

 

 <열하일기>의 연행루트를 그대로 따라가

고구려의 옛 땅을 밟고, 중원의 중심으로 향한다 !!

 

 

제55편 [2부작 박지원의 열하일기 4천리를 가다] -20060728

제1부 고구려성을 넘어 요하를 건너다 

 

제56편 [2부작 박지원의 열하일기 4천리를 가다] - 20060804

제2부 청의 심장부, 열하에서 황제를 만나다 

 

 

"HD 역사스페셜 TITLE" 클릭->KBS 공식 홈페이지

[http://www.kbs.co.kr/1tv/sisa/hdhistory/ ]

 

 

 

 

 

 

 

* 제 1부 고구려성을 넘어 요하를 건너다

         - 고구려 전문가와 동행 취재,

            요동 한복판에서 중국 동북지역의 의미를 재조명한다!

         - 소현세자가 갇혀 지내던 심양,

            세자관의 위치를 새롭게 밝혀내다!!!

 

(1) 열하일기의 ‘열하’는 어떤 의미인가?

박지원은 팔촌형이자 영조의 사위인 박명원의 자제군관 자격으로 연행길에 올랐다.

연행길은 보통 압록강을 건너 북경에 도착하는 것이 정해진 루트.

그러나 박지원 일행이 북경에 도착했을 때, 황제는 내몽고지역에 위치한 '열하'에 있었다.

열하는 청나라 황제들이 즐겨찾던 휴양지.

그 때문에 사신단은 북경에서 약 230킬로미터 떨어진 '열하'까지 가게 되었다. 

  

(2) 조선사신단은 왜 노숙을 해야 했나?

제1편의 여정은 고구려의 옛 땅인 단동에서 요하까지.

취재팀은 고구려전문가인 우석대 조법종교수와 함께 대장정길에 올랐다.

압록강을 건너 중국대륙에 들어와 첫날을 보낸 조선사신단.

그들은 천막을 짓고 노숙을 해야 했다. 청이 정한 '봉금지대' 때문이다.

청나라는 자신들의 발상지인 만주지역을 보호하기 위해 봉금지대를 제안하여

'구련성'부터 국경관문소인 '책문'까지는 사람이 살지 않았다.

취재진은 책문을 지나 '봉황산'에 도착, 옛 고구려의 성을 확인하였다.

 

(3)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박지원이 본 역사의 비극!!

봉황산성을 떠난 취재진은 '초하구'와 '연산관' 등을 거치며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뼈아픈 역사를 반추한다.

박지원은 <열하일기>의 '허생전'에서 북벌의 무모함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청석령과 석문령.

조선사신들은 청석령 일대를 고구려의 고토로써 특별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현지에서는 지금까지도 고구려의 생활방식인 '부경(창고의 하나)'을 확인할 수 있었다. 


(4) 중원을 누빈 고구려의 기억

다음 행선지는 요동벌판. 우리에게는 만주벌판으로 더 익숙한 곳이다.

고구려는 한때 이 넓은 요동벌의 주인이었다.

취재팀은 중원을 누빈 고구려의 역사를 찾아갔다.

요동벌판과 산봉우리들이 만나는 접점에는 고구려의 산성이 일렬로 줄지어 있다.

중원의 세력들이 넘보지 못하게 1차 방어선으로 산성을 구축한 것이다.

요동벌의 심장부인 대도시 '요양'은 중국대륙의 동서남북을 잇는 요충지로

고구려는 여기에 '요동성'을 세웠던 것이다. 요동성을 둘러보는 것은 조선사신들의 연례행사였다. 

 

 

(5) 청이 일어선 곳, 조선은 피눈물을 흘린 곳 ‘심양’

청태조 누르하치의 아들인 청태종 '홍타이지'는 병자호란 때 직접 군대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

삼전도의 치욕을 안겨준 인물이다.

그는 심양에서 국호를 '청'으로 정하고 황제 즉위식을 올렸다.

한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볼모로 끌려와 8년간 억류당했던 곳도 심양이다.

소현세자가 심양에 있던 시기,

청은 이미 만리장성까지 진출했으나 조선은 숭명반청 정책을 고집했다.

 

그 때문에 조선의 백성들은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했다.

심양 곳곳에 남아있는 당시 조선의 애환을 취재했다.

 

* 제 2부 청의 심장부, 열하에서 황제를 만나다

       - 기록으로만 남아있던 요하서쪽 고구려성을 발견!!!

       - 명이 망한 지 130여년, 여전히 청을 오랑캐로 배척하던 조선!

         열하에 도착한 박지원은 단숨에 청의 거대한 실체를 깨닫는다!

         청 황제는 왜 열하에 피서산장을 조성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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